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무능한 장녀라더니 상단을 먹어버렸다: Chapter 41 - Chapter 50

96 Chapters

41화

사람들이 하나둘 소리 난 쪽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정하은은 걸음을 멈췄다. 폭발음은 아니었다. 뭔가 깨지고, 물이 쏟아지고, 쇠붙이가 바닥을 긁는 소리였다.“공방거리답네요.”카시안이 담담하게 말했다.“자주 있는 일인가 봐요?”“예. 대개는 남의 벽을 부수거나, 자기 손을 태우거나, 돈을 못 갚거나 셋 중 하나입니다.”“오늘은요?”카시안은 잠시 소리 난 쪽을 보았다.“셋 다일 수도 있겠군요.”정하은은 그제야 웃었다.사람들이 몰린 곳은 좁은 골목 끝의 낡은 공방 앞이었다. 문짝 하나가 반쯤 떨어져 있었고, 바닥에는 물이 흘렀다. 얼음 조각 몇 개가 진흙과 섞여 굴러다녔다.그 한가운데에 작은 나무상자가 엎어져 있었다. 주변에는 금속판과 구리관, 숯가루가 뒤엉켜 있었다. 물은 그 틈에서 계속 새어 나왔다.그 앞에 선 여자는 젖은 앞치마 차림이었다. 머리카락 끝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고, 손등에는 숯가루가 묻어 있었다. 스물 중반쯤 되어 보였다.공방 안쪽에서 중년 남자가 뛰쳐나왔다.“내 문!”그는 반쯤 떨어진 문짝을 보더니, 곧장 여자에게 달려들었다.“엘린! 이번엔 내 문까지 뜯어먹었구나!”여자가 쳐다도 보지 않고 대꾸했다.“문은 원래 삐걱거렸어.”“삐걱거리던 문을 네가 부쉈잖아!”“그러니까 고쳐야겠네.”“내 돈으로?”“네가 공방 주인이잖아?”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말장난하지 마!”중년 남자가 이를 갈았다.“이달치 방세도 밀렸어. 지난번엔 유리관도 깨먹고, 그전엔 도르래를 태워 먹고, 오늘은 문까지 날려먹었다. 이제 정말 끝이야. 빨리 짐 싸.”여자의 손이 멈췄다. 이번에는 진심이 느껴졌다.“오늘 안으로 나가.”중년 남자가 말했다.“상자고 쇳조각이고 다 치워. 아니면 내가 고물상에 넘길 거다.”여자는 젖은 구리관을 쥔 채 천천히 일어섰다.“하루만 줘.”“안 돼.”“이것만 고치면 돼. 하루면 충분해.”“네 하루는 사흘이고, 네 사흘은 한 달이야.”“이번엔 진짜야.”“항상 진짜였지.”사람들 사이에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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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검은 창고 앞에는 오늘도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사고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물건을 맡기는 사람들이 훨씬 조심스러워졌다는 것이었다.차례가 와도 바로 물건을 내려놓지 않았다. 끈이 제대로 묶였는지 다시 확인하고, 상자 모서리가 눌린 곳은 없는지 살폈다. 접수원이 손을 내밀면 잠깐 망설이는 사람도 있었다.그래도 줄은 줄지 않았다.그거면 됐다.정하은은 장부를 넘겼다.“다음.”작은 상자를 품에 안은 여자가 앞으로 나왔다. “열어봐도 됩니까?”접수원이 묻자 앞에 서 있던 여자가 품에 안은 상자를 더 끌어안았다.“꼭 열어봐야 해요?”“내용물을 확인하지 않으면 접수할 수 없습니다.”여자는 잠시 망설이다 상자를 내밀었다.“대신 조심해서 열어요.”접수원이 뚜껑을 열었다.안에는 붉은빛과 갈색빛이 섞인 얇은 조각들이 들어 있었다. 말린 꽃잎처럼 보였지만 냄새는 달랐다. 달면서도 쌉쌀한 향이 났다.“이게 뭡니까?”“그것까지 알아야 해요?”정하은이 장부에서 고개를 들었다. 열린 상자에서 은은한 향이 퍼지고 있었다.“꼭 그럴 필요는 없어요. 향이 나는 건 확인했으니까요.”여자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저희가 주의해야 할 게 있나요?”“없어요. 그냥 망가지지 않게만 보내주세요.”“알겠습니다.”정하은은 상자를 한번 보고 말했다.“다만 향이 다른 물건에 밸 수 있어서 따로 포장해야 해요. 그만큼 포장비가 추가됩니다.”여자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 그렇게 해주세요.”정하은은 장부 한쪽에 적었다.말린 잎. 냄새 강함. 별도 포장.접수원이 번호표를 건넸다.정하은은 다음 장부를 펼쳤다.“다음.”이번에는 빈손으로 서 있던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그는 접수대 위에 접힌 쪽지 하나를 올렸다.“물건은 오후에 옵니다. 먼저 자리 잡아달래요.”접수원이 쪽지를 펴기도 전에 정하은이 말했다.“안 돼요.”남자가 정하은을 돌아봤다.“뭐가 안 된다는 겁니까?”“물건이 없잖아요. 가져오시면 그때 접수할게요.”“주인님 물건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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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예복점은 항구 거리의 소란과 귀족가의 체면이 딱 중간쯤에서 만나는 곳에 있었다.예복점 안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천이 벽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낮은 탁자 위에는 단추와 자수실, 은색 가위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점주는 두 사람을 보자마자 허리를 숙였다.“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카시안 님. 로세트 아가씨.”정하은은 대답 대신 안쪽에 걸린 남자 예복을 보았다. 검은 천, 은색 단추, 목을 반쯤 감싸는 높은 깃. 그녀의 시선이 잠깐 그 깃에 머물렀다.“신랑 목둘레는 재셨어요?”점주가 당황했다.“아직은…….”“조금 답답하게 재주세요.”카시안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벌써 해치우실 생각입니까?”“아까 간판은 말이 없어야 한다고 했잖아요.”“아가씨가 원하시면 묵언 수행도 해보겠습니다.”“하지 마요.”“왜요?”정하은은 천을 하나 집어 들었다. 은빛이 희미하게 감도는 짙은 회청색이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천결을 쓸며 무심하게 말했다.“조용하면 무슨 생각 하는지 봐야 하잖아요. 그게 더 귀찮아요.”“아가씨는 제가 조용하면 불편하십니까?”정하은은 그를 보았다.“당신은 조용하면 위험해 보여요.”“말하면요?”“귀찮죠.”“둘 중에 고르셔야 한다면?”정하은은 잠시 생각하는 척했다.“귀찮은 쪽.”“저는 기분이 좋습니다.”“취향이 이상하네요.”“뭐든 아가씨가 저를 고르셨으니까요.”정하은은 천을 점주에게 넘겼다.“이걸로 볼게요.”점주가 재빨리 다가왔다.“신부 예복으로 쓰시기에는 색이 차분합니다. 조금 더 밝은 색도 준비되어 있습니다.”정하은은 벽에 걸린 밝은 천들을 훑었다. 흰색, 연분홍, 금빛, 옅은 연두. 예쁘긴 했다. 하지만 그 색들 안에 서 있는 자신은 떠오르지 않았다.이벨리아라면 입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입혔을 것이다. 조용하고 얌전하고, 누구의 딸인지 한눈에 보이게.정하은은 다시 회청색 천을 봤다.카시안이 물었다.“마음에 듭니까?”“네.”카시안은 점주를 보며 말했다.“그럼 이 색으로.”점주는 고개를 숙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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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말린 약재 냄새가 창고 입구까지 번졌다.상인은 상자 뚜껑을 반쯤 열어놓고 마일로의 눈치를 봤다.“이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마일로가 상자 안쪽의 약재를 손끝으로 헤집었다.“덜 말랐습니다.”상인이 상자 안을 내려다봤다.“그냥 보내면 안 될까요?”“이건 분리하셔야 합니다.”“전부요?”“네. 더 말려서 가져오시거나, 전부 분리하셔야 합니다.”정하은이 펜 끝으로 접수증을 톡 쳤다.상인은 입을 다물었다. 뒤에 선 남자가 코를 막고 말했다.“빨리 좀 합시다. 냄새 때문에 머리 아파 죽겠네.”정하은이 상인을 보았다.“분리 비용까지 내시면 여기서 처리해드릴게요.”상인은 잠시 망설이다 동전을 더 꺼냈다.“그렇게 하겠습니다.”마일로가 접수증을 적었다.“브란트행. 별도 보관. 습기 재확인.”그가 접수증을 찢어 건네려던 순간, 길 쪽에서 낮은 욕설이 들렸다.줄 끝이 먼저 움직였다.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짐을 안은 사람들이 뒤를 돌아봤고, 돌아본 사람부터 한 걸음씩 물러났다.정하은은 고개를 들었다.짙은 녹색 마차가 검은 창고 정문 앞에 멈춰 섰다. 흰 말 네 필. 은색 가시나무 문장.곧 마차 문이 열렸다. 먼저 보인 것은 장갑 낀 손이었다.남자가 마차에서 내렸다.창백한 얼굴에 광대가 도드라졌고, 코끝은 날카로웠다. 뒤로 넘긴 밝은 갈색 머리 아래, 얇은 입술만 웃고 있었다.그는 창고를 보며 말했다.“작군.”마차 뒤로 따라오던 사내들이 차례로 말에서 내렸다. 몇은 줄 서 있던 사람들을 양옆으로 밀어냈고, 몇은 창고 입구 앞에 자리를 잡았다.사람들이 눈치를 보며 뒤로 물러났다.남자가 장갑 낀 손으로 창고를 가리켰다.“들어가.”사내들이 그대로 창고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줄 선 사람 하나가 물러나다 뒤 사람의 상자에 부딪혔다.“조심…….”말은 끝까지 나오지 못했다.마일로가 상인에게 접수증을 내밀었다.“받으십시오.”상인은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정하은이 말했다.“들어가요.”“예?”“안쪽으로, 얼른.”상인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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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검은 외투를 입은 남자가 골목 입구에서 아이의 말을 듣고 있었다. 아이는 창고 쪽을 가리키며 숨을 몰아쉬었다.“검은 창고요. 안이 난리 났어요.”남자의 얼굴이 굳었다.“다시 말해.”“사람들이 칼 들고 들어갔어요.”남자는 바로 아이의 팔을 잡았다.“너, 붉은 닻 술집 알지.”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거기로 가. 뒷문으로 들어가서 베라를 찾아.”“뭐라고 해요?”“방금 나한테 한 말 그대로.”아이는 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남자가 손을 놓았다.“뛰어.”아이는 곧장 반대편 골목으로 뛰었다.남자는 아이가 뛰는 걸 더 보지 않았다. 창고를 향해 달렸다.**술집 뒤편 좁은 문이 벌컥 열렸다.베라는 손에 잔을 들고 있었다.“뭐야.”아이가 숨도 못 쉬고 말했다.“검은 창고. 사람들이 칼 들고 들어갔어요.”베라의 얼굴에서 술기운이 사라졌다.“누가.”아이는 고개를 저었다.“몰라요. 안에서 난리 났어요.”잔이 바닥에 떨어졌다.쨍그랑.“실렌!”안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났다.“들었다.”실렌이 벽에 기대 세워둔 얇은 장검을 집었다. 검은 가죽 칼집 끝에 은색 장식이 낮게 흔들렸다.베라는 탁자 밑에서 짧은 낫칼을 꺼냈다. 손잡이 끝에 감긴 붉은 끈을 손목에 묶었다.베라가 문가의 남자를 돌아봤다. “카시안 님께 전해. 검은 창고에 칼 든 놈들이 들이닥쳤다고. 우리는 바로 간다.”그가 곧장 반대편 골목으로 사라졌다.**그 순간 밖에서 누군가 거칠게 숨을 삼켰다.정문 쪽에 서 있던 호위가 돌아섰다. 그의 칼이 반쯤 뽑히기도 전에, 몸이 문기둥에 박혔다.쾅.호위가 숨을 토하며 무릎을 꺾었다.검은 외투를 입은 남자가 정문 안으로 들어왔다.크지 않은 몸이었다. 대신 목과 어깨가 짧고 단단했다. 젖은 검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고, 손등에는 오래된 상처가 몇 줄 남아 있었다.오른손에는 짧은 쇠갈고리가 들려 있었다. 배에서 밧줄을 끌 때나 쓸 법한 물건이었다.정문에 남아 있던 다른 호위가 칼을 뽑았다.남자는 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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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정하은은 이틀 동안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첫날은 눈을 뜨는 것도 힘들었다. 손바닥은 붕대 속에서 뜨겁게 욱신거렸고, 목은 물을 삼킬 때마다 따끔거렸다. 머리채를 잡혔던 쪽은 베개에 닿기만 해도 아팠다.도라는 젖은 수건을 갈아주고, 약을 먹이고, 의사를 불렀다.진찰을 마친 의사는 당분간 푹 쉬라고 했다.국회에서 사흘 밤을 샌 적도 있었다. 선거 막판에는 차 안에서 쪽잠을 자고, 아침에는 후보 뒤에 서서 웃었다. 그때도 힘들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몸이 말을 안 듣진 않았다.이벨리아의 몸은 약했다.아니, 약한 몸으로 너무 세게 맞았다.둘째 날 오후, 문밖이 조용해졌다.도라가 물잔을 내려놓고 문 쪽을 봤다.“또 오셨습니다.”정하은은 눈을 감은 채 물었다.“누가.”묻고 나서 바로 알았다.카시안이었다.어제도 왔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도 문 앞에 서 있었다.똑똑.도라가 정하은을 한 번 돌아본 뒤 문을 열었다.카시안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걸음을 늦췄다. 그는 도라에게 먼저 물었다.“열은.”“아직 있습니다.”“먹은 건.”“죽을 조금 드셨습니다.”“약은.”“조금 전에 드셨습니다.”정하은이 눈을 떴다.“둘이 합이 아주 잘 맞네요.”카시안이 그녀를 내려다봤다.“일어나셨습니까?”그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말없이 붕대 감긴 손과 목에 감긴 얇은 천을 차례로 봤다.정하은이 물었다.“일 없어요?”“있습니다.”“그럼 가요.”“지금 하고 있습니다.”“무슨 일인데요.”“앉아 있는 일.”정하은은 그를 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한마디 하려 했다.하지만 몇 마디 말도 하지 않았는데 금세 목이 말랐다.“도라, 물 좀 줘.”목소리가 갈라졌다.도라가 물잔을 들려 하자 카시안이 먼저 손을 뻗었다. 도라는 잠깐 멈췄다가 잔을 넘겼다.카시안은 잔을 들고 기다렸다.정하은이 눈썹을 찌푸렸다.“설마 먹여주겠다는 건 아니죠.”“그럴 생각이었습니다.”정하은은 잠깐 그를 보다가 손을 내밀었다.“그냥 주세요.”카시안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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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식탁 위에는 빈 그릇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그 가운데에서 카시안은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엘린은 마지막 고기 조각을 씹어 삼키고 포크를 내려놓았다.“이제 말해.”정하은이 엘린을 봤다.“뭘?”“아까 왜 그랬어?”엘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상자는 열어보지도 않고, 사람들 다 돌려보내고, 갑자기 고기 먹으러 가자고 하고.”“배고파 보였으니까.”“그거 말고.”정하은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이미 결과는 네가 알고 있잖아.”엘린의 표정이 굳었다.“……뭐?”“나는 네가 충분히 노력했다는 걸 알아.”“뭘 보고.”“네 얼굴.”엘린은 입을 다물었다.정하은은 빈 그릇 너머로 엘린을 보았다.“그거면 충분했어.”“상자를 봐야 알지.”“상자는 안 봐도 돼.”정하은은 담담하게 말했다.“내가 알고 싶은 건 결과가 아니야.”“그럼 뭔데.”정하은은 테이블 위에 놓인 상자를 떠올렸다.“그 상자로 뭘 하려고 했어?”엘린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생선을 오래 보관하려고.”정하은이 그녀를 봤다.“생선?”“잡은 지 이틀이 지나도, 사흘이 지나도 상하지 않게.”“왜 하필 생선인데?”엘린의 손가락이 물컵을 톡 건드렸다.잠깐 침묵이 흘렀다.“우리 아버진 어부였어. 배 한 척으로 먹고사는 사람이었지. 문제는 바다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시간이 너무 길다는 거였어.”엘린의 입술이 비틀렸다.“게다가 항구에 도착했다고 끝이 아니야. 바로 다 팔리면 좋지. 근데 그런 날이 얼마나 되겠어. 자리 잡고, 흥정하고, 사람 기다리고. 그러다 하루 이틀은 그냥 가.”“…….”“그동안 값은 계속 떨어져.”엘린은 컵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문질렀다.“상인들은 알아. 어부들이 오래 못 버틴다는 거. 오늘 못 팔면 내일은 더 싸진다는 거.”정하은이 물었다.“그래서 값을 깎아?”“응.”엘린은 짧게 대답했다.“안 팔리면 버려야 하니까.”엘린은 물컵을 내려놓았다.“그게 싫었어.”“뭐가.”“많이 잡아 와도 늦으면 손해였고, 적게 잡아 와도 오래 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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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결혼식 당일 아침, 정하은은 생각보다 멀쩡했다.전날 밤까지도 조금은 긴장할 줄 알았다. 남의 몸으로, 남의 이름으로, 남의 가문이 정한 날짜에 결혼을 하는 일이다.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했다. 그런데 막상 아침이 되자, 마음은 의외로 차분했다.어차피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해야 한다면, 카시안과 하는 편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카시안은 잘생겼다. 그건 부정할 수 없었다. 웃을 때는 수상하고, 웃지 않을 때는 더 위험하지만, 어쨌든 잘생겼다.그 얼굴을 매일 본다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다.정하은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매일. 아침에? 잠들기 전에? 식탁에서? 복도에서? 같은 방에서?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정치판에서도 후보자 가족의 동선부터 선거 캠프 숙소 배정까지 짜봤지만, 남편과 같은 침대를 써야 하는지까지 정리해본 적은 없었다.정하은은 낮게 중얼거렸다.“호칭부터 문제네.”도라가 머리를 빗기다 말고 멈췄다.“예?”“아무것도 아니야.”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카시안. 그건 익숙하다. 제일 낫다. 부르기도 쉽고, 입에도 붙는다.여보. 정하은은 속으로 한 번 불러봤다가 바로 지웠다. 안 된다. 너무 낯간지럽다. 저 말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카시안이 웃을 것이다. 분명히 웃을 것이다. 그리고 그 웃음은 한동안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자기. 너무 가까웠다. 아직 그 정도로 아무렇지 않은 척할 자신은 없었다.그이. 아니다. 너무 멀쩡한 부인 흉내 같았다.남편. 딱딱하고, 남의 일 같다. 하지만 공식 자리에서는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정하은은 거울 속 자신의 눈을 보았다. 결혼식 당일 아침에 이런 걸 고민하고 있다니.도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불편하십니까?”“아니.”“머리 장식이 무거우신가요?”“그것도 아니야.”“그럼…….”정하은은 잠깐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라.”“예, 아가씨.”“결혼하면 남편을 뭐라고 부르지?”도라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거울 속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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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정하은은 걸음을 옮겼다. 홀은 조용했다. 사람 수가 적어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이 들렸다. 치맛자락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 누군가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 창밖에서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카시안 앞에 도착하자 그가 낮게 말했다.“걸음은 괜찮습니까.”“괜찮아요.”옆에서 대신관이 헛기침을 했다. 작은 혼례라 그런지 대신관도 거창한 예식복 대신 단정한 흰 예복을 입고 있었다.“시작해도 되겠습니까?”정하은이 말했다.“네.”카시안도 고개를 끄덕였다.식은 짧았다. 정말로 짧았다.가문과 가문의 결합을 알리는 문장. 두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는 절차. 로세트와 블랙우드 양측의 증인 확인. 신 앞에서 서로의 손을 맞잡는 의식.정하은은 카시안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정하은의 손바닥에는 붕대가 감겨 있어 제대로 맞닿지는 않았다. 그래도 손가락 끝이 살짝 닿았다. 카시안은 힘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다친 손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러웠다.정하은은 그 손을 보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을 했다. 이 손이랑 앞으로 같이 밥 먹고, 같이 마차 타고, 같이 집에 들어가고, 같이…….잠은 따로 자나?생각이 거기서 튀었다. 정하은은 의식 중이라는 사실을 가까스로 기억했다.잠자리. 그것도 정해야 한다. 부부가 됐다고 해서 무조건 같은 침대인가? 블랙우드 저택에는 방이 많다고 했으니 따로 자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따로 자면 소문이 나나? 신혼부부가 바로 각방을 쓰면 이상한가? 그럼 처음 며칠만 같이 자나? 며칠? 얼마나?정하은은 아주 미세하게 눈을 찡그렸다.카시안이 낮게 속삭였다.“아픕니까?”“아니요.”“표정이 심각합니다.”“잠깐 중요한 생각을 했어요.”“예식 중에요?”“생각이 멋대로 와서요.”대신관이 두 사람을 보았다.“서약문을 따라 해주십시오.”정하은은 정신을 붙잡았다.서약문은 짧았다. 서로의 이름을 인정하고, 위급할 때 버리지 않으며, 가문의 이익을 함께 책임진다는 내용이었다. 사랑이란 단어는 없었다. 좋다. 괜히 사랑을 넣었으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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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마차가 멈췄다.문이 열리고, 카시안이 먼저 내렸다. 정하은은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천천히 내려섰다.“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정하은은 그 말에 걸음을 멈췄다.“벌써요?”“갈 곳이 방 말고 더 있습니까?”“말을 그렇게 하면 이상하잖아요.”카시안은 잠깐 생각하더니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부인께서 쉬실 방으로 모시겠습니다.”정하은은 그를 보았다.“더 이상해졌어요.”“어렵군요.”“어려운 건 이제부터예요.”“어떤 점이요?”정하은은 말했다.“그 방을 같이 쓸건지 정해야 하니까요.”카시안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중요한 문제군요.”“웃지 마요.”“참고 있습니다.”“참으면 입꼬리가 내려가야죠.”“제 입꼬리는 독립적인 성향이 강합니다.”두 사람이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른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그렌 모트입니다. 저택의 관리와 손님 응대를 맡고 있습니다.”그렌은 눈썹이 거의 없었다. 창백한 얼굴에 표정이 거의 없어, 멀리서 보면 마른 인형처럼 보였다. 손에는 검은 지팡이를 들고 있었는데, 손잡이 끝이 묘하게 무거워 보였다.정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잘 부탁해요.”“불편함 없도록 모시겠습니다.”그렌 옆에는 왼쪽 눈 밑에 작은 점이 있는 여자가 서 있었다. 허리에는 가위 두 개가 걸려 있었는데, 재단가위처럼 보였지만 날이 짧고 두꺼웠다.“미라 덴입니다. 저택 안 살림은 제가 맡고 있습니다.”정하은은 미라의 허리춤에 걸린 가위를 보았다.“가위를 두 개나 가지고 다녀요?”미라가 아래를 한번 내려다봤다.“하나는 옷감용이고, 하나는 잡다한 일에 씁니다.”“잡다한 일이 많나 봐요.”미라는 얌전히 웃었다.“이 집에서는 꽤 많습니다.”그렌이 길을 열었다.“방이 준비되어 있습니다.”정하은은 카시안을 보았다.“방은 하나예요?”“예.”“대답이 빠르네요.”“늦게 대답한다고 두 개가 되지는 않습니다.”정하은은 카시안을 흘겨보았다.잠시 후, 정하은은 문 앞에 선 채 침대를 바라보았다.“침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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