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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붉은 혼서: Chapter 41 - Chapter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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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사람들 앞의 자백

아내가 남편 대신 대답했다.“사람들 앞에서 하세요. 집에 돌아가 또 저한테만 숨기지 말고.”기원은 젖지 않은 종이를 골라 붓을 들었다. 젊은 서리는 아버지를 데려간 자와 먼저 찾아온 관리의 인상착의, 수레가 들어온 시각, 열쇠를 돌려받지 못한 일까지 한 번에 털어놓았다.그 사이 예부 마부가 수레를 슬금슬금 뒤로 빼기 시작했다.끼이익.바퀴 소리를 들은 기원이 붓을 내던졌다. 그는 다시 말고삐를 잡았지만 수레가 이미 움직였다. 발이 돌 틈에 걸려 몸이 옆으로 넘어졌다.수레가 기원을 끌고 갔다.“기 서리!”그가 가장 먼저 달려들어 바퀴 살을 붙잡았다. 조금 전 그를 때리려던 서리도 반대편에 매달렸다. 마부가 채찍을 휘둘렀지만 이번에는 가족들까지 수레 앞을 막았다.열 사람의 손이 바퀴와 수레채를 붙잡았다. 말이 콧김을 뿜으며 버텼고, 바퀴는 대문을 한 자 남겨두고 멎었다.경연이 마부를 끌어내렸다.“오늘 반출 명령을 내린 자와 지난밤 수레를 보낸 자를 함께 적어라.”“홍 주사께서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나도 가만있을 생각이 없다.”경연의 말이 떨어지자 포졸이 마부와 예부 아전을 묶었다.기원은 흙투성이가 된 채 일어났다. 늙은 서리 하나가 그의 소매에서 튀어나온 약첩을 주워 밀어 넣었다.“자네 아버지 약부터 지어.”“아직 명단이 남았습니다.”늙은 서리는 대꾸하지 않고 기록판 절반을 빼앗아 자기 무릎 위에 놓았다. 기원은 다시 가져오려다 마당 밖 약방 쪽을 보고 손을 내렸다.그때 가족들 뒤에서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앞으로 나왔다.십이 년 전 대리시 형장 옆 창고를 맡았던 자였다. 오늘 수레에 붙잡힌 짐꾼 하나가 그의 아들이었다.늙은 창고지기는 아들의 결박을 보자마자 마당 가운데 무릎을 꿇었다.“저 아이는 오늘 품삯을 받고 수레를 끌러 왔을 뿐입니다. 십이 년 전 일을 말하면 풀어주십시오.”아들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아버지, 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네가 평생 내 죄까지 품고 살 필요는 없다.”그는 진문재가 처형된 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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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불붙은 사망 기록

그는 문 앞에서 한 번 멈췄다.“예부 홍 주사의 손을 거친 사망 기록이 하나 더 있네. 임원기.”경연의 손이 책상 모서리를 움켜쥐었다.“네 어머니 일은 대리시보다 네 집안이 먼저 알고 있을 걸세.”조문이 나가자 기원이 바닥에 떨어진 귤껍질을 주웠다.“이것도 봉해둘까요?”“버리게.”“심 대감은 말려두라고 하실 텐데요.”“오늘 지휘관은 나다.”기원은 귤껍질을 쓰레기 통에 던졌다. 고환은 심리 순서를 다시 짜러 뛰어갔고, 늙은 서리는 젖은 장부를 말릴 화로를 더 들였다. 지휘관 하나가 물러나도 옥문 닫을 시각과 다음 날 재판은 기다려주지 않았다.경연은 패 하나만 집어 허리에 찼다.“배씨 저택으로 가겠습니다.”소의도 겉옷을 들었다.“저도 갑니다.”“오늘은 돌아가셔도 됩니다.”“제 아버지 관인이 쓰인 일입니다.”경연은 더 말리지 않았다.* * *그 시각 배씨 저택 안채에서는 방여운이 남편의 관복을 벗겨주고 있었다.배시충은 사랑채에서 잔다고 해놓고 잠자리 화로가 들어올 무렵 안채로 왔다. 여운은 이유를 묻지 않고 시비들을 내보냈다.찬 관복이 바닥에 내려앉았다. 여운의 손바닥이 시충의 가슴에 닿자 굳어 있던 어깨가 풀렸다.“오늘은 손이 따뜻하군.”“대감 몸이 찬 겁니다.”시충이 아내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서른 해 가까이 함께 산 몸은 어디를 만지면 상대의 숨이 깊어지는지 알았다. 여운도 그의 목을 감싸고 입을 맞췄다.비녀 하나가 빠져 발치에 떨어졌다.딸각.시충의 손이 저고리 안으로 들어와 맨 허리를 감쌌다. 엄지가 가슴 아래를 스치자 여운은 낮게 숨을 흘리며 그의 입술을 더 깊이 물었다. 남편의 허벅지 사이로 한쪽 무릎을 밀어 넣고 품으로 더 가까이 들어가던 순간, 가슴 사이에 눌리는 다른 단단한 물건을 느꼈다.그녀가 남편의 안옷 속으로 손을 넣었다.낡은 약합 하나가 나왔다. 뚜껑에는 오래 닳은 글자 두 자가 남아 있었다.원기.여운의 팔이 남편 목에서 내려왔다.“제 침방까지 가져오셨습니까?”시충이 약합을 빼앗아 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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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죽은 뒤 돌아온 어머니

“불부터 꺼라!”시비들이 물을 끼얹었다. 화로의 숯이 검은 물을 토했고, 방바닥으로 연기와 재가 퍼졌다. 사람들은 기침하며 문과 창을 열었다.노태부인이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쳤다.“집안사람만 남고 모두 나가라.”춘초가 명주의 팔을 잡았지만 명주가 뿌리쳤다.“저도 집안사람입니다.”“너까지 알 일이 아니다.”“제 오라버니 어머니 일인데 제가 왜 몰라야 합니까?”명주는 물동이를 내려놓고 경연 옆에 섰다. 춘초는 잠깐 망설이다 시비들을 데리고 문밖으로 나갔다.방여운이 젖은 겉옷 아래에서 기록을 꺼냈다. 한쪽 귀퉁이는 검게 탔지만 글자는 남아 있었다.시충이 다시 손을 뻗었다.“내놓으시오.”“싫습니다.”여운은 기록을 경연에게 건넸다.그 순간 시충의 풀린 옷깃에서 약합이 떨어졌다.달각. 낡은 상자가 젖은 바닥을 미끄러져 노태부인의 발치에 멎었다.여운의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사람은 기록에서 죽여놓고 물건은 가슴에 품고 사셨군요.”노태부인의 얼굴이 굳었다.“시충아, 아직도 그걸 가지고 있었느냐.”경연은 약합을 줍지 않았다. 손에 든 사망 기록을 폈다.먹이 물에 번져도 이름과 날짜는 읽혔다.임원기. 병사. 스무 해 전 팔월 열이렛날.경연은 그 날짜를 알고 있었다.열한 살의 그는 팔월 스무날 밤 어머니 방에 있었다. 비가 창호를 때렸고, 임원기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떠나기 전에는 그의 옷고름을 두 번 고쳐 맸다.경연의 손에서 젖은 종이가 떨렸다.“저는 이 기록보다 사흘 뒤에 어머니를 만났습니다.”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경연이 종이를 탁자 위에 펼쳤다. 명주가 입술로 날짜를 다시 읽었고, 방여운은 젖은 손을 치맛자락에 닦았다.시충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그날 밤 네 어머니가 떠난 것은 맞다.”노태부인이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시충아.”“죽었다고 한 건 누굽니까?”경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시충은 아들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경연은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대신 소의가 그의 곁으로 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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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새벽의 수레

덕수가 마부석에 올랐다. 만금도 말없이 그 옆에 앉았다.수레는 대나무 숲을 돌아 큰길로 나왔다. 바퀴가 얼어붙은 흙을 밟을 때마다 덜컹, 짐칸 바닥이 울렸다. 려화는 벽을 짚고 몸을 버텼다.첫 갈림길에서 덕수가 고삐를 왼쪽으로 당겼다.큰길은 오른쪽이었다. 대리시 포졸들이 기다리기로 한 길도 그쪽이었다. 계화사에서 온 심부름꾼이 전날 밤 별원 담 너머로 그 사실을 외치고 갔다.“왜 갈대길로 가요?”만금이 남편의 팔을 잡았다.“큰길로 가면 대리시가 수레부터 잡을 거야.”“잡으라고 온 사람들이잖아요.”“문씨 집 일을 관청에 넘기면 우리 아들은 끝이야.”“그래서 장은 사람한테 넘기려고요?”“말조심해.”덕수가 고삐를 세게 쳤다. 노새가 뛰면서 수레가 갈대밭 사이로 기울었다.짐칸 안의 려화는 두 사람의 말을 모두 들었다. 그녀는 흔들리는 문에 등을 붙이고 빗장을 밀어봤다. 나무가 바깥 홈에 단단히 걸려 있었다.갈대가 수레 옆면을 사각사각 긁었다. 동쪽 하늘이 밝아질수록 길은 더 좁아졌다. 마른 물길 하나를 건널 때 바퀴가 진창에 깊이 빠졌다.덕수가 내려 바퀴를 밀었다.그때 갈대밭에서 사내 셋이 나왔다.얼굴을 천으로 가린 자가 덕수의 이름부터 불렀다.“문씨 별원지기 덕수. 아들은 서쪽 창고에서 일한다지?”덕수의 손이 바퀴에서 떨어졌다.“누구시오?”“짐칸만 내주면 아들 자리는 그대로다.”만금이 마부석에서 내려 수레 문을 등으로 막았다.“도련님은 계화사로 모시랬습니다.”사내가 웃었다.“문 도련님 명도 곧 바뀔 거요.”그가 만금의 팔을 잡아당겼다. 만금이 손등을 물었다.“악!”짝, 사내의 손바닥이 만금의 뺨을 때렸다. 그녀가 수레바퀴 옆으로 넘어졌다.덕수가 달려들었지만 다른 사내가 몽둥이로 그의 배를 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덕수가 진흙에 무릎을 박았다.려화가 안에서 문을 걷어찼다.쾅!낡은 문틀이 한 번 벌어졌다가 닫혔다.“만금 아주머니!”“문에서 물러나요!”만금이 뺨을 누른 채 몸을 일으켰다. 사내가 다시 팔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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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갈대밭의 두 여자

려화는 만금의 팔을 어깨에 건 채 갈대밭을 빠져나왔다.한 걸음 옮길 때마다 만금의 다친 발이 땅을 끌었다. 젖은 치맛자락은 무릎에 감겼고, 갈대 끝에 맺힌 서리가 두 사람의 얼굴과 머리카락에서 녹아내렸다.뒤쪽 도랑에서는 더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려화는 멈추지 않았다. 만금이 숨을 들이켤 때마다 목 안에서 가느다란 쇳소리가 났다.갈대밭 끝에 낮은 움막 하나가 나타났다. 지붕 위로 숯 연기가 희게 새고 있었다.려화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부지깽이를 든 노파가 나왔다.“도둑이면 가져갈 것도 없다.”노파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만금의 부은 발목에서 눈을 멈췄다.“도둑이 사람을 업고 다니진 않겠지. 들어와.”움막 안은 어두웠다. 한쪽 벽에는 새끼줄로 묶은 숯자루가 쌓였고, 화덕 옆에는 재를 뒤집어쓴 고구마가 묻혀 있었다. 노파는 볏짚 자리를 발로 펴고 만금을 앉혔다.려화가 발목의 천을 풀자 살갗이 자줏빛으로 부어 있었다.“뼈가 나간 건 아니다.”노파가 따뜻한 재를 헝겊에 싸서 건넸다.“오늘은 딛지 마. 급하다고 밟으면 평생 절어.”만금은 입술을 깨문 채 려화를 보았다.“아씨는 가요.”“어디로요?”“어디든 나 없는 데로요. 나는 저 사람들 얼굴을 봤어요.”려화는 재주머니를 만금의 발목 위에 얹었다. 손등에 난 갈대 상처에서 피가 다시 배어 나왔다.“아주머니가 문을 열지 않았으면 저는 아직 수레 안에 있었어요.”“내가 잠근 문이었어요.”“마지막에 연 사람도 아주머니고요.”만금의 손이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손톱 밑에는 수레 빗장을 부술 때 박힌 나무 가루가 남아 있었다.려화는 머리에서 은비녀를 빼 노파 앞에 놓았다.“이분 남편이 찾아올 때까지 맡아주세요.”“사람 눕힌 값으로 비녀는 너무 비싸.”“그럼 돌려주시면 됩니다.”노파는 비녀 대신 화덕에서 고구마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만금의 손에, 하나는 려화의 소매에 밀어 넣었다.만금은 고구마를 쥐고도 먹지 못했다. 려화가 검게 탄 껍질을 반쯤 벗겨주자 그제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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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이름을 묻지 않는 방

계화사의 아침은 마당에 널린 이불을 걷는 일로 시작됐다.밤사이 방을 세 번이나 옮긴 여자들은 자기가 어느 이불에서 잤는지부터 찾아야 했다. 아이들은 솜이 터진 자리를 손가락으로 누르고 다녔고, 한쪽 처마에서는 젖은 버선이 줄줄이 김을 피웠다.유 마마는 안채 계단에 서서 방마다 사람 수를 다시 셌다.첫 번째 방에는 젖먹이 울음이 났고, 두 번째 방에서는 밤새 잠들지 못한 사람이 이제야 코를 골았다. 가장 안쪽 방 문에는 손바닥만 한 의자가 받쳐져 있었다. 빗장을 걸면 무서워하는 여자가 안에서 밀어둔 것이었다.“아이 둘 있는 방에는 화로 하나 더. 혼자 자겠다는 사람은 문 가까운 곳에 두지 마세요.”“왜요?”“도망가고 싶을 때 다른 사람까지 밟고 나가게 되니까.”여자 하나가 피식 웃었다. 웃고 나서도 보퉁이는 품에서 내려놓지 않았다.뒷문에서는 새 널판을 박는 망치 소리가 났다.탕. 탕.전날 담을 넘은 사내가 부순 문이었다. 대팻밥 냄새가 죽 끓는 냄새와 섞여 안채까지 들어왔다.유 마마가 부엌으로 갔을 때 솥 안에는 바닥이 보일 만큼 묽은 좁쌀죽이 남아 있었다. 그릇은 사람 수보다 하나 모자랐다.“제 것은 빼세요.”허리를 곧게 세우는 법부터 가르치던 조복령이 빈 그릇을 내려놓았다. 전날 도망치는 사내를 막다가 손등이 베였는데도 붕대를 소매 안으로 감추고 있었다.유 마마가 국자를 빼앗았다.“낮에 수업할 사람이 왜 굶습니까?”“오늘 수업을 엽니까?”“열어야 장작을 사지요.”복령은 안채 쪽을 돌아보았다. 이름을 감추고 들어온 여자들이 문틈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밖에서 또 들어오면요?”“혼담 손님은 큰길 문에서 받고 안채 문은 잠급니다. 위험하다고 밥까지 끊을 수는 없어요.”마침 장작 장수가 지게를 진 채 마당으로 들어왔다. 그는 지게끈도 풀지 않고 지난달 외상부터 내놓으라고 했다.유 마마가 돈주머니를 열었다. 새로 온 여자들의 사흘치 약값과 이불값뿐이었다.“절반을 드릴 테니 장작은 다 두고 가세요.”“나머지는 언제 줍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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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늦게 여는 주점

반월주가의 아침 문은 늘 두옥선이 열었다.간판에는 반월주가라 적혀 있었지만 세필골 사람들은 모두 옥선네라고 불렀다.문 안쪽에는 옥선의 손바닥에 반질반질해진 술독 뚜껑이 세 개 놓여 있었다. 작은 독은 돈을 낸 손님에게, 큰 독은 옥선 자신이 마실 때 열었다. 산해는 전날 밤 그 순서를 거꾸로 배웠다.그날은 해가 처마 위로 올라왔는데도 문이 닫혀 있었다.옥선은 화로 옆에 놓인 젖은 신발을 발끝으로 밀었다.“이걸 여기 두면 손님 술에서도 발 냄새가 나.”정산해가 뒷방 문틀에 기대어 한쪽 신을 집었다. 속옷 위에 겉옷만 걸쳐 목과 어깨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왼쪽 어깨에는 밤새 옥선이 남긴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어디 둬야 할지 몰랐다.”“표행길에서는 젖은 신을 머리에 이고 잤어?”산해가 대답을 찾는 사이 옥선이 행주를 던졌다. 산해는 얼굴로 날아온 행주를 잡고도 화로 앞에 한동안 서 있었다.“행주는 거기 두지 말고. 옷부터 입어.”산해가 허리띠를 매는 동안 옥선은 술병을 닦았다. 병 입구에 마른 술자국이 남으면 못 견디는 사람이라 같은 곳을 세 번이나 훑었다.산해가 뒤에서 팔을 뻗어 그녀의 손에 든 병을 빼냈다. 옥선의 등이 벌어진 겉옷 사이의 맨가슴에 닿았다. 허리 아래로 감긴 팔이 밤새 멍든 자리까지 천천히 쓸자 옥선이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눌렀다.“아침부터 또 방값 올릴 생각이야?”“어젯밤 값을 다 못 낸 것 같아서.”산해의 입술이 귓불을 물었다. 옥선은 짧게 숨을 삼키고도 병 닦던 행주를 놓지 않았다. 뒤에서 맞닿은 그의 몸이 다시 단단해지는 것을 느끼자 엉덩이로 한 번 밀어 경고했다.“문부터 열고. 다음 값은 장사 끝나고 받아.”산해는 한참 뒤에야 허리를 놓았다. 옥선은 붉어진 귀를 감추려 닦은 병을 선반 맨 위에 올렸다.바깥에서는 세필골이 먼저 깨어났다. 맞은편 세탁방에서 빨랫방망이가 탁탁 울렸고, 종이 가게 아이가 묵정 계단의 얼음을 깨며 욕을 했다. 지나가던 손님이 닫힌 문을 두드렸다.“오늘 장사 안 해요?”옥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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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돌아온 빈 수레

늙은 수레꾼은 수레 아래에서 나오지 않았다.“표행길에선 죽은 줄 알았더니 이제 여자까지 데리고 다니네.”“입부터 나오라고 해.”옥선이 바퀴를 발끝으로 찼다.수레가 흔들리자 사내가 욕을 하며 기어 나왔다. 머리카락과 뺨에 검은 기름이 묻었고, 왼쪽 무릎은 오래된 부상 때문에 끝까지 펴지지 않았다.그는 산해보다 두 살 많았다. 젊을 때는 같은 표행대에서 번갈아 불침번을 섰고, 산해가 자취를 감춘 뒤에는 그의 몫으로 남은 품삯을 옥선에게 한 번 가져온 적이 있었다.그날 옥선은 돈을 받지 않았다.수레꾼은 지금도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옥선도 모르는 척했다.“조광복이 쓰던 수레를 찾는다.”산해가 말했다.수레꾼은 손에 묻은 기름을 바지에 닦았다.“그 이름은 왜 또 나와?”“계화사 회계 장은과 함께 사람을 실어 날랐어.”“나는 안 열어봤다. 사람인지 궤짝인지도 몰라.”산해는 그 말을 바로 잇지 않았다.“열어봤다고 한 사람은 없어. 어느 길로 갔는지만 묻는 거야.”수레꾼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뒤쪽 작업대에서 어린 마부가 쇠못을 한 바가지 쏟았다. 데구루루, 못들이 얼어붙은 바닥을 굴렀다.그가 아이부터 불렀다.“맨손으로 줍지 마! 녹슨 것에 찔리면 손 썩는다.”아이에게 집게를 던져준 뒤에야 산해 쪽으로 돌아왔다.“조광복은 남쪽 짐을 맡아도 꼭 북문으로 돌았어. 값싼 말과 입 무거운 마부가 그쪽에 많았으니까.”“장은은?”“어젯밤 그쪽 사람 셋이 말을 빌리러 왔다. 성 밖 채권자를 만난다며 값을 두 배 준다고 했지.”“내줬어?”“안 내줬다. 말을 거칠게 다루더군.”그가 동쪽 샛길을 턱으로 가리켰다.“다른 마방으로 갔어. 한 놈은 조광복 수레를 몰던 자였고.”산해가 더 묻으려는 순간 창명문 쪽에서 말 울음이 터졌다.히이잉!수레터 사람들이 길 양옆으로 뛰어 물러났다. 피 묻은 노새 한 마리가 포졸에게 끌려 들어왔다. 뒤따르는 짐수레는 문짝 하나가 떨어져 나가 한쪽 경첩만 덜컹거렸다.산해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문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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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어머니의 빈 무덤

배씨 선산의 흙은 첫 삽부터 얼어 있었다.인부가 곡괭이를 내리치자 땅이 깨지는 대신 쇳소리가 났다.쨍!마른 새 떼가 소나무 위에서 한꺼번에 날아올랐다.경연은 돌담 밖의 작은 봉분을 바라보았다. 배씨 선조들의 묘는 담 안쪽 양지에 줄을 맞춰 앉아 있었다. 임원기의 봉분만 북풍을 그대로 맞는 비탈에 떨어져 있었다.비석에도 이름은 없었다.‘장손 생모.’경연은 어린 시절 해마다 그 넉 자 앞에 절했다. 그때는 이름이 없는 어른도 있는 줄 알았다.서 노태부인이 가마 안에서 헛기침했다.“봄에 열어도 될 무덤을 굳이 오늘 파는구나.”“봄까지 기다리면 누군가 또 기록을 없앨 겁니다.”경연은 인부에게서 곡괭이를 받았다.그가 두 번, 세 번 같은 곳을 내리쳤다. 네 번째에야 언 흙이 손바닥만큼 떨어져 나갔다. 진동이 손목을 타고 어깨까지 올랐지만 그는 곡괭이를 놓지 않았다.소의는 조금 뒤에 서 있었다. 젖은 옷 대신 방여운이 내준 짙은 남색 겉옷을 입었다. 소매가 길어 먹물 밴 손가락이 반쯤 가려졌다.노태부인의 시선이 그 옷을 훑었다.“집안 묘를 여는 데 진 낭자까지 올 필요는 없었다.”“거짓 사망 기록에는 제 아버지 관인이 쓰였습니다.”소의는 품에 싼 기록을 한 번 눌렀다.“누구 집안일인지 나누기에는 이름이 너무 많이 겹쳤습니다.”노태부인은 염주를 굴렸다. 알 하나가 손가락 아래에서 오래 멈췄다.명주는 인부들에게 따뜻한 물을 돌렸다. 경연에게도 그릇을 내밀었지만 그는 한 모금만 마시고 다시 구덩이로 내려갔다.“오라버니 손에서 피 나.”“흙이 먼저 풀려야 한다.”“손이 망가지면 다음 삽은 누가 들어?”명주가 곡괭이 자루를 붙잡았다. 경연은 그제야 손을 놓았다. 손바닥이 갈라져 피가 맺혀 있었다.소의가 자기 소매 안쪽을 길게 찢었다.“손을 펴보십시오.”“괜찮습니다.”소의는 대답하지 않고 그의 굳은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경연은 두 번째 손가락에서야 힘을 풀었다. 그녀가 천을 감는 동안 그는 손을 빼지 않았다. 방여운은 두 사람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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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북방으로 가던 약

배시충은 해마다 겨울이 오기 전 같은 꾸러미를 만들게 했다. 하충은 배씨 상단 짐에 섞어 북방 정주로 보냈다. 받는 사람 이름은 해마다 달랐지만 의원이 쓰는 약은 같았다.하충은 꾸러미를 화로에 넣었다.마른 약재가 불을 먹으며 탁탁 튀었다. 달고 쓴 냄새가 창고에 차올랐다.문밖에서 젊은 마구간지기가 불렀다.“하 총관, 이번 북방 짐도 제가 묶을까요?”하충은 타다 남은 약봉지를 부지깽이로 눌렀다.“올겨울 북방 짐은 없다.”“해마다 보내던—”“없다고 했다.”마구간지기의 발소리가 멀어졌다.화로 안에서 정주로 가야 했던 마지막 약봉지가 검게 오그라들었다. 하충은 재가 식을 때까지 창고 문을 열지 않았다.* * *아리에게 배정된 자리는 침선방 계단 아래였다.누우면 발끝이 광주리에 닿고, 일어서면 머리가 계단 밑판에 닿았다. 그래도 문씨 저택의 시비 처소보다 따뜻했고 안쪽에서 문을 잠그지 않았다.아리는 새벽부터 자기 요를 세 번 접었다. 침선방의 막내 채란은 그 모습을 보며 다리미에 숯을 넣었다.“그렇게 작게 접으면 밤에 다시 펴기 귀찮아.”“제 자리가 작잖아요.”“작아도 네 자리야. 광주리는 밀면 돼.”채란이 발로 광주리를 밀었다. 안에 든 실패가 와르르 쏟아졌다.윗자리의 연교가 혀를 찼다.“첫날부터 실을 다 엎으면 오늘 품삯에서 빼.”“제 품삯에서 왜 빼요?”“그럼 새로 온 애 품삯에서 빼든가.”아리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실패를 색깔별로 세웠다.“엎은 사람이 치우세요.”채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새로 온 애가 성질도 있네.”“손가락 찔려도 참고 했어요. 할 수 있습니다.”교령은 세 아이의 말을 들으면서 혼례 치마 허리선을 잡았다. 입가가 살짝 올라갔지만 고개를 들지는 않았다.“채란이 치워. 연교는 짧게 자른 고름 세 개 오늘 안에 살리고. 아리는 이 소매 이어봐.”그녀가 비단 저고리를 내밀었다. 옷감이 모자라 왼쪽 소매가 손가락 하나만큼 짧았다.아리는 남은 천을 뒤집어 안쪽 단을 뜯었다. 연교가 옆에서 훔쳐봤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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