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본 것은 낡은 현수막이었다.후보는 그 아래에서 혼자 연습하고 있었다.“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아니, 다시.”그는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가 금세 지웠다. 손을 내미는 각도도 어색했고, 고개를 숙이는 타이밍도 반 박자 늦었다.주변은 썰렁했다. 접이식 의자들은 벽 쪽으로 밀려 있었고, 바닥에는 밟힌 전단지가 몇 장 남아 있었다.선거캠프였다.후보는 좋은 사람이라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좋은 사람이라는 것만으로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정하은은 그때 아직 이십 대 초반이었다. 맡은 일도 대단하지 않았다. 컵을 채우고, 명단을 정리하고, 행사장 의자를 다시 펴는 일. 후보가 사람들 앞에서 말을 꼬이면 옆에서 상황을 정리하는 일.그날도 마찬가지였다.“아니, 방금 제가 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후보는 시장 상인회장 앞에서 너무 오래 고개를 숙였다. 상대는 이미 지루해졌는데, 후보는 아직도 말을 끝내지 못하고 있었다. 정하은은 명단을 정리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상인회장은 후보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후보 뒤쪽, 조용히 서 있는 젊은 여자에게 가 있었다.정하은은 명단 귀퉁이에 작게 표시했다.상인회장 X. 상인회장 뒤 여자 O.그다음은 노인회장이었다. 그는 행사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나갈 때마다 노인회장의 표정을 살폈다. 정하은은 명단에 다시 표시했다.발언자 X. 결정자 O.기자도 마찬가지였다. 질문은 후보에게 던졌지만, 시선은 대답하는 후보보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쫓고 있었다.정하은은 명단의 순서를 바꿨다. 후보가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의 이름이 위로 올라갔다. 후보가 인사만 하고 지나가야 할 사람의 이름은 아래로 내려갔다.다음 날부터 동선이 바뀌었다.후보는 시장 입구에서 악수하지 않았다. 시장 끝, 생선 냄새가 진하게 밴 골목으로 들어가 오래된 가게 주인에게 먼저 고개를 숙였다. 연설문 첫 문장도 바뀌었다. 거창한 말은 빠졌다. 대신 그 동네 사람들이 매일 밟고 다니던 깨진 보도블록 이
Last Updated : 2026-09-08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