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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4화. 내 앞에서는 그러지 마

Penulis: 혜진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9-02 09:17:10

014화. 내 앞에서는 그러지 마

[오늘은 여섯 시 반쯤 갈 수 있을 것 같아.]

답장은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다.

온다는데 뭐라고 하겠어.

오든가.

그 한마디를 썼다가 지웠다.

[알아서 해.]

그것도 지웠다.

결국 화면을 껐다.

그리고 괜히 휴대폰이 신경 쓰였다.

충전은 아침부터 해뒀다.

접촉이 안 좋은 단자를 몇 번 비틀어서 백 퍼센트까지 채워놨고, 화면도 오늘은 멀쩡했다.

누가 연락을 기다려서 그런 건 아니었다.

어제처럼 갑자기 꺼지면 귀찮으니까.

그뿐이었다.

“이안아, 이거 날짜 한번 봐줘.”

미정 이모가 통조림 상자를 밀어줬다.

나는 휴대폰을 뒤집어놓고 유통기한을 확인했다.

“내년 삼월까지예요. 이쪽 선반에 두면 돼요.”

“너 오늘 폰 많이 보네.”

“시간 보는 거예요.”

“벽에 시계 있는데.”

고개를 들었다.

정말 바로 앞 벽에 시계가 있었다.

여섯 시 이십칠 분.

나는 통조림을 상자째 들었다.

“그럼 이제 안 볼게요.”

미정 이모가 웃었다.

“누가 뭐랬니.”

대답하지 않고 창고로 들어갔다.

선반에 상자를 올리는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발소리가 들어왔다.

낯선 사람은 아니었다.

보폭이 일정했다.

급하게 걷지도 않고, 바닥을 끄는 소리도 없다.

요 며칠 동안 몇 번 들었다고 벌써 구분이 됐다.

“안녕하세요.”

한태겸에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제야 창고 밖으로 나왔다.

벽시계가 여섯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확히.

태겸은 미정 이모에게 종이봉투 하나를 건네고 있었다.

“지난번 빵 잘 먹었어요.”

“별거 아니었습니다.”

“이안이 친구가 참 예의가 바르네.”

친구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멈췄다.

태겸이 나를 봤다.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저 새끼도 들었다.

나는 바로 말했다.

“친구 아니에요.”

“그래?”

미정 이모가 태겸과 나를 번갈아 봤다.

“그럼 뭐야?”

대답이 막혔다.

학폭 피해자와 가해자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태겸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학교 동창입니다.”

나는 그를 봤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에 안 들었다.

너무 멀쩡한 말이라서.

“그래, 동창.”

미정 이모는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다. 이안이 여기 와서는 옛날 친구 만나는 걸 한 번도 못 봤거든.”

“이모.”

“왜, 맞잖아.”

태겸의 시선이 잠깐 내 얼굴에 머물렀다.

나는 먼저 창고 쪽으로 돌아섰다.

“일 남았어요.”

“그래. 태겸 씨도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요.”

“도울 일 있으면 돕겠습니다.”

걸음이 멈췄다.

뒤를 돌아봤다.

“왜 일을 도와.”

“하면 안 돼?”

“여기 봉사하러 온 거 아니잖아.”

“지금부터 하면 되지.”

미정 이모가 기다렸다는 듯 장갑 한 켤레를 건넸다.

“그럼 저쪽 생수 좀 같이 옮겨줘요. 이안이가 자꾸 혼자 들려고 해서.”

“이모.”

“허리 나가면 내가 책임져?”

태겸이 장갑을 받았다.

나를 보며 말했다.

“어디로 옮기면 돼.”

나는 한숨을 삼켰다.

“따라와.”

* * *

한태겸은 일을 잘했다.

그게 제일 짜증났다.

어설프게 도와주면 그냥 비키라고 하면 됐다.

그런데 시키지 않은 것도 알아서 했다.

생수 묶음을 창고 안쪽으로 옮기고, 바닥에 눌어붙은 테이프를 떼고, 빈 상자를 접어 한쪽에 쌓았다.

무거운 걸 들 때도 힘주는 티를 내지 않았다.

셔츠 소매를 두 번 접어 팔꿈치 아래에 고정하고, 상자를 들기 전에 어디에 놓을지 먼저 확인했다.

회사에서 서류만 만지는 인간인 줄 알았는데 손이 느리지 않았다.

“그건 거기 아니야.”

내가 말하자 태겸이 바로 멈췄다.

“어디.”

“세제는 아래. 위에 두면 터졌을 때 다 흐르잖아.”

“알겠어.”

토도 달지 않는다.

상자를 다시 내렸다.

나는 옆 선반에 통조림을 채웠다.

좁은 창고 안에서 서로 움직이다 보니 몇 번이나 동선이 겹쳤다.

내가 오른쪽으로 가면 태겸이 멈췄고, 내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움직였다.

한 번도 어깨가 부딪히지 않았다.

그게 이상했다.

예전에는 내가 복도를 막아 서면 한태겸이 벽에 붙어 지나갔다.

내가 일부러 길을 좁혀도 아무 말 못 했다.

지금은 반대였다.

태겸이 훨씬 큰데도 내가 지나갈 공간부터 내줬다.

“왜 그렇게 봐.”

태겸의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안 봤어.”

“봤잖아.”

“너 일하는 거.”

“그걸 왜 봐.”

“잘하길래.”

“이 정도는 다 해.”

“그래.”

태겸은 다시 상자를 들었다.

칭찬을 해놓고 반응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나는 괜히 통조림 캔의 방향을 맞췄다.

라벨이 앞으로 오게.

하나.

둘.

셋.

손끝이 조금 빨라졌다.

“이안아.”

미정 이모가 밖에서 불렀다.

“네.”

“커터칼 어디 뒀어?”

“여기요.”

선반 위에 있던 걸 집어 들고 나가려다가 테이프 묶음이 발에 걸렸다.

몸이 앞으로 조금 쏠렸다.

별일 아니었다.

바로 균형을 잡았다.

문제는 손이었다.

쥐고 있던 커터칼 날이 접히지 않은 상태였다.

손바닥 옆이 따끔했다.

“아.”

칼을 내려놓았다.

길게 베인 건 아니었다.

새끼손가락 아래쪽에 붉은 선이 생기더니 피가 얇게 올라왔다.

“정신 안차리고 뭐 해.”

태겸이 상자를 내려놨다.

“괜찮아.”

“손 보여줘.”

“별거 아니야.”

태겸이 내 앞까지 왔다.

손을 잡지는 않았다.

그냥 자기 손을 펴서 내 앞에 내밀었다.

“보여줘.”

나는 그 손을 내려다봤다.

크고, 손가락 마디가 굵었다.

손등에는 오래된 흉터가 있었다.

셔츠 소매 아래로 반쯤 가려졌다가 손을 펼치자 더 선명해졌다.

내가 만든 건지, 다른 데서 생긴 건지 모르는 흉터.

그걸 물어본 적은 없었다.

지금도 못 물었다.

“진짜 별거 아니라고.”

“그럼 보여줘도 별거 아니겠네.”

말이 얄미웠다.

그런데 손은 계속 펼쳐져 있었다.

잡아당기지도 않고.

나는 결국 다친 손을 그 위에 올렸다.

닿는 순간 체온부터 느껴졌다.

태겸 손이 더 따뜻했다.

손가락이 바로 닫히지는 않았다.

내가 손을 빼지 않는 걸 확인한 뒤에야 엄지와 검지가 내 손목 아래를 가볍게 받쳤다.

“조금 벌어졌네.”

“이 정도로 호들갑 떨지 마.”

“소독은 해야지.”

“내가 해.”

“그래.”

태겸이 바로 손을 놓았다.

너무 쉽게.

나는 왜인지 손을 한 번 내려다봤다.

잡힌 자국도 없었다.

그냥 따뜻했던 느낌만 남았다.

“구급함 저쪽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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