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낮에는 오빠, 밤에는 주인님: Chapter 111 - Chapter 120

123 Chapters

111화. 알았다

금요일 오후의 사무실은 늘 조금 느슨했다.다음 주 예식 일정표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업체에 보낼 메일을 정리하는 동안, 옆자리에서 다연이 기지개를 켰다."오늘 금요일인 거 실화야? 이번 주 왜 이렇게 길었지.""그러게.""너 이번 주 내내 얼굴이 별로였어. 주말엔 좀 쉬어."해원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다연은 더 묻지 않고 자기 화면으로 돌아갔다. 해원은 그게 고마웠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면 대답할 말이 없었다.금요일이었다.해원은 그 단어를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 일요일 아침, 해원의 집 복도에서 태헌을 배웅하며 했던 말이 있었다. 금요일에 봐요. 태헌은 끝나면 연락하겠다고 했다. 아무 일도 없던 아침이었다. 그 뒤로 닷새가 지났다.그 약속이 아직 유효한지 해원은 몰랐다. 그날 이후 연락을 주고받으면서도, 금요일 이야기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해원도 꺼내지 않았다. 지금 같은 때에 약속을 지키자고 말하는 게 맞는지, 그냥 지나가게 두는 게 맞는지 알 수 없었다.여섯 시가 조금 넘어 업무를 마무리했다. 컴퓨터를 끄고 가방을 챙기는데 책상 위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태헌이었다.[끝났어.]해원은 그 짧은 한마디를 한참 내려다봤다.일요일에 태헌이 했던 말 그대로였다. 끝나면 연락할게.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든, 태헌은 그 약속을 그대로 가져와 있었다.해원은 답장을 썼다.[어디로 가면 돼요?]잠시 뒤 호텔 이름과 방 번호가 왔다. 해원은 그 이름을 몰랐다. 태헌의 회사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먼저 갈게."다연에게 인사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지도 앱을 켰다. 택시로 이십 분 거리였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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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금방 올게

태헌은 휴대전화를 다시 거두었다. 화면을 한 번 더 보지는 않았다. 그대로 침대 옆 탁자 위에 엎어놓았다.해원도 그 답장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초인종이 울렸다. 룸서비스였다.태헌이 문을 열고 쟁반을 받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해원은 서류가 밀려난 책상 한쪽에 그릇을 옮겨 담았다. 의자가 하나뿐이라 해원은 소파에, 태헌은 침대 끝에 앉아 접시를 무릎 위에 올렸다.파스타는 조금 식어 있었다. 둘 다 별말 없이 먹었다. 포크가 접시에 닿는 소리만 났다."내일 몇 시에 가요?""열 시쯤.""네."식사를 마친 뒤 해원이 그릇을 정리했다. 태헌이 먼저 씻으러 들어갔다. 물소리가 들리는 동안 해원은 창가에 섰다. 호텔 창밖으로 도로가 내려다보였다. 금요일 밤의 차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저 차들 중 어딘가에는 집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태헌이 나오고, 해원이 씻었다.욕실 거울 앞에 놓인 세면도구는 전부 태헌의 것이었다. 칫솔 하나, 면도기 하나. 해원은 그 옆에 자기 물건을 내려놓을 데가 없어서 세면대 가장자리에 가방에서 꺼낸 작은 파우치를 올려놓았다.씻고 나왔을 때 방은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태헌이 천장 등을 끄고 침대 옆 스탠드만 켜두었다. 태헌은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해원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누르며 창가 소파에 앉았다. 태헌은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해원도 그 시선을 알았다."해원아."해원이 고개를 들었다."이리 와."몇 주 전 해원의 집 거실에서 들었던 말이었다. 그날 해원은 웃으며 걸어갔다. 오늘은 웃음이 나지 않았다. 대신 수건을 내려놓는 손이 그날보다 빨랐다.해원은 침대 앞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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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그래도 좋았다

월요일 오후의 사무실은 주말 예식 뒷정리로 어수선했다. 해원은 일요일에 치른 두 건의 정산서를 맞추고 있었다. 옆자리에서 다연이 탁상 달력을 넘기다 말고 소리를 냈다.“야, 이번 주말 우리 둘 다 오프다. 이게 몇 주 만이야.”“그러네.”“넌 뭐 해? 어머님 댁 가?”“아니. 안 가.”“웬일이래. 쉬는 날이면 맨날 거기 가서 밥 얻어먹고 오더니.”다연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모니터로 돌아갔다. 해원도 정산서로 시선을 돌렸다. 숫자가 잘 들어오지 않았다.예전에는 쉬는 날이면 별생각 없이 엄마 집에 갔다. 엄마가 먼저 오라고 할 때도 있었고, 해원이 그냥 심심해서 갈 때도 있었다. 엄마가 결혼한 뒤로 엄마 집은 그 큰 집이 되었고, 태헌이 있는 날은 넷이서 밥을 먹었다. 그걸 일정이라고 불러본 적도 없었다. 원래 그런 거였다.이제는 갈 수 없었다.누가 오지 말라고 한 건 아니었다. 엄마도, 명우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지난주 그 식탁에서 일어난 뒤로 해원은 그 집 현관을 혼자 열고 들어가는 자기 모습조차 떠올릴 수 없었다.토요일에는 대문 밖에서 태헌을 기다렸다.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엄마가 보고 싶었다. 그건 정말이었다. 그런데 엄마를 보고 싶은 것과 그 집에 갈 수 있는 것은 어느새 서로 다른 일이 되어 있었다.해원은 정산서 맨 아래 합계를 다시 계산했다. 틀린 데는 없었다.여섯 시가 넘어 컴퓨터를 껐다. 가방을 챙기면서 휴대전화를 열었다.[끝났어요.]보내고 나서야 해원은 금요일에 태헌이 보낸 말이 [끝났어.]였다는 게 생각났다. 괜히 웃음이 났다. 일부러 따라 한 건 아니었다.이제 퇴근하면 제일 먼저 연락할 사람이 태헌이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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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너무 오래 기다렸어요

다음 날은 해원이 먼저 퇴근했다.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태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저 먼저 끝났어요.]답장은 사무실 건물을 나서기도 전에 왔다.[가 있어.]해원은 그 말을 보고 가방 안을 확인했다. 어제 받은 카드키가 지갑 옆에 들어 있었다.호텔에 도착해서도 프런트에는 들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익숙해진 층에서 내렸다. 방 앞에 서자 습관처럼 초인종 쪽으로 손이 갔다가 멈췄다.해원은 가방에서 카드키를 꺼냈다.삑.초록불이 들어왔다.문을 열고 들어갔다."……."아무도 없는 방은 처음이었다.태헌이 없는데도 방에는 그의 흔적이 가득했다. 책상 한쪽에는 다 마신 커피잔과 접어둔 영수증이 있었고, 옷장에는 어제 본 셔츠들이 걸려 있었다. 욕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등 뒤에서 문이 닫히며 잠기는 소리가 났다.기분이 조금 이상했다.남의 방에 혼자 들어온 건 맞는데 몰래 들어온 기분은 아니었다. 태헌이 직접 카드를 줬고, 먼저 와 있으라고 했다.무엇보다 자기가 문을 열었다.어제까지는 태헌이 안에서 열어줘야 들어올 수 있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해원은 괜히 웃음이 나서 가방부터 내려놓았다.침대 옆에는 어제 두고 간 충전기가 그대로 꽂혀 있었다.그걸 보니 또 기분이 좋아졌다.해원은 휴대전화를 연결했다.자기 물건이 하나 있다는 것뿐인데, 어제보다 이 방이 조금 덜 남의 방 같았다.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태헌이었다.[씻어.]해원은 메시지를 읽고 바로 욕실 쪽을 봤다.[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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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오래전 일

태헌은 해원이 잡아당기는 대로 끌려오지 않았다. 대신 셔츠 앞을 쥔 해원의 손목을 잡았다."기다리라고 했는데.""기다렸잖아요.""그럼 조금만 더 기다려."해원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태헌이 해원을 돌려세웠다. 등이 벽에 닿았다. 조금 전 직원 목소리를 들으며 숨을 참고 서 있던, 현관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 벽이었다.태헌의 손이 셔츠 단추를 아래에서부터 풀었다. 하나를 풀 때마다 손등이 맨살을 스치고 지나갔다. 해원은 고개를 숙여 그 손을 보려다가 턱이 잡혀 다시 들렸다."나 봐."해원은 태헌을 봤다. 마지막 단추가 풀리자 셔츠가 양쪽으로 갈라졌다. 태헌은 그걸 벗기지 않았다. 어깨 아래로 끌어내려 팔꿈치에 걸쳐두었다. 소매가 팔에 엉켜서 해원은 손을 마음대로 들 수가 없었다.태헌의 입술이 목덜미에 닿았다. 쇄골을 지나 가슴께로 내려가는 동안 해원은 벽에 등을 붙인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한쪽 가슴을 입에 머금자 무릎에서 힘이 빠졌다. 태헌의 팔이 허리를 받쳐 올렸다."아까는 잘 참더라.""……네.""이제는 참지 마."허벅지 안쪽으로 손이 파고들었다. 해원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생각보다 큰 소리라서 스스로 놀랐다. 옆방에 들릴지도 몰랐다. 입술을 깨물자 태헌이 엄지로 그 입술을 눌러 벌렸다."참지 말라고 했어."손가락이 더 깊이 움직였다. 해원은 이번에는 참지 않았다. 참을 수가 없었다. 벽 너머에 누가 있었을 때는 숨소리 하나 내지 못했는데, 지금은 소리가 멋대로 흘러나왔다. 팔꿈치에 걸린 셔츠 때문에 그를 붙잡을 수도 없어서 해원은 그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매달리듯 버텼다.다리가 떨리기 시작하자 태헌이 손을 뺐다. 해원이 원망하듯 올려다봤다."왜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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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어떤 종류의 관심

아버지가 그 이름을 처음 꺼낸 건 평범한 수요일 저녁이었다.본저 식탁에는 둘뿐이었다. 차명우는 국을 몇 숟갈 뜨다가 수저를 내려놓고, 날씨 이야기라도 하듯 말했다."요즘 만나는 사람이 있다."태헌은 젓가락을 든 채 아버지를 봤다."한수경 씨라고. 다음에 한번 소개하마."그게 전부였다. 어디서 만났는지도, 어떤 사람인지도 덧붙이지 않았다. 명우는 다시 국을 떴다.태헌은 그 짧은 말투에서 오히려 무게를 읽었다. 아버지는 가벼운 일을 저렇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십 년 넘게 혼자였던 사람이, 아들 앞에서 처음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진지하다는 뜻이었다."네. 그러세요."태헌은 그렇게만 대답했다.다음 날 아침, 태헌은 늘 쓰던 외부 업체에 메일을 보냈다. 한수경. 기본 인적 사항과 가족관계 확인.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사생활에 새로 깊이 들어오는 사람이면 태헌은 기본적인 확인은 해두는 편이었다. 태원그룹 회장 곁에 서는 사람이었다. 문제가 생긴 뒤에 아는 것보다 생기기 전에 아는 편이 나았다. 아버지는 이런 일을 싫어했으니 말하지 않았다. 태헌에게는 그저 업무의 연장이었다.보고서는 일주일 뒤에 왔다.한수경. 오십 대 중반. 이혼 후 혼자 지내 왔고, 작은 공예 갤러리 '온재'를 운영한다. 수경 본인 명의의 눈에 띄는 채무나 소송도 없었다. 차명우와 만난 지는 반년 남짓. 태헌은 그 부분을 읽으며 조금 놀랐다. 아버지가 반년이나 말하지 않고 있었다는 게 더 의외였다.가족관계 항목에는 딸 하나가 있었다.윤해원. 스물여덟. 웨딩플래너. 근무처 라비엘 프라이빗. 오피스텔에서 혼자 거주.이름 옆에는 회사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작은 사진이 붙어 있었다. 정장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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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별건 없었어

일요일 오전, 해원이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해원은 이불 속에서 휴대전화를 찾아 시간을 봤다. 열 시 반이었다. 알람 없이 이렇게 늦게까지 잔 게 얼마 만인지 기억나지 않았다.금요일 퇴근길에 집에 들러 주말 동안 입을 옷을 몇 벌 챙겨 왔다. 가방에 넣어둔 채 꺼내지도 않았는데, 일어나서 옷장을 여니 그 옷들이 태헌의 셔츠 옆에 걸려 있었다. 언제 걸었는지 몰랐다. 해원은 옷장 문을 잡은 채 잠깐 그걸 보다가 니트 하나를 꺼내 입었다.예전 같으면 일요일 이 시간쯤엔 엄마 집에 갈 준비를 했을 것이다. 점심을 같이 먹고, 오후에는 소파에서 엄마랑 텔레비전을 보다가 저녁까지 얻어먹고 돌아오는 날이었다.이번 주는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해원은 자기 집에도 가지 않았다. 갈 수 있었다. 오피스텔은 그대로 있었고, 거기서 하루 종일 누워 있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금요일 밤에도, 토요일 밤에도 해원은 이 방에 남았다. 태헌이 있는 데 있고 싶었다. 그게 이유의 전부였다.카드키 신호음이 나고 문이 열렸다. 태헌이 커피 두 잔을 들고 들어왔다."깼네.""어디 갔다 왔어요?""프런트."태헌이 커피 하나를 해원에게 건넸다."일주일 연장했어."해원은 그 말에 먼저 안심했다. 오늘이 이 방의 마지막 날이라는 걸 아침에 눈뜨자마자 떠올렸었다. 그러고 나서 바로 협탁 위의 지갑으로 손이 갔다."이번 주는 제가 반 낼게요.""됐어.""제 옷도 여기 있는데요.""옷 몇 벌 걸었다고 방값을 내?""거의 매일 오잖아요."공짜로 묵는 게 싫은 건 아니었다. 태헌에게 뭔가를 받는 것도 이제는 불편하지 않았다. 다만 자기도 거의 매일 쓰는 방인데 그걸 전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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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처음 기록

태헌은 조사 업체에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윤해원의 채권이 지금 어디에 있고, 언제 어디로 넘어가는지.답은 이틀 만에 왔다.해원의 보증채권은 아직 원래 대출을 내준 금융사가 가지고 있었다. 회수를 포기한 다른 부실채권들과 함께 묶음으로 매각될 예정이었다. 입찰은 다음 달 초. 어느 회사가 가져갈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보고서 끝에는 짧은 설명이 붙어 있었다.매각 후 새 채권자는 독촉 및 법적 회수 절차 즉시 진행 가능.태헌은 그 문장을 오래 봤다.채권 매입 회사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잘 알았다. 싸게 사서, 받아낼 수 있는 만큼 받아낸다. 독촉을 시작하고, 지급명령과 압류 절차를 밟고, 결국 급여나 계좌까지 건드릴 수 있었다. 이런 묶음 채권을 사는 회사들은 대부분 그렇게 했다. 그게 그 회사들의 일이었다.모르는 회사의 누군가가 해원의 이름이 적힌 서류를 들고 그녀에게 돈을 갚으라고 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기한을 정하고, 독촉하고, 그녀의 월급과 집에 손을 대는 장면.싫었다.이유를 따져보면 이상한 감정이었다. 해원을 직접 본 건 한 번뿐이었다. 그것도 그녀는 그를 하객 한 명으로 지나쳤다. 말이라고는 식사는 이층이라는 안내 한 마디를 들은 게 전부였다. 그런 여자의 채권을 누가 가져가든 태헌이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게다가 아버지가 만나는 여자의 딸이었다. 이대로 가면 동생이 될 여자였다. 손대면 안 되는 이유로는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예식장 비상계단에서 느꼈던 게 무엇인지 태헌은 이제 정확히 알았다.해원이 아버지가 만나는 여자의 딸이라는 사실은 그의 관심을 꺾지 않았다. 반대였다. 언젠가 가족들 앞에서 동생이라고 불러야 할 여자, 손대면 안 되는 여자라는 사실 때문에 더 원했다.태헌은 그 욕망이 비뚤어졌다는 것도 알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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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내가 가져오면

수요일 저녁, 해원은 호텔 근처 마트에서 장바구니 두 개를 꽉 채웠다. 이번 주 저녁은 자기가 사기로 했다. 매일 밖에서 사 먹거나 룸서비스를 시키는 건 돈도 돈이지만 질렸다. 데우기만 하면 되는 반찬 몇 가지, 즉석밥, 과일, 생수. 계산대에서 봉투를 받고 나서야 들고 가기 무겁다는 걸 알았다. 카드키로 문을 열고 들어가 봉투를 내려놓았다. 냉장고를 열자 캔 두 개가 이미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었다. 해원은 반찬통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겨우 세 개를 밀어 넣고, 나머지는 포기했다. 태헌은 여덟 시가 넘어 들어왔다. 책상 위에 줄지어 놓인 반찬통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이게 다 뭐야." "저녁이요. 이번 주는 제가 산다고 했잖아요." "사 온다는 게 이런 뜻이었어?" "사 먹는 것도 사는 거죠." 태헌이 웃으며 재킷을 벗었다. 둘은 소파 앞 낮은 테이블에 반찬통을 펼쳐놓고 앉았다. 전자레인지가 없어서 데우지도 못한 잡채는 조금 굳어 있었다. 그래도 해원은 오랜만에 밥 같은 밥을 먹는 기분이었다. "오늘 늦었네요." "회의가 길어졌어. 너는?" "저도 오늘 좀 피곤했어요." 해원은 젓가락으로 잡채를 뒤적이다가 한숨을 쉬었다. "다음 달 예식 하나가 신부 어머니 쪽이 엄청 까다로워요. 이번 주에만 컨셉을 세 번 바꾸셨어요. 팀장님이 오늘 그 건을 다른 플래너한테 넘기자고 하셨거든요. 제가 너무 많이 들고 있다고." "그래서?" "제가 한다고 했죠." "왜." "처음부터 제가 맡은 거니까요. 중간에 사람 바뀌면 신부님만 더 힘들어지고. 그리고 다른 사람한테 넘기면 그 사람이 또 처음부터 시달려야 하잖아요." 해원은 말하면서도 스스로 한심하다는 듯 웃었다. 피곤하다고 투덜대면서 그 일을 자기가 다시 가져온 셈이었다. 태헌이 해원을 보고 있다가 무심하게 말했다. "넌 예전에도 그러더니." "예전에요?" 해원이 고개를 들었다. "언제요?" 태헌의 젓가락이 잠깐 허공에 머물렀다. 아주 짧았다. "계약할 때도 그랬잖아." "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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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주인님

문성재는 이틀 만에 방법을 찾아왔다. "다음 달 입찰까지 안 기다리셔도 됩니다. 금융사 쪽이랑 따로 얘기해서 윤해원 건 포함해서 몇 건만 먼저 넘겨받는 걸로 했습니다. 묶음 정리를 빨리 하고 싶은 건 그쪽도 마찬가지라서요." "조건은요?" "그렇게까지 당기시면 값은 조금 더 쳐줘야 합니다. 입찰로 갔으면 덜 줬을 겁니다." "상관없습니다." 성재가 잠깐 말을 멈췄다. 수익이 안 나는 채권을, 값을 더 주고, 서둘러서 사겠다는 의뢰인이었다. 그래도 성재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럼 진행하겠습니다." 일주일 뒤, 성재에게서 전화가 왔다. "윤해원 건 넘어왔습니다. 오늘부로 태원에셋파트너스가 채권자입니다." 태헌은 책상 위에 펼쳐둔 서류를 덮었다. "수고했어요." "추심은 기존 일정대로 이어갑니까? 전 채권자 쪽에서 독촉을 몇 번 넣은 기록이 있습니다. 그대로 이어받으면 다음 단계가 지급명령이고요." "기존 추심은 전부 멈추세요." "독촉도요?" "네. 연락도 하지 말고, 서류도 보내지 마세요." 성재는 이번에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대신 확인할 것만 확인했다. "채권양도 통지는요? 그건 보내야 합니다. 채권자가 바뀌었다는 건 알려야 하니까요." "그건 정상적으로 보내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 뒤로는 그냥 들고만 계시는 겁니까?" 태헌은 잠깐 생각했다. "압류 예고 서류는 준비해 두세요."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멈추라고 하시면서요?" "보내지는 말고. 서류만 만들어서 저한테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채무자 연락은 제가 합니다." 통화가 끝났다. 해원의 채권은 이제 태헌이 통제할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추심을 멈춘 건 진심이었다. 다른 채권자가 해원의 회사로 서류를 보내거나 월급을 건드릴 일은 없었다. 그 권한을 가진 사람이 태헌으로 바뀌었으니까. 그리고 압류 예고 서류는 해원에게 보낼 게 아니었다. 해원 앞에 놓을 서류였다. 태헌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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