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낮에는 오빠, 밤에는 주인님: Chapter 91 - Chapter 100

123 Chapters

91화. 이제 시작이야

해원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태헌의 손에 들린 검붉은 로프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한쪽 끝은 그의 손에 감겨 있었고, 나머지는 바닥 가까이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색이 짙어서, 피부 위에 놓이면 훨씬 선명할 것 같았다.해원은 상의부터 벗었다.단추를 하나씩 풀 때마다 태헌의 시선이 손끝을 따라왔다. 셔츠가 어깨에서 미끄러져 팔꿈치를 지나 떨어졌지만 그는 도와주지 않았다. 해원이 직접 바지를 내리고 마지막 속옷까지 벗는 동안에도 그 자리에 서서 보기만 했다.모든 옷이 바닥에 떨어지고 나서야 태헌이 가까이 왔다.“팔 들어.”해원이 양팔을 들자 태헌은 로프를 길게 풀어 먼저 등 뒤로 넘겼다. 줄이 겨드랑이 아래를 지나 앞으로 돌아오더니 가슴 위를 가로질렀다. 차갑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매끄러운 감촉이 피부 위를 천천히 밀고 지나갔고, 해원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었다.로프는 가슴 윗선을 따라 이어졌다가 가운데에서 한 번 교차했고, 다시 갈라진 줄이 아래로 내려와 가슴 밑을 받쳤다. 태헌은 서두르지 않았다. 등 뒤로 돌아간 줄을 정리하고 다시 앞으로 가져올 때마다 로프가 닿는 자리가 조금씩 달라졌다. 해원이 숨을 들이쉬면 줄이 가슴에 더 단단히 붙었다가 내쉬면 아주 조금 풀리는 것 같았지만, 태헌이 뒤에서 길이를 조절할 때마다 그 작은 여유마저 사라졌다.남은 줄이 허리를 한 바퀴 감고 배꼽 위에서 정리되자 태헌의 손이 떨어졌다.팔은 아직 자유로웠다. 그런데도 자세가 벌써 달라져 있었다. 로프가 가슴과 허리를 잡아주면서 등이 자연스럽게 펴졌고, 위아래 줄 사이로 모인 가슴도 평소보다 더 도드라져 보였다.“앉아.”해원이 침대 끝에 앉자 태헌이 바로 앞에 몸을 낮췄다. 그는 해원의 오른쪽 다리를 들어 무릎을 깊게 접었다. 발뒤꿈치가 엉덩이 가까이 올라오면서 종아리와 허벅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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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안 풀어주실 거에요?

태헌이 먼저 해원의 턱을 끌어올렸다.입술이 겹쳐지자 해원은 평소처럼 그의 목을 감으려고 팔을 들었다. 그런데 손은 배 앞에서 멈췄다. 허리 앞쪽 줄에 붙들린 손목이 한 뼘도 채 올라가지 못하고 팽팽하게 당겨졌다. 키스는 이어지는데 그를 끌어당길 손이 없었다. 해원은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손목을 몇 번 당겨보다가 결국 포기하고, 대신 상체를 그의 가슴 쪽으로 기울였다. 묶인 가슴이 태헌의 셔츠에 닿았다. 로프 매듭이 천에 눌리는 감촉까지 그대로 느껴졌다.태헌이 입술을 조금 떼고 낮게 웃었다.“손 쓰려고 했지.”“……습관이에요.”“오늘은 안 돼.”그가 다시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더 깊었다. 해원은 손 대신 고개를 들어 그를 따라갔고, 태헌이 일부러 조금 물러나면 목을 길게 빼서라도 입술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키스가 끝나자 태헌은 해원의 허리와 접힌 다리를 한꺼번에 받쳐 들었다. 해원은 저항할 새도 없이 몸이 들렸다. 혼자서는 무릎 하나 펼 수 없으니, 침대 안쪽으로 옮겨지는 동안 할 수 있는 건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는 것뿐이었다. 태헌은 해원을 베개 쪽에 눕히고, 벌어진 두 다리가 제자리에 오도록 무릎을 하나씩 잡아 위치를 바로잡았다. 자세를 정한 건 전부 그였다.해원은 등을 대고 누운 채 몸을 조금 틀어봤다. 옆으로 돌아누우려 해도, 다리를 모으려 해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왔다.“이거 생각보다 진짜 못 움직이겠는데요.”“그러라고 묶었어.”“주인님… 너무 못됐어요.”“오늘은 좀 그런 것 같네.”태헌이 그 위로 몸을 낮췄다. 입술이 목덜미를 지나 쇄골로, 가슴 위를 가로지른 줄 바로 위로 내려갔다. 로프 사이로 도드라진 살에 입술이 닿자 해원의 등이 저절로 휘었다. 몸을 비틀어 피하고 싶었는데, 줄에 붙들린 몸은 오히려 그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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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그렇게 좋아?

“그래서 어디 가요?”해원이 안전벨트를 매며 물었다.태헌은 차를 출발시키고 나서야 대답했다.“일단 가.”“어디를요.”“가면서 정하지.”해원은 바로 옆을 봤다.“진짜요?”“응.”“주인님이요?”“왜.”“이런 거 제일 싫어하시잖아요. 어디 갈지, 몇 시에 갈지, 얼마나 걸릴지 다 정해놓는 거 좋아하시면서.”태헌이 신호 앞에서 차를 세웠다.“오늘은 안 정했어.”“왜요?”“그냥.”해원은 조금 의심스러운 얼굴로 그를 봤다.“저한테 맡기려고 그러시는 거예요?”“아니.”“그럼 더 이상한데.”태헌이 웃었다.“갈 데 하나는 있어.”“역시.”“근데 거기 갔다가 그다음은 몰라.”해원은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 정도면 주인님 기준으로는 엄청난 모험이네요.”“시끄러워.”해원은 웃으며 창밖을 봤다.토요일 낮이라 도로에는 차가 많았다. 둘 다 오전 일정이 없어서 평소보다 늦게 만났고, 점심도 아직 먹지 않은 상태였다. 해원은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집 앞에 내려오라는 말만 듣고 나온 참이었다. 평소 같으면 한두 번 더 물었을 텐데 오늘은 별로 상관없었다.차 안에 음악이 작게 흐르고 있었고, 태헌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해원은 휴대전화를 조금 보다가 금방 화면을 껐다.“멀어요?”“한 삼십 분.”“거기 가서 밥도 먹어요?”“근처에 있겠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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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오빠도요

식당을 나온 뒤에도 둘은 어디로 갈지 정하지 않았다.해원이 아까 창밖으로 봤던 소품 가게에 먼저 들어갔다. 특별히 살 건 없었지만 작은 그릇과 향초, 문구류를 천천히 둘러봤다. 태헌은 옆에서 기다리거나 해원이 집어 든 물건을 같이 봤다.해원이 작은 유리잔 하나를 들었다.“예쁘네요.”“사.”“집에 잔 많아요.”“그래도 맘에 들면 사.”해원은 잠깐 들고 있다가 다시 선반에 내려놨다.가게를 나온 뒤에는 바로 옆 디저트 가게에 들렀다. 해원이 마들렌 하나를 샀고, 태헌은 필요 없다고 했다. 해원은 한입 먹다가 남은 걸 반으로 갈라 그의 손에 올려놨다. 태헌은 별말 없이 받아먹고 조금 뒤에 말했다.“괜찮네.”“그렇죠?”둘은 다시 걸었다.주말 오후라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해원이 사람을 피하려고 태헌 쪽으로 조금 붙자, 태헌은 자연스럽게 해원의 손을 잡았다. 한 번 잡은 손은 사람이 적어진 뒤에도 놓지 않았다.대화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는 가게가 있으면 잠깐 들어갔다 나왔고, 마음에 드는 게 없으면 그냥 다시 걸었다. 해원이 걸음을 늦추면 태헌도 같이 늦췄고, 태헌이 길을 건너려고 방향을 틀면 해원도 별말 없이 따라갔다.한참을 걷다가 해원이 네컷사진 가게 앞에서 멈췄다.입구 옆 벽에는 사람들이 찍고 붙여놓은 사진이 가득했다. 안쪽에는 촬영 부스가 여러 개 나란히 있었고, 막 찍고 나온 커플들이 출력물을 보며 웃고 있었다.태헌이 해원을 봤다.“찍을래?”해원이 조금 의외라는 듯 그를 봤다.“먼저 물어보시네요.”“보고 있었잖아.”해원은 다시 가게 안을 봤다.“찍어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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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응 엄마

사진을 찍고 나온 뒤 둘은 한참을 더 걸었다.해는 조금씩 기울고 있었고, 거리에는 낮보다 사람이 많아졌다. 조금 걷다 보니 카페가 하나 보였다.“들어갈까요, 오빠?”말하고 나서 해원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방금 처음 부른 것도 아닌데, 사람들 사이에서 소리 내 부르니 전혀 다른 말처럼 들렸다.태헌은 안을 한번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둘은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해원은 말차 라떼를, 태헌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음료가 나오기 전까지 둘 다 잠깐 휴대전화를 봤다.해원이 먼저 다음 주 일정을 열었다.“다음 주 토요일은 안 될 것 같아요.”태헌이 화면에서 눈을 들었다.“왜.”“회사 행사 있어요. 늦게 끝날 거예요.”“몇 시쯤.”“아홉 시 넘을 것 같아요.”“그럼 일요일.”해원은 일정표를 넘겼다.“일요일은 괜찮아요.”“그럼 그때 보자.”“네.”다음에도 만날지 묻는 사람은 없었다. 언제 만날지만 정했다.해원은 화면을 조금 더 내려보다가 말했다.“목요일도 늦으시죠?”“응.”“해외 쪽 회의 있는 날 아니에요?”태헌이 해원을 봤다.“기억해?”“전에 말씀하셨잖아요.”“맞아.”“그날은 저도 늦어요. 아홉 시쯤.”“그럼 금요일은?”해원이 다시 일정표를 확인했다.“금요일은 괜찮아요.”태헌은 고개를 끄덕였고, 해원도 더 말하지 않았다. 둘은 어느새 다음 주 일정까지 맞춰놓고 있었다.음료가 나왔다. 해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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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이른 도착

해원이 눈을 떴을 때 태헌은 아직 자고 있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온 빛이 침대 끝까지 와 있었다. 어제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늦게 들어왔고, 자정이 가까워서야 잠들었다. 일요일이라 둘 다 오전 일정도 없었다. 해원은 옆으로 누운 채 잠든 태헌을 잠시 보다가 침대에서 조심스럽게 빠져나왔다. 씻고 나온 뒤 냉장고를 열어봤다. 제대로 해먹을 만한 건 별로 없었다. 계란 몇 개와 우유, 식빵이 전부였다. 해원은 식빵을 꺼내다가 결국 배달 앱을 켰다. 한참 메뉴를 보고 있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일어났어요?” 태헌이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며 주방으로 들어왔다. “응.” “뭐 드실래요?” “아무거나.” 해원이 휴대전화를 내려다봤다. “그 말 제일 어려운데.” 태헌이 냉장고를 열었다. “먹을 거 없네.” “그래서 보고 있잖아요.” 태헌은 물을 꺼내 한 모금 마시더니 해원 옆에 섰다. “국밥.” “일어나자마자요?” “점심때 다 됐어.” 해원은 메뉴를 바꿔 가까운 식당에서 국밥을 주문했다. 음식이 오는 동안 거실을 조금 정리했다. 어제 벗어둔 옷을 치우고, 소파 위에 놓인 가방도 방으로 옮겼다. 태헌은 식탁에 앉아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 해원이 물었다. “오늘 진짜 일정 없으세요?” “응.” “회사도요?” “전화 오면 받는 정도.” “그럼 조금 더 있어도 되겠네요.” 태헌이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 세 시에 오신다며.” “네.” “그 전에 갈 거야.” “왜요?” “아침부터 여기 있으면 이상하잖아.” 해원은 잠깐 생각했다. 수경은 태헌이 해원 집에 드나드는 것 자체를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예전부터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것도 알고 있었고, 식사나 부탁 때문에 들르는 일도 몇 번 있었다. 하지만 일요일에 전날 입었던 옷 그대로 집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면 얘기가 달랐다. “그건 그렇네요.” 해원은 별다른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초인종이 울렸다. 배달이 도착했다. 둘은 식탁에 마주 앉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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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너만 와

“엄마.” 해원의 목소리가 먼저 나왔다. 수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채 해원과 태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손에는 작은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방금 전까지 해원의 허리에 있던 태헌의 손은 이미 떨어져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조금 전 장면이 없던 일이 되지는 않았다. 해원은 자기 입술이 아직 뜨거운 것도, 둘 사이가 너무 가까웠던 것도 뒤늦게 의식했다. 태헌이 한 걸음 물러났다. 해원은 그대로 서 있었다. 이미 늦었다. 수경은 전부 봤다. “엄마, 그게…….” 말을 꺼냈지만 뒤가 이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수경이 천천히 두 사람 쪽으로 걸어왔다. 몇 걸음 오다가 다시 멈췄다. “너희가…….” 말이 끊겼다. 수경은 태헌을 봤다. 그리고 다시 해원을 봤다. “방금…….” 이번에도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해원은 엄마 얼굴을 제대로 보기 어려웠다. 차라리 화를 냈으면 덜 무서웠을 것 같았다. 수경은 아직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모르는 사람처럼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수경이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었다. “잠깐만.”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수경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가 바로 내렸다. 다시 해원을 봤다. “내가 잘못 본 거야?” 해원의 입술이 움직였다. 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잘못 봤다고 하면 됐다. 순간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고, 오해라고 둘러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엄마 얼굴을 보고 있으니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수경이 다시 물었다. “……잘못 본 거 아니지?” 해원은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 아주 작게 대답했다. “응.” 수경의 표정이 굳었다. 그 뒤로 또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해원은 수경이 자기를 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다. 수경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럼 너희…….” 이번에도 한 번 멈췄다. “무슨 관계야?” 해원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옆에 태헌이 있다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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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좋아하는거야?

좋아하는 거야?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해원은 복도 끝을 한 번 봤다. 태헌은 아직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따라오지도, 문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은 채였다. 문이 가운데서 맞물리자 그 모습이 사라졌다.엘리베이터 안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수경은 층수 표시판만 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아까부터 들고 있던 작은 쇼핑백이 그대로 들려 있었다. 해원은 그 쇼핑백에 뭐가 들었는지 알 것 같았고, 동시에 전혀 모를 것 같았다. 반찬일 수도 있고, 지난번에 말했던 이불 커버일 수도 있었다. 평소 같으면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이게 뭐야?" 하고 물었을 것이다. 지금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수경이 먼저 내렸다. 해원은 한 걸음 뒤에서 따라갔다. 수경의 차는 입구에서 가까운 기둥 옆에 서 있었다. 평소처럼 대충 세워둔 게 아니라 주차선에 반듯하게 맞춰져 있었다. 딸 집에 오는 날이면 늘 그랬다.수경이 운전석 문을 열었다. 해원은 잠깐 망설이다가 조수석에 탔다.문이 닫히자 주차장의 소음이 한꺼번에 멀어졌다. 수경은 쇼핑백을 뒷좌석에 내려놓고 운전대에 두 손을 얹었다. 시동은 걸지 않았다.해원은 무릎 위에 손을 모았다. 무슨 말이라도 먼저 해야 할 것 같았다.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설명하겠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아까 복도에서 한 말을 다시 한번 해야 할지. 어떤 말을 골라도 첫마디부터 틀릴 것 같아서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수경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운전대를 쥔 손가락이 몇 번 움직였다가 다시 멈췄다. 옆 칸에 차 한 대가 들어와 서더니 운전자가 내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둘 다 그쪽을 보지 않았다.해원은 수경이 무엇부터 물을지 짐작해보려 했다. 언제부터냐고 물을 것 같았다. 아니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그도 아니면 방금 본 게 뭐냐고 다시 확인할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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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네가 말해

수경은 한동안 창밖만 보고 있었다. 주차장 천장의 형광등 하나가 깜빡였다가 다시 켜졌다. 해원은 그 불빛이 몇 번 흔들리는 동안 엄마가 무언가를 차례대로 세고 있다는 걸 느꼈다. 상견례, 결혼 준비, 결혼식, 그리고 그 뒤의 날들."그럼 그때부터야?""…….""상견례 때부터 둘이 그런 사이였냐고."해원은 고개를 저었다가 멈췄다. 아니라고 하기에는 그때 이미 아무 사이도 아니었던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금 같은 관계였다고 하면 그것도 거짓이었다. 해원이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 몰라 입을 열었다 닫는 사이, 수경이 먼저 다음 말을 꺼냈다."그럼 내가 결혼했을 땐……."수경은 그 문장을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가, 이번에는 돌려 말하지 않았다."내가 명우 씨랑 결혼한 뒤에도 계속 만났어?"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엄마를 봤다. 부정하려면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엄마 얼굴을 보고 있으니 아니라는 말이 목에서 올라오지 않았다.수경이 눈을 감았다.해원은 엄마가 무엇을 떠올리는지 다 알지는 못했다. 그래도 짐작할 수 있는 날이 하나 있었다. 수경이 가장 많이 웃었던 날. 딸과 새 아들이 될 사람을 나란히 두고, 이제 정말 가족이 됐다고 믿었던 날.그날 해원도 그 자리에 있었다. 엄마의 웃는 얼굴을 봤다. 그리고 그 전날 밤과 그다음 날들을, 엄마는 모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엄마, 미안해."말이 나왔지만 너무 작았다. 수경은 눈을 뜨지 않았다. 해원은 그 말이 아무것도 덮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 더 말했다."미안해."수경이 천천히 눈을 떴다. 해원을 보지는 않았다. 운전대 가운데 로고 언저리를 보며, 무언가 붙잡을 곳을 찾는 사람처럼 물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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