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무능한 장녀라더니 상단을 먹어버렸다: Chapter 51 - Chapter 60

96 Chapters

51화

그는 정문 바로 앞 등불 아래에 섰다. 숨지도 않았고, 서두르지도 않았다. 얇은 장검은 이미 뽑혀 있었다.가장 앞의 사병이 창을 세웠다.“멈춰라!”실렌은 멈췄다. 대답은 없었다.나흘째 잠을 설친 사병들은 그 침묵을 견디지 못했다.“누구냐!”창 하나가 먼저 찔러 들어왔다. 빠르기는 했다. 하지만 끝이 흔들렸다. 긴장과 피로가 손목에 같이 붙어 있었다.실렌은 창끝이 뻗어오는 방향을 따라 한 걸음 안으로 들어갔다. 검끝이 창을 쥔 손의 장갑끈을 스쳤다. 창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사병이 자기 손을 내려다보기도 전에, 검집 끝이 목 옆을 쳤다. 그는 무릎부터 꺾였다.옆의 사병이 검을 뽑았다. 칼은 끝까지 나오지 못했다. 실렌의 장검이 검날이 아니라 검집 입구를 스쳤다. 반쯤 빠져나온 검이 안에서 걸렸다. 사병이 힘으로 잡아빼려는 순간, 검집 끝이 팔꿈치 안쪽을 눌렀다.팔이 접혔다. 욕설이 터졌다.창끝이 다시 들어왔고, 짧은 검을 든 사병이 옆으로 돌았다. 움직임 자체는 훈련된 것이었다. 앞에서 찌르고, 옆에서 파고드는 식이었다.다만 한 박자 늦었다. 나흘 동안 선 채 버틴 몸은 명령보다 느렸다.실렌은 창 쪽으로 붙었다. 긴 창은 거리가 무너지면 무거운 막대가 된다. 검등이 손잡이 쪽을 눌렀고, 창대가 아래로 떨어졌다.짧은 검이 옆구리를 향해 들어왔다. 실렌은 크게 피하지 않았다. 손목만 돌렸다. 장검의 평평한 면이 손등을 쳤다. 검이 떨어졌다.사병은 손을 붙들고 뒤로 물러났다.남은 자들이 그제야 실렌을 둘러싸려 했다. 창끝이 벌어지고, 검을 든 자들이 좌우로 퍼졌다.실렌은 움직이지 않았다. 등불 아래에 그대로 섰다.그를 무너뜨리려면 모두가 정문을 봐야 했다. 정문 앞의 사병들이 그를 보았다. 본관 입구의 호위들도 그를 보았다. 2층 회랑의 궁수들도 활시위를 당기며 그를 보았다.저택 앞쪽의 시선이 전부 정문에 묶였다.그 사이, 베라는 본관 창틀을 넘고 있었다.안쪽 복도는 비어 있었다. 베라는 몸을 낮추고 걸었다. 부엌 옆을 지나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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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금고실.야라는 계단 아래에 섰다.키 큰 여자였다. 회갈색 피부에, 왼쪽 뺨을 가로지르는 오래된 흉터가 있었다. 머리는 뒤로 단단히 묶었고, 양손에는 짧은 철퇴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둥근 철퇴가 아니었다. 머리 부분은 납작하고 각졌으며, 모서리에는 촘촘한 홈이 파여 있었다. 갑옷을 찢어 열기보다, 갑옷째로 안쪽을 망가뜨리는 물건이었다.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좁은 계단 끝에 호위 넷이 있었다. 웨슬러가 가장 믿는 자들이었다.갑옷은 다른 병력보다 두꺼웠고, 검도 좋았다. 방패는 없었다. 좁은 계단에서 방패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 대신 둘은 짧은 검을 들었고, 하나는 양손검을 짧게 잡고 있었다. 마지막 하나는 금고실 문 바로 앞에 섰다.그들도 나흘 동안 제대로 자지 못했다.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손가락은 검 손잡이를 너무 세게 쥐고 있었다. 하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정문 사병들과는 달랐다. 겁을 먹었어도 자리를 지킬 줄 아는 자들이었다.가운데 선 호위가 낮게 말했다.“더 오면 죽는다.”야라는 한 계단 올라갔다.왼쪽의 짧은 검이 먼저 들어왔다. 찌르는 곳은 팔 아래였다. 갑옷이 덜 닿는 자리. 빠르고 정확했다.야라의 철퇴가 검날 옆을 눌렀다. 검끝이 계단 벽에 박혔다. 호위가 검을 빼려 팔에 힘을 주는 순간, 다른 철퇴가 그의 허벅지 갑옷을 찍었다.쾅.갑옷은 찢어지지 않았다. 안쪽 다리만 접혔다. 호위가 이를 악물며 무릎을 꿇었다.오른쪽에서 단검이 들어왔다. 야라는 거리를 내줬다. 호위가 더 깊이 들어오는 순간, 그녀의 무릎이 가슴갑옷 중앙을 찍었다.숨이 끊긴 몸이 앞으로 접혔다. 야라는 철퇴 손잡이 끝으로 그의 턱 아래를 받쳤다. 고개가 들리고, 몸은 뒤로 밀렸다. 호위는 벽에 부딪혀 주저앉았다.남은 둘은 바로 달려들지 않았다.하나는 양손검을 짧게 잡고 앞을 막았다. 다른 하나는 금고실 문 앞에서 자세를 낮췄다. 야라가 지나가려 하면 옆구리를 찌를 자리였다.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야라는 양손검을 든 호위 쪽으로 올라갔다.검이 내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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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정하은은 눈을 떴다.낯선 천장이 보였다. 높은 천장, 얇게 흔들리는 커튼. 잠깐 동안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몸이 먼저 잠을 더 원했다. 머리는 무겁고, 배 위도 무거웠다.정하은은 눈을 깜빡였다.……배 위가 무거워?그녀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카시안이 있었다. 눈을 감은 채였다. 자신은 카시안의 팔을 베고 누워 있었다.정하은은 굳었다.긴 베개는 어디 갔지?분명히 있었다. 침대 가운데, 정확히 가운데. 누구라도 넘어오지 말라는 뜻으로 놓인 길고 단호한 물리적 증거.그런데 지금 그 베개는 내 발치 쪽으로 반쯤 밀려나 있었다.배신감이 밀려왔다. 누구에게 느끼는 배신감인지는 따지고 싶지 않았다. 일단 배신감이었다.정하은은 조심스럽게 몸을 빼려 했다.하지만 카시안의 팔이 그녀의 배 위에 있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너무 평화롭게.정하은은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자신 있다더니. 넘어오지 않을 자신 있다더니. 입꼬리 독립 성향이 강하다더니. 팔도 독립 성향이 강한 건가.정하은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이불을 밀었다.“카시안.”낮게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카시안 블랙우드.”이번에는 조금 더 낮았다. 카시안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정하은은 카시안의 팔을 흔들었다.“일어나요.”카시안이 천천히 눈을 떴다. 아직 잠이 덜 깬 얼굴이었다. 그는 잠시 정하은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들의 자세를 보았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정하은에게 돌아왔다.정하은이 먼저 말했다.“설명해요.”카시안은 잠깐 말이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당황도, 변명도, 수습도 없었다. 대신 아주 깊은 의문이 떠올랐다.“제가요?”정하은의 눈이 가늘어졌다.“지금 그 말이 나와요?”“상황상 먼저 확인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확인?”“예.”카시안은 아주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정하은의 배 위에 있던 자신의 팔을 천천히 거두었다. 마치 자신도 억울하다는 듯한 손길이었다.그리고 자기 뒤쪽, 침대 가장자리를 가리켰다.정하은은 그쪽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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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그렌은 정하은을 보았다.“전원 말씀이십니까?”“지금 저택 안에 있는 사람들만요. 하인, 마부, 창고 담당, 경비, 주방 사람들까지.”그렌의 시선이 카시안에게 아주 짧게 갔다. 카시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정은 정하은의 몫이라는 뜻이었다.그렌이 고개를 숙였다.“알겠습니다.”노아가 입 안의 빵을 급히 삼켰다.“뭔가 시작되는 겁니까?”베라가 그를 보았다.“먹어.”“궁금해서요.”“궁금해도 먹어.”옆자리에서 누군가 말했다.“먹으면서 궁금해하면 되지.”노아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지.”야라가 말했다.“시끄럽다.”노아는 입을 다물었다.정하은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잠시 후, 사람들이 하나둘 식당으로 들어왔다.주방에서 앞치마를 두른 여자 둘이 왔다. 먼지 묻은 소매를 걷어붙인 중년 남자도 있었다. 마구간 냄새가 희미하게 묻은 소년, 빨래를 하다 온 듯 손이 젖은 하녀, 허리춤에 짧은 몽둥이를 찬 남자들 몇 명까지.식당 안의 빈자리가 빠르게 줄었다.정하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 순간 식당이 조용해졌다.정하은은 식탁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기다리는 얼굴들이었다.그녀가 입을 열었다.“어제 인사도 제대로 못 했죠.”몇 사람이 고개를 숙였다.정하은은 말을 이었다.“이벨리아 블랙우드입니다.”잠깐 숨을 고른 뒤, 그녀는 다시 식탁을 보았다.“여기서 편하게 밥만 먹고 지낼 생각은 없습니다.”누군가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카시안에게 기대서 살겠다는 뜻도 아니고, 블랙우드 이름 뒤에 숨겠다는 뜻도 아니에요.”정하은은 또박또박 말했다.“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만들 겁니다.”“그러려면 여러분 도움이 필요합니다.”식탁에 앉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였다.정하은은 말을 이었다.“블랙우드는 여러 일을 하고 있죠. 창고도 있고, 운송도 있고, 경비도 있고, 작은 거래도 있고, 사람을 찾아내는 일도 하고, 문제를 조용히 해결하는 일도 합니다.”“그런데 주력 사업은 없어요.”식당 안이 조용해졌다.“지금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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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블랙우드 저택의 문지기는 문 앞에 선 여자를 한참 바라보았다.여자는 젖어 있었다.비가 온 것은 아니었다. 하늘은 흐렸지만, 아직 물방울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자의 머리카락 끝과 소매 끝은 눅눅했고, 치맛자락에는 마른 진흙과 새로 묻은 흙이 뒤섞여 있었다.뒤에는 작은 손수레 하나가 있었다. 수레 위에는 천으로 덮은 길쭉한 물건과 낡은 가방 두 개가 실려 있었다.여자는 문지기를 노려보았다.“이벨리아를 보러 왔어.”문지기는 바로 문을 열지 않았다.“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엘린.”“약속이 있으십니까?”엘린의 입술이 굳었다.없었다.없다고 말하는 순간, 정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엘린은 턱을 들었다.“전할 게 있어.”“무엇을 말입니까?”“그 여자가 말한 거.”“부인께서 말씀하신 것 말입니까?”부인.엘린은 그 호칭을 듣고 잠깐 표정이 굳었다. 로세트가 아니라 블랙우드. 정말 그렇게 됐나 보다.“그래. 그 부인이 말한 거.”문지기는 엘린 뒤의 수레를 보았다.“물건입니까?”“물건이든 뭐든, 네가 볼 건 아니야.”문지기는 더 묻지 않았다.“기다려주십시오.”문이 완전히 열리지는 않았다. 작은 쪽문만 열리고, 안쪽으로 사람이 들어갔다.엘린은 닫힌 문 앞에 남았다.그녀는 수레 손잡이를 꽉 쥐었다.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박혀 있었지만, 오늘은 그 위에 또 물집이 잡혔다. 산기슭에서 내려오는 동안 수레는 두 번이나 옆으로 기울었고, 진흙에 바퀴가 박혔을 때는 길가의 돌을 주워 받쳐야 했다.엘린은 이를 악물었다.쪽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집사처럼 보이는 마른 남자가 나왔다. 눈썹이 거의 없고, 창백한 얼굴을 한 남자였다. 손에는 검은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그렌 모트입니다. 부인께 전달했습니다.”엘린은 바로 물었다.“그래서?”“부인께서 만나시겠다고 하셨습니다.”그렌은 수레 쪽을 보았다.“물건은 제가 옮기도록 하겠습니다.”“손대지 마.”그렌은 멈췄다.엘린은 수레 손잡이를 더 세게 잡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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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정하은은 조용히 엘린을 보았다.엘린은 말하고 나서 입을 다물었다.그 말은 너무 솔직했다.망하면 바로 들킨다.정하은은 말했다.“망해도 돼.”엘린의 눈빛이 거칠어졌다.“그딴 말 쉽게 하지 마.”“쉽게 하는 말 아니야.”“망하면 욕먹는 건 나야.”“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시킨 거잖아.”곧 마차 한 대가 동쪽 창고 앞으로 들어왔다. 마차에는 빈 나무상자들이 실렸다. 그렌이 물통을 준비했고, 하인 둘이 옆에 섰다.정하은은 뒤로 물러났다.“시작해.”엘린은 가만히 서 있었다.손끝이 아주 작게 떨렸다.그녀는 바로 감추듯 손을 말아쥐었다. 그리고 마차 위로 올라갔다. 접힌 나무틀을 펼치고, 짐과 옆판 높이에 맞춰 양쪽 받침의 위치를 조절했다. 틀이 자리를 잡자 기름 먹인 천을 씌우고, 끈을 당겨 마차 옆판 아래에 묶었다.움직임은 빨랐다.끈을 당기고, 고리를 맞추고, 천의 기울기를 보고, 앞쪽을 눌러 고정했다. 그다음 마차 바닥에 받침판을 깔고, 빈 상자들을 올렸다.엘린은 마차에서 내려와 말했다.“물.”하인 하나가 물통을 들었다.“위에서 한 번에 붓지 마.”정하은이 하인에게 말했다.“조금씩. 넓게.”물이 천 위로 떨어졌다.물방울은 천을 타고 양옆으로 내려갔고, 고리 아래 달린 끈을 따라 땅으로 떨어졌다. 짐 위로 떨어지는 물은 없었다.정하은은 마차 안쪽을 봤다.빈 상자들은 마른 상태였다.엘린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그때 그렌이 물었다.“마차가 움직일 때도 확인하시겠습니까?”엘린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정하은은 마차를 보았다.“천천히 움직여주세요. 물은 계속 붓고요.”마부가 고삐를 당기자 마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하인 둘은 양옆을 따라 걸으며 천 위로 물을 뿌렸다.처음 몇 걸음은 괜찮았다. 물은 그대로 양쪽으로 흘러내렸다.그러나 앞쪽에서 바람이 불어오자 팽팽하던 천이 순간 들렸다.그 틈으로 물방울 몇 개가 안쪽에 튀었다.“그만.”엘린이 소리치자 마차가 멈췄다.엘린은 말없이 올라가 안쪽 상자를 확인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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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블랙우드의 사람들은 생각보다 빨리 흩어졌다.정하은이 일주일을 줬지만, 정말 일주일을 다 쓰려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첫 번째 물건은 엘린이 온 날 저녁이 되기도 전에 들어왔다.마구간에서 일하는 소년이 작은 자루를 들고 식당으로 찾아왔다. 자루 안에서는 돌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정하은은 자루와 소년을 번갈아 보았다.“뭘 잡아 왔어요?”“잡은 건 아닙니다.”“그럼 주웠어요?”“샀습니다.”소년은 제법 당당하게 자루를 열었다.안에는 손바닥만 한 잿빛 덩어리가 들어 있었다. 표면이 거칠고 군데군데 흰 결정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정하은이 하나를 집었다.“돌이네요.”“예.”정하은은 돌을 한 번 뒤집어봤다.“좋아요. 시작부터 예상 밖이네.”소년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렸다.“말들이 좋아합니다.”“돌을요?”“계속 핥습니다.”정하은은 돌을 다시 보았다.“먹어봤어요?”소년이 손가락 끝을 조금 들어 보였다.“이만큼만요.”“왜요?”“말들이 너무 좋아해서.”정하은은 잠깐 소년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이해해요. 남이 맛있게 먹으면 궁금하죠.”소년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짭니다.”“소금이네요.”“예.”“말들이 좋아하고요?”“묶어두면 이것만 봅니다.”정하은은 돌을 자루에 내려놓았다.“좋네요.”소년의 얼굴이 밝아졌다.“팔 수 있습니까?”“말한테요?”소년이 눈을 깜빡였다.“말은 돈이 없는데요.”정하은이 웃었다.“그러니까 주인한테 팔아야죠.”소년은 그제야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말을 키우는 사람이면 삽니다.”“말이 좋아하는 걸 보여주면 더 잘 사겠네요.”“보여드릴 수 있습니다.”“그럼 이거 하나로 며칠이나 먹는지 알아와요.”정하은은 자루 안의 돌을 한 번 더 보았다.“말이 몇 번이나 쳐다보는지도.”소년이 잠깐 멈췄다.“쳐다보는 것도 셉니까?”“좋아한다면서요.”“예.”“그럼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알아야죠.”소년은 진지한 얼굴로 자루를 안았다.“세겠습니다.”그가 돌아가자 카시안이 물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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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버려.”“뭔지는 봐야죠.”베라가 노아를 봤다.“문제는 너 하나로 충분해.”노아는 억울한 얼굴로 정하은을 보았다.“새 마님, 물건은 죄가 없습니다.”정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노아의 얼굴이 밝아졌다.“사람이 문제죠.”노아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베라가 짧게 웃었다.노아는 못 들은 척 첫 번째 물건을 내밀었다.손바닥만 한 나무 조각이었다. 둥근 나무판 가운데에 얇은 쇳조각이 들어가 있었다.“이건 생선 경매장에서 씁니다.”그가 엄지로 가운데를 눌렀다.딸각.생각보다 크고 또렷한 소리가 났다.식당에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노아가 만족스럽게 웃었다.“이렇습니다.”그가 다시 눌렀다.딸각.몇 사람이 미간을 찌푸렸다.노아의 엄지가 세 번째로 움직이려는 순간 베라가 말했다.“손가락 접어.”노아가 멈췄다.“아직 설명이 남았습니다.”“입으로 해.”노아는 딸각쇠를 정하은에게 건넸다.“경매를 시작할 때도 쓰고, 살 사람이 참여한다고 알릴 때도 씁니다. 생선 공판장이 워낙 시끄러워서 목소리보다 이게 낫답니다.”정하은이 가운데를 눌렀다.딸각.손끝에 얇은 쇠가 꺾였다 돌아오는 감각이 느껴졌다.“이거 하나면 사람들이 돌아봐요?”“예. 저도 돌아봤습니다.”“그래서 사버렸어요?”“예.”“잘 만든 물건이네요.”노아의 얼굴이 밝아졌다.“그렇죠?”“소리 한 번에 손님 하나를 잡았잖아요.”노아가 잠깐 생각했다.“저는 손님이 아니라 조사하러 간 겁니다.”“돈을 냈으면 손님이에요.”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맞아.”노아는 딸각쇠를 바라보았다. 조금 배신당한 얼굴이었다.정하은은 한 번 더 눌렀다.딸각.그렌이 식당 문밖에서 들어오다가 멈췄다.“부르셨습니까?”정하은은 손안의 물건을 내려다봤다.“아뇨.”그렌은 노아를 봤다.“또 뭘 사 왔나 보군.”“또라니요. 오늘 처음 보여드리는 겁니다.”“네가 없는 동안 조용했다.”노아는 대답하지 못했다.정하은은 딸각쇠를 보류 쪽으로 밀었다.“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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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며칠 만에 식당 안이 제법 북적였다.그동안 모두 각자 맡은 일로 저택을 비우는 날이 많았다. 작은짐 사업은 마일로가 맡았고, 로웬을 비롯한 실무진이 그 일을 도왔다. 카시안과 베라, 야라는 로세트 상단 일로 바빴다. 실렌과 노아도 단풀 마을의 사전 조사를 마치고 막 돌아온 참이었다.동쪽 창고에서 지내던 엘린은 그사이 식당을 오가며 블랙우드 사람들과 제법 얼굴을 익혔고, 비를 막는 마차 덮개도 완성했다.그렇게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는데, 정하은의 자리만 비어 있었다.베라가 카시안을 봤다.“새 마님은 오늘도 안 오십니까?”“곧 와.”카시안은 정하은의 빈 의자를 당겨놓았다.“오늘은 같이 먹겠다고 했어.”노아가 빵을 뜯다가 고개를 들었다.“새 마님 얼굴 본 지 꽤 된 것 같습니다.”“너도 며칠 없었잖아.”베라가 말했다.“떠나기 전부터 못 뵀습니다.”노아는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요즘은 식당에 아예 안 오십니까?”음식을 내려놓던 주방 하녀가 말했다.“그동안은 일하시는 곳으로 가져다드렸어요.”노아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맞은편의 엘린을 봤다.“엘린은 알고 있습니까?”“뭘.”“새 마님이 그동안 뭘 하셨는지요.”엘린은 수프를 한 숟가락 떠먹었다.“알아.”노아가 몸을 조금 기울였다.“뭡니까?”“곧 보면 알 텐데.”“조금만 먼저 알려주시면 안 됩니까?”“안 돼.”노아는 아쉬운 얼굴로 빵을 다시 뜯었다.그때 식당 문이 열렸다.먼저 들어온 건 미라였다. 길쭉한 상자 하나를 품에 안고 있었다.그 뒤로 정하은이 모습을 드러냈다.갈색 머리카락이 등을 가득 덮은 채 걸음을 따라 흔들렸다. 짙은 갈색 사이에는 조금 밝은 가닥이 섞여 있었고, 끝부분은 부드럽게 말려 있었다.식탁 위의 말소리가 하나둘 끊겼다.평소 입던 드레스에, 분명 같은 얼굴이었다.그런데 전혀 다른 사람이 들어온 것처럼 보였다.노아는 입에 넣으려던 빵을 멈췄고, 베라도 잔을 내려놓았다.정하은은 쏟아지는 시선을 받으며 식당을 가로질렀다. 카시안 옆에 멈춰 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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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이번에는 대답이 빨랐다.“네.”여자들의 목소리가 겹쳤다.정하은은 방금 붙인 머리카락을 다시 떼어냈다.딸각.딸각.이번에는 아무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조금 전까지 뒤로 물러났던 사람들이 정하은의 손끝을 따라 가까이 왔다.정하은은 짧은 검은 머리카락을 양옆에 붙였다.원래 머리는 뒤로 말아 올리고, 짧은 가닥을 얼굴 옆으로 내렸다.미라가 빗으로 몇 번 정리했다.몇 분 전과 또 다른 모습이 됐다.정하은이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이건요?”주방 여자는 대답하지 못했다.자기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아 목덜미 위로 올려봤다.하녀 하나도 같은 행동을 했다.“저도 저렇게 할 수 있습니까?”“머리 길이에 따라 조금 다르겠지만요.”“이 색 말고 제 머리색으로도요?”“있어요.”“끝이 더 말린 건요?”“네. 그것도 있어요.”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머리숱이 적은 곳에만 붙일 수도 있어요?”“혼자서도 할 수 있습니까?”“매일 바꿔도 됩니까?”“긴 것과 짧은 걸 같이 써도 돼요?”“저 붉은색 좀 보여주세요.”조금 전까지 식탁 위의 머리카락을 꺼리던 사람들이었다.이제는 상자 주변으로 모여들었다.미라가 머리카락을 하나씩 꺼내 보여줬다.“이쪽이 더 밝습니다.”“그건 뒤에 붙이는 길이예요.”“끝이 말린 건 눌리지 않게 잡아주세요.”주방 여자는 밝은 갈색 머리카락을 자기 얼굴 옆에 대봤다.옆에 있던 사람이 고개를 저었다.“그건 너무 밝아.”“그래?”“붉은색이 더 나아.”“붉은색은 너무 튀잖아.”“그게 좋은 거 아니야?”두 사람은 벌써 자기 물건처럼 고르고 있었다.그렌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식탁 한쪽으로 몰리자 접시를 먼저 치웠다.“음식 위로 넘기지는 마세요.”그는 빈 공간을 만들어 상자를 옮겨놓았다.여자들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따라갔다.엘린은 식탁 끝에 기대 서서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며칠 동안 자신이 본 건 작은 금속 조각과 머리카락 묶음뿐이었다.정하은이 몇 번 붙였다 떼는 것도 봤다.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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