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망나니가 플래그를 세운다: Chapter 11 - Chapter 20

66 Chapters

가면 (2)

"도시락 싸 와도 되나?""싸 오면 나눠 먹어야지, 혼자 먹으면 그게 사람이냐.""그럼 넌 안 싸 오고 뺏어 먹겠다는 소리네.""나눔의 정신이라고 해 줄래?""나눔은 가진 놈이 하는 거야."교실은 들떠 있었다. 입학하고 처음으로 강의실 밖에서 하는 훈련이니 그럴 만도 했고, 도시락 반찬까지 화제에 오르는 걸 보면 소풍 기분이 팔 할이었다. 나한테는 사흘짜리 초읽기였지만.원작에서 읽었다. 신입생 합동 야외 실습, 동부 구릉지. 거기서 첫 장례식이 시작된다. 완전히 치웠다고 적혀 있는 균열의 찌꺼기가 지하에 살아남아 있다가 실습 당일에 열리고, 3년째 교체가 밀린 낡은 감지기는 그 낌새를 못 잡아서 아무도 대비를 못 한다.강현우는 이 사고를 안다. 회귀 전에 겪었으니까. 그날 누구보다 빨리 움직인다.문제는 땅이 열리는 자리가 두 곳인데 저놈 몸은 하나라서, 한쪽을 구하는 동안 다른 쪽에서 신입생 둘이 죽는다는 거다. 회귀 전이랑 똑같이. 그리고 그 자리에서 저놈은 두 번째로 무너진다.내 계획은 심플했다. 사고 자체를 지운다. 감지기를 갈고, 지하에 남은 걸 열리기 전에 파낸다. 장비도 사람도 준비는 이미 끝나 있었다. 다음 주말에 넣는 걸로.그런데 실습이 금요일로 당겨지면서 주말이 통째로 사라졌다. 남은 시간, 사흘.원작엔 없던 변경이었다. 그동안 내가 굴린 돈이 어디선가 일정 하나를 툭 건드렸는지도 모르지. 세계선은 이미 삐끗대기 시작했고, 그 진원지는 대체로 나였다. 뭐, 원인은 나중에 따지고.지금 남은 건 하나. 사흘 안에, 아무도 모르게, 지하를 비우고 감지기를 갈아 끼운다. 돈으로 될 일이었으면 진작 끝냈다. 돈만 갖고는 안 되고 사람이 붙어야 되는 일이라 여태 아껴 둔 거고.폰을 꺼내 비서실에 문자 하나를 보냈다.—오늘 밤 계속 전화합니다. 비워 두세요.종례가 끝난 복도에서 윤이서와 스쳤다. 낮의 소문은 그 애 귀에도 들어갔을 텐데,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고개를 돌려 버렸다. 경멸조차 아까워하는 각도로.저렇게 보이는 게 정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Read more

두 시 십칠 분 (1)

얼마나 큰지는 열어 봐야 안다. 비서실장의 그 말이 밤새 머리에 걸려서 안 떨어졌고, 그걸 확인하는 건 다음 날 밤이었다.* * *수요일 밤 열한 시, 기숙사 책상 앞. 스탠드 하나만 켜 놓고 동부 구릉지 도면을 띄워 둔 채 앉아 있었다. 창은 닫아 뒀는데도 어디선가 밤벌레 소리가 새어 들어왔고, 주작 길드 정예들이 '합동 훈련' 간판을 걸고 구릉지에 들어간 지는 세 시간째였다."지점 A, 정리 끝났어요."홍세라 보고가 이어폰으로 들어왔다. 뒤로 장비 옮기는 소리, 누가 뭐라고 외치는 소리, 웃음소리 같은 게 뒤섞여 딸려 왔다."지점 B는.""그게 말이죠, 대표님."목소리에서 웃음기가 빠졌다."어제 실장님이 멀리서 뜬 수치보다 더 나빠요. 다 치웠다고 도장 찍은 것부터가 엉터리였고, 이거 몇 년을 이 밑에서 자라고 있었던 거예요."도면 위 붉은 점을 말없이 내려다봤다. 옆에 붙은 숫자가 실시간으로 갈아치워지면서 서류에 적힌 것의 세 배를 찍고 있었다. 어제 멀리서 뜬 수치가 낮게 잡힌 거였구나."세 배야.""세 배로 안 보이는데요. 여기 서 있으면 더 커요.""얼마나.""제 키만 한 게 아직 안 나왔어요. 지금 세 번째 층 파는 중이고."원작이 안 알려 준 부분이었다. 소설은 '찌꺼기가 열렸다'고만 썼지 얼마나 큰지는 안 썼다. 하긴 크기를 적을 이유가 없지. 그 자리엔 강현우가 있었으니까.원작에서 둘만 죽었다길래 딱 그 정도 크기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강현우가 나머지를 혼자 다 막고 있었던 거다. 저게 강현우 없이 열렸으면 훈련이고 뭐고 그냥 학살이었을 테고."밤새 파낼 수 있겠어?""밤새면 되죠. 대신 대표님."목소리가 한 단 낮아졌다."이거 열렸으면 우리 애들 전원 투입해도 아슬아슬했어요. 학생들은 세지도 않았고요."그러고는 이어폰 너머가 잠깐 조용해졌다. 홍세라는 원래 입이 쉬질 않는 여자다. 시체 더미 위에서도 농담을 던지고, 여태 봐 오면서 그 여자가 뭔가에 놀라는 건 못 봤다.근데 지금, 그 입이 멈췄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Read more

두 시 십칠 분 (2)

실습은 진짜로 소풍이었다.조는 학과 조랑 따로 짰다. 새 조로 구릉지를 돌면서 지형 판독이랑 흔적 식별 과제를 하는 반쯤 견학성 훈련이었고, 교관들이 곳곳에 깔린 가운데 학생들은 과제 반 수다 반으로 봄 언덕을 누볐다.밟을 때마다 풀 냄새가 진하게 올라왔고, 저 아래 어느 조는 벌써 도시락을 깠는지 참기름 냄새까지 바람에 실려 왔다."저기, 한도윤 씨. 이 지형 판독, 답 아세요?""세 번째 항목은 침식 흔적. 네 번째는 인공 절개면."안경을 밀어 올리며 지도랑 지면을 번갈아 보다가 입을 반쯤 벌렸다."어, 어떻게 바로.""지도랑 실물이 다르잖아. 다른 이유가 답이야.""아, 진짜네. 근데 여기 저쪽 사면만 풀 색이 달라요."그건 내가 안 본 거였다. 과제란 여섯 번째 칸에 옮겨 적었다."적어. 두 번은 안 불러 줘.""어, 어! 적어, 적어!""야, 그 손으로 적지 말고 종이에 적어.""손에도 적어 놓으려고 그랬지!""손 씻으면 어쩌려고.""안 씻을 건데.""그럼 그 손으로 김밥 먹지 마."뒤에서 여자애 하나가 참다가 웃음을 터뜨렸고, 안경은 귀 끝까지 빨개진 채로 종이에 뭔가를 열심히 적었다. 나중에 보니 지형 판독란에 '침식'이랑 '절개면'이 두 번씩 적혀 있었다.우리 7조 애들은 망나니랑 한 조라는 사실에 어색해하다가, 내가 과제를 반쯤 혼자 처리해 주자 어색함이랑 편리함 사이에서 아주 빠르게 타협했다."저기, 그럼 다섯 번째도…….""그건 너희가 해. 다섯 번째까지 내가 하면 조가 왜 있냐."소문 속 망나니랑 과제를 대신 풀어 주는 망나니 사이에서 갸웃거리는 표정들이 꽤 볼만했지만 굳이 정리해 주진 않았다. 헷갈리게 두는 편이 소문보다 나으니까.언덕 아래로 다른 조가 지나가면서 윤이서가 보였다. 조에서 제일 뒤였고, 강현우가 빠진 자리가 그 앞에 비어 있었다. 조원이 건넨 말에 옅게 웃었다. 원작에서 읽은 구도 그대로였다. 그 애가 안전하게 웃을 수 있는 자리.웃는 얼굴은 처음 봤다. 원작 삽화가 저 웃음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6
Read more

두 시 십칠 분 (3)

강현우가 갈 곳은 하나뿐이었다.과제 정리는 조원들한테 떠넘겼다. 어차피 답은 다 채워 줬으니 불만도 없었고, 북쪽 능선을 따라 움직였다. 배운 것 중에 검술보다 비싸게 주고 배운 게 기척 죽이는 법이다. 안 죽는 기술의 절반은 안 들키는 기술이니까.능선 아래, 지점 B.강현우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장갑도 안 낀 맨손으로 조급하게 흙을 파헤치면서 몇 번이고 같은 자리를 긁어 대던 그 손이 이윽고 멈췄다.그 아래 드러난 건 금속 표식이었다. 작업이 끝난 자리에 박는 길드 규격 표지판. 규정대로면 날짜랑 작업 주체가 같이 새겨진다. 이틀 전 날짜에, 주작 길드.강현우는 그 표식을 오래 내려다봤고, 등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웃는 건지 떠는 건지 거리 때문에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였을지도.바람이 실어 온 목소리는 낮고 갈라져 있었다."이 사고는. 이렇게, 끝나지 않았는데."수십 년의 전장이 전부 저 남자 것이다. 그런 남자가 남이 먼저 지워 놓은 사고 앞에 무릎을 꿇고 있고, 그 사고를 지운 놈은 기숙사 의자에 앉아 전화 몇 통을 돌렸을 뿐이다.그는 표식을 움켜쥐었다.회귀자한테 미래는 유일한 무기고 남들이 모르는 걸 혼자 아는 게 전부인데, 그 미래가 제 손이 닿기도 전에 누군가한테 이틀이나 먼저 지워져 있었다.우연은 표식에 날짜를 안 새긴다. 이건 대놓고 사람 손이었다.강현우가 일어서더니 천천히 주변을 훑기 시작했다. 능선을, 수풀을, 바람 방향을. 바위 그늘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데 그 시선이 이쪽에서 한 번 멈췄다가 지나갔다. 숨을 멈춘 채로 바위에 더 붙었다.저건 어제까지의 눈이 아니었다. 어제까진 아는 악당을 감시하는 눈이었고, 지금 저 눈은 정체 모를 뭔가를 사냥하기 시작했다.사고를 지웠다. 완벽하게 지웠다. 문제는, 회귀자한테 '완벽한 무사고'만큼 수상한 게 없다는 거다. 지운 흔적 자체가 서명이 됐다.'첫 플래그를 회수했더니.'소리 없이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제일 골치 아픈 놈 속에, 새 플래그가 서 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Read more

좋은 검 (1)

실습 끝나고 주말.아카데미는 평화로웠다. 가온다인 미담은 며칠 더 기사를 탔고, 어느 예능에선 '요즘 보기 드문 상생'이라며 굳이 언급까지 해 줬다.학생들은 벽에 새로 박힌 감지기가 뭘 막았는지도 모르고 그 아래서 웃고 떠들었는데, 그중 하나는 거기다 우산을 걸어 놨다가 교관한테 걸려서 운동장을 세 바퀴 돌았다."대표님, 재밌는 소식."홍세라 전화는 일요일 밤에 왔다. 뒤로 잔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어디 술자리에서 슬쩍 빠져나온 모양이었다."우리 길드에 기록 좀 보자는 신청이 들어왔어요. 수요일 동부 구릉지 합동 훈련 건.""학생이겠지.""맞히시네요. 아카데미 1학년, 강현우. 신입생 수석이 길드 작업 기록을 뒤져요. 대표님 이름 붙은 건은 열람 신청이 저한테 먼저 올라오게 해 뒀거든요. 3년째."폰을 귀에서 뗐다가 다시 붙였다.생각보다 빨랐다. 자료관까지 팔 건 예상했는데 벌써 길드에 서류를 넣었다니. 열아홉, 아니 속은 몇 살인지도 모를 놈이 밟는 순서까지 아주 정갈했다."어떻게 할까요? 규정 뒤져서 거절할 구실은 만들 수 있어요. 미성년은 못 본다든가.""공개해. 전부."수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했다가, 뭔가 재밌는 걸 주운 목소리가 돌아왔다."오.""단, 규정대로만. 신청서에 적힌 것만, 처리 기한 꽉 채워서.""기한 꽉 채우는 건 저희 특기예요."숨기면 벽이 생긴다. 뒤에 뭔가 있다고 광고하는 꼴이고. 반대로 활짝 열어 버리면 강현우가 받아 볼 서류엔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정기 합동 훈련, 규정대로 밟은 순서, 작업 완료 보고. 전부 진짜다.진짜 서류가 제일 좋은 위장이지."연결고리만 없으면 돼. 그 훈련 시킨 쪽에서 내 이름 나올 구멍, 있어?""대표님도 참. 3년 동안 그 값 받아 왔는데요."홍세라는 웃고, 잠깐 쉬고, 덧붙였다."근데 그 학생, 눈이 좋네요. 다들 미담이라고 박수 칠 때 혼자 서류를 뒤져. 대표님이 좋아할 타입인데.""내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타입이야."농담 아니었는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Read more

좋은 검 (2)

의심해도 좋고 조사해도 좋다. 가온다인이랑 그 대장간 사이엔 회사가 네 겹으로 겹쳐 있으니까. 아무리 파 봐야 그 검이 네 손까지 오는 데 3년 걸렸다는 것까진 못 판다.좋은 검은 검사를 빨리 키운다. 니가 빨리 커야 내가 오래 산다.* * *그날 오후 실전 검술 수업은 제1훈련장에서 열렸다. 진도상 '상위 호흡 검격' 시범이 있는 날이었고, 시범 상대는 늘 그렇듯 교관이 학생 중에 지명했다."강현우. 나와라."의외성 제로. 학생들이 자리 잡고 구경 모드로 들어갔다. 신입생 수석이랑 교관 시범 대련은 입학하고 몇 번짼지 모를 단골 구경거리였고, 오늘은 다른 게 하나 있었다.강현우 손에 새 검이 들려 있었다."야, 저거 이번에 받은 거지?""뽑는 것 좀 봐. 벌써 손에 붙었는데?""새 검 처음 쓰는 날엔 원래 좀 어색하지 않냐.""쟤가 어색한 거 본 적 있어?""밥 먹을 때. 젓가락질 이상해.""그건 좀 귀엽다."대련은 교과서적으로 시작됐다. 교관이 호흡을 보여 주고, 강현우가 받고, 응용 붙여서 돌려주고. 시범이라는 이름값 하는 절제된 합 교환이었다.근데 열 합쯤 지나니까 공기가 달라졌다.강현우 검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아니, 빨라진다는 말은 좀 부정확하다. 군더더기가 사라지는 거였다. 합이 거듭될수록 궤적이 단순해지면서 무거워졌고, 새 검이 그 손에 익어 가는 속도가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교관 표정에서 여유가 걷혔다.'원작보다 빠른데.'나는 관중석 끝에서 팔짱 끼고 그 광경을 봤다.원작 이 시기, 강현우는 정체기였다. 실습 사고에서 둘을 잃고 회귀 전이랑 똑같은 실패를 반복했다는 자책이 몇 주 동안 그 검을 묶어 놨고, 소설은 그 구간을 '검이 무거워졌다'고 썼다. 마음 무게가 검에 실려서.이 세계선 강현우한텐 그 몇 주가 없다. 죽은 사람이 없으니 장례식도 없었고, 자책할 게 없으니 의문만 남았고, 정체 대신 추진력이 붙었다. 거기에 몇 년 앞당긴 검까지 손에 쥐었으니 그 차이가 지금 눈앞에서 결과로 굴러 나오는 중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Read more

막아선 쪽 (1)

의무동 진료실은 소독약 냄새에 오후 햇빛이 섞여서 묘하게 나른했고, 검진 결과도 그 나른함만큼이나 허무하게 깨끗했다."아주 건강합니다. 심박이며 마력 순환이며 신경 반응이며 전부 정상 범위 상단이에요. 신입생 중에 이런 수치 흔치 않은데.""그렇습니까.""운동 꾸준히 하나 봐요. 요즘 애들은 앉아만 있어서 손목부터 나가던데.""밥을 잘 먹고 다녀서 그렇습니다.""어이구, 그런 학생이 왜 검진을 자청해서 와요."교의가 차트를 넘기며 웃는 동안 나는 대답 대신 창틀에 놓인 화분을 봤다. 물을 너무 준 건지 잎 끝이 누렇게 죽어 가는 중이었다. 사람 고치는 양반이 화초 하나 못 살리는 것도 좀 그렇지 않나."혹시 갑자기 몸이 뜨거워지는 증상은요.""열이요? 감기면 여기서 잡혔을 거고. 뭐, 열아홉짜리 심장이 멋대로 뛰는 이유야 백 가지쯤 되죠. 연애라도 하나?""그런 거 아닙니다.""아니면 말고. 잠은 자요? 눈 밑이 좀 어둡던데.""잡니다.""거짓말도 성의 있게 하는 학생이네. 다음 주 체력 측정 있으니까 그때까지 밤은 좀 새지 말고."정기 검진이라고 둘러댔지만 확인하러 온 건 따로 있었다. 그날 훈련장에서의 몇 초, 심장이 한 번 크게 구르고 등줄기로 열이 번지면서 세상이 갑자기 선명해지던 그 감각. 하필 강현우가 벽을 넘던 순간에 온 게 걸렸다.그런데 정작 몸엔 아무것도 없단다. 각성 전조? 이 몸은 이미 각성자고, 약물이나 저주 쪽도 잡히는 게 없다니 재료가 아예 없는 셈이었다.재료 없이 굴리는 가설은 그냥 망상이다. 보류함에 던져 두고 나왔다. 나중에 재료가 모이면 그때 꺼내면 되니까.지금은 처리할 판이 산더미였다. 다음 달 '그 날짜'가 째깍째깍 다가오는 중이었고, 실습 건이 몸풀기였다면 이건 본선이다. 준비할 건 많고 시간은 늘 모자라고. 뭐, 매번 이런 식이긴 했다.소문은 여전했다. 스폰받는 망나니, 주말마다 검은 세단이 모시러 가는 놈. 최근엔 종목이 하나 늘어서 걔 얼굴은 진짜지 않냐는 항목이 주로 여학생 쪽에서 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Read more

막아선 쪽 (2)

그러고 딱 한 발 더 들어갔다. 주먹을 쥔 것도 목소리를 높인 것도 아닌데 셋의 어깨가 나란히 뒤로 물러났다. 저들을 밀어낸 건 저들 머릿속에서 알아서 부푼 이름 석 자였다. 그 자리에 서서 물러난 만큼을 그냥 비워 뒀다. 채우는 건 저들 몫이지.가운데 놈이 한 번 더 버텨 봤다."허세 부리지 마라. 너 절연당했다며. 뒤에 뭐가 있다고.""그러게. 절연당한 놈이 왜 주작 길드장 차를 타고 등교할까."왼쪽 놈 낯빛이 먼저 변했다. 아까 점찍은 그놈이었다. 입학식 날 검은 세단을 직접 봤거나 소문 출처가 어딘지 아는 눈치더니, 가운데 놈 소매를 잡아끌면서 목소리를 낮췄다."야, 가자.""뭘 가.""쟤 그, 진짜야.""뭐가 진짜인데.""그러니까 그게……. 아, 좀 가자고."진짜 뭔지는 저들도 모른다. 모르니까 무섭고.침묵은 길지 않았다. 가운데 놈이 마지막으로 나를 노려봤지만 그 눈에 남은 건 오기뿐이었고, 셋은 재수 없다느니 어쩌고를 씹어뱉으며 물러갔다. 발이 빨랐다.악명이라는 방패는 오늘도 성능이 좋았다.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상대가 알아서 쫄아 주는 거. 이만큼 싸게 먹히는 무기도 없다."저, 저기. 고맙습니다. 진짜로.""고맙긴."인사를 자르고 이미 걷고 있었다."이번 주 과제, 니가 초안 다 써 와. 그게 값이야.""네, 네! 언제까지 드리면 될까요?""금요일.""금요일이요? 아, 넉넉합니다!""넉넉하면 표도 하나 넣어. 표 있으면 교수가 안 읽고 넘어가더라.""아, 그런 게 있군요."목소리가 왜 저렇게 밝은지는 모르겠다만. 하긴, 값을 붙여 준 게 나을 거다. 공짜로 구해 줬으면 갚을 길 없는 빚이 됐을 텐데, 초안 하나로 퉁쳤으니 저쪽도 홀가분하겠지.걸으면서 아까 그 삼 초를 다시 돌려 봤다. 계산은 분명히 '지나간다'였고, 입이 먼저 나갔다.몸이 계산을 앞지른 게 처음도 아니었다. 훈련장에서의 그 몇 초도 그랬으니까. 보류함에 넣어 둔 항목 옆에 비슷한 게 하나 더 쌓인 기분이었다.다만 결은 좀 달랐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Read more

직접 파헤친다 (1)

감시가 한 단계 올라갔다는 건 굳이 안 봐도 알았다.예전 강현우는 대놓고 봤다. 교실에서, 식당에서, 복도에서. 나 너 보고 있다를 절반쯤 섞은 경고용 눈빛이었고, 그건 차라리 편했다. 요즘은 눈이 안 보이는데 무게만 더 무겁다.등하굣길 어딘가, 훈련장 관중석 사각, 도서관 서가 너머. 하긴, 수십 년 전장 구른 놈이 작정하고 숨으면 열아홉짜리 캠퍼스에서 못 숨을 리가 없지.'대놓고 보던 때가 그립네, 이거.'수요일 아침엔 비서실장한테 전화가 왔다."대표님. 지난주부터 가온다인 회사 서류하고 공개된 자료를 들여다본 기록이 여러 건 잡힙니다. 들어온 자리는 아카데미 도서관 단말이고, 장학 재단 쪽도 같은 자리에서 열어 봤습니다.""몇 시쯤.""새벽 두 시하고 네 시. 이틀 연속입니다.""잠은 자는 놈인가 몰라.""새벽 네 시 기록은 저희 쪽에도 잘 안 잡히는 시간입니다. 조치할까요?""아뇨. 그냥 보게 두세요. 보라고 깔아 둔 건데요.""막아 두면 흔적이 하나 줄어듭니다만.""막으면 그다음을 알 수가 없잖아요. 보게 두면 어디까지 왔는지가 보이고.""……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아침은 드셨습니까. 지난번처럼 굶고 회의 잡으시면 곤란합니다.""먹었어요.""기숙사 급식은 지난달에 단가를 올려 뒀습니다. 드시라고 올린 겁니다만.""……끊습니다."발 빠르네. 길드 기록에서 막히니까 회사 쪽으로 핸들을 꺾은 거다. 근데 거기도 꽝이다. 가온다인이랑 나 사이엔 회사가 네 겹씩 껴 있고, 재단 어른들 명단에 열아홉짜리 이름 같은 건 안 올라간다.서류로는 못 뚫는다. 절대. 문제는 이 인간이 서류로 막혔다고 얌전히 접는 타입이 아니라는 거다.'다음 수가 뭐냐, 그래서.'내가 아는 강현우는 벽을 만나면 부수거나, 타 넘거나, 무너질 때까지 죽치고 기다린다. 포기라는 단어를 쓰는 걸 한 번도 못 봤다. 하필 그게 마음에 들어서 투자한 건데 지금은 그게 제일 골치다.서류가 막히면 사람한테 붙을 거고, 사람이 입을 닫으면 그땐 현장을 팔 거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Read more

직접 파헤친다 (2)

위장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판단은 버리지 않았다. 다만 첫 번째 삶의 한도윤은 사흘도 조용히 못 있던 놈이었다. 그런 놈이 열엿새를 조용했다. 사람이 통째로 바뀌었을 리는 없으니, 그러면 남는 건 아직 꺼내지 않은 패였다.그리고 동부 구릉지.강현우는 서류 더미에서 잔재를 치운 보고서 사본을 다시 꺼냈다. 몇 번을 읽어서 문장을 외울 지경이었다.그 실습에서는 두 명이 죽어야 했다. 김세아. 박준일.첫 번째 삶에는 몰라서 놓쳤고, 이번에는 두 곳 중 하나만 지킬 수 있어 밤새 포기할 이름을 골랐다. 그 지옥 같은 산수를 누군가 이틀 전에 지워 버렸다.규정대로 박힌 표식, 날짜 각인, 빈틈없는 서류.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고 김세아와 박준일은 오늘도 식당에서 웃고 있었다. 처음 며칠은 자다가도 명단을 확인했고, 그때마다 둘이 모두 살아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기억 속 명단에서 사망 일자가 지워진 것도 아닌데, 살아 있는 얼굴을 볼 때마다 그 날짜만 더 또렷하게 어긋났다.미래는 바뀔 수 있었다. 다른 누군가의 손으로도.어제 점심엔 식당에서 두 사람을 지나쳤다. 김세아는 친구들과 디저트를 두고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었고, 박준일은 옆 테이블에서 그 소란을 구경하며 웃고 있었다. 두 번의 삶에서 강현우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장면이었다. 그 애들의 열아홉 이후를 그는 처음 보고 있었다."야, 한 판 더. 아까 그거 무효야.""무효는 무슨. 손 늦게 낸 건 너잖아.""준일아, 너도 봤지? 쟤가 늦게 냈지?""나는 아무것도 못 봤는데.""야, 너 아까부터 계속 그 소리.""내가 뭘 봤다고 하면 둘 중 하나한테 맞잖아.""똑똑하네.""살려고 그러는 거야.""근데 지난주 그 실습은 진짜 시시했어. 잔재 하나도 못 봤잖아.""운 좋은 거지.""운은 무슨.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강현우가 알던 두 사람은 영정 속 열아홉에서 멈춰 있었다. 식판을 든 손이 내려가지 않았다. 저 애들의 살아 있는 스무 살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김세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Read more
PREV
1234567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