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혼서

붉은 혼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0
By:  moominkiller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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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남자와 혼인된 여인이 파혼 소장을 맡긴 다음 날, 우물에서 붉은 혼례복을 입은 시신이 발견된다. 시신의 품에서 자신이 쓴 소장과 처형된 아버지의 관인이 나오자 필사인 진소의는 살인범으로 몰린다. 그녀를 심문하는 사람은 법과 기록만을 믿는 대리시 소경 배경연. 서로를 의심하던 두 사람은 사라진 진짜 신부를 쫓으며 혼수와 족보, 황실의 혈통까지 거래한 열두 장의 거짓 혼서를 발견한다. 기록에서 지워진 여자들의 이름을 되찾으려는 두 사람의 중국풍 성인 로맨스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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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 죽은 사내의 아내

연경 서시의 가게들은 초경을 알리는 북이 울리기 전에 문을 닫았다.

겨울이 끝나간다 해도 밤바람은 매서웠다. 장사꾼들은 처마 밑에 남은 눈을 쓸어내고, 마지막 손님이 나가기도 전에 등잔 심지를 줄였다. 문을 늦게 닫아 얻는 동전 몇 닢보다 얼어붙은 자물쇠를 녹이는 숯값이 더 드는 계절이었다.

청묵재만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당곡우는 열린 문짝 하나를 붙들고 골목 끝을 내다보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주점 깃발과 눈 녹은 물이 고인 돌바닥뿐이었다.

“이제 문 닫아도 되지요?”

대답은 없었다.

곡우는 입술을 비죽이며 안으로 돌아보았다.

진소의는 창가 책상에 앉아 서찰 한 통을 베끼고 있었다. 붓끝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의뢰인이 세상을 떠난 어머니 앞으로 부치는 서찰이라 했으므로, 소의는 문장 하나를 적을 때마다 원문과 똑같은 자리에서 숨을 골랐다.

등잔빛은 그녀의 오른쪽 얼굴만 밝혔다. 가녀린 어깨 위로 드러난 피부는 백옥을 얇게 다듬은 듯 희고 투명했다. 까만 눈망울에는 긴 속눈썹이 드리웠고, 눈꼬리는 울음을 그친 뒤처럼 옅게 붉고 촉촉했다. 아무 표정이 없으면 멍하니 먼 곳을 보는 듯했지만 도톰하고 붉은 입술만은 이상하리만치 생기가 있었다. 수수한 옷차림으로도 오래 눈이 머무는 얼굴이었다.

숱 많고 탄력 있는 검은 머리는 대충 틀어 올려 은비녀 하나만 꽂아두었다. 느슨하게 풀린 한 올이 뺨으로 흘러내렸으나 소의는 손대지 않았다. 붓을 잡은 가운뎃손가락에는 씻어도 빠지지 않는 먹물이 배어 있었다.

서찰에는 같은 말이 세 번이나 나왔다.

한 번만 돌아와 달라고.

죽은 사람에게 돌아오라고 쓰는 일은 어리석었다. 그러나 청묵재에는 그런 어리석음을 사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살아 있는 아들에게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못 하던 이도, 죽은 아비 앞으로는 밤새 석 장을 불렀다.

“문을 더 열어두면 제 손부터 얼어 떨어지겠습니다.”

곡우가 다시 묻자 소의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입술 끝이 아주 조금 풀리자 왼쪽 볼에만 얕은 보조개가 생겼다.

“닫으라고 했잖아.”

“전 못 들었는데요.”

“분명 말했어.”

“장궤 목소리가 너무 작은 겁니다.”

곡우는 입을 삐죽인 채 문짝을 당겼다.

그때 문밖에서 세 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똑. 똑, 똑.

첫 번째 소리 뒤에는 긴 틈이 있었고, 뒤의 두 번은 빠르게 이어졌다.

곡우의 손이 빗장 위에서 멈추었다.

“못 들은 척할까요?”

“빗장 소리가 났어.”

곡우는 빗장에서 손을 슬그머니 뗐다.

“이래서 눈 밝은 장궤 밑에선 일하기 힘들다니까.”

그녀가 투덜거리며 문을 열었다.

찬바람과 함께 여인 하나가 들어왔다.

회색 장옷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여인의 몸을 가리고 있었다. 눈 아래에는 옅은 면사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진창을 밟았는데도 비단신 코에는 흙 한 점 없었다. 장옷 매듭의 양쪽 끈은 길이까지 같았다.

곡우는 여인의 얼굴보다 신발과 손을 먼저 보았다.

그다음으로 본 것은 여인의 뒤였다. 시녀도 마부도 없었다. 돈은 많이 받거나, 한 푼도 못 받거나. 곡우는 발뒤꿈치로 돈궤를 책상 아래 더 깊숙이 밀었다.

“서찰을 쓰러 오셨습니까?”

곡우가 물었다.

여인은 안으로 한 걸음 들어와 닫히는 문을 돌아보았다. 문짝이 맞물리고 빗장이 내려앉는 것을 끝까지 확인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죽은 사내와 혼인한 여자도 화리할 수 있습니까?”

곡우는 빗장을 놓쳤다.

나무가 덜컥 울렸다.

소의의 붓끝에서도 검은 먹 한 방울이 떨어졌다. 베끼던 서찰의 ‘돌아오라’는 글자 옆이었다.

소의는 번진 먹을 잠시 바라보다 붓을 내려놓았다.

“앉으시지요.”

여인은 앉지 않았다.

“할 수 있습니까?”

“죽은 사람과는 화리할 수 없습니다.”

“화리는 부부가 함께 관청에 나가 혼인을 끝내는 절차입니다. 남편이 죽었다면 사별이고, 처음부터 혼인하지 않았다면 기록이 잘못된 겁니다.”

면사 아래의 입술이 굳었다.

소의는 맞은편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우선 앉으시지요.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여인은 그제야 의자 끝에 걸터앉았다. 등을 기대지 않았고 장옷도 벗지 않았다. 오른발은 의자 아래에 놓지 않고 문 쪽으로 비스듬히 내밀어 두었다.

곡우는 문가에 선 채 손님의 소매를 보았다.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는데 옷감 끝만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소의의 손이 찻주전자로 향했다가 멈추었다. 그녀는 빈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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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죽은 사내의 아내
연경 서시의 가게들은 초경을 알리는 북이 울리기 전에 문을 닫았다.겨울이 끝나간다 해도 밤바람은 매서웠다. 장사꾼들은 처마 밑에 남은 눈을 쓸어내고, 마지막 손님이 나가기도 전에 등잔 심지를 줄였다. 문을 늦게 닫아 얻는 동전 몇 닢보다 얼어붙은 자물쇠를 녹이는 숯값이 더 드는 계절이었다.청묵재만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당곡우는 열린 문짝 하나를 붙들고 골목 끝을 내다보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주점 깃발과 눈 녹은 물이 고인 돌바닥뿐이었다.“이제 문 닫아도 되지요?”대답은 없었다.곡우는 입술을 비죽이며 안으로 돌아보았다.진소의는 창가 책상에 앉아 서찰 한 통을 베끼고 있었다. 붓끝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의뢰인이 세상을 떠난 어머니 앞으로 부치는 서찰이라 했으므로, 소의는 문장 하나를 적을 때마다 원문과 똑같은 자리에서 숨을 골랐다.등잔빛은 그녀의 오른쪽 얼굴만 밝혔다. 가녀린 어깨 위로 드러난 피부는 백옥을 얇게 다듬은 듯 희고 투명했다. 까만 눈망울에는 긴 속눈썹이 드리웠고, 눈꼬리는 울음을 그친 뒤처럼 옅게 붉고 촉촉했다. 아무 표정이 없으면 멍하니 먼 곳을 보는 듯했지만 도톰하고 붉은 입술만은 이상하리만치 생기가 있었다. 수수한 옷차림으로도 오래 눈이 머무는 얼굴이었다.숱 많고 탄력 있는 검은 머리는 대충 틀어 올려 은비녀 하나만 꽂아두었다. 느슨하게 풀린 한 올이 뺨으로 흘러내렸으나 소의는 손대지 않았다. 붓을 잡은 가운뎃손가락에는 씻어도 빠지지 않는 먹물이 배어 있었다.서찰에는 같은 말이 세 번이나 나왔다.한 번만 돌아와 달라고.죽은 사람에게 돌아오라고 쓰는 일은 어리석었다. 그러나 청묵재에는 그런 어리석음을 사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살아 있는 아들에게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못 하던 이도, 죽은 아비 앞으로는 밤새 석 장을 불렀다.“문을 더 열어두면 제 손부터 얼어 떨어지겠습니다.”곡우가 다시 묻자 소의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입술 끝이 아주 조금 풀리자 왼쪽 볼에만 얕은 보조개가 생겼다.“닫으라고 했잖아.”“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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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십 년 전의 혼인
“기록을 가지고 오셨습니까?”여인이 품에서 접은 종이를 꺼냈다.현청에서 내준 혼인 기록, 혼적첩이었다. 종이는 새것이었으나 적힌 내용은 십 년 전의 것이었다. 붉은 관인 아래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양계문.문려화.곡우가 소의의 어깨 너머로 혼적첩을 훑다가 한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이상한데요. 양계문은 혼서가 오른 날보다 열사흘 먼저 죽었어요.”“양주 출신의 포목상 양계문.”소의의 손끝이 그 아래 줄로 내려갔다.“신부는 당시 열넷이었군.”곡우가 면사로 가린 여인을 돌아보았다.“그럼 열넷에 죽은 사내의 후처가 되어, 열 해를 과부로 산 셈이네요.”소의가 물었다.“양계문이라는 사람을 아십니까?”“오늘 처음 이름을 보았습니다.”“양주에 가신 적은요?”“연경 밖으로 나간 적도 없습니다.”“이 혼적첩은 직접 받아오셨습니까?”여인은 혼적첩을 누른 채 소의를 바라보았다.“왜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합니까?”“관청에서 이 종이를 받아온 사람이 있어야 기록이 어디서 바뀌었는지 찾을 수 있습니다.”엄지 아래에서 종이 모서리가 두 번 접혔다.“제 시녀가 대신 갔습니다. 지금 어디 있는지는 모릅니다.”소의는 혼적첩을 다시 여인 앞으로 밀었다.“예정된 혼례는 언제입니까?”“사흘 뒤입니다.”소의가 혼적첩을 책상에 놓았다.“혼례를 멈추고 싶으십니까?”“멈춰야 합니다.”“기록만 바로잡고 예정대로 혼례를 올릴 수도 있습니다.”“그럴 수 없습니다.”“왜입니까?”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배필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그분은 아무것도 모릅니다.”“따로 마음에 둔 분이 있습니까?”“없습니다.”소의의 눈이 혼적첩 위의 두 이름으로 내려갔다.“그럼 혼례가 아니라 이 기록을 만든 사람이 두려우신 겁니까?”여인의 손이 혼적첩 위를 덮었다. 양계문과 문려화, 두 이름이 손바닥 아래로 사라졌다.“그 사람을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그때 옆문이 벌컥 열렸다.“빈속에 그런 이야기부터 하면 속 버린다.”두옥선이 김이 오르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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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붉은 관인
“하지만 관청이 혼례를 먼저 막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사이에 이 기록을 만든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찾으면요?”“그 뒤 일은 찾고 나서 정하시지요.”“혼수 이야기도 소장에 넣어드릴까요?”려화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빼주십시오.”“혼례가 깨지면 돌려받아야 할 물건이 있을 텐데요.”“돈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제 이름으로 이 혼례를 올릴 수 없게만 해주십시오.”여인은 웃지 않았지만 면사 아래 입술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다들 제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했습니다.”려화는 품에서 새 종이 세 장을 꺼냈다. 소의는 그중 한 장을 펼쳤다.“저는 글만 대신 써드립니다. 결정은 낭자가 하셔야지요.”“결정까지 대신해드리면 품삯도 더 받아야 하고요.”곡우가 끼어들자 여인은 입꼬리를 아주 조금 풀었다.마침내 여인이 면사를 완전히 걷었다.스물넷쯤 되었을까. 화려하게 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반달 모양으로 다듬은 눈썹에는 잔털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고, 겨울바람을 맞은 뺨에도 마른 자국이 없었다. 눈가만은 사흘 밤을 자지 못한 사람처럼 어두웠다.“이름을 말씀해주셔야 합니다.”소의가 말했다.여인은 혼적첩 위에 적힌 이름 석 자를 바라보았다.그 이름으로 스무 해를 넘게 살았다. 어머니는 그 이름을 웃으며 불렀고, 오라비는 화가 나면 성까지 붙여 불렀다. 사흘 뒤에는 낯선 집안의 족보에 그 이름이 옮겨질 예정이었다.그런데 관청은 이미 십 년 전에 그 이름을 죽은 남자에게 주었다.“문려화입니다.”소의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붓에 먹을 먹였다.문려화는 소의가 자기 이름을 적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문씨 여식 려화.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려화는 종이에 손을 대려다가 손가락을 거두었다.소의는 소장을 세 벌 썼다. 한 벌은 현청에, 한 벌은 예부의 혼인 기록을 맡는 곳에 낼 것이었다. 마지막 한 벌은 청묵재에 남겨두었다. 려화는 소의가 가리킨 자리마다 자기 이름을 적었다.려화는 완성된 글을 읽고 물었다.“이렇게 쓰면 정말 혼례가 멈춥니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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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우물가의 새벽
“당신 손만 대면 경첩이 운다니까.”기수는 세 번쯤 부정한 뒤 다음 날부터 문고리를 더 살살 잡았다.전날 밤, 세탁방 뒷방에는 화로의 마지막 숯만 붉게 남아 있었다. 창호 아래로 찬 기운이 얇게 스며들었지만 두 사람이 누운 요 안쪽은 더웠다. 구겨진 속적삼과 벗어둔 버선이 침상 아래 한 짝씩 떨어져 있었다.기수는 이불 끝에 걸터앉아 순라복을 입었다. 아직 잠에서 덜 깬 보향은 이불 밖으로 팔 하나만 내놓고 그 모습을 보았다. 기수가 허리띠를 둘러 매듭을 지으려는 순간, 보향의 손이 띠 끝을 낚아챘다.“남의 집 문고리는 밤마다 만지면서 제 허리끈은 그냥 두고 가려고?”그녀가 잡아당기자 매듭이 스르르 풀렸다. 기수는 허리띠에 끌려 침상 위로 넘어왔다. 한쪽 무릎은 요 위에, 다른 다리는 아직 바닥에 둔 어정쩡한 꼴이었다. 보향의 웃는 얼굴이 바로 아래에 있었다.“순라 나갈 사람을 누가 자꾸 눕혀.”“잡아당긴다고 다 눕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어.”기수가 팔을 짚어 그녀 위로 몸을 낮췄다. 창호에 비친 두 그림자가 겹쳤다. 보향은 벌어진 그의 옷깃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새벽 찬바람을 맞으러 갈 사람의 가슴은 아직 이불 속 온기로 뜨거웠다. 손바닥이 단단한 가슴을 지나 배까지 내려가자 기수의 숨이 짧아졌다.“이래놓고 가라고 할 거지?”“얼마나 아쉬워하는지 보고.”기수의 손이 이불 아래로 들어갔다. 발목을 감싼 손이 종아리를 훑고, 벌어진 무릎 안쪽으로 천천히 올라왔다. 엄지가 속곳 가장자리 바로 아래의 여린 살을 누르자 보향의 입에서 짧은 숨이 샜다.“흐응…… 순라 나갈 손이 아주 바쁘네.”그녀는 발끝으로 기수의 허벅지를 타고 올라가 옷 아래 단단해진 곳을 느리게 눌렀다. 기수의 허리가 순간 굳었다. 이불이 두 사람 사이에서 불룩 솟았다가 발치로 밀려났다.기수의 입술이 귀밑에 닿았다. 목덜미를 지나 속적삼 밖으로 드러난 어깨로 내려갈 때마다 보향의 손가락이 그의 등을 조금씩 세게 눌렀다. 기수가 느슨해진 옷깃을 입술로 더 밀어내고 쇄골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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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붉은 혼례복
“신, 신부예요.”떡 장수가 배달 아이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밀어 넣었다. 밤새 술을 팔던 주모는 등잔을 들고 맨발로 뛰어나왔다.“비켜봐!”“사람을 건져야지! 줄을 내려!”“손을 봐! 산 사람이 아니야!”“그래도 꺼내야 할 것 아냐!”“손대지 마! 관청에서 올 때까지 아무도 손대지 마!”기수가 두레박 줄을 잡으려는 사내의 손등을 쳐냈다. 뒤에서 떠밀린 떡 장수가 우물 벽에 배를 부딪치며 욕을 했다. 누군가 붉은 옷을 보고 짧게 비명을 질렀다.“목을 맨 거야. 내가 줄 자국을 봤어.”“목은 물속이잖아! 뭘 봤다는 거야?”“문씨 댁 신부 아니야? 혼례가 사흘 남았다던—”말은 끝나기도 전에 다른 말에 덮였다.아이는 그제야 몸을 돌렸다. 등에 멘 나무틀이 사람 둘을 연달아 치고 지나갔다.“순검청에 알리고 올게요!”“너, 배달은 내려놓고 대리시로 가!”“사람이 죽었는데 배달부터 가면 안 되겠지요?”소년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뛰는 발마다 나무틀이 덜컹덜컹 울었다.기수는 두레박 줄을 풀어 우물 입구를 둘렀다. 사람들이 줄 아래로 기어들 때마다 어깨를 밀어내느라 등롱은 벌써 두 번이나 꺼질 뻔했다.보향은 세탁방에서 입는 덧치마를 두른 채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한 손의 물동이에서는 물이 철퍽철퍽 넘쳤고, 다른 팔에는 남의 집 빨랫감이 한 아름 안겨 있었다.“무슨 일이야?”“보지 마.”보향은 물동이를 기수 발등 앞에 내려놓고 우물 안을 보았다.붉은 치마가 물속에서 천천히 퍼졌다. 금실로 수놓은 봉황 한 마리는 날개가 접힌 채 돌벽에 닿아 있었다.등 뒤에서는 누가 신부인지, 누가 밀었는지를 두고 목소리가 높아졌다.“왜 그래?”“우물물을 못 쓰게 됐잖아. 오늘 빨래는 다 어쩌라고.”“지금 그 말이 나와?”“당신이 물값 대신 내줄 거야?”기수는 대답하지 못했다.아침 해가 지붕 끝 위로 올라올 무렵에는 사람 어깨가 골목을 막았다.찻집 주인은 빈 물항아리를 쾅쾅 두드렸다.“물을 못 뜨는데 오늘 장사를 어떻게 하라는 거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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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살인범의 이름
“공무 중입니다.”“그러니 사람들부터 물려.”“지금 그러고 있잖습니까.”뒤이어 검은 관복을 입은 관리가 우물 앞으로 왔다. 배경연이 대리시 패를 꺼내기도 전에 앞줄 사람들이 저절로 길을 비켰다.그는 짓밟힌 진흙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수십 개의 발자국이 검은 흙 한 덩어리로 뭉개진 한가운데서도 관복의 깃과 흰 속깃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머리카락은 옥관 아래 팽팽하게 묶였고 소매 끝에는 먼지 한 점 없었다.경연은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넓은 어깨에서 검은 관복이 곧게 떨어졌고, 희고 차가운 얼굴은 범접하기 어려울 만큼 잘생겼다. 길고 깊은 눈매와 분명한 콧대, 다문 얇은 입술에는 귀한 집에서 태어난 사람의 고고함이 배어 있었다. 밤을 새운 흔적은 긴 속눈썹 아래에만 옅게 남았다.“처음 발견한 사람이 누구지?”기수가 손을 들었다.“소인이 새벽 순라를 돌다가 발견했습니다.”“시신에 손댔나?”“아닙니다. 두레박 줄만 풀어 사람들을 막았습니다.”경연의 눈이 젖은 밧줄로 갔다.“우물가에 다른 사람이 있었나?”“없었습니다.”노탁이 우물 안으로 갈고리를 내렸다. 첫 번째는 붉은 옷자락을 스치고 돌벽을 긁었다.끼이익.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쇠 긁는 소리와 밧줄 당기는 포졸들의 숨만 남았다.“조금 왼쪽! 더 내려!”갈고리가 옷자락 아래에 걸렸다. 노탁과 포졸 둘이 밧줄을 당겼다. 젖은 밧줄이 우물 턱을 문지르며 물을 뿜었다. 노탁의 손바닥이 미끄러지자 뒤의 포졸이 그의 허리를 받쳤다.“놓치지 마! 당겨!”붉은 치맛자락이 먼저 올라왔다. 물이 한 바가지씩 쏟아져 포졸들의 장화와 앞줄 사람들의 발을 덮쳤다.“아악, 차가워!”사람들이 서로를 밀치며 물러났다. 찻집의 빈 잔 하나가 돌바닥에 떨어져 쨍그랑 깨졌다.시신의 머리가 우물 턱을 넘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돌에 철썩 붙었다. 오래 닫힌 우물의 냄새가 퍼지자 주모가 입을 가리고 고개를 돌렸다.곡우가 숨을 삼켰다.부어오른 얼굴은 어젯밤 여인과 닮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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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소장에 없던 유언
“이걸 왜 이제 내놓아?”“우물 앞은 사람이 너무 많았습니다. 여기서 정식으로 넘기려 했습니다.”요분은 옥졸에게 장부를 가져오라 했다. 물건을 받은 시각과 사람을 적은 뒤에야 관인 조각을 다시 쌌다.옥문장이 열쇠를 세면서 왔다. 허리춤에 열한 개가 달려 있었는데도 입술로 다시 숫자를 세었다.“심문실로 데려가라는 명입니다.”“아직 밥도 안 먹였는데.”“전례상 첫 심문 전에는—”“전례가 배고픈 사람 대신 대답해주나?”요분은 식은 죽 한 그릇을 소의에게 내밀었다.“세 술만 뜨시오. 저 사람은 열쇠 세다가 해가 질 테니.”소의는 정말 세 술만 먹었다.심문실에는 네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사건을 맡은 배경연이 가운데 책상에 앉아 있었다. 오른쪽에서는 서리 기원이 심문 내용을 적을 준비를 했다. 왼쪽의 신임 평사 고환은 법전을 펼쳐놓고 있었다. 노탁은 문 옆에 섰다.요분이 관인 조각을 책상 위에 놓았다.“진소의가 스스로 내놓았습니다.”기원이 기록을 시작했다.“진소의, 역관 진문재의 딸로서—”“호적고 서리였습니다.”소의가 말했다.기원의 붓이 멈췄다.“무엇이 말입니까?”“제 아버지는 다른 나라 말을 옮기던 역관이 아니라, 혼인과 호적 기록을 맡은 서리였습니다. 다르게 적어주십시오.”“문서를 꾸며 처형된 사람이라는 건 같지 않습니까?”“죄명까지 정확히 적으시면서 생전의 일은 아무렇게나 적으실 겁니까?”경연이 기원에게 말했다.“호적고 서리 진문재의 딸이라고 적게.”기원은 잘못 적은 말을 지웠다.경연은 소의를 다시 보았다. 그의 앞에 앉은 사람들은 대개 죄가 없어도 먼저 용서를 구했다. 소의는 자기에게 불리한 관인부터 내놓고도 아버지의 직책 한 글자를 그냥 넘기지 않았다.그녀가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한 번 적셨다. 경연은 눈을 기록으로 내렸다. 붙잡아온 사람의 입술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불쾌했지만, 불쾌한 대상은 소의가 아니라 자신이었다.고환이 우물에서 나온 소장을 펼쳤다.“이 글을 썼습니까?”“앞의 내용은 제가 썼습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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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얼굴을 보지 않은 가족
“누가 얼굴을 확인했지?”“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고환이 법전을 덮었다.“옷과 장신구로 알았겠지요.”소의가 고개를 들었다.“문려화 낭자는 가족에게 들키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경연의 시선이 전갈 아래 적힌 문세린의 이름에 머물렀다.“그런데 아버지는 딸의 얼굴도 보지 않고 죽었다고 알렸군.”경연은 전갈을 기원에게 건넸다.“진소의는 당분간 여옥에 둔다. 노탁이 돌아오면 곧바로 문씨 저택부터 확인하게.”소의가 물었다.“혼수에 관한 마지막 줄도 함께 조사하실 겁니까?”“그 문장으로 이득을 얻는 사람부터 볼 겁니다.”“적어도 문려화 낭자는 아닙니다.”경연은 대답하지 않았다.문씨 집안의 전갈과 죽은 여자의 유언이 같은 책상 위에 놓였다.* * *대리시 마당에는 새벽부터 만두 냄새가 퍼졌다.밤을 새운 서리와 포졸들이 찜통 앞에 줄을 섰다. 뚜껑이 열릴 때마다 흰 김이 사람들 얼굴을 덮었다.노탁은 줄 맨 앞에서 손가락 두 개를 폈다.“어제 아침부터 집에 못 갔으니 두 개요.”뒤에 선 기원이 만두 바구니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그는 심문 내용을 적는 서리였다.“밤 당직을 선 사람만 두 개입니다.”“나도 밤을 샜어.”“한유백 앞에서도 그렇게 말하세요. 시신 옆으로 끌고 갈 테니.”기원이 자기 몫을 챙기는 사이 노탁은 바구니에 남은 마지막 만두를 집었다.“그건 배 소경 나리 몫입니다.”“나리는 아침을 안 드시잖아.”노탁이 만두를 베어 문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그게 내 만두 같은데.”배경연이 마당 한가운데 서 있었다. 밤새 입은 검은 관복은 구겨져 있었고, 손에는 식은 찻잔이 들려 있었다.노탁은 입을 가린 채 허리를 숙였다.“반은 남기겠습니다.”경연이 베어 문 만두를 보았다.“그냥 다 먹게.”그는 그대로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노탁이 기원에게 속삭였다.“화를 내신 거냐?”“모르겠습니다.”“그게 더 무섭네.”노탁은 남은 만두를 급히 입에 넣었다.경연의 방은 밤보다 더 추웠다. 화로의 불은 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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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배경연의 식은 차
그가 나가자 신임 평사 고환이 들어왔다. 죄를 따져 판결문을 쓰는 젊은 관리였다. 새 관복에는 구김 하나 없었고, 팔에는 두꺼운 법전이 끼워져 있었다.“진소의를 더 가둬두어야 합니다.”고환은 세 손가락을 폈다.“시신에게서 진소의가 쓴 소장이 나왔습니다. 진문재의 관인도 함께 나왔습니다. 청묵재에서는 같은 이름의 관인 조각까지 발견됐습니다.”경연은 문씨 집안의 전갈을 그 앞으로 밀었다.“이것부터 읽게.”고환이 빠르게 읽었다.“가족이 시신을 딸이라고 인정했습니다.”“얼굴도 보지 않고.”“옷과 장신구가 같답니다.”“그것만으로 사람까지 같다고 할 수는 없어.”고환이 법전을 펼쳤다.“그래도 가족의 말은 중요한 근거입니다.”“그럼 가족을 불러 직접 보게 하면 되겠군.”고환의 손이 멈췄다.“예부에서는 사건을 다른 관청인 형부로 넘기라고 합니다.”“문세린이 일하는 곳이 예부지.”“예.”“딸의 얼굴도 보지 않은 아비가 자기 관청을 움직여 사건부터 가져가려는군.”경연은 전갈을 접었다.“넘기지 않겠네.”문이 열렸다.대리시를 맡은 심조문이 마른 귤껍질을 씹으며 들어왔다. 경연이 일어나자 그는 손부터 내저었다.“앉아. 아침부터 허리 숙이는 사람은 충분히 봤어.”조문은 문씨 집안의 전갈을 집었다.“문세린이 사람을 세 번이나 보냈더군.”“제게는 두 번 왔습니다.”“나머지 한 명은 내 집까지 찾아왔어. 자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더군.”조문의 말끝에는 남쪽 억양이 조금 남아 있었다.“사건을 붙잡고 있으면 내 은퇴가 늦어지겠지?”“지금 넘기면 은퇴하신 뒤에도 불려 나오실 겁니다.”“그건 더 싫군.”조문은 소의의 심문 기록을 펼쳤다.진문재.그 이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열두 해 전 진문재에게 사형을 내린 판결문에는 조문이 손수 남긴 붓자국도 있었다.경연은 아무 말 없이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그 딸은 어떻던가?”“깨진 관인도 먼저 내놓았습니다. 자기에게 불리한 물건인데도 숨기지 않았습니다.”“범인이 아닌 것 같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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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시신은 신부가 아니다
요분이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죽은 이는 산 사람을 데려가지 않아.”“눈을 뜨면요?”“감기지 않은 눈은 내가 감겨드린다.”“손을 잡으면요?”“놓지 못한 손은 저 오작인이 펴드릴 거고.”아이는 방 안을 슬쩍 보았다.“무섭지 않아요?”“무서우면 예를 갖추면 돼. 소리 지르지 않고, 함부로 보지 않고, 그 사람이 남긴 말을 빼먹지 않는 거야.”요분은 아이 손에 콩 다섯 알을 쥐여주었다.“이걸 다 세고도 무서우면 다시 다섯 번 세.”유백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시신을 살피기 시작했다.시신의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물기를 닦았다. 붉은 혼례복은 벗겨서 옆 나무판 위에 따로 펼쳐두었다.노탁은 문 가까이에 섰다.“더 가까이 오십시오.”“여기서도 잘 보입니다.”“그러면 기록을 대신 쓰시겠습니까?”노탁은 한 걸음 다가왔다. 오른손은 소매 안에서 부적을 쥐고 있었다.유백이 시신의 얼굴과 몸을 차례로 살폈다.“서른다섯 안팎입니다.”“물에 불어서 더 나이 들어 보이는 건 아니고요?”노탁은 고환에게 들었던 말을 그대로 했다.“다음에는 평사 나리도 데려오십시오. 두 번 대답하지 않게.”유백은 시신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돌렸다. 왼쪽 관자놀이에 손가락 두 마디만 한 화상 자국이 있었다. 뒤통수에는 머리카락이 피와 함께 엉겨 붙어 있었다.“우물에 들어가기 전에 뒤통수를 크게 맞았습니다.”노탁이 부적을 쥔 손에 힘을 줬다.“우물에 빠져 죽은 게 아닙니까?”“아닙니다. 죽은 뒤에 우물에 던져졌습니다.”시신의 배와 골반을 살핀 유백은 기록을 멈추었다. 몸에는 오래전 출산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아이를 낳았습니다.”“언제요?”“시기까지 알 수는 없습니다. 최근에 생긴 흔적은 아닙니다.”“문려화는 스물넷입니다.”“문려화가 아닙니다.”유백은 시신의 얼굴을 흰 천으로 덮었다.“이 얼굴과 화상 자국을 아는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연경에 사람이 몇인데 어디서 찾습니까?”“사흘 안에 사라진 여자를 찾는 사람부터 만나십시오. 여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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