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무능한 장녀라더니 상단을 먹어버렸다: Chapter 31 - Chapter 40

96 Chapters

31화

처음 본 것은 낡은 현수막이었다.후보는 그 아래에서 혼자 연습하고 있었다.“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아니, 다시.”그는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가 금세 지웠다. 손을 내미는 각도도 어색했고, 고개를 숙이는 타이밍도 반 박자 늦었다.주변은 썰렁했다. 접이식 의자들은 벽 쪽으로 밀려 있었고, 바닥에는 밟힌 전단지가 몇 장 남아 있었다.선거캠프였다.후보는 좋은 사람이라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좋은 사람이라는 것만으로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정하은은 그때 아직 이십 대 초반이었다. 맡은 일도 대단하지 않았다. 컵을 채우고, 명단을 정리하고, 행사장 의자를 다시 펴는 일. 후보가 사람들 앞에서 말을 꼬이면 옆에서 상황을 정리하는 일.그날도 마찬가지였다.“아니, 방금 제가 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후보는 시장 상인회장 앞에서 너무 오래 고개를 숙였다. 상대는 이미 지루해졌는데, 후보는 아직도 말을 끝내지 못하고 있었다. 정하은은 명단을 정리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상인회장은 후보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후보 뒤쪽, 조용히 서 있는 젊은 여자에게 가 있었다.정하은은 명단 귀퉁이에 작게 표시했다.상인회장 X. 상인회장 뒤 여자 O.그다음은 노인회장이었다. 그는 행사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나갈 때마다 노인회장의 표정을 살폈다. 정하은은 명단에 다시 표시했다.발언자 X. 결정자 O.기자도 마찬가지였다. 질문은 후보에게 던졌지만, 시선은 대답하는 후보보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쫓고 있었다.정하은은 명단의 순서를 바꿨다. 후보가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의 이름이 위로 올라갔다. 후보가 인사만 하고 지나가야 할 사람의 이름은 아래로 내려갔다.다음 날부터 동선이 바뀌었다.후보는 시장 입구에서 악수하지 않았다. 시장 끝, 생선 냄새가 진하게 밴 골목으로 들어가 오래된 가게 주인에게 먼저 고개를 숙였다. 연설문 첫 문장도 바뀌었다. 거창한 말은 빠졌다. 대신 그 동네 사람들이 매일 밟고 다니던 깨진 보도블록 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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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정하은은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사라지지 않았다. 카시안은 여전히 거기 있었다. 한 팔은 그녀의 허리에 걸쳐져 있었고, 다른 손은 이불 위에 느슨하게 놓여 있었다.정하은은 숨을 멈췄다.기억해. 어제 무슨 일이 있었지.술을 마셨다. 거기까지는 확실했다. 카시안과 마주 앉아 있었고, 잔이 있었고, 자신은 분명히 술을 마셨다. 그리고.“더 가져와요.”정하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내 목소리였다.기억 속 카시안이 잔을 내려놓았다.“아가씨, 이제 그만 마시시는 게 좋겠습니다.”“싫어요.”“싫다는 말이 그렇게 또렷하신 건 처음 듣습니다.”“그럼 잘 들어요. 싫어요.”맙소사.정하은은 이불 속에서 손끝을 움켜쥐었다. 아니다. 여기까지는 아직 괜찮다. 술 더 달라고 한 건 창피한 일이지, 치명적인 일은 아니다.그다음 기억이 왔다. 카시안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녀가 그의 소매를 잡았다.“가지 마요.”정하은은 숨을 삼켰다.맙소사.카시안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웃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난처한 듯했다.“아가씨.”“가지 말라고 했어요.”“그 말의 뜻은 알고 하십니까?”기억 속의 자신이 고개를 들었다. 발음은 평소보다 느렸지만 이상할 만큼 또렷했다.“몰라요.”정하은은 속으로 죽었다.“그런데 가지 말라는 뜻은 알아요.”끝났다. 여기서 끝났어야 했다. 하지만 기억은 끝나지 않았다.엎어진 잔. 젖은 테이블보. 가까워진 숨. 카시안이 잡았다가 놓은 손목. 한 번 물러서던 몸.“멈추라면 멈춥니다.”낮은 목소리.정하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그만.그러나 기억은 잔인했다. 자신이 먼저 카시안의 셔츠 깃을 잡아당겼다. 정하은은 조용히, 아주 조용히 이불을 끌어올려 얼굴을 덮고 싶어졌다.내가 뭘 했지.그때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깨어나셨습니까?”정하은은 그대로 멈췄다. 카시안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고, 지나치게 가까웠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카시안이 눈을 뜨고 있었다.“언제부터 깨어 있었어요?”“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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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정하은은 침대 밑으로 손을 넣었다.손등에 먼지가 묻었다. 나무 바닥은 차갑고, 벽과 침대 다리 사이 틈은 좁았다.여기였다.왼쪽 다리 뒤, 바닥이 조금 들뜬 곳.손끝에 종이가 걸렸다. 정하은은 그것을 천천히 끌어냈다.오래 접어둔 자국이 남은 종이였다.펼치자 흐릿한 선과 지명이 드러났다.정하은의 시선이 북서쪽에 멈췄다. 먹물이 번진 자리 아래에 어린 글씨가 남아 있었다.가야 할 곳.정하은은 그 글자를 읽었다.그러자 오래된 기억이 따라왔다.복도였다.윤이 나는 바닥. 벽에 걸린 초상화. 낮게 깔린 발소리.이벨리아는 기둥 뒤에 서 있었다. 어머니를 기다리던 중, 하녀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복도 끝까지 나와 있었다.어머니는 지팡이에 기댄 채 걸어가고 있었다.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맞은편에서 에드문드가 오고 있었다. 그 뒤에는 손님들이 있었다.어머니는 비켜서려 했지만, 다리가 느렸다. 몸을 완전히 돌리는 데 시간이 걸렸다.손님 하나가 어머니를 보았다.“저분은…….”에드문드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그게 끝이었다.이벨리아는 기둥 뒤에서 그 말을 들었다.부인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고. 이벨리아의 어머니도 아니었다.그저 신경 쓸 필요 없는 사람.어머니는 고개를 숙였다. 웃지도 못했고, 울지도 않았다.어머니의 방은 늘 어두웠다.창문은 있었지만 빛은 늦게 들었고, 두꺼운 커튼은 낮에도 방 안을 흐리게 만들었다. 침대 옆 탁자에는 흰 찻잔이 놓여 있었다.손잡이 아래에 금이 간 잔.이벨리아는 그 잔을 기억했다. 처음부터 금이 가 있었다. 하녀는 그걸 모르는 척했고, 어머니도 모르는 척했다. 차를 마실 때마다 손끝이 그 금에 닿았지만, 어머니는 늘 웃었다.“예쁜 잔이네.”그 말이 싫었다.손님 앞에 놓이는 잔에는 금이 가 있지 않다는 걸, 어린 이벨리아도 알았다.어머니는 그런 것들을 받을 때마다 고맙다고 했다. 약상자도 그랬다.어머니가 밤새 열이 났던 다음 날이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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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도라의 숨이 멎었다.정하은은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결혼식 날짜는 잡혔고, 상대도 정해졌어. 순서가 조금 달라졌을 뿐이지.”“아가씨, 저는…….”“말이 새면.”정하은은 말을 끊었다.“너라고 알겠어.”도라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정하은은 말을 거두지 않았다.“내 방에 들어오는 사람은 많지 않아. 아침에 문 앞까지 온 것도 너고, 지금 이 침대를 본 것도 너야.”“말하지 않겠습니다.”“생각도 조심해.”도라가 고개를 들었다.정하은은 잔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밀었다.“사람은 말보다 표정에서 먼저 티가 나. 너는 접수실에서 그걸 배웠고.”도라의 눈이 흔들렸다.“배운 걸 내 방에서 쓰지 마.”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도라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명심하겠습니다.”“시트는 네가 직접 치워. 다른 하녀 손에 넘기지 마.”“예.”“이 방에 어젯밤 누가 들어왔는지, 넌 모르는 거야.”“예.”“네가 뭘 봤는지도 모르는 거고.”도라는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좋아.”정하은은 그제야 이불에서 손을 뗐다.도라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손끝이 흔들리지 않았다. 시트를 걷고, 이불을 접고, 떨어진 머리끈을 주웠다. 조용하고 정확했다.겁은 먹었다.하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정하은은 꿀물을 마저 마셨다.몸은 아직 무거웠지만, 생각은 점점 맑아졌다.어젯밤의 일은 여기서 끝낸다.도라는 옷장 쪽으로 갔다.“오늘은 어느 옷으로 준비할까요?”정하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옷장 안쪽에 걸린 회청색 드레스가 떠올랐다. 어머니가 좋아했던 색. 이벨리아가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옷.“회청색 드레스.”도라의 손이 잠깐 멈췄다.“그 옷은…….”“알아.”도라는 더 말하지 않았다. 옷걸이가 나무 막대에 스치는 소리가 났다. 회청색 드레스가 나왔다.화려한 옷은 아니었다. 하지만 천은 좋았다. 빛을 받으면 푸른 기가 살짝 돌았고, 그늘에서는 회색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이벨리아는 그 옷을 싫어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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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차는 좋았다.향부터 달랐다. 잔을 들기도 전에 옅은 꽃향이 먼저 올라왔고, 찻물은 맑았다. 혀끝에 닿는 맛도 거칠지 않았다. 정하은은 한 모금만 마셨다. 그걸로 충분했다.도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부인께서 허락하셨다고 합니다.”“그래.”정하은은 잔을 내려놓았다.비비안은 일단 요구를 들어줬다. 아마 지금도 재고, 기다리고, 다음 움직임을 살피고 있을 것이다.정하은은 비비안이 자신의 요구에 움직였다는 것만 확인하면 됐다.좋은 차가 올라왔고, 제대로 차린 점심도 곧 올 것이다. 이 집은 요구하면 움직인다. 다만 명분은 필요하다.정하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도라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아가씨?”“가주님을 뵈러 가.”도라의 눈이 흔들렸다.“지금 말씀이십니까?”“그래.”“식사는…….”“다녀와서 먹어.”도라는 더 묻지 않았다. 그 대신 정하은의 옷자락을 살폈다. 회청색 드레스는 구겨지지 않았다. 머리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얼굴은 조금 창백했지만, 회청색 드레스와는 오히려 잘 어울렸다.복도는 아침보다 밝았다. 창문으로 들어온 빛이 바닥에 길게 깔려 있었다. 정하은은 그 위를 밟고 걸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이었다.하녀들이 멀리서 고개를 숙였다. 전과 달랐다. 어제까지는 시선을 피했다면, 오늘은 고개를 숙인 채 정하은을 살폈다.좋은 차. 제대로 차린 점심. 사소한 것들은 저택 안에서 생각보다 빨리 번졌다.정하은은 시선을 주지 않았다.가주의 집무실 앞에는 수행원이 서 있었다. 그는 정하은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아가씨.”“가주님을 뵈러 왔어.”“약속이 있으십니까?”“없어.”수행원이 잠시 말을 잃었다. 도라가 뒤에서 숨을 삼켰다.정하은은 문을 보았다.“이벨리아 로세트가 왔다고 전해.”수행원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가, 곧 다시 나왔다.“들어오시랍니다.”도라는 문밖에 멈췄다.정하은은 혼자 안으로 들어갔다.에드문드는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서류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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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방 안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창밖에서 마차 바퀴 소리가 지나갔다. 멀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긴 침묵이었다.카시안이 물었다.“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십니까?”“알아.”“술기운도 아닌데.”“그래서 온 거야.”정하은은 그를 똑바로 보았다.“이번엔 기억하려고.”카시안은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로 다가오지 않는 걸 보면, 정하은이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정하은은 피하지 않았다. 원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온 건 아니다. 확인하고 싶다. 하지만 확인만 하러 온 것도 아니다.몸도, 관계도, 거래도. 상대가 먼저 가졌다고 해서 끌려갈 생각은 없었다.정하은은 카시안 앞에서 멈췄다.“싫으면 말해.”카시안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세지 않았다. 하지만 놓치지도 않았다.“그 말을 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닌 것 같은데.”“나는 이미 했어.”“무모합니다.”“자주 들어.”“위험합니다.”“그것도.”카시안은 짧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숨에 가까웠다.다음 순간, 그는 정하은을 끌어당겼다.입술이 닿았다.이번에는 기억났다. 옷깃을 스치는 손. 가까워지는 숨. 뒤로 밀린 의자. 귓가에 닿는 목소리.정하은은 눈을 감지 않았다. 그를 보았다. 카시안도 그녀를 보았다. 그 시선이 마음에 들었다.마치 서로가 서로를 삼킬 수 있는지 재는 것 같아서.문밖의 소리들은 멀어졌다. 응접실 안의 시간만 느리게 가라앉았다.오래 지나지 않아 술병이 놓여 있던 탁자는 한쪽으로 밀려 있었고, 회청색 드레스의 리본은 느슨해져 있었다.정하은은 흐트러진 숨을 고르며 창가에 기대 앉았다.좋았다.그 사실이 더 짜증났다.카시안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정은 평소보다 조금 풀려 있었지만, 눈은 여전히 날카로웠다.“이제 됐습니까?”정하은은 고개를 들었다.“응.”“그래서 이제 진짜 용건을 말할 겁니까?”정하은은 잠시 그를 보다가, 피식 웃었다.눈치가 빠르다.“창고가 필요해.”카시안의 시선이 멈췄다.“방금 전 일과 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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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안 받습니다.”마르코 베일은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그는 품에 안고 있던 작은 상자를 다시 고쳐 들었다. 상자는 크지 않았다. 한 팔로 안을 수 있을 정도였고, 안에는 천 견본 몇 묶음과 염료 샘플이 들어 있었다. 내륙 공방도시 브란트의 염색 공방에서 이 견본을 보고 다음 달 주문을 결정하기로 했다.오늘 떠나지 못하면 늦는다.“안 받는다고요?”상단 접수원은 장부에서 눈도 들지 않았다.“예.”“왜요?”“짐이 작습니다.”마르코의 입이 벌어졌다.짐이 작다니.짐이 작아서 맡기겠다는 거였다. 마차 한 대를 통째로 빌릴 수 있을 만큼 크면 그가 여기까지 와서 고개를 숙이고 서 있을 이유가 없었다.“다른 화물에 끼워주시면 안 됩니까?”“화물 목록은 이미 찼습니다.”“그럼 다음 마차는요?”“사흘 뒤입니다.”마르코는 입 안쪽을 씹었다.사흘 뒤.그때면 주문은 끝난다.라베른은 항구도시였다. 아침마다 배에서 물건이 쏟아지고, 낮이면 마차가 내륙으로 빠져나갔다. 브란트는 하루 반 거리의 공방도시였다. 라베른에서 들어온 염료와 천이 브란트의 염색 공방으로 가고, 브란트의 가공품이 다시 항구로 내려왔다.“운임은 내겠습니다.”“마차를 따로 잡으십시오.”“이 상자 하나 때문에 마차 한 대를요?”접수원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는 짜증보다 익숙함이 먼저 떠 있었다. 이런 말을 하루에도 몇 번씩 듣는 사람의 표정이었다.“급하면 그렇게 해야죠.”접수원의 목소리는 무심했다. 무심해서 더 사람을 미치게 했다.마르코는 상자를 안은 팔에 힘을 줬다. 접수처 뒤쪽에는 큰 포대와 나무 궤짝들이 줄지어 쌓여 있었다. 곡물, 원단, 철물, 향신료. 그런 것들 사이에서 그의 작은 상자는 눈에 띄지도 않았다.“비켜주십시오. 뒤에 기다립니다.”뒤에서 누군가 헛기침을 했다.마르코는 이를 악물고 옆으로 물러났다. 접수원은 이미 다음 손님을 불렀고, 뒤에 서 있던 사내는 큰 원단 궤짝 다섯 개를 사람들에게 내리게 했다. 궤짝 옆에는 상단 인장이 찍혀 있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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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마르코는 말문이 막혔다.거절이 아니었다. 조건이었다.여자는 접수원에게 말했다.“분리 보관료. 브란트 쪽에도 같은 표시 보내고.”“예.”마르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추가 비용이 있습니까?”“자리를 따로 쓰잖아요.”짧은 대답이었다.마르코는 입을 다물었다. 억울하다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창고 안쪽을 보자 그 말은 다시 내려갔다.여기서는 그의 상자를 받아주고 있었다. 기존 상단은 보지도 않고 거절했다. 이곳은 열어보고, 냄새를 확인하고, 따로 묶고, 도착하면 알려준다고 했다.이상하게도 그쪽이 더 납득됐다.“얼마입니까?”접수원이 운임과 분리 보관료, 직접 고지 비용, 수령 확인 회송 비용을 차례로 불렀다. 마차 한 대를 빌리는 값과 비교하면 말도 안 되게 쌌다. 그래도 작은 상자 하나에 붙는 비용으로는 적지 않았다.마르코는 잠시 계산했다. 주문을 따내면 충분히 남았다.그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냈다.“내일 도착합니까?”접수원이 장부를 보며 답했다.“오늘 해 지기 전 브란트 방향 마차에 실립니다. 내일 오전 도착 예정입니다. 도착하면 공방 뒷문으로 고지합니다. 수령인이 확인하면 회송 쪽지가 돌아옵니다.”“그럼 제가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까?”“이곳으로 와도 되고, 항구 시장 쪽 접수대에 물어도 됩니다. 이름과 접수 번호를 말하십시오.”접수 번호.마르코는 자신도 모르게 웃을 뻔했다.거절당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여기서는 번호까지 붙여주고 있었다.이게 장사구나.그는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접수원은 붉은 목패를 꺼냈다.라베른 출발. 브란트 공방구 도착. 수령인 폴. 뒷문 직접 고지. 분리 보관. 수령 확인 회송.글자가 하나씩 적혔다. 이내 접수원이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접수 번호입니다.”마르코는 종이를 받아 넣었다.그때 창고 안쪽에서 다른 손님의 목소리가 올라갔다.“남작 부인의 재봉실 물건이야. 먼저 보내줘야지.”귀족가 하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턱을 세우고 있었다. 접수원은 당황했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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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중앙으로 보내고 싶다는 물건이 무엇이죠?”정하은이 물었다.하인은 품에 안은 작은 상자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상자는 나무로 되어 있었고, 겉에는 두꺼운 천이 둘러져 있었다. 그 위로 희미한 소금 냄새가 올라왔다.“열어보세요.”하인은 망설이다가 천을 풀었다. 뚜껑이 열리자, 창고 안으로 비릿한 냄새가 퍼졌다.생선이었다.정하은은 뚜껑을 다시 덮었다.“죄송하지만 다시 가져가세요.”“아직 설명도 드리지 않았습니다.”“들은 걸로 할게요.”“중앙 귀족가로 가는 물건입니다.”“그럼 더더욱 안 받아요.”하인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정하은은 손수건으로 손끝에 묻은 냄새를 닦았다.“여기서 중앙까지 며칠이나 걸리는지 아시죠?”하인이 입을 다물었다.정하은은 뚜껑 덮인 상자를 가리켰다.“신선도는 어떻게 유지하실 건가요? 저희는 배송만 하는데.”“소금을 쳤습니다.”“소금은 시간을 조금 벌어주는 거지, 기적을 만드는 물건이 아니에요.”하인의 얼굴이 붉어졌다.“중앙 귀족가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연회 전에 꼭 도착해야 합니다.”“연회에 올라가기 전에 썩겠죠.”하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돈은 충분히 내겠습니다.”“돈을 더 내면 생선이 안 썩나요?”마일로가 옆에서 작게 헛기침을 했다.정하은은 하인을 똑바로 보았다.“대책도 없이 왜 생선을 보내려는 거죠?”하인은 잠시 망설였다.“그건 의뢰인의 사정입니다.”정하은은 바로 말했다.“그럼 이 상자도, 그 사정도 다 가져가세요.”하인의 눈이 흔들렸다.그는 상자를 가져가려다 멈췄다.“연회 전에 도착해야 합니다. 어떻게든 방법이 없겠습니까?”“저희는 그 방법이 없어요.”정하은은 상자를 하인 쪽으로 밀었다.하인은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정말 안 됩니까?”“네. 상할 걸 알면서 받을 수는 없어요.”더는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하인은 결국 상자를 다시 품에 안았다.“알겠습니다.”그는 굳은 얼굴로 창고를 나갔다.정하은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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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목욕물은 아주 뜨겁게.”도라는 문턱에서 멈칫했다.“아가씨, 너무 뜨거우면…….”“안 죽어.”정하은은 장갑을 벗어 탁자 위에 던졌다. 젖은 가죽 장갑이 무겁게 떨어졌다.“술도 가져와.”“술이요?”“아주 독한 걸로.”도라의 눈이 아주 조금 커졌다. 묻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도라는 이제 질문을 삼키는 법을 알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문이 닫히자 방 안이 조용해졌다. 정하은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피곤했다.잠시 후 문밖에서 도라의 목소리가 들렸다.“아가씨, 목욕물이 준비되었습니다.”정하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낮게 웃었다.“그래도 싸게 막았네.”실패치고는 싼 편이었다. 보상할 수 있는 선에서 끝났으니. 그런데도 기분은 더러웠다.정하은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피부가 따갑게 달아올랐다. 도라는 말을 잘 들었다. 아주 뜨겁게 준비하라 했더니, 정말 아주 뜨겁게 준비했다.물결이 쇄골 아래까지 올라왔다. 정하은은 욕조 가장자리에 머리를 기댔다. 밤공기에 습기가 섞여 있어서 그런지 비 냄새가 났다.비?정하은은 눈을 떴다.사람이 잘못한 건 찾아내서 고치면 된다. 그런데 비가 오면?정하은은 욕조 가장자리에 놓인 잔을 들었다. 도라가 가져온 술은 색이 짙고, 냄새부터 날카로웠다. 한 모금 넘기자 목 안쪽이 확 타올랐다.좋았다. 생각이 조금 선명해졌다.비가 오면, 지금 만든 기준만으로는 부족하다. 젖으면 안 되는 물건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괜찮던 물건도 젖는 순간 문제 물품이 된다.결국 필요한 건 하나였다. 비가 오든, 길이 진창이 되든, 마차가 흔들리든, 물건을 바깥과 떼어놓는 방법.정하은의 손끝이 멈췄다.바깥과 떼어놓는다. 젖지 않게. 상하지 않게.그 순간 낮에 돌려보낸 상자가 떠올랐다. 중앙 귀족가로 보내달라던 생선. 상자 뚜껑을 열었을 때 퍼졌던 비릿한 냄새.연회 전에 도착해야 한다고 했다.이 시대에도 얼음은 있었다. 다만 비쌌고 오래 버티지 못할 뿐, 중앙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닷새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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