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번 생은 그의 형을 선택했다: Chapter 11 - Chapter 20

176 Chapters

11화. 존재하지 않는 상단

최만석이 무천의 처소를 찾은 것은 다음 날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방 안에는 새 거울이 놓여 있었고, 향로에서는 평소보다 짙은 향이 피어올랐다. 최만석은 무천의 손등에 남은 상처를 발견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오랫동안 남의 비밀을 팔아 살아온 사람은 궁금한 것이 있어도 함부로 입 밖에 내지 않았다.“찾으셨습니까, 공자님.”최만석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무천은 앉으라는 말도 없이 탁자 위에 은자 주머니를 던졌다.“서씨 상단에 거래를 넣어라.”“물건을 사시려는 겁니까, 파시려는 겁니까?”“어느 쪽이든 상관없다.”최만석이 눈을 가늘게 떴다.“그렇다면 거래 자체가 목적은 아니시군요.”무천은 대답하지 않았다.최만석이 주머니를 들어 무게를 가늠했다. 상당한 은자가 들어 있었지만, 곧바로 소매에 넣지는 않았다. 돈이 많은 의뢰일수록 뒤에 감춰진 위험도 컸다.“누구를 불러내면 됩니까?”“서예령이다.”“서씨 상단의 아가씨 말씀이십니까?”“그렇다.”“그분을 만나려는 것이라면 직접 서신을 보내시는 편이 빠를 텐데요.”무천의 눈빛이 서늘해졌다.“그랬다면 너를 부르지 않았겠지.”최만석은 더 묻지 않았다.서예령과 무천의 파혼 이야기는 이미 황도에 조금씩 퍼지고 있었다. 무천이 서씨 상단에서 가져간 물건값을 갚으라는 요구를 받았다는 소문도 들었다.자신을 만나 주지 않는 여인을 거래로 끌어내려는 것이라면, 실패했을 때 모든 책임을 떠안을 사람까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작은 거래로는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최만석이 말했다.“서씨 상단은 황도에서도 손에 꼽히는 곳입니다. 비단 몇 필이나 약재 몇 상자로 아가씨가 직접 나오지는 않겠지요.”“그래서 큰 거래를 만들라고 한 거다.”“큰 거래에는 큰돈이 필요합니다.”“얼마면 되지?”무천이 망설임 없이 묻자 최만석의 시선이 달라졌다.“거래가 진짜처럼 보이려면 물건과 창고, 어음이 있어야 합니다. 상단의 인장도 필요하고, 과거에 다른 곳과 거래한 기록까지 있어야 하지요.”“가짜 인장을 만들면 되지않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7
Read more

12화. 감춘 손목

다음 날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무겸의 마차가 서씨 상단 앞에 멈췄다.그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예령은 본점 이층의 작은 응접실을 비워 두었다. 사람들이 오가는 저택보다 상단에서 만나는 편이 눈에 덜 띌 것이라 판단했다.그러나 검은 옷을 입은 무겸이 지팡이를 짚고 안으로 들어서자 상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진북후부의 장남이 서씨 상단에 찾아왔다는 사실보다, 예령과 혼인을 약조한 사내가 직접 찾아왔다는 사실에 더 관심이 많은 눈치였다.예령은 창밖을 내려다보다 휘장을 내렸다.“눈에 띄지 않으려 이곳에서 뵙자고 했는데 소용없게 됐군요.”“내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도 상단으로 나오지 않았소?”무겸이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그렇다면 그대도 숨길 생각은 없었던 것 같은데.”“피하지 않겠다는 것과 구경거리가 되고 싶다는 건 다른 일입니다.”“곧 익숙해져야 할 것이오.”예령이 차를 따르던 손을 멈췄다.“무엇에 말입니까?”“사람들이 그대와 나를 함께 묶어 이야기하는 것에.”무겸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예령은 곧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둘의 혼인은 서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한 약조였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당연하다는 듯 두 사람을 한데 묶는 말이 나오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예령은 찻잔을 그에게 밀어 주며 화제를 돌렸다.“확인할 것이 있다고 하셨지요.”무겸은 차를 마시지 않았다.그의 시선이 예령의 얼굴에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예령은 소매 속에 감춰 둔 손을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렸다.“손을 내놓으시오.”“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왼손.”예령의 눈빛이 가늘어졌다.멍은 소매 안쪽에 가려져 있었다. 연화와 아버지, 함께 갔던 호위들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일이었다.“어떻게 아셨습니까?”“무엇을 말이오?”“제 손목이 다쳤다는 사실 말입니다.”무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다쳤다고 말한 적은 없소.”예령은 그가 자신을 떠본 것임을 뒤늦게 깨달았다.무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감추고 있는 것을 보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Read more

13화. 진북후부로

이틀 뒤 아침, 서씨 저택 앞에 두 대의 마차가 나란히 섰다. 한 대는 서문백과 예령이 탈 마차였고, 다른 한 대는 약속보다 먼저 도착한 무겸의 것이었다. 무겸은 검은빛 도포를 입고 지팡이를 짚은 채 서 있었다. 햇빛을 받지 못한 듯 흰 얼굴과 곧은 콧날, 짙은 눈썹 아래 깊은 눈매가 어우러져 차갑고 수려한 인상을 주었다. 병약해 보이는 안색과 달리 자세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서문백은 그런 무겸을 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큰공자께서도 함께 가시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진북후께서 부르신 사람은 나와 예령이뿐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무겸은 조금도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두 분만 들어가시면 조씨 부인이 파혼을 집안싸움으로 돌릴 겁니다. 제가 예령과 혼인을 약조했다는 사실도 직접 말씀드리는 편이 낫습니다.” 서문백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무천과의 파혼을 요구하는 자리에 그의 형과 함께 나타나면 진북후를 자극할 수도 있었다. 반대로 무겸을 빼놓으면 조씨가 새 혼인을 인정하지 않으려 들 것이 분명했다. 예령이 먼저 마차에 올랐다. 옅은 푸른빛 치마에 장신구도 거의 하지 않은 수수한 차림이었다. 그러나 희고 고운 얼굴과 가늘고 또렷한 눈매는 꾸미지 않아도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함께 가시지요.” “예령아.” “어차피 언젠가는 알려야 할 일입니다.” 무겸이 뒤따라 오르자 서문백이 당황했다. “공자의 마차는 따로 있지 않습니까?” “가는 동안 준비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태연하게 예령의 맞은편에 앉았다. 서문백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결국 자리를 잡았다. 마차가 출발하자 좁은 공간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예령은 맞은편의 무겸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햇빛이 창을 통해 들어올 때마다 그의 선명한 옆얼굴 위로 옅은 그림자가 지나갔다. “진북후께서 파혼을 허락하실까요?” “아버지는 집안의 손해를 먼저 따지는 분이시오.” “그렇다면 거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Read more

14화. 없었던 일

“혼인할 사이에 그 정도 편의도 봐주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조씨는 오히려 서씨 부녀가 야박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예령은 전생의 자신이 이 집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다시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그들에게 며느리의 재물은 혼인하기 전부터 진북후부의 것이었다. 무천이 허락 없이 가져다 써도 예령이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뿐이었다. 그때 무겸이 지팡이로 바닥을 한 차례 짚었다. 또각. 크지 않은 소리였지만 조씨가 말을 멈췄다. “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실 텐데 대문 앞에서 손님을 세워 둘 생각입니까?” “너는 부르지 않으셨다.” “예령과 혼인을 약조한 사람으로서 온 겁니다.” 조씨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 혼인을 누가 허락했지?” “제 혼인은 제가 정합니다.” “진북후부의 장남이라는 사실을 잊었느냐?” 무겸의 수려한 입가에 희미한 냉소가 번졌다. “제가 장남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계셨군요.” 두 사람 사이에 차가운 침묵이 흘렀다. 그때 안쪽에서 진북후의 측근이 급히 나왔다. “후작 나리께서 모두 들어오라 하십니다.” 조씨는 못마땅한 얼굴로 길을 비켰다. 예령은 열린 대문 너머로 길게 이어진 회랑을 바라보았다. 전생에 수없이 오갔던 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무천의 아내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기 위해 이 문을 넘는 것이었다. 예령이 먼저 발을 내디뎠다. 그 뒤를 무겸의 지팡이 소리가 느리게 따라왔다. 긴 회랑 끝에 자리한 서실은 낮인데도 어두웠다. 문이 열리자 묵향과 오래된 종이 냄새가 섞여 흘러나왔다. 방 안에는 진북후가 홀로 앉아 있었다. 관자놀이에는 흰머리가 섞였지만 넓은 어깨와 꼿꼿한 자세는 여전했다. 햇볕과 바람에 거칠어진 얼굴에는 전장에서 보낸 세월이 깊은 주름으로 남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예령이 보낸 파혼서와 무천의 지출 내역이 펼쳐져 있었다. “앉게.” 진북후의 낮은 목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그는 무겸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Read more

15화. 누구의 말이 거짓인가

이내 그는 예령의 곁에 앉은 무겸을 발견했다. “형님은 왜 여기 계십니까?” “내가 불렀다.” 진북후가 차갑게 잘랐다. “앉아라.” 무천은 예령의 맞은편에 앉았다. 붕대 감긴 손을 무릎 아래로 감췄지만 예령은 이미 보았다. 비녀로 찌른 곳은 손등이었고, 검은 옷의 사내가 내리친 곳은 손목이었다. 진북후가 장부를 무천 앞으로 밀었다. “서씨 상단의 인장을 사용했느냐?” 무천은 장부를 내려다보지도 않았다. “예령이 제게 맡긴 것입니다.” 예령의 눈매가 서늘해졌다. “제가 언제 맡겼습니까?” “우리가 남처럼 허락을 하나하나 구해야 하는 사이였나?” 무천은 마치 서운하다는 듯 웃었다. 수려한 얼굴에 번진 미소는 예전처럼 다정해 보였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네가 내게 준 것이 얼마나 많은데 이제 와서 인장 하나를 문제 삼는 거지?” 전생에도 그랬다. 무천은 예령이 한 번 베푼 호의를 영원한 허락처럼 여겼다. 거절하면 변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예령이라고 몰아세웠다. “인장을 사용하라고 허락한 적은 없습니다.” “결국 돌려줄 재물이었다.” “그러면 지금 돌려주십시오.” 무천의 미소가 굳었다. 예령은 탁자 위 장부를 펼쳐 가장 마지막 장을 그에게 보였다. “원금뿐 아니라 상단이 입은 손해까지 모두 갚으시면 됩니다.” “고작 돈 때문에 혼인을 깨겠다는 것이냐?”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령의 맑은 눈동자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제 것이니 마음대로 써도 된다고 생각하신 그 마음이 문제입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무천은 한동안 예령을 바라보았다. 더는 자신을 달래려 하지 않는 얼굴이 낯설고도 아름다웠다. 가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수록 오히려 그녀를 제 곁에 묶어 두고 싶었다. 진북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들었다.” 그의 시선이 무천의 붕대 감긴 손으로 향했다. “서 아가씨가 병영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Read more

16화. 파혼의 대가

무천이 형을 노려보았다.“형님은 끼어들지 마십시오.”“내 혼인 상대의 일이니 끼어들 자격은 충분해 보이는데.”무겸의 목소리는 평온했다.그러나 지팡이를 쥔 손등에는 힘줄이 희미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예령은 그가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태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진북후가 탁자를 내리쳤다.쾅.“내 앞에서 그만들해라.”두 형제의 시선이 동시에 진북후에게 향했다.“무천, 니가 정말 서 아가씨의 길을 막았느냐?”“우연히 마주쳤습니다.”“진북후부의 문양도 없는 마차를 끌고 호위들을 데려간 채 우연히 말이냐?”이번에 대답한 사람은 무겸이었다.천의 표정이 굳었다.무겸은 품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그날 함께 갔던 서씨 상단 호위들의 진술입니다. 무천이 데려온 사내들의 인상착의와 마차의 생김새도 적혀 있습니다.”진북후가 종이를 펼쳤다.조씨가 다급히 말했다.“서씨 집안의 호위들이니 주인의 뜻에 맞춰 말했겠지요.”“그렇다면 무천과 함께 간 자들을 불러 확인하면 됩니다.”무겸의 수려한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그들 또한 같은 말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하군요.”조씨의 얼굴이 굳었다.무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진북후가 종이에서 시선을 들었다.“그날 데려간 자들은 어디 있느냐?”“제 사람들이 아닙니다.”“네 사람이 아닌 자들과 서 아가씨의 길을 막았단 말이냐?”“저는 길을 막지 않았습니다.”무천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조급함이 묻어났다.“그저 잠시 이야기하려 했을 뿐입니다. 예령이 갑자기 비녀를 휘두르는 바람에 일이 커졌습니다.”예령이 그의 붕대 감긴 손을 바라보았다.“그 상처가 제가 찌른 자리입니다.”조씨의 눈이 커졌다.“네가 무천이를 찔렀다고?”“놓으라고 했는데도 계속 제 손목을 놓지 않았습니다.”예령은 소매 안에서 비녀를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닦아 냈지만 끝부분에는 희미한 검붉은 얼룩이 남아 있었다.“저를 마차로 끌고 가기에 스스로를 지키려고 한 일입니다.”진북후의 시선이 비녀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Read more

17화. 내 뒤에 있으시오

전생에는 저런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신이 너무 심하게 굴었나 돌아보았다. 무천이 화를 풀 때까지 기다렸고, 잘못하지 않은 일에도 먼저 사과했다.이제는 그의 다정한 목소리 안에 감춰진 명령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무천이 다시 한 걸음 내디뎠다.“예령아.”그 순간 무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지팡이가 바닥을 짚는 소리는 느렸지만, 어느새 그의 몸이 예령과 무천 사이를 완전히 가로막고 있었다.검은 도포를 입은 넓은 등이 예령의 시야를 채웠다.“아버지의 명을 듣지 못했나?”무겸이 물었다.목소리는 낮고 평온했지만 무천은 더 다가오지 못했다.“형님은 이 일에서 빠지십시오.”“싫다면?”“예령과 저는 십여 년을 알고 지냈습니다. 형님이 끼어들 자리가 아닙니다.”무겸의 입가에 옅은 냉소가 번졌다.“십여 년을 알았으면서 그 여인이 무엇을 싫어하는지도 몰랐군.”무천의 눈빛이 사나워졌다.무겸은 태연히 말을 이었다.“아니면 알고도 무시한 건가?”“그만해라.”진북후의 명령에 측근들이 무천의 양팔을 붙잡았다.“처소로 데려가라. 내 허락 없이는 누구도 만나지 못하게 해.”“아버지!”무천이 붙잡힌 채 몸을 비틀었다.예령을 향한 눈빛에는 분노보다 짙은 집착이 어려 있었다.“이렇게 끝날 것 같아?”낮은 목소리가 예령의 귓가에 선명히 박혔다.“너는 결국 내게 돌아오게 될 거야.”무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그가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자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드러났다. 당장이라도 무천을 막아설 듯했지만, 예령이 조심스럽게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손끝에 닿은 옷감 아래로 단단한 팔이 느껴졌다.무겸이 고개를 돌렸다.조금 전까지 차갑게 가라앉아 있던 눈빛이 예령과 마주치자 한결 부드러워졌다.예령은 자신이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손을 놓으려 했지만 무겸이 먼저 낮게 말했다.“그대로 있어도 되오.”예령의 손이 멈췄다.“적어도 이곳을 나갈 때까지는.”그 말이 단순히 보호를 위한 것인지 다른 뜻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Read more

18화. 죽은 상단의 인장

그날 밤, 굳게 닫힌 무천의 처소 뒤편으로 작은 쪽지 하나가 던져졌다.무천은 쪽지를 펼쳐 짧은 문장을 적었다.금원상단을 사흘 안에 준비해라.마지막 줄을 적는 그의 입가에 뒤틀린 미소가 번졌다.예령이 제 발로 자신에게 올 수 없다면, 오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들 생각이었다.무천이 처소 밖으로 던진 쪽지는 밤이 깊어서야 최만석의 손에 들어갔다.금원상단을 사흘 안에 준비해라.짧은 명령을 읽은 최만석은 혀를 찼다. 일곱 날도 빠듯하다고 했건만, 무천은 그 절반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은자를 받은 이상 못 한다고 물러날 수도 없었다.그는 동이 트기 전에 사람들을 깨웠다.“서문 밖 창고부터 구해. 물건을 빌려줄 상단도 찾아 놓고.”최만석은 겉옷을 걸치며 덧붙였다.“나는 금원상단의 인장과 장부를 구하겠다. 정오 전에 다시 모여.”날이 밝기 전, 최만석은 황도 남쪽의 낡은 객잔으로 들어갔다.장사를 접은 지 오래된 곳이었다. 문짝은 비스듬히 기울었고, 마당에는 잡초가 무릎까지 자라 있었다. 최만석이 뒤채의 문을 세 번 두드리자 안에서 빗장이 풀렸다.방 안에는 마른 체격의 사내가 등잔불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금원상단의 마지막 상단주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 장문호였다.“가져왔나?”최만석의 물음에 장문호가 낡은 나무함을 내놓았다.함 안에는 오래된 장부 세 권과 붉은 천에 싸인 인장이 들어 있었다. 장부 가장자리는 누렇게 바랬고, 인장 손잡이에는 여러 해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 남아 있었다.최만석은 종이에 인주를 찍어 문양을 확인했다.둥근 테두리 안에 새겨진 금원상단 네 글자. 십 년 전 상단이 쓰던 진짜 인장이었다.“사흘 뒤 돌려주지.”그가 은괴 세 덩이를 밀어 놓았다.장문호의 마른 손이 은괴 위에서 멈췄다.“이걸 어디에 쓰려는 거요?”“모르는 편이 오래 살지.”“숙부의 이름으로 나쁜 짓을 벌이면—”“빚쟁이에게 이 집을 빼앗기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나?”장문호의 얼굴이 굳었다.최만석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함을 닫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Read more

19화. 의심스러운 초대

“삼 할이나 싸다고요?” 연화가 눈을 크게 떴다. “물건에 하자만 없다면 큰 이문이 남겠어요.” “그래서 이상한 거야.” 예령은 서신을 다시 읽었다. 다급한 사정도, 직접 오라는 조건도 그럴듯했다. 지나치게 그럴듯해서 오히려 누군가 자신이 움직일 이유를 하나씩 골라 붙인 듯했다. “마지막으로 금원상단과 거래한 장부를 가져와. 서신을 가져온 자가 어느 문으로 들어왔는지, 누구와 말을 섞었는지도 알아보고.” “거래를 거절하시려고요?” “아니. 진짜라면 놓칠 이유가 없고, 가짜라면 누가 이런 수고를 했는지 알아봐야지.” 연화가 장부를 찾으러 나간 뒤,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들어가도 되겠소?” 무겸이었다. 그는 진북후부에서 확인한 진술의 사본을 전하러 왔다며 맞은편에 앉았다. 예령은 잠시 망설이다 금원상단의 서신을 내밀었다. 무겸은 글을 훑어본 뒤 봉인의 인영을 오래 살폈다. “인장은 진짜인 듯하군.” “공자께서도 금원상단을 아십니까?” “북방 군량을 맡을 때 옛 거래처를 조사한 적이 있소. 금원상단은 십 년 전 상단주가 죽은 뒤 자취를 감췄지.” “문을 닫았다는 뜻입니까?” “적어도 다시 장사를 시작했다는 기록은 없었소.” 예령은 서신 위에 손끝을 얹었다. 진짜 인장으로 만든 거짓 거래라면 준비한 사람이 만만치 않았다. 자신이 오래된 거래처를 함부로 외면하지 못한다는 것까지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가 보려고 합니다.” 무겸의 시선이 들렸다. “함정일 수 있소.” “그러니 더 확인해야 합니다. 이번에 피하면 다른 이름과 다른 물건으로 다시 접근할 겁니다.” 잠시 침묵하던 무겸이 서신을 접어 예령에게 돌려주었다. “그렇다면 혼자 가지 마시오.” “호위를 데려갈 생각입니다.” “호위에게 맡기라는 뜻이 아니오.” 무겸이 낮게 말했다. “내가 함께 가겠소.” 무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깥에서 다급한 발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Read more

20화. 닫힌 창고

서문 밖 창고에 도착했을 때는 미시가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낡은 창고 앞에는 면포를 실은 수레 세 대가 서 있었다. 일꾼들은 쉴 새 없이 짐을 옮겼고, 금원상단의 깃발도 걸려 있었다.예령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그럴듯한 모습이었다.예령의 마차가 멈추는 것을 맞은편 지붕 위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무겸이 남몰래 붙여 둔 검은 옷의 호위였다.그는 창고의 정문과 뒤편 골목을 차례로 살폈다. 예령이 데려온 호위가 여섯이나 되었으나 안심하지 않았다. 창고 주변에는 짐꾼으로 보기에는 움직임이 지나치게 절도 있는 사내들이 섞여 있었다.그가 위치를 바꾸려는 순간 골목 안쪽에서 짧은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검은 옷의 사내는 지붕 아래로 몸을 낮췄다. 지난번 무천이 데려온 자들이 서로를 부를 때 사용하던 신호였다.골목 끝으로 낯익은 뒷모습이 사라졌다.그가 그 뒤를 쫓아 담을 넘는 순간, 양쪽 지붕에서 그물이 떨어졌다. 기다리고 있던 사내 넷이 동시에 칼을 뽑았다.검은 옷의 사내가 단검으로 그물을 찢었다.그제야 그는 자신이 상대를 쫓은 것이 아니라 창고에서 유인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상단의 관리인으로 꾸민 최만석이 허리를 숙였다.“기다리고 있었습니다.”“물건부터 확인하겠습니다.”“물론입니다.”최만석은 호위들을 보고도 막지 않았다. 오히려 창고 문을 활짝 열어 안을 보여 주었다.면포 꾸러미가 천장 가까이 쌓여 있었다. 예령이 그중 하나를 골라 끈을 자르자 견본과 같은 천이 나왔다.한 필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위치를 바꾸어 세 꾸러미를 더 열어 보았지만 모두 상품이었다.면포에는 습기나 곰팡이 흔적도 없었다. 창고 바닥에는 실제로 물건을 옮긴 수레 자국이 깊게 남아 있었고, 꾸러미마다 금원상단의 묵은 표찰까지 달려 있었다.누군가 자신을 속이기 위해 준비한 것이라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돈과 사람이 들어간 계략이었다.“이 정도 물건을 왜 삼 할이나 싸게 내놓는 겁니까?”“오늘 안에 정리하지 못하면 빚쟁이들에게 전부 빼앗깁니다. 적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Read more
PREV
123456
...
18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