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os los capítulos de 나를 괴롭히던 놈과 같이 살게 됐다: Capítulo 11 - Capítulo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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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화. 연락을 하든가

011화. 연락을 하든가 여섯 시가 넘었는데 한태겸은 오지 않았다. 나는 시계를 보지 않았다. 정확히는, 보지 않으려고 했다. “이안아, 저쪽 상자만 옮기면 오늘은 끝이야.” “네.” 미정 이모가 가리킨 곳으로 갔다. 기증받은 생필품 상자가 벽 한쪽에 쌓여 있었다. 세제, 휴지, 통조림, 즉석밥. 겉면에 적힌 품목을 확인해서 각 선반에 나누면 끝이었다. 나는 커터칼로 테이프를 갈랐다. 즉석밥 열두 개. 통조림 여덟 개. 세제 네 통. 손은 알아서 움직였다. 문제는 부속동 현관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가 돌아간다는 거였다. 일곱 시 십 분. 택배 기사였다. 일곱 시 이십칠 분. 본당에 다니는 할머니 둘이 우산을 찾으러 왔다. 일곱 시 사십이 분. 아이 하나가 두고 간 물통을 가지러 뛰어 들어왔다. 그때마다 나는 괜히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더 세게 내려놓았다. “오늘 진짜 누구 기다려?” 뒤에서 미정 이모가 물었다. “아니라니까요.” “근데 왜 문 열릴 때마다 봐.” “사람 들어오니까 보죠.” “평소에는 안 보잖아.”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나는 빈 상자를 접어 끈으로 묶었다. 한태겸이 온다고 한 적은 없었다. 어제도 분명 그랬다. 퇴근이 늦으면 못 올 수도 있다고. 내가 먼저 물었다. 내일도 올 거냐고. 생각이 거기까지 가자 기분이 더 나빠졌다. 욕을 아주 작게 뱉었는데 미정 이모가 바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상자를 든 채 멈췄다. “뭐라고 했어?” “무겁다고요.” “그렇게 들리지는 않았는데.” “잘못 들으셨어요.” 나는 웃었다. 입꼬리를 올리고 눈까지 조금 접었다. 이 정도면 넘어간다. 몇 년 동안 몸에 밴 표정이었다. 미정 이모가 의심스럽게 쳐다보다가 결국 웃었다. “그래, 무거우면 나 불러. 혼자 들지 말고.” “네. 이것만 두고 올게요.” 상자를 들고 창고로 들어갔다.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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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화. 내가 샀어

012화. 내가 샀어 “그럼 다행이고.” “뭐가 다행인데.” “약속 어긴 건 아니니까.” 말이 또 저런 식이었다. 내가 화낼 자리를 먼저 빼버린다. 나는 혀로 볼 안쪽을 밀었다. 태겸이 그걸 봤다. “그 버릇 아직 있네.” 입 안에서 혀가 멈췄다. “뭔데.” “짜증날 때 그러는 거.” “네가 뭘 알아.” “학교 때도 했어.” 표정이 굳는 게 느껴졌다. 태겸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게 더 싫었다. 기억한다는 말만 해놓고 어떤 장면을 기억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팔짱을 꼈다. “오늘 왜 늦었는데.” “회의.” “몇 시에 끝났어.” “일곱 시 조금 넘어서.” “그럼 연락을 하든가.” 말이 튀어나왔다. 태겸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커졌다. 나는 바로 알아챘다. “아니.” 늦었다. “그게 아니라, 올 거면 온다고 하고 안 올 거면 안 온다고 해야 사람이—” “사람이?” 입을 다물었다. 태겸은 웃지 않았다. 그러니까 더 짜증났다. “아무튼.” 나는 시선을 돌렸다. “애매하게 굴지 말라고.” 잠깐 침묵이 생겼다. 태겸이 먼저 휴대폰을 내밀었다. “번호 줘.” 나는 화면을 내려다봤다. 새 연락처 입력창이 떠 있었다. “왜.” “연락하라며.” “내가 언제 번호 달랬냐.” “번호 없으면 연락 못 하잖아.” 맞는 말이라 더 열받았다. “안 줘도 돼.” 태겸이 덧붙였다. “그럼 다음부터 그냥 올게.” 손에 들린 휴대폰을 봤다. 받지 않으면 끝이었다. 그대로 방에 들어가도 됐다. 내일 한태겸이 오든 말든 알 필요 없었다. 나는 몇 초 더 서 있다가 결국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 “진짜 귀찮게 하네.” 내 번호를 입력했다. 이름 칸에 손가락이 멈췄다. 서이안. 그대로 저장하려다가 괜히 지웠다. 다시 썼다. 이안. 저장. 휴대폰을 돌려줬다. 태겸은 화면을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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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화. 내 연락처를 저장했다

013화. 내 연락처를 저장했다 “그래서?” “내가 들어.” “마음대로 해.” 또 저 말이었다. 밖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밤공기가 차가워져서 컵우동 뚜껑 사이로 올라오는 김이 금방 흩어졌다. 태겸은 도시락 포장을 뜯었다. 전자레인지에 너무 오래 돌렸는지 플라스틱 바닥이 뜨거워 보였다. “회의 맨날 늦게 끝나?” 내가 물었다. “맨날은 아니고.” “무슨 일 하는데.” 태겸의 젓가락이 멈췄다. 생각해보니 제대로 물어본 적이 없었다. “내부 감사 쪽.” “감사?” “회사에서 문제 생기면 확인하는 일.” “사람 캐는 거?” “대충.” “어쩐지.” “뭐가.” 나는 우동 면을 젓가락으로 풀었다. “사람 존나 쳐다보더라.” 태겸이 웃었다. “직업병인가 보네.” “기분 나빠.” “덜 볼게.” “아예 보지 마.” “그건 힘들 것 같은데.” 젓가락이 멈췄다. 태겸은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방금 한 말이 별말 아니라는 얼굴이었다. “왜.” 내가 물었다. 그제야 태겸이 나를 봤다. “뭐가.” “왜 힘든데.” “네가 눈앞에 있잖아.” 또 그 말. 나는 우동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뜨거웠다. 혀끝이 조금 데였다. “이상한 소리 자연스럽게 하네.” “이상했어?” “어.” “미안.” “사과하지 말라니까.” “그것도 미안.” “한태겸.” 태겸이 웃었다. 나는 젓가락으로 컵 가장자리를 한 번 두드렸다. 짜증이 나는데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더 뭐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그때 편의점 문이 열렸다. “이안 형?”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성당에 자주 오는 고등학생 하나가 음료수를 들고 서 있었다. 나는 바로 허리를 조금 폈다. “아직 안 들어갔어?” “학원 끝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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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4화. 내 앞에서는 그러지 마

014화. 내 앞에서는 그러지 마 [오늘은 여섯 시 반쯤 갈 수 있을 것 같아.] 답장은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다. 온다는데 뭐라고 하겠어. 오든가. 그 한마디를 썼다가 지웠다. [알아서 해.] 그것도 지웠다. 결국 화면을 껐다. 그리고 괜히 휴대폰이 신경 쓰였다. 충전은 아침부터 해뒀다. 접촉이 안 좋은 단자를 몇 번 비틀어서 백 퍼센트까지 채워놨고, 화면도 오늘은 멀쩡했다. 누가 연락을 기다려서 그런 건 아니었다. 어제처럼 갑자기 꺼지면 귀찮으니까. 그뿐이었다. “이안아, 이거 날짜 한번 봐줘.” 미정 이모가 통조림 상자를 밀어줬다. 나는 휴대폰을 뒤집어놓고 유통기한을 확인했다. “내년 삼월까지예요. 이쪽 선반에 두면 돼요.” “너 오늘 폰 많이 보네.” “시간 보는 거예요.” “벽에 시계 있는데.” 고개를 들었다. 정말 바로 앞 벽에 시계가 있었다. 여섯 시 이십칠 분. 나는 통조림을 상자째 들었다. “그럼 이제 안 볼게요.” 미정 이모가 웃었다. “누가 뭐랬니.” 대답하지 않고 창고로 들어갔다. 선반에 상자를 올리는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발소리가 들어왔다. 낯선 사람은 아니었다. 보폭이 일정했다. 급하게 걷지도 않고, 바닥을 끄는 소리도 없다. 요 며칠 동안 몇 번 들었다고 벌써 구분이 됐다. “안녕하세요.” 한태겸에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제야 창고 밖으로 나왔다. 벽시계가 여섯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확히. 태겸은 미정 이모에게 종이봉투 하나를 건네고 있었다. “지난번 빵 잘 먹었어요.” “별거 아니었습니다.” “이안이 친구가 참 예의가 바르네.” 친구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멈췄다. 태겸이 나를 봤다.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저 새끼도 들었다. 나는 바로 말했다. “친구 아니에요.” “그래?” 미정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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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화. 떼지 않은 밴드

015화. 떼지 않은 밴드 내가 말했다. “어디.” “부속실.” “같이 가.” “혼자 할 수 있다니까.” “알아.” 태겸이 먼저 문 밖으로 나갔다. “그래도 같이 가자.” 이 새끼는 말을 듣는 건지 안 듣는 건지 모르겠다. * * * 부속실 세면대에서 상처를 씻었다. 물이 닿자 생각보다 따가웠다. 표정을 찌푸렸는데 거울 너머로 태겸과 눈이 마주쳤다. “괜찮다며.” “닥쳐.” 태겸이 웃었다. 아주 작게. 구급함을 열어 소독솜과 밴드를 꺼냈다. “내가 한다고.” “응.” 그는 물건만 내 옆에 놓았다. 나는 소독솜 포장을 뜯었다. 한 손으로 하려니 잘 안 됐다. 비닐 모서리가 자꾸 미끄러졌다. 태겸이 보고 있었다. “웃으면 죽인다.” “안 웃었어.” “표정이 웃는데.” “도와줄까?” 나는 포장지를 다시 잡아당겼다. 안 뜯겼다. 태겸이 손을 내밀었다. “줘.” 이번에는 그냥 건넸다. 그가 포장을 뜯어 소독솜만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놨다. “해.” “네가 해주는 거 아니었어?” 말이 나가고 나서 내가 먼저 태겸을 봤다. 태겸도 잠깐 멈췄다. “원하면.”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나는 손에 놓인 솜을 봤다. 내가 하면 됐다. 그게 맞았다. 그런데 한 손으로 밴드까지 붙이려면 또 귀찮을 것 같았다. 나는 소독솜을 다시 태겸 쪽으로 내밀었다. “빨리 해.” 태겸이 받았다. 아무 말 없이. 내 손목을 잡는 대신 손바닥 아래에 자기 손을 받쳤다. 피가 묻은 부분을 소독솜으로 눌렀다. 따가워서 손가락이 움찔했다. 태겸의 손도 바로 멈췄다. “아파?” “안 아파.” “움찔했는데.” “그냥 해.” 이번에는 솜이 조금 천천히 움직였다. 상처 주변을 닦고 피가 멎는 걸 기다렸다. 가까이 있으니 태겸 셔츠에서 섬유유연제 냄새와 아주 옅은 커피 냄새가 났다. 싫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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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화. 내 앞에서 잠들었다

016화. 내 앞에서 잠들었다 다음 날 한태겸은 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오지 못한다고 먼저 연락했다. [오늘 야근이 길어질 것 같아.] 메시지는 오후 네 시 사십 분에 왔다. [기다리지 마.] 나는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누가 기다린다고. 답장을 쓰려다가 말았다. 안 기다려. 그걸 보내면 기다렸던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았다. 알아서 해. 그것도 이상했다. 결국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 그날은 아홉 시까지 일을 했다. 미정 이모가 먼저 들어가라고 했는데도 창고 정리를 끝냈고, 빨래방에서 올라온 수건까지 전부 개고 나서야 방으로 돌아왔다. 평소보다 한 시간 늦었다. 씻고 침대에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몸은 피곤한데 머리가 멀쩡했다. 휴대폰을 켰다. 한태겸 메시지가 그대로 있었다. 기다리지 마. 나는 화면을 끄고 베개 옆에 엎어뒀다.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진짜 개짜증나네.” 혼잣말이 방 안에 작게 남았다. * * * 다음 날 오후 여섯 시 이십 분. [오늘은 간다.] 이번에는 메시지가 짧았다. 나는 한참 있다가 답장을 보냈다. [알아서 와.] 보내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읽음 표시가 떴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괜히 폰을 덮었다. “뭘 그렇게 봐?” 미정 이모가 또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사람?” “아니라니까요.” “내가 이름도 안 말했는데.” 입을 다물었다. 미정 이모가 웃었다. “이안이 요즘 표정이 좀 많아졌네.” “원래 많았어요.” “아닌거 같은데.”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괜히 머리끈을 한번 고쳐 묶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단정하게 묶었다. 앞머리도 귀 뒤로 넘겼다. 왜 그러는지는 몰랐다. 그냥 성당 안에 있을 때는 이렇게 하는 게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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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화. 이번에는 혼자 붙였다

017화. 이번에는 혼자 붙였다“그래서?”“누가 들어올 수도 있잖아.”말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 나왔다.나는 침대에 앉은 채 그를 봤다.“여기 성당이야.”“그래도.”“누가 들어오겠냐.”“모르지.”“그럼 문 닫고 가면 되잖아.”“네가 깨면 놀랄 것 같아서.”그 말이 이상했다.“뭐가.”“그냥.”나는 입을 다물었다.태겸은 내 방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았다.문턱 바깥에 앉아 있었다.딱 거기까지.내가 잠든 사이에도.나는 손끝으로 침대 시트를 쥐었다가 폈다.“얼마나 있었어.”“삼십 분쯤.”“미친 새끼냐.”“그 말 오늘 처음 듣네.”“웃기지 마.”목소리가 아직 잠겨 있어서 욕도 힘이 없었다.태겸이 피식 웃었다.“물 마실래?”“있어.”책상 위 전기포트를 봤다.컵이 하나뿐이었다.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그게 이상하게 눈에 들어왔다.태겸도 봤는지 시선이 잠깐 머물렀다.“배 안 고파?”“안 고파.”말하자마자 배에서 소리가 났다.너무 선명했다.침묵이 생겼다.나는 눈을 감았다.“죽을래?”“내가 한 거 아니잖아.”“웃으면 진짜 죽인다.”“안 웃을게.”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나는 베개를 집어 던질까 하다가 힘이 없어서 관뒀다.“뭐 사왔어?”태겸이 옆에 있던 봉투를 들어 보였다.“죽.”“왜 죽이야.”“피곤하다며.”“누가 환자냐.”“안 먹어도 돼.”그 말을 듣자 또 짜증이 났다.나는 침대에서 내려왔다.발바닥에 차가운 바닥이 닿았다.태겸은 내가 다가가도 일어나지 않았다.문턱에 앉은 상태로 봉투만 옆으로 밀었다.내가 가져갈 수 있게.나는 봉투를 집었다.“너도 먹어.”“난 먹었어.”“언제.”“사오는 길에.”“혼자?”“응.”그 한마디 뒤에 나는 괜히 봉투 손잡이를 만졌다.어제는 내가 사줬다.오늘은 태겸 혼자 먹었다.그게 왜 마음에 걸리는지 모르겠다.“다음부터 그냥 같이 먹어.”말이 나갔다.태겸이 나를 봤다.나는 바로 덧붙였다.“어차피 여기 올 거면.”“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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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8화. 잠든 얼굴은 몰랐다

018화. 잠든 얼굴은 몰랐다서이안이 잠든 뒤에도 나는 바로 일어나지 못했다.벽 쪽으로 돌아누운 이안의 호흡이 일정해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아까까지만 해도 내가 나가느냐고 몇 번이나 확인하던 사람이었다.그런데 이제는 눈도 뜨지 않았다.머리끈을 풀어놓은 긴 머리가 베개와 침대 가장자리까지 흘러내려 있었다.성당에서 낮게 묶고 다닐 때보다 훨씬 길어 보였다.나는 시선을 거뒀다.잠든 사람을 계속 보는 취미는 없었다.적어도 오늘까지는 그런 줄 알았다.책상 위에는 먹다 남긴 죽이 있었다.뚜껑을 덮었다.쓰레기를 봉투에 넣고, 이안이 아무렇게나 밀어둔 의자를 조금 안쪽으로 넣었다.그 정도를 하는 동안에도 침대에서는 움직임이 없었다.이상했다.서이안은 원래 이렇게 잘 자는 인간이 아니었다.학교 때도 그랬다.수업 시간에 책상에 엎드려 있는 건 자주 봤지만 진짜로 자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교사가 교실을 나가면 바로 눈을 떴고, 누가 가까이 가면 먼저 고개를 들었다.그때는 그걸 경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그저 성질 더러운 놈이 잠귀까지 밝다고 생각했다.지금 와서 보니 조금 다르게 보였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침대까지 두 걸음 반.손을 뻗으면 머리카락 끝에 닿을 거리였다.뻗지 않았다.대신 바닥에 떨어진 머리끈만 주웠다.검은색 고무줄 하나.아무 무늬도 없는 싸구려였다.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잠깐 보다가 책상 가장자리에 놓았다.그때 이안이 몸을 조금 움직였다.나는 그대로 멈췄다.깨지는 않았다.이불이 허리 아래로 조금 밀렸다.후드집업이 올라가면서 티셔츠 밑단이 함께 당겨졌다.희게 드러난 옆구리 아래로 가느다란 흉터가 잠깐 보였다.오른쪽 갈비뼈 아래.나는 시선을 멈췄다.처음 보는 흉터였다.어디서 생겼는지 몰랐다.묻고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그다음에야 내가 그걸 왜 궁금해하는지가 따라왔다.나는 이불 끝을 봤다.끌어올리면 됐다.손만 뻗으면 됐다.하지만 그러지 않았다.이안은 자고 있었다.허락을 받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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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화. 이미 그 신뢰를 이용하고 있었다

019화. 이미 그 신뢰를 이용하고 있었다잠시 후 재희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나는 파일을 다시 열었다.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내가 이안에게 거리를 주는 이유는 알고 있었다.과거의 나와 반대로 하고 싶어서.싫다는 말을 무시하지 않기 위해서.그런데 그것만이 전부였나.기다리는 건 내 습관이었다.사람이 자기 입으로 말할 때까지.스스로 움직일 때까지.내가 손대지 않아도 결국 내 쪽으로 오게 될 때까지.휴대폰이 울렸다.업무용 메신저가 아니라 개인 메시지였다.화면에 이름이 떴다.이안.저장된 이름 두 글자.메시지는 짧았다.[밴드 갈았어.]나는 몇 초 동안 그 문장을 봤다.어젯밤 내가 남긴 말을 기억한 모양이었다.답장을 썼다.[잘했네.]보내기 직전에 멈췄다.너무 이상했다.지웠다.[손은 괜찮아?]이번에는 보냈다.읽음 표시가 바로 떴다.답은 늦었다.한참 뒤 한 줄이 왔다.[멀쩡해.]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나는 바로 표정을 지웠다.옆자리 재희가 봤는지 물었다.“뭐야.”“뭐가요.”“방금 웃었잖아.”“안 웃었습니다.”“웃었어.”“자료 보세요.”재희가 의심스럽게 쳐다봤다.“요즘 누구 만나?”나는 대답하지 않았다.그 질문에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만난다.그건 맞았다.며칠째 거의 매일 만나고 있었다.그런데 상대가 누구냐고 물으면 설명할 말이 없었다.친구도 아니고.연인도 아니고.그렇다고 단순한 동창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게 끼어 있었다.피해자와 가해자.그게 가장 정확했다.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도 지금은 부족했다.“아니면 됐고.”재희가 돌아섰다.나는 휴대폰을 다시 봤다.새 메시지가 하나 더 와 있었다.[오늘은 오냐.]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처음이었다.내가 먼저 오늘 갈 수 있다고 말하기 전에,이안이 먼저 물었다.아니.정확히는 아직 아니었다.이안은 내가 오느냐고 묻고 있었을 뿐이다.먼저 만나자고 한 건 아니다.그래도 달랐다.어제까지는 내가 가면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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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화. 네 현재를 챙기고 있다

020화. 네 현재를 챙기고 있다한태겸은 내가 먼저 연락한 뒤부터 연락을 줄였다.이상한 말이었다.먼저 연락이라고 해봐야,[오늘은 오냐.]그 한 줄이었다.그런데 그 다음날부터 태겸은 아침에도, 점심에도, 별말을 보내지 않았다.대신 오겠다고 한 날에는 시간만 정확히 보냈다.[오늘은 일곱 시 반.][회의 끝나면 바로 갈게.]그 정도.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그리고 마음에 든다는 사실이 더 마음에 안 들었다.* * *그날 태겸은 일곱 시 이십팔 분에 왔다.정확하게.성당 정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미정 이모에게 먼저 인사했고, 내 쪽은 나중에 봤다.나도 바로 아는 척하지 않았다.일부러.“이안아, 이것 좀.”“네.”미정 이모가 식료품 상자를 건넸다.나는 받아 들었다.태겸은 말없이 반대편을 잡았다.“혼자 들 수 있어.”“알아.”“그럼 놔.”“같이 들면 빨리 끝나잖아.”그 말에는 반박하기 어려웠다.우리는 상자를 창고까지 옮겼다.전에는 이렇게 같이 들면 손잡이 때문에 손이 닿을까 신경 쓰였다.오늘은 아니었다.손은 닿지 않았다.그런데 굳이 확인하지도 않았다.그 차이가 조금 이상했다.창고 안에 상자를 내려놓자 태겸이 물었다.“손은.”“다 나았어.”“보여줘.”나는 바로 손바닥을 폈다.그리고 뒤늦게 내가 왜 이렇게 자연스럽게 보여줬는지 깨달았다.태겸도 그런 표정은 하지 않았다.상처만 봤다.밴드는 떼어낸 상태였다.얇게 붉은 자국만 남아 있었다.“괜찮네.”“그러니까.”“흉질 것 같진 않고.”“네가 의사냐.”“아니.”태겸이 손을 놓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나는 먼저 손을 내렸다.이전 같았으면 손을 보여주는 것부터 싫었을 텐데.지금은 그 과정 자체가 짧아졌다.괜히 더 생각하기 싫었다.“오늘은 뭐 먹을 건데.”내가 먼저 물었다.태겸이 나를 봤다.“배고파?”“나 말고 너.”“나?”“요 며칠 맨날 대충 먹잖아.”말하고 나서 입을 다물었다.태겸도 대답이 없었다.“왜.”“아니.”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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