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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다정한 지옥: Chapter 11 - Chapter 20

76 Chapters

11화

“뭐가요.”“말이 통하는 사람이어서.”“지난번엔 사람 취급도 안 하더니.”이재의 눈이 조금 커졌다.“제가 언제요?”“비슷했습니다.”“피해의식 아니에요?”“직업상 그런 건 별로 없습니다.”이재는 캐모마일을 한 모금 마셨다. 말이 통한다는 평가는 조금 보류하기로 했다.“그럼 저한테 이걸 알려주는 이유는요?”“알고 싶다고 했잖아요.”이재가 그를 봤다.―그건 제가 결정할게요.며칠 전 자신이 한 말이었다.“알고 결정하겠다고 했으니까.”이번에는 그 말을 지키러 온 모양이었다.“그럼 제가 위험한 건 아니죠?”“모릅니다.”“그럼 됐네요.”“모른다고 했지, 아니라고는 안 했는데요.”이재가 눈을 가늘게 떴다.“꼭 그렇게 말해야 돼요?”“아니라고 했다가 위험해지면 어떡하려고?”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마음에는 안 들었다.“그 사람은 죽었잖아요.”이재가 말했다.“네.”“그건 확실하고요?”“기록상으로는요.”“기록상?”“당시 신원 확인 절차에 문제는 없었습니다. 사망 처리도 정상적으로 됐고.”이재는 캐모마일 잔을 만지작거렸다.“그럼 이건 그 사람이 한 게 아니네요.”“그렇게 보는 게 맞겠죠.”“그런데 하는 짓은 비슷하고.”“네.”죽은 사람이 돌아올 수는 없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누군가가 죽은 사람의 방식을 따라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게 더 나은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형사님은 원래 그렇게 의심이 많아요?”“직업이 이래서.”“피곤하겠네.”“남 걱정할 때는 아닐 텐데.”“저 안 위험하다면서요.”“그런 말 안 했는데.”이재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진짜 재수 없어.”말이 나간 뒤에야 아차 싶었다. 태혁이 그녀를 봤다. 이재는 모른 척 캐모마일을 마셨다.이미 늦었다.“이제 좀 편해졌나 보네.”“……뭐가요?”“말 놨잖아요.”“혼잣말이었어요.”“다 들리던데.”이재는 대꾸하지 않았다. 태혁은 서류를 챙겼다.“오늘은 여기까지예요.”“다음에 또 확인되는 거 있으면요?”태혁의 손이 잠시 멈췄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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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역시 대리님밖에 없어요.”“한 시간 넘으면요?”다은이 잠깐 고민했다.“그때는 조금 미워할게요.”“조금이면 괜찮네요.”결국 조금 미움받을 시간은 생겼다. 수정된 데이터를 다시 돌리고 보고서에 들어간 숫자까지 전부 맞춰본 뒤에야 이재는 모니터 전원을 껐다. 열 시가 가까워져 있었다.옆자리에서는 다은이 가방을 챙기며 기지개를 켰다.“내일 아침의 제가 오늘의 저를 엄청 싫어하겠죠?”“오늘의 다은 씨가 사고 쳤으니까 감수해야죠.”“대리님까지 왜 그래요.”“저도 피해자잖아요.”“아.”다은이 억울해할 명분을 잃었다. 이재가 웃으며 가방을 챙겼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다은은 말을 걸 때마다 묘하게 허리를 세웠다.회장 딸과 같은 팀.그 사실 하나가 사람을 꽤 불편하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요 며칠 사이에는 적어도 농담 한 번 할 때마다 표정부터 살피는 일은 없어졌다. 이재로서는 그쪽이 훨씬 편했다.사무실을 나서자 센서가 사람을 따라 조명을 밝혔다. 낮에는 통화 소리와 키보드 소리가 끊이지 않던 공간이 지금은 조용했다. 빈 책상 위로 꺼진 모니터만 줄지어 서 있었다.둘은 엘리베이터 앞에 나란히 섰다. 다은이 휴대폰을 확인했다.“저 택시 거의 왔어요. 대리님은요?”“차 가져왔어요.”“이렇게 피곤한데 운전 괜찮으세요?”“이 정도는 괜찮아요.”“다행이다.”그러더니 다은이 문득 덧붙였다.“저는 왠지 기사님이 데리러 오실 줄 알았어요.”이재가 고개를 돌렸다. 다은의 표정에 한 박자 늦게 후회가 떠올랐다.“……방금 제가 굉장히 편견에 찬 발언을 한 것 같은데요.”“도대체 회장 딸이 나오는 드라마를 얼마나 본 거예요?”“많이는 아니고요.”“몇 개나 봤는데요.”“……꾸준히?”“많이 봤네.”다은이 웃음을 참다가 결국 고개를 숙였다.“죄송해요.”“뭐가 죄송해요.”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다은이 먼저 올라탔다.“대리님 생각보다 은근히 짓궂으시네요.”“생각보다?”다은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이것도 편견인가.”“오늘 많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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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평소보다 빠른 목소리였다.이재는 순간 아무 말도 못 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자신인데, 놀란 건 저쪽 같았다.―윤이재 씨.“……어떻게 알았어요?”―당신이 먼저 전화했잖아요.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투였다. 곧장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어디예요.“회사요.”―지하주차장?“네.”―몇 층.“3층.”―혼자예요?“네.”―말해요.이재는 계속 걸었다.“사람이 하나 있는데.”호흡이 조금 짧아졌다.“제 차 앞에 있던 차에 계속 타고 있었던 것 같아요.”―지금은요.“제가 지나가니까 내렸어요.”전화 너머에서 의자가 밀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따라와요?이재가 옆에 세워진 SUV의 창에 시선을 주었다. 뒤로 남자가 비쳤다.“……네.”대답과 거의 동시에 태혁 쪽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차로 가지 말고 엘리베이터로 가요.“가고 있어요.”―계속 가요. 뛰지 말고.남자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이재도 속도를 높였다.―절대 뒤돌아보지 말고.“안 봐요.”―잘하고 있어요.짧은 한마디였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막혀 있던 숨이 아주 조금 내려갔다.태혁 쪽에서 시동이 걸렸다.―조금만 기다려요.“뭘요?”―갈게요.이재의 걸음이 잠깐 느려졌다.“여길요?”―네.“강태혁 씨.”―왜요.“경찰은 부르지 마요.”망설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알았어요.“진짜요?”―네.이유는 묻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마음을 놓이게 했다. 잠시 뒤 태혁이 말했다.―대신 내가 갈게요.이번에도 허락은 구하지 않았다.“별일 아닐 수도 있어요.”―그럼 좋은 거고.역시 간단했다.―엘리베이터 보여요?“네. 거의 다 왔어요.”그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저기...”숨이 턱 막혔다. 이재의 걸음이 빨라졌다.―이재 씨.전화 너머의 태혁도 바로 반응했다.“괜찮아요.”대답은 자동이었다. 괜찮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지하 5층에 있었다.B5.뒤에서 발소리가 계속 다가왔다.B4.“저기요!”이번에는 훨씬 가까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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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그럼 왜…….”이재는 한 번 숨을 골랐다.“계속 따라오셨어요?”김현우의 얼굴이 난처하게 굳었다.“퇴근하려고 내려왔는데 대리님 차가 아직 있더라고요.”“제 차를 알아요?”“몇 번 봤습니다.”대답하고 나서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얼굴이 더 굳었다.“아니, 일부러 찾아본 건 아니고요. 주차 위치가 비슷해서.”“그래서요?”“야근하시는 것 같아서…… 기다렸습니다.”“왜요?”김현우가 시선을 피했다.“번호를... 여쭤보고 싶어서요.”이재는 잠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차 안에서 기다렸다가. 자기가 지나가니 내려서. 주차장 끝까지 뒤따라와 엘리베이터 문까지 잡아 열었다. 이유는 번호. 평소였다면 황당해서 웃었을지도 몰랐다. 지금은 웃을 힘도 없었다.“……오늘은 그냥 가주세요.”“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김현우는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 1층에 도착하자 연신 고개를 숙이며 먼저 내렸다. 문이 닫혔다. 그제야 이재는 벽에 머리를 기댔다.온몸에서 힘이 빠졌다.―갔어요?“네.”태혁의 목소리도 조금 전보다 낮아졌다.―숨은.이재가 천천히 들이쉬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들어왔다.“괜찮아지고 있어요.”잠깐 아무 말이 없었다. 전화 너머로 차가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렸다.“강태혁 씨.”―네.“진짜 아무 일도 아니었어요.”―알아요.“그냥 회사 신입이었고.”―들었어요.“그러니까 천천히 와도 돼요.”―싫은데.이재가 눈을 깜빡였다.“뭐가요?”―천천히 가는 거.짧았다. 더 할 말도 없었다. 이재는 휴대폰을 귀에 댄 채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십 분도 지나지 않아 검은 세단 한 대가 건물 진입로로 들어왔다. 차가 제대로 멈추기도 전에 운전석 문이 열렸다. 강태혁이었다.검은 니트에 어두운 바지 차림으로 차 문을 닫고 곧장 로비로 들어왔다. 평소보다 걸음이 빨랐다. 이재는 소파에 앉아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발견한 태혁의 시선이 그대로 고정됐다.다가오자마자 얼굴부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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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이재가 그를 봤다. 태혁의 표정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애매하면 무조건 나한테 전화해요.”“…….”“혼자 판단하지 말고.”말투는 부탁보다 지시에 가까웠다. 평소였다면 싫다고 했을지도 몰랐다.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알았어요.”태혁은 그제야 차에서 내렸다. 이재는 그가 자기 차 쪽으로 걸어가는 걸 잠깐 보고 있다가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다.회사 신입 하나가 번호를 물어보려고 기다리고 있었고, 그걸 모르던 자신이 겁을 먹었다. 그리고 강태혁에게 전화를 했다.그뿐이었다.무서운 순간 그가 생각난 건 이상할 것도 없었다.십 년 전에도 가장 무서웠던 순간의 끝에 강태혁이 있었으니까.그건 설명할 수 있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건 그다음이었다.전화를 건 걸 후회하지 않았다. 달려오겠다는 말을 듣고도 싫지 않았고. 정말 나타난 얼굴을 봤을 때는. 조금 안심했다.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런데도 다음에 또 같은 일이 생긴다면... 아마 다시 전화할 것 같았다.강태혁은 이재가 내려준 자리에서 몇 걸음 걸어 자기 차 앞에 섰다. 건물 입구 한쪽에 비스듬히 붙어 있는 검은 세단. 주차선은 없었다. 불법 주차였다.형사가 불법 주차라니. 급하게 올라오느라 눈에 들어오는 자리에 처박아둔 결과였다. 태혁은 운전석 문을 열면서 한 번 뒤를 돌아봤다. 이재의 차는 이미 진입로 끝을 돌아 사라진 뒤였다.―안 타요?차 있는 데까지 태워주겠다는 뜻이었다. 바로 위라고 말했으면서 결국 얻어탔다. 태혁은 차에 올라 문을 닫았다. 휴대폰을 거치대에 올리려다 잠시 멈췄다.통화 기록 맨 위에 이름이 남아 있었다.윤이재.그쪽에서 먼저 전화를 한건 처음이었다.―숨이…….그 목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틈으로 손 하나 들어왔을 뿐이었다. 그 순간 이재는 십 년을 거슬러 올라갔다. 태혁은 화면을 끄고 휴대폰을 거치대에 꽂았다.로비에서 이재를 만났을 때는 상태만 봤다. 다친 곳이 있는지. 호흡은 돌아왔는지. 혼자 운전해도 되는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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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어.”준호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태혁은 첫 번째 영상을 다시 돌렸다.한 번. 두 번.남자의 동선을 머릿속에 넣었다.첫 번째 사건. 두 번째 사건.거짓 신분. 집 안을 살핀 행동. 가족사진. 같이 사는 사람. 귀가 시간.겹치는 부분은 늘었다. 하지만 아직 그뿐이었다.왜 지금인지. 왜 그 집들인지. 두 사건 사이에 어떤 연결이 있는지. 잡힌 건 없었다.태혁은 영상을 멈췄다.“앞뒤 한 시간씩 더 확인해.”“네.”“차량도 봐. 같은 번호 반복해서 잡히는지.”“알겠습니다.”준호가 메모하다가 잠깐 고개를 들었다.“아까 나가신 건 윤이재 씨 때문이었습니까?”태혁의 시선이 화면에서 떨어졌다.“왜.”“혹시 이쪽 사건이랑 관련된 일인가 해서요.”준호가 태혁의 휴대폰에 뜬 이름을 본 모양이었다. 하긴. 남들이 놓친 몇 초짜리 장면을 들여다보는 게 형사라는 직업이었다. 태혁은 짧게 대답했다.“아니야. 사건이랑 상관없어.”준호는 그걸로 끝냈다. 질문이 더 이어지지 않는 게 마음에 들었다. 다시 키보드 소리만 이어졌다. 태혁도 화면으로 돌아갔다.십 분. 이십 분. 영상을 몇 번이고 되감았다. 결론은 달라지지 않았다.계획적으로 접근했다는 가능성만 하나 더 높아졌다. 그 이상은 없었다. 한참 뒤 준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커피 사 오겠습니다. 드실 겁니까?”“아메리카노.”“아이스요?”“어.”준호가 사무실을 나갔다. 주변이 조용해졌다. 태혁은 의자에 등을 기대고 목덜미를 한번 문질렀다. 모니터 한쪽에는 십 년 전 사건 기록이 함께 떠 있었다.현장 기록. 피해자 목록. 당시 작성된 서류. 페이지를 넘기던 손이 잠깐 멈췄다.윤이재. 열여덟. 태혁은 몇 초간 이름을 보다가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십 년 전의 이재와 지금의 이재는 좀처럼 한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기억 속에는 얼굴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날의 상황이 먼저였다.문. 피. 구급대원. 그리고 들것 위에서 눈을 감은 어린 여자애.그런데 지금의 윤이재는 달랐다. 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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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보내고 나서야 손가락이 멈췄다.굳이?사건과 관련된 질문도 아니었다.신변보호 중인 것도 아니고. 이재가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는 건 별일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태혁은 화면을 껐다. 오늘 상태가 안 좋았으니까 확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정리하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휴대폰이 진동했다.[네. 들어왔어요.]짧았다. 태혁은 화면을 내려놓으려 했다. 곧 메시지가 하나 더 올라왔다.[설마 아직도 일해요?]손이 멈췄다.[이제 나가요.]십여 초쯤 뒤 답이 왔다.[늦었네요.]조금 있다가 한 줄이 더 붙었다.[조심히 들어가세요.]태혁은 그 문장을 잠깐 봤다. 별것 아닌 인사였다. 오늘 자신이 이재에게 했던 말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네.]답은 그것뿐이었다. 보내고 보니 지나치게 딱딱한가 싶었다. 그 생각이 든 것부터가 조금 이상했다. 태혁은 더 쓰려던 손을 거뒀다.원래 이 정도면 됐다. 휴대폰을 거치대에 끼우고 차를 출발시켰다.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오자 한산한 도로가 이어졌다.첫 번째 신호에 걸렸을 때였다. 태혁은 별생각 없이 휴대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면은 꺼져 있었다. 새 연락이 올 이유도 없었다. 대화는 이미 끝났다. 그걸 알면서 확인했다.신호가 바뀌었다. 태혁은 다시 앞을 보고 차를 움직였다. 오늘 머릿속을 가장 오래 차지한 건 당연히 사건이어야 했다.두 개의 집. 같은 방식의 접근. 십 년 전의 기록. 그런데 그 사이로 자꾸 다른 장면이 끼어들었다.운전석에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던 이재. 희고 작은 얼굴. 눈 밑의 점.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가늘어지던 눈.그런 것들은 굳이 기억해둘 필요가 없는 정보였다. 그런데도 남아 있었다. 태혁은 무심코 미간을 문질렀다. 그동안은 보지 못했던 건지, 볼 생각이 없었던 건지. 그 차이가 조금 걸렸다.***다음 날 아침, 이재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출근했다. 어젯밤 지하주차장에서 거의 주저앉았던 사람치고는 상당히 멀쩡한 출근이었다. 잠은 설쳤고 속은 비어 있었지만, 화장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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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옆에 있던 다은이 사진을 슬쩍 보고 눈을 크게 떴다.“누구예요?”“뉴욕에서 같이 일하던 친구들이요.”다은이 사진과 이재를 번갈아 봤다.“신기해요.”“뭐가요?”“외국인 친구들 있는 거요. 뭔가…… 부러워요.”이재가 웃었다.“같이 일하다 보면 안 친해질 수가 없어요.”특히 야간 근무와 진상 고객까지 몇 번 함께 겪고 나면 더 그랬다. 사진 속 세 사람은 이재가 떠나기 전과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퇴근 직전 같이 욕하고, 쉬는 날이면 별 목적도 없이 차를 몰고 나가던 얼굴들.십 년 동안 미국에 있었으니 그곳에도 당연히 자신의 생활이 있었다. 다시 메시지가 올라왔다.[Come visit before we forget your face.] (우리 네 얼굴 까먹기 전에 놀러 와.)이재는 잠깐 화면을 보다가 답했다.[Miss you guys.] (다들 보고 싶어.)하트가 하나. 우는 얼굴이 둘. 욕이 하나.클로이의 애정 표현은 여전히 조금 거칠었다.“친구분들 보고 싶으시겠어요.”다은의 말에 이재가 사진을 한 번 더 바라봤다.“응. 보고 싶네요.”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 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지는 않았다. 그곳에서의 십 년이 싫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평온했고, 익숙했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무도 캐묻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편하기까지 했다.다만 한국에 돌아와 며칠을 보내고 나니 알 것 같았다. 미국은 잘 만들어놓은 생활이었고, 한국은 좋든 싫든 자신의 삶이 시작된 곳이었다. 도망치듯 떠났으니, 한 번쯤은 제 발로 돌아와 살아보고 싶었다.***점심 무렵, 회의실에서 나온 이재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속도를 조금 늦췄다. 그중 자신의 아버지 윤정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윤정호는 아주 잠깐 딸을 바라보더니 고개만 가볍게 까딱했다. 딱 회사에서 마주친 직원에게 할 법한 인사였다. 이재도 얌전히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스쳐 지나갔다.조금 웃긴 건 아버지의 입매가 평소보다 살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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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태혁의 휴대폰이 벌써 네 번째 울렸다.발신자는 강유진. 세 번째까지 넘긴 태혁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탕비실로 들어갔다. 급한 일이면 메시지부터 남겼을 누나였다. 아무것도 없는 걸 보니 목숨이 오가는 일은 아닐 터였다.태혁이 전화를 받았다.“왜.”―야. 너 살아 있어?“어.”―엄마가 실종신고 하겠대.태혁은 정수기에서 물을 받았다.“하라 그래.”―어디다?“경찰.”―네가 경찰이잖아, 미친놈아!“빨리는 찾아주겠네.”―엄마 전화 좀 받아.“바빴어.”―오늘 집에 와. 엄마가 밥 해놨대.“오늘 늦어.”―늦게라도 와.잠깐 벽시계를 확인한 태혁이 컵을 들었다. 하긴, 본가에 안 간지도 한참이긴 했다.“알았어.”―엥? 온다고?“응.”이번에는 유진이 잠시 말을 멈췄다.―별일 없지?태혁은 물을 한 모금 삼켰다.“없어.”―알겠어. 이따 봐.“어.”통화가 끝났다. 자리로 돌아오자 준호가 추가로 확보된 CCTV를 띄워놓고 있었다.“1차 사건 전후 영상 더 왔습니다.”태혁은 곧장 의자를 당겨 앉았다. 화면 속 남자는 여전히 얼굴을 남기지 않았다. 첫 번째 집에서도. 두 번째 집에서도.비슷한 체격에 비슷한 접근 방식. 집에 들어가기 전에는 주변을 살폈고, 안에서는 가족사진과 동거인, 귀가 시간을 확인했다. 닮은 점은 늘어나는데 두 피해자를 잇는 선은 아직 없었다.통화 기록과 금융 거래. 병원. 보험. 직장.하나씩 겹쳐보았지만 같은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태혁이 영상의 재생 속도를 낮췄다.“여기.”준호가 화면을 멈췄다.“흰색 세단이요?”“앞에도 있었어.”십여 분 전까지 되돌리자 같은 차가 한 번 더 걸렸다. 번호판은 보이지 않았다. 우연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확인해야 했다.“동선 더 따라가.”“네.”준호가 곧장 다른 영상을 열었다. 그 뒤로 한참 더 화면을 돌렸지만 새로 잡히는 건 없었다. 준호가 시계를 확인하고 말했다.“팀장님.”“왜.”“오늘 집에 가신다면서요.”태혁의 시선이 옆으로 갔다.“너 나 스토킹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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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한 시간쯤 뒤, 태혁은 다시 현관에 서 있었다. 올 때는 빈손이었는데 나갈 때는 반찬 봉투가 양손에 하나씩 들려 있었다. 안을 확인한 태혁이 말했다.“이걸 언제 다 먹어요. 혼자 사는데.”“아침에도 먹고 저녁에도 먹어.”주은이 과일까지 넣으려 하자 유진이 옆에서 자연스럽게 받아 들었다.“사과는 나 줘. 얘 잘 안 먹잖아.”“그래?”“응. 대신 이거 가져가.”유진은 냉장고에서 작은 반찬통을 꺼내 태혁의 봉투에 넣었다.“장조림. 어제 했어.”태혁이 반찬통을 한번 내려다봤다.“누나가?”“응.”잠깐의 침묵 뒤.“잘 먹을게.”유진이 오히려 조금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왜 그렇게 봐.”“아니. 웬일로 순순히 대답하나 해서.”태혁은 대꾸하지 않고 봉투 손잡이를 정리했다. 유진이 옆에서 한쪽 매듭이 느슨한 걸 보고 대신 고쳐 묶었다.“운전하다 쏟지 말고.”“응.”“통은 다음에 줘도 돼.”“다음에 올 때 줄게.”그 말에 유진이 손을 멈췄다가 고개만 끄덕였다.“그래.”주은이 현관까지 따라 나왔다.“운전 조심하고.”“네.”“전화도 좀 받고.”“받을게요.”이번에는 바로 대답했다. 문을 닫기 전 태혁은 누나를 한번 봤다.“잘 가.”유진이 먼저 말했다. 태혁은 고개를 까딱했다.“응.”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휴대폰이 울렸다. 박준호였다.[흰색 세단 동선 추가 확인 중입니다. 아직 번호는 안 잡혔습니다.][그래. 남은 건 내일 해.]답장을 보내고 화면을 껐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 층수를 눌렀다.―운전 조심하고.조금 전 어머니가 한 말이었다. 그런데 닫힘 버튼에 손을 올리는 순간 다른 목소리가 그 뒤를 이어왔다.―조심히 들어가세요.윤이재. 태혁의 손이 잠깐 멎었다. 어제는 자기가 먼저 물었다. 집에 들어갔느냐고.오늘은 별일이 없었다. 그러니 연락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당연한 일이 조금 싱거웠다.태혁은 엘리베이터 문에 희미하게 비친 자기 얼굴을 보다가 눈썹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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