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한 장녀라더니 상단을 먹어버렸다

무능한 장녀라더니 상단을 먹어버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By:  정하은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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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보좌관 정하은은 정치판에서 십 년을 버티며 사람의 말보다 욕망과 선택을 믿는 법을 배웠다. 의문의 폭발 사고로 죽은 뒤 눈을 뜬 곳은 낯선 세계, 남부 최대 상인가문 로세트의 장녀 이벨리아의 몸. 가주와 형제, 하녀들까지 그녀를 무시하고, 가문은 더러운 일을 맡는 조직의 수장에게 정략결혼으로 넘기려 한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이벨리아 안에 들어온 여자가 남의 판에서 살아남는 데 누구보다 익숙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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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1화

정하은은 사람을 믿지 않았다.

정확히는 사람의 말을 믿지 않았다.

말은 얼마든지 꾸밀 수 있다. 진심도 연기할 수 있고, 충성도 흉내 낼 수 있다. 필요하면 사랑조차 만들어낼 수 있다.

이건 정치판에서 십 년을 구르며 배운 교훈이었다.

그래서 정하은은 늘 행동을 봤다. 말보다 중요한 건 선택이었다. 사람의 욕망은 결국 그 선택에서 드러났다.

**

국회의원회관의 밤은 조용했다.

대부분의 사무실은 불이 꺼져 있었다. 복도에도 사람이 거의 없었다.

정하은은 책상 위에 놓인 서류철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사진. 계좌 내역. 녹취록. 문자 메시지. 호텔 출입 기록. 이름이 지워진 증언서 몇 장.

이게 공개되면 정치 생명은 끝이었다.

“실장님.”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낮게 불렀다.

평소라면 큰소리부터 쳤을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얼굴은 창백했고, 손끝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정하은은 그의 얼굴을 잠시 보다가 물었다.

“왜요.”

“이번에는 진짜 위험합니다.”

“그동안 위험하지 않은 일이 있었나요?”

“농담이 아닙니다.”

“제가 농담하는 걸로 보여요?”

남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겁을 먹은 게 뻔히 보였다. 그래도 이 일에서 손을 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정치판에는 저런 인간들이 많았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이익이 보이면 끼어든다. 그러면서 자기한테 피해가 오는 건 싫어한다.

“의원님은 뭐라고 해요?”

“가만히 있으랍니다.”

“당대표는요?”

“덮으라고 하죠.”

“저쪽에서는 뭐라던가요?”

남자는 눈을 피했다.

“안 그래도 전화가 왔었습니다.”

“봐달래요?”

“아뇨. 실장님 선에서 멈추면 없던 일로 해주겠다고.”

정하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남자는 그걸 보고 바로 입을 다물었다. 정하은이 저런 얼굴을 하면 보통 좋은 일이 생기지 않았다.

“없던 일이라.”

“실장님.”

“네.”

“이번에는 정말 물러나야 합니다.”

“왜요?”

“그 사람을 건드리면 우린 다 죽습니다.”

정하은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서류철을 닫았다.

“그럼 덮죠.”

남자가 멍한 얼굴로 그녀를 봤다.

“정말요?”

“그래요.”

남자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도 어딘가 찝찝한 얼굴이었다.

정하은은 그 표정을 보고 피식 웃었다.

사람은 이상했다. 자신이 원하던 답을 들어도 불안해했다. 특히 정하은 같은 사람이 순순히 물러설 때는 더 그랬다.

“못 미더우세요?”

“정말 덮는 겁니까?”

“제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보셨어요?”

남자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남자가 돌아간 뒤에도 정하은은 한동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시계는 밤 열두 시를 넘기고 있었다.

정하은은 서랍을 열어 검은색 USB 하나를 꺼냈다. 겉보기에는 평범했지만 안에 들어 있는 자료는 평범하지 않았다.

조금 전 남자에게 덮자고 한 말은 진심이었다.

다만, 오늘은 아니었다.

정하은은 휴대폰을 들어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

[내일 오전 9시.]

수신인은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전송 버튼을 누른 뒤, 정하은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는다. 누군가는 의원이 되고, 누군가는 감옥에 간다.

정치는 결국 순서의 문제였다.

그리고 정하은은 그 순서를 정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정치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정하은은 정의를 믿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고, 좋은 정치인이 좋은 나라를 만든다고 믿었다.

그 믿음은 채 3년을 가지 못했다.

처음 배신한 사람은 상대 당 의원이 아니었다.

같은 편이었다.

두 번째도 같은 편이었다. 세 번째도. 네 번째도.

그때 정하은은 깨달았다.

정치인은 거짓말쟁이가 아니었다. 그들은 상황에 따라 진실이 바뀌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정하은도 바뀌었다.

정의를 위해 싸우지 않았다. 이기는 쪽에 섰다. 살아남는 쪽에 섰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승진은 더 빨라졌다.

서른둘에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온 사람은 흔하지 않았다.

보좌관들은 그녀를 실장이라 불렀고, 의원은 비서실장이라 불렀고, 기자들은 그림자라고 불렀다.

정하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문득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오랜만이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정하은이 모시는 의원이었다.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

“예, 의원님.”

“아직 안 갔나?”

“정리할 게 좀 있어서요.”

“그 자료는?”

“처리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하은아.”

의원이 낮게 불렀다. 정하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보통 이름을 부를 때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가끔 네가 무섭다.”

정하은은 웃었다.

“새삼스럽게요.”

“사람 하나 망가뜨리는 걸 너무 쉽게 생각해.”

“그럼 하지 말까요?”

“그건 또 아니지.”

정하은의 웃음이 조금 짙어졌다. 역시 정치인이었다. 더럽다고 욕하면서도 필요하면 쓴다. 싫어하면서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의원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보자.”

“예.”

전화가 끊겼다. 정하은은 잠시 꺼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몸을 돌렸다.

이제 집에 갈 시간이었다.

그 순간 휴대폰이 또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정하은은 화면을 잠시 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상대는 바로 말하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정하은은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 순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하은 씨.”

낯선 목소리였다. 그런데 처음 듣는 목소리 같지 않았다.

“누구시죠?”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요.”

정하은은 미간을 좁혔다.

“무슨 말이죠?”

“당신 찾기까지.”

“누구냐고 물었어요.”

수화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모르겠죠.”

“뭘요?”

“사람들이 얼마나 당신을 싫어하는지.”

정하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녀가 망가뜨린 정치인만 해도 열 손가락으로 부족했다. 기자도 있었고, 기업인도 있었고, 검사도 있었다.

그중 누가 원한을 품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요.”

“그래서.”

여자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이번에는 당신 차례예요.”

그 순간 정하은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엄청난 폭음이 들렸다. 벽이 무너지고 유리가 산산조각 났다. 사무실 전체가 흔들렸다.

무언가가 날아와 정하은의 몸을 덮쳤다.

의식이 멀어졌다. 소리도, 빛도 전부 뒤섞였다.

정하은은 쓰러지는 순간까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은 하나였다.

누가.

그 뒤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

처음에는 꿈인 줄 알았다.

몸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너무 가벼웠고, 무엇보다 너무 아팠다.

정하은은 천천히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천장에는 금빛 장식이 둘러져 있었고, 얇은 휘장이 침대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한동안 천장을 바라보던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순간 머릿속이 깨질 듯 아파왔다.

머릿속에 낯선 기억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전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정하은은 이를 악물었다. 정치판에서 별의별 일을 겪어봤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몇 분이 흘렀을까.

고통이 조금 가라앉자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은 혼자 쓰기에는 지나치게 넓었다. 벽에는 값비싼 그림들이 걸려 있었고, 가구 역시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커튼은 묵직했고, 카펫은 발이 푹 잠길 정도로 두꺼웠다.

최소한 돈 없는 집은 아니었다. 아니, 돈이 너무 많은 집이었다.

정하은은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는 모르는 여자가 있었다.

아름다웠다.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와 긴 머리, 가는 턱선과 차분한 눈매. 하지만 어딘가 병약해 보였다.

정하은은 거울 속 얼굴을 한참 보다가 자신의 뺨을 만졌다. 촉감도 진짜였다.

꿈이 아니었다.

그때 머릿속에서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이벨리아 로세트.

그리고 계단.

누군가에게 밀리던 감각.

정하은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움켜쥐었다.

그때 방문 밖에서 누군가 말했다.

“안에 들어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굳이 뭘 그래. 깨어났으면 부르겠지.”

곧이어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장녀 아가씨인데.”

“장녀면 뭐해. 가주님도 관심 없는데.”

“맞아. 상단에서도 아무 일 안 맡기잖아.”

“그러니까 저렇게 지내는 거지.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정하은은 조용히 문을 바라보았다.

짧은 대화였지만 얻은 정보는 적지 않았다. 장녀. 가주의 무관심. 상단에서도 아무 역할이 없는 여자.

그 정도면 충분했다.

정하은은 침대 가장자리에 다시 앉았다. 지금 당장 문을 열고 나갈 생각은 없었다. 상황도 모르고 움직이는 건 정치 초년생이나 하는 짓이었다.

그녀는 다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모르는 얼굴이 그녀를 마주 보고 있었다. 아무 힘도 없는 여자. 누군가가 죽이려 했을지도 모르는 여자.

정하은은 낮게 중얼거렸다.

“재밌네.”

그때 문밖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복도 끝에서 걸음소리가 다가왔다. 무겁고 일정한 걸음.

정하은은 고개를 들었다.

누가 오는지는 몰라도, 문밖의 사람들을 입 다물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곧 걸음소리가 문 앞에서 멈췄다.

문손잡이가 천천히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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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정하은은 사람을 믿지 않았다.정확히는 사람의 말을 믿지 않았다.말은 얼마든지 꾸밀 수 있다. 진심도 연기할 수 있고, 충성도 흉내 낼 수 있다. 필요하면 사랑조차 만들어낼 수 있다.이건 정치판에서 십 년을 구르며 배운 교훈이었다.그래서 정하은은 늘 행동을 봤다. 말보다 중요한 건 선택이었다. 사람의 욕망은 결국 그 선택에서 드러났다.**국회의원회관의 밤은 조용했다.대부분의 사무실은 불이 꺼져 있었다. 복도에도 사람이 거의 없었다.정하은은 책상 위에 놓인 서류철을 손끝으로 두드렸다.사진. 계좌 내역. 녹취록. 문자 메시지. 호텔 출입 기록. 이름이 지워진 증언서 몇 장.이게 공개되면 정치 생명은 끝이었다.“실장님.”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낮게 불렀다.평소라면 큰소리부터 쳤을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얼굴은 창백했고, 손끝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정하은은 그의 얼굴을 잠시 보다가 물었다.“왜요.”“이번에는 진짜 위험합니다.”“그동안 위험하지 않은 일이 있었나요?”“농담이 아닙니다.”“제가 농담하는 걸로 보여요?”남자는 입술을 깨물었다.겁을 먹은 게 뻔히 보였다. 그래도 이 일에서 손을 뗄 생각은 없어 보였다.정치판에는 저런 인간들이 많았다.위험한 줄 알면서도 이익이 보이면 끼어든다. 그러면서 자기한테 피해가 오는 건 싫어한다.“의원님은 뭐라고 해요?”“가만히 있으랍니다.”“당대표는요?”“덮으라고 하죠.”“저쪽에서는 뭐라던가요?”남자는 눈을 피했다.“안 그래도 전화가 왔었습니다.”“봐달래요?”“아뇨. 실장님 선에서 멈추면 없던 일로 해주겠다고.”정하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남자는 그걸 보고 바로 입을 다물었다. 정하은이 저런 얼굴을 하면 보통 좋은 일이 생기지 않았다.“없던 일이라.”“실장님.”“네.”“이번에는 정말 물러나야 합니다.”“왜요?”“그 사람을 건드리면 우린 다 죽습니다.”정하은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그러다가 서류철을 닫았다.“그럼 덮죠.”남자가 멍한 얼굴로 그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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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문이 열렸다.가장 먼저 보인 것은 검은 구두였다. 광이 날 정도로 깨끗한 가죽 구두. 그 위로 곧게 뻗은 다리와 흐트러짐 없는 옷차림이 이어졌다.남자는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오십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눈길이 갔다.정하은은 그런 사람을 알고 있었다. 국회의원회관에도 있었다. 말 한마디 없이 회의실 분위기를 바꾸는 인간들.당대표. 장관. 기업 총수. 그리고 돈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자들.남자는 아무 말 없이 정하은을 바라보았다. 정하은도 말없이 그를 마주 보았다.먼저 입을 연 것은 남자였다.“일어났군.”담담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낯선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길게 늘어선 식탁.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어린 이벨리아. 그리고 식탁 맨 끝에 앉아 있는 남자.아버지였다.로세트 가문의 가주, 에드문드 로세트.기억 속에서도 두 사람은 거의 말을 나누지 않았다. 정하은은 눈앞의 남자를 다시 바라보았다.좋은 아버지는 아닌 모양이었다.에드문드는 천천히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뒤에는 중년 남자 둘과 의사로 보이는 노인이 따라 들어왔다.에드문드는 침대 맞은편에 멈춰 섰다.“어디 불편한 곳은…….”에드문드가 잠시 말을 멈췄다.“있나.”어색했다. 딸에게 하는 말 같지 않았다. 너무 사무적이었다.“없어요.”에드문드는 잠시 그녀를 보더니 의사에게 턱짓했다.“확인해.”“예, 가주님.”노인이 앞으로 나왔다. 손목을 잡고 맥박을 확인했다. 눈동자를 살피고, 빛을 비춰 보기도 했다.“어지럽지는 않으십니까?”“네.”“속은 메스껍지 않으십니까?”“괜찮아요.”“머리 통증은요?”“조금 있어요.”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계단에서 구르셨으니 당연합니다. 다행히 뼈에는 큰 이상이 없어 보입니다만, 머리를 부딪힌 흔적이 있습니다.”“기억은 어떠십니까?”“잘 모르겠어요.”의사의 손이 멈칫했다.“잘 모르시겠다니요?”“기억나는 것도 있고, 안 나는 것도 있어요.”“어느 정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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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정하은은 말없이 레온을 바라봤다.레온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문을 열었다. 그때 문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레온 도련님, 회의실에서 찾으십니다.”“알아.”“그리고 블랙우드 쪽에서 사람이 왔습니다.”레온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정하은은 그 이름을 놓치지 않았다.블랙우드.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 이름과 함께 불쾌한 감정이 떠올랐다. 두려움과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레온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벌써?”“예. 혼담 관련 서류를 가져왔다고 합니다.”혼담.정하은은 그 단어도 놓치지 않았다.레온이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를 보았다. 입가에는 여전히 웃음이 걸려 있었다.“아, 맞다.”그가 느긋하게 말했다.“네 남편 될 사람이지.”정하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레온은 그 침묵이 마음에 드는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기억 안 나는 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겠네.”“왜.”“알면 기분 나쁠 테니까.”“누군데.”레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문을 열고 나가며 말했다.“로세트의 그림자.”문이 닫혔다.정하은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계단. 상단 회의. 카이든. 블랙우드. 혼담. 로세트의 그림자.짧은 시간 동안 나온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차례로 정리됐다. 정하은은 침대 난간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폭발로 죽기 전까지 정치판에서 배운 게 하나 있었다.사람은 진실을 숨길 수 있다. 하지만 감정은 잘 숨기지 못한다.레온은 자신이 살아난 걸 반기지 않았다. 그리고 떠나기 직전, 굳이 계단 이야기를 꺼냈다.블랙우드라는 이름에는 이벨리아의 두려움과 체념이 남아 있었다. 혼담 이야기를 할 때 레온은 웃었다.적어도 축복받는 결혼은 아닌 모양이었다.정하은은 침대 난간을 두드리던 손을 멈췄다.이벨리아.너 도대체 뭘 하고 살았던 거냐. 그리고 이 집은 너를 어디로 보내려던 거지.그때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아가씨.”아까 들었던 하녀의 목소리였다.“들어와.”문이 열리며 젊은 하녀 두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정하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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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밤새 내리던 비는 그쳐 있었다. 유리창에는 아직 빗방울이 남아 있었고, 커튼 사이로 아침 햇빛이 들어왔다.정하은은 햇빛이 닿는 느낌에 천천히 눈을 떴다.여전히 달라진 건 없었다.낯선 몸. 낯선 방. 낯선 이름.그 모든 것이 아직도 현실감 없이 느껴졌지만, 멈춰 있을 순 없었다.당황은 짧게. 파악은 길게. 판단은 조용히.그게 지금까지 정치판에서 살아남은 방식이었다.정하은은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조금 걷었다.창밖으로 로세트 저택의 일부가 보였다. 넓은 정원. 길게 이어진 마차길. 그 너머로 줄지어 선 창고 건물. 그리고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저택이라기보다 상단 본부에 가까웠다.하녀와 시종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짐을 나르는 인부들, 장부를 든 남자들, 봉인된 상자를 확인하는 점원들, 마차에 물건을 싣는 이들까지 보였다.돈이 움직이고 있었다.정하은은 그 풍경을 조용히 바라보았다.돈이 움직이는 곳에는 반드시 규칙이 있다. 그리고 규칙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새는 구멍이 있다.그때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정하은은 커튼을 놓고 몸을 돌렸다. 곧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똑똑.“들어와.”문이 열리고 마리엔과 리사가 들어왔다. 두 사람은 식사 카트를 밀고 있었다.“아침 식사입니다, 아가씨.”마리엔이 말했다.어제보다 말투는 공손했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했다.정하은은 식탁 앞에 앉았다.빵은 어제보다 조금 더 부드러웠다. 과일도 상태가 나아졌다. 차향 역시 짙어졌다.웃기게도, 어제의 한마디가 효과를 낸 모양이었다.정하은은 차를 마시지 않고 물었다.“알아왔어?”마리엔의 손이 멈췄다. 리사는 눈을 내리깔았다.“무엇을 말씀하시는지…….”“내 방 식사와 차를 누가 정하는지.”마리엔이 고개를 숙였다.“주방에서 정합니다.”“주방 누구.”“그건…… 주방 전체에서 준비하는 일이라 특정해서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무난한 대답. 책임질 사람을 지우는 대답.정하은은 수프 그릇 옆에 놓인 숟가락을 손끝으로 살짝 밀었다.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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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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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젊은 여자의 웃음이 사라졌다.“뭐?”“누구냐고.”정하은은 담담하게 다시 물었다.여자의 얼굴이 붉어졌다.그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자신은 이 집에서 꽤 대접받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적어도 이벨리아 앞에서는 굳이 자신을 소개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그런 사람일수록 첫 질문이 중요하다.당신이 누구냐.그 말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다. 네가 내 앞에서 이름 없이 통할 만큼 중요한 사람이냐고 묻는 것이다.헬가가 급히 입을 열었다.“아가씨, 저분은 클라라 로세트 님입니다.”로세트.같은 가문.정하은은 클라라를 찬찬히 보았다. 화려한 드레스, 정성 들인 머리, 손에 쥔 부채, 목에 걸린 진주.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이벨리아를 조롱하는 데 조금도 망설임이 없는 태도.집안에서 제법 대접받는 위치인 모양이었다.하지만 가주도 아니고, 장남도 아니다.그 정도면 충분했다.“그래.”정하은이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알았어.”클라라의 표정이 조금 풀리려는 순간, 정하은이 덧붙였다.“그러니까 길 비켜.”클라라는 부채를 접었다.탁.짧은 소리가 울렸다.“정말 머리를 다쳤나 보네.”“그 말은 아까도 들었어.”“뭐?”“같은 말을 반복하는 걸 보니, 할 말이 많지는 않은 모양인데.”클라라의 목덜미까지 붉어졌다.정하은은 그녀를 더 상대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헬가.”“예, 아가씨.”“집사장에게 간다고 했지.”“……예.”“계속 가.”정하은은 다시 걸었다.클라라가 날카롭게 외쳤다.“이벨리아!”정하은은 멈추지 않았다.“야!”그제야 정하은의 걸음이 멈췄다.홀 전체가 완전히 얼어붙었다.정하은은 천천히 돌아섰다.클라라는 턱을 치켜든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화가 났다기보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벨리아가 자신을 무시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정하은은 조용히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지?”클라라가 이를 악물었다.“너 지금 감히 나를 무시해?”“아니.”정하은은 주변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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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정하은은 자신의 팔을 잡은 손을 내려다봤다.그리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모두가 보고 있었다. 하녀들. 시종들. 상단 직원들. 경비병들. 헬가. 마리엔과 리사. 그리고 클라라를 따르던 젊은 여자들까지.목격자는 충분했다.정하은은 낮게 말했다.“로세트 가문 장녀를 장남 이름으로 협박한 것도 모자라, 공개된 홀에서 손까지 댔네.”클라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그게 무슨…….”바로 그 순간, 안쪽 문이 열렸다.중년 남자 하나가 급히 나왔다.그의 시선은 빠르게 움직였다. 굳어 있는 헬가. 고개 숙인 하녀들. 얼굴이 하얗게 질린 클라라. 그리고 모두의 시선을 받고도 평온하게 서 있는 정하은.“이게 무슨 소란입니까.”헬가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집사장님.”정하은은 그를 바라봤다.집사장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아가씨, 몸이 아직 편치 않으신 것으로 압니다. 방으로 돌아가시는 편이 좋겠습니다.”정하은은 작게 웃었다.또 방.이 집 사람들은 이벨리아를 방에 넣어두는 데 익숙했다.“싫은데.”집사장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아가씨.”정하은은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집사장은 잠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무슨 일이 있었습니까?”“내가 로세트의 장녀인 건 맞아?”집사장이 멈칫했다.“그렇습니다.”정하은은 클라라를 바라봤다.“그런데 저 여자가 나한테 ‘야’라고 했어.”클라라의 얼굴이 굳었다.“상단 장부 한 장 제대로 넘겨본 적도 없는 애가 주인 행세를 한다고 했고.”정하은은 다시 집사장을 바라봤다.“내가 따지니까 이번에는 장남 이름을 들먹이면서 날 협박했어.”정하은이 담담하게 물었다.“클라라는 나를 그렇게 대해도 되는 위치야?”집사장은 대답하지 않았다.정하은은 잠시 기다렸다.“대답하기 곤란한가 보네.”집사장의 표정이 굳었다.“그럼 가주님께 직접 물어보지.”정하은은 회의실 쪽을 바라봤다.“로세트의 장녀가 이 집에서 어느 정도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그녀는 다시 집사장을 바라봤다.“어떻게 할래?”집사장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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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집사장의 집무실은 홀 안쪽 복도 끝에 있었다.그는 앞서 걸으며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어깨가 미세하게 굳어 있었고, 걸음도 아주 조금 빨랐다.지금까지 이벨리아 로세트라는 이름은 관리하기 쉬운 이름이었을 것이다.방에 넣어두면 조용했고, 주어진 것을 먹었고, 시키는 대로 입었으며, 불편해도 참았다.그런데 오늘 갑자기 그 이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관리하기 쉬운 이름이, 관리해야 할 문제로 변한 것이다.집사장은 그것을 불쾌해하고 있었다.좋다.불쾌함은 감정이다.감정이 생기면 실수를 한다.“여기입니다.”집사장이 문 앞에서 멈춰 섰다.두꺼운 나무문에는 작은 금속 명패가 붙어 있었다.집사장실.집사장은 문을 열었다.정하은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헬가와 마리엔, 리사도 뒤따라 들어와 문가에 섰다.방 안은 깔끔했다.책상 위에는 서류 몇 묶음이 흐트러짐 없이 정리되어 있었다. 한쪽에는 잠금장치가 달린 서랍장이 있었고, 창가에는 작은 응접용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집사장이 정중하게 말했다.“아가씨, 앉으시지요.”정하은은 의자에 앉았다. 집사장은 맞은편에 서 있었다.정하은은 그를 바라보았다.“이름.”집사장이 아주 잠깐 멈칫했다.“예?”“네 이름.”집사장은 고개를 숙였다.“오르테스입니다. 아가씨.”“오르테스.”정하은은 그의 이름을 낮게 불렀다.“내가 요구한 장부 보여줘.”오르테스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준비하겠습니다.”“지금 당장.”“아가씨, 장부는 열람 절차가 있습니다. 특히 지출 장부는 담당자의 확인과 열람 사유가 필요합니다.”정하은은 작게 웃었다.또 절차.정치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불리한 사람들은 늘 절차 뒤에 숨었다.절차상 어렵습니다. 검토가 필요합니다. 관련 부서와 협의하겠습니다. 확인 후 답변드리겠습니다.말은 달라도 뜻은 같았다.시간을 벌겠다.정하은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내 걸 내가 보겠다는 게 열람 사유야.”오르테스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리고 담당자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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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정하은은 창가에서 시선을 거두고 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이 열렸다.검은 마차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젊었다. 스물 후반쯤 되었을까. 검은 머리는 단정하게 넘겨져 있었고, 눈매는 길었다. 잘생겼다. 그것도 사람의 시선을 끄는 방식으로 잘생겼다.하지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역시 웃음이었다.남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하인들의 시선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집에 가벼운 방문이라도 온 사람처럼 여유로웠다.정하은은 그 웃음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정치판에서 가장 위험한 인간들은 대개 잘 웃었다. 웃음은 방패가 된다. 상대를 방심하게 만들고, 속내를 가리고, 때로는 칼끝을 숨긴다.남자가 정하은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아까 창밖에서 마주쳤던 것과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이제 제대로 인사드릴 수 있겠군요.”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처음 뵙겠습니다, 아가씨.”정하은은 그를 바라봤다.“처음?”남자의 눈썹이 아주 살짝 올라갔다.“아닙니까?”“나는 기억이 온전하지 않아서.”정하은은 담담하게 말했다.“처음인지 아닌지 모르겠는데.”남자는 잠시 그녀를 보더니 곧 웃었다.“저는 처음입니다.”“그래?”“소문은 들었습니다. 계단에서 크게 다치셨다고.”“소문이 빠르네.”“제가 하는 일이 원래 그렇습니다.”“무슨 일을 하는데?”“듣고, 옮기고, 가끔은 묻는 일도 합니다.”정하은은 남자의 얼굴을 바라봤다.웃고 있었다.눈까지 웃고 있었다.그런데도 그게 진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정하은은 그런 눈을 많이 봤다.협상 테이블에서. 비밀 녹취가 오가는 자리에서. 누군가의 약점을 손에 쥔 사람들이 짓던 눈.“이름은?”남자의 미소가 조금 짙어졌다.“제 소개가 늦었습니다.”그는 한 손을 가슴에 얹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카시안 블랙우드입니다.”카시안 블랙우드.정하은은 그 이름을 기억했다.남자가 고개를 들며 덧붙였다.“아가씨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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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정하은은 책상 위에 놓인 사본을 다시 내려다봤다.교육비. 지급 완료. 딜런 마크. 확인 인장. 그리고 비비안 로세트.이 가문의 안주인.정하은은 리사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의 어머니였다면 굳이 그렇게 설명하지 않았을 것이다.흥미로웠다.만약 누군가 이벨리아의 교육비를 빼돌렸다 해도, 왜 안주인의 인장이 찍혀 있을까.비비안이 직접 관여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면 누군가 그녀의 인장을 이용했을 수도 있다. 혹은 이 집에서는 이벨리아와 관련된 모든 지출이 안주인의 손을 거쳐야 했을 수도 있다.어느 쪽이든 의미는 있었다.이벨리아가 상단 장부 한 장 넘겨본 적 없는 무능한 딸이 된 이유.그것은 정말 이벨리아가 무능해서였을까.배울 기회조차 빼앗겼다면?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수업에 교육비가 계속 지급됐다면?정하은은 낮게 웃었다.“친절하네.”장부는 언제나 친절했다.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 노크 소리가 났다.똑똑.“들어와.”문이 열렸다. 리사가 먼저 들어왔고, 그 뒤로 마리엔이 모습을 드러냈다.정하은은 의자에 앉은 채 두 사람을 바라봤다.“문 닫아.”리사가 급히 문을 닫았다.“마리엔.”“예, 아가씨.”“이리 와서 앉아.”“제가 어찌…….”“앉으라고 했어.”마리엔은 잠시 망설이다가 의자 끝에 조심스럽게 앉았다.하녀가 주인 앞에 앉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정하은이 원한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사람은 서 있으면 도망칠 생각을 한다. 그러니 앉혀서 말을 시켜야 한다.정하은은 리사를 보았다.“너는 거기 서 있어.”“예.”리사는 문 옆에 선 채 손을 모았다. 정하은은 마리엔에게 시선을 돌렸다.“계단 사고 말이야.”마리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예?”“그날 일을 말해봐.”마리엔은 입술을 깨물었다.“아가씨께서 서쪽 계단 아래에 쓰러져 계셨고, 제가 발견해서 사람을 불렀습니다.”“왜 거기에 갔지?”“아가씨를 찾으러 갔습니다.”“왜 나를 찾으러 갔는데?”“방을 나가신 뒤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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