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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Autor: 홍피코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09-04 17:37:46

직원이 두 사람을 안쪽 자리로 안내했다.

창가를 따라 낮은 조명이 길게 이어진 곳이었다. 이재가 먼저 걸었고, 태혁은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몇 걸음인데 이상하게 시선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

검은 원피스는 가까이서 보니 더 그랬다. 노출이 많은 것도 아닌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느다란 몸의 선이 고스란히 따라 움직였다.

태혁은 괜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따라 서울 야경이 볼 만했다.

자리에 도착하자 직원이 이재의 의자를 빼주었다. 이재가 앉고 태혁도 맞은편에 자리했다.

메뉴판이 놓였다.

이재는 바로 펼쳤지만 태혁은 한 박자 늦었다.

“여기 괜찮죠?”

“네.”

“메뉴는요?”

대답은 하는데 정작 메뉴판은 보지 않았다.

이재가 눈을 들었다.

태혁의 시선이 자신에게 있었다.

“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

“아뇨.”

그제야 태혁이 메뉴판을 펼쳤다.

“좋은데.”

“근데 왜 안 봐요?”

“보고 있었습니다.”

“나를 보고 있었잖아요.”

태혁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

이재가 웃었다.

“뭐 먹고 싶은데요?”

“윤이재 씨 먹고 싶은 걸로 골라요.”

“내가 사니까?”

“그건 아니고.”

“그럼?”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태혁은 물잔만 들었다.

뭐야.

아까부터.

이재는 메뉴판으로 시선을 내리면서도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는 걸 느꼈다.

그러고 보니 이쪽만 평소와 다른 것도 아니었다.

오늘따라 반듯한 셔츠에, 평소보다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 가까이 섰을 때 느꼈던 향도 어제보다 조금 선명했다.

괜히 옷장을 몇 번이나 열었다 닫은 게 자기뿐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조금 전부터 붕 떠 있던 기분이 더 이상해졌다.

“강태혁 씨.”

“네.”

“향수 뿌렸어요?”

“네.”

대답이 너무 순순했다.

“왜요?”

태혁이 눈을 들었다.

“나는 향수 뿌리면 안 됩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됐네요.”

“그게 아니라…….”

이재는 말을 고르다 웃었다.

“그런 거 성가셔할 것 같아서.”

“평소에는 그렇죠.”

평소에는.

이재의 손가락이 메뉴판 위에서 멈췄다.

그럼 오늘은 뭐가 다른가.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럼 내가 먹고 싶은 걸로 시킬게요.”

“네.”

이재는 다시 메뉴를 내려다봤다.

아직 와인에는 입도 대지 않았는데 벌써 조금 취한 기분이었다.

***

이재는 몇 가지 요리를 고르고 직원의 추천을 받아 레드와인 한 병을 주문했다.

짙은 붉은색 와인이 잔 안에서 천천히 흔들렸다. 향은 부드러웠는데 첫 모금은 생각보다 독했다. 목을 타고 내려간 열기가 금세 속까지 번졌다.

이재가 잔을 내려놓았다.

“술 잘 마셔요?”

“적당히.”

“적당히?”

“취할 만큼은 안 마십니다.”

“재미없게 마시네.”

태혁이 이재의 잔을 봤다.

“윤이재 씨는요.”

“조금?”

“조금.”

태혁이 이재의 말을 따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저번에 봤으니까.”

설렁탕집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술기운 오른 얼굴로 쓸데없이 말이 많아졌던 것도, 잘생겼다고 생각했던 것도, 집에 돌아가 메시지를 보낼까 말까 한참 고민했던 것도.

이재가 괜히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때는 회식이었잖아요.”

“오늘은?”

“오늘은…….”

데이트.

클로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아주 선명하게 재생됐다.

“첫 데이트인데 취하면 안 되죠.”

말이 입 밖으로 떨어진 순간 이재의 눈이 커졌다.

천천히 태혁을 봤다.

태혁도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

미쳤다.

“방금 거는…….”

태혁이 입술을 한번 눌렀다.

“말실수예요. 말실수.”

결국 태혁이 고개를 숙였다. 웃음을 참으려는 게 너무 뻔했다.

“웃지 마요.”

그 말에 기어이 태혁의 웃음이 터졌다.

크게 소리 내 웃은 것도 아니었다. 짧게 숨을 흘리며 웃었는데, 그게 오히려 더 낯설었다.

이재는 처음 봤다.

강태혁이 저렇게 웃는 얼굴.

평소 단단하게 닫혀 있던 입매가 풀리자 입꼬리 아래로 깊은 입동굴이 생겼다.

……입동굴이 있었네.

이런 걸 발견하고 있는 자신도 좀 어이가 없었다.

“왜 웃냐고요.”

“귀여워서.”

“뭐가요?”

“방금.”

이재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오늘, 저 웃음에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이미 조금 늦은 것 같기는 했지만.

“말실수라니까요.”

“데이트 맞잖아요.”

태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잔을 들었다.

말문이 막혔다. 저렇게 쉽게 인정해버릴 줄이야.

잠깐 태혁을 바라보던 이재도 결국 잔을 들었다.

“그럼.”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맑은 소리가 났다.

“첫 데이트니까 적당히 마셔요.”

태혁이 이재를 보다가 또 웃었다.

“네네.”

또 저 입동굴.

큰일이다.

***

와인은 생각보다 빨리 줄었다.

접시가 몇 번 바뀌는 동안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다른 곳으로 흘렀다.

“영화 좋아한다고 했죠.”

태혁이 물었다.

“네. 혼자 보는 거 좋아해요.”

“왜 혼자 봅니까.”

“편하잖아요. 내가 보고 싶은 거 보고, 끝나면 바로 집에 가도 되고.”

“뭘 주로 보는데요.”

“로맨스.”

“의외네요.”

“왜요?”

“그런 거 안 좋아할 것 같아서.”

이재가 웃었다.

“나도 좋아해요. 로맨스.”

“왜요.”

“음…….”

이재는 잠깐 생각하다 와인잔을 기울였다.

“인생에 로맨스가 없으니까?”

태혁이 잔을 내려놓았다.

“지금도?”

이재가 멈췄다.

눈이 마주쳤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강태혁은 꼭 저랬다.

별것 아닌 것처럼 말해놓고 사람만 곤란하게 만들었다.

“……오늘은 좀 있네요.”

태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다행이네.”

이재는 잠깐 그를 봤다.

괜히 그 한마디만 유난히 가까이 들렸다.

“강태혁 씨도 봐요?”

“뭘요.”

“로맨스 영화.”

“봅니다.”

“진짜?”

“왜 그렇게 놀랍습니까.”

“안 그렇게 생겼으니까.”

“로맨스 영화 보는 얼굴이 따로 있습니까.”

“그건 아닌데…… 강태혁 씨는 안 어울리기는 해요.”

태혁이 피식 웃었다.

“편견 심하네요.”

“어떤 거 좋아해요?”

“결말 좋은 거.”

“해피엔딩?”

“네.”

“오. 진짜 안 어울려.”

“윤이재 씨는요?”

“나도 해피엔딩.”

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어울리네요.”

“왜요?”

태혁이 아주 잠깐 이재를 봤다.

“그렇게 끝났으면 좋겠으니까.”

무슨 뜻인지 굳이 묻지 않았다.

대신 웃었다.

“그럼 영화 취향은 맞네.”

“그러네요.”

“하나는 찾았다.”

“뭘요.”

“같이 할 수 있는 거.”

아, 나 취했나.

뭘 같이 해.

이재는 아무렇지 않은 척 와인을 마셨다.

태혁은 그런 이재를 잠깐 바라보더니 그냥 웃었다.

그게 더 신경 쓰였다.

***

와인이 반쯤 비었을 무렵 이재가 물었다.

“요리는 해요?”

“네.”

“잘해요?”

“꽤.”

“진짜?”

태혁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

“왜 못 믿어요.”

“그냥 의외라서.”

“오늘 의외라는 말 많이 듣네요.”

“오늘 처음 아는 게 많으니까.”

이재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태혁을 봤다.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주방에 서 있는 모습이 생각보다 쉽게 그려졌다.

그러다 혼자 웃었다.

“왜 웃어요.”

“강태혁 씨가 앞치마 두른 거 상상했어요.”

“갑자기?”

“요리한다니까요.”

“그래서 웃었어요?”

“아니.”

이재가 그를 한번 훑었다.

“생각보다 잘 어울려서.”

태혁은 잠깐 그녀를 보다가 물었다.

“해줘요?”

이재의 눈이 올라갔다.

“뭘요.”

“요리.”

“……나한테요?”

“해달라면서요.”

“내가 언제요.”

“방금 눈으로.”

이재가 어이없어 웃었다.

“그런 것도 읽어요?”

“직업이라.”

“그럼 해줘요.”

“그래요.”

대답이 너무 쉽게 돌아왔다.

이재가 오히려 눈을 깜빡였다.

“진짜요?”

“해달라면서요.”

“말 바꾸기 없어요.”

“안 바꿉니다.”

대화는 거기서 끝났는데 생각은 이상한 데로 이어졌다.

강태혁이 요리해주는 걸 먹는 나중.

자기 집인지, 저 남자의 집인지.

생각이 거기까지 갔다가 이재는 와인을 마셨다.

아무래도 술을 너무 빨리 마셨다.

“강태혁 씨 취했죠.”

“아직.”

“근데 왜 이래요.”

“어떤데요.”

“오늘 좀…….”

“좀?”

이재는 그를 빤히 봤다.

“적극적이잖아요.”

태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싫어요?”

이번에는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건 아닌데.”

“그럼 됐네요.”

이재는 괜히 와인잔을 돌렸다.

“오늘 이상하다니까.”

“윤이재 씨도 그런데.”

“내가 뭐가요.”

태혁의 시선이 이재에게 머물렀다.

검은 원피스의 어깨선을 스치듯 지나간 눈이 다시 얼굴로 올라왔다.

짧았다.

그런데 이재는 정확히 알아챘다.

“……옷이요?”

“옷도.”

“또 뭐가 다른데요.”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태혁은 그저 이재를 봤다.

이재가 먼저 버티지 못했다.

“아까부터 왜 자꾸 봐요?”

“예뻐서.”

이번에는 웃을 수가 없었다.

“……오늘만?”

왜 그런 걸 물었는지 자신도 몰랐다.

태혁은 잠깐 이재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은 티가 좀 나는 거고.”

심장이 세게 뛰었다.

이재는 시선을 피했다.

평소에는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남자가 오늘따라 자꾸 예상 밖의 말을 던졌다.

더 곤란한 건, 싫지 않다는 것이었다.

“……진짜 취했네.”

“아직 아니라니까.”

“맨정신에도 그런 말 해요?”

“못 할 건 없죠.”

됐다.

이번에는 한번 받아쳐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맨정신에도 해봐요.”

태혁이 잠깐 멈췄다.

이재의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순간 그가 말했다.

“내일 해줄게요.”

웃음이 사라졌다.

“……뭘요.”

“예쁘다고.”

이재는 말없이 와인을 마셨다.

오늘 저 남자를 이길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와인병 바닥이 보일 무렵이었다.

태혁의 셔츠 소매는 어느새 손목 위로 한 번 접혀 있었다.

손등 위로 옅게 드러난 핏줄과 긴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는 저 손이 자신의 허리를 잡았다.

이재가 불쑥 말했다.

“손이 예쁘네요.”

태혁이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내 손?”

“응.”

이재는 손가락 끝으로 그의 손등을 살짝 건드렸다.

닿고 나서야 조금 늦게 깨달았다.

자기가 먼저 만졌다.

태혁의 시선이 손끝으로 내려갔다.

“윤이재 씨.”

“네.”

“나 안 취했어요.”

이재가 눈을 들었다.

“그래서요?”

“지금 하는 거.”

태혁의 손이 천천히 뒤집혔다.

손끝이 그의 손바닥에 닿았다.

긴 손가락이 느리게 말려 이재의 손을 잡았다.

“술 탓으로 못 돌립니다.”

손바닥이 뜨거웠다.

이재는 손을 빼지 않았다.

“나는 좀 취했는데.”

“알아요.”

“그럼 좀 봐줘야 되는 거 아니에요?”

태혁의 엄지가 이재의 손가락 옆을 느리게 스쳤다.

“뭘 봐줘요.”

그 작은 움직임 하나에 감각이 전부 맞닿은 손으로 쏠렸다.

손가락 하나가 스쳤을 뿐인데 이상할 만큼 선명했다.

이재가 작게 말했다.

“내일 모른 척해줘요.”

“싫은데.”

이재가 눈을 들었다.

“왜요.”

“기억할 거라서.”

이재는 대답하지 못했다.

식사는 진작 끝났고 와인도 거의 비었다.

그런데 둘 다 손을 놓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 남자와 함께 있는 데는 늘 이유가 있었다.

사건이 있어서.

무서워서.

혼자 있기 싫어서.

오늘은 아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이재는 한동안 닿아 있는 손을 바라보다 물었다.

“우리 이제 가야 되는 거 아니에요?”

“가고 싶어요?”

대답은 의외로 쉬웠다.

“아니.”

태혁의 엄지가 다시 한번 손가락을 쓸었다.

“그럼 조금 더 있어요.”

이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을 조금 움직여 그의 손을 제대로 마주 잡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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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정한 지옥   14화

    직원이 두 사람을 안쪽 자리로 안내했다.창가를 따라 낮은 조명이 길게 이어진 곳이었다. 이재가 먼저 걸었고, 태혁은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몇 걸음인데 이상하게 시선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검은 원피스는 가까이서 보니 더 그랬다. 노출이 많은 것도 아닌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느다란 몸의 선이 고스란히 따라 움직였다.태혁은 괜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오늘따라 서울 야경이 볼 만했다.자리에 도착하자 직원이 이재의 의자를 빼주었다. 이재가 앉고 태혁도 맞은편에 자리했다.메뉴판이 놓였다.이재는 바로 펼쳤지만 태혁은 한 박자 늦었다.“여기 괜찮죠?”“네.”“메뉴는요?”대답은 하는데 정작 메뉴판은 보지 않았다.이재가 눈을 들었다.태혁의 시선이 자신에게 있었다.“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아뇨.”그제야 태혁이 메뉴판을 펼쳤다.“좋은데.”“근데 왜 안 봐요?”“보고 있었습니다.”“나를 보고 있었잖아요.”태혁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이재가 웃었다.“뭐 먹고 싶은데요?”“윤이재 씨 먹고 싶은 걸로 골라요.”“내가 사니까?”“그건 아니고.”“그럼?”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태혁은 물잔만 들었다.뭐야.아까부터.이재는 메뉴판으로 시선을 내리면서도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는 걸 느꼈다.그러고 보니 이쪽만 평소와 다른 것도 아니었다.오늘따라 반듯한 셔츠에, 평소보다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 가까이 섰을 때 느꼈던 향도 어제보다 조금 선명했다.괜히 옷장을 몇 번이나 열었다 닫은 게 자기뿐은 아닌 모양이었다.그 사실을 깨닫자 조금 전부터 붕 떠 있던 기분이 더 이상해졌다.“강태혁 씨.”“네.”“향수 뿌렸어요?”“네.”대답이 너무 순순했다.“왜요?”태혁이 눈을 들었다.“나는 향수 뿌리면 안 됩니까?”“아니, 그런 건 아닌데.”“그럼 됐네요.”“그게 아니라…….”이재는 말을 고르다 웃었다.“그런 거 성가셔할 것 같아서.”“평소에는 그렇죠.”평소에는.이재의 손가락이 메뉴판 위에서

  • 다정한 지옥   13화

    일요일 아침, 이재는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에 잠에서 깼다.경찰이었다.전날 성림동에서 발생한 사건과 관련해 당분간 주거지 인근 순찰을 강화할 예정이며, 건물 보안팀과도 협조를 마쳤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이상한 사람을 보거나 조금이라도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라며 담당자 번호까지 남겼다.전화를 끊고 거실로 나온 이재는 커튼을 걷었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도로 위로 차가 드문드문 지나갔고, 산책하는 사람도 보였다.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그런데 이제는 알고 있었다.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라는 걸.아버지가 보낸 사람들도 어젯밤부터 근처에 있었다. 이재가 불편하지 않도록 건물 안팎에서 거리를 두고 교대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창가에 서 있던 이재의 시선이 길 건너편에 멈췄다.어제부터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검은색 세단이 한 대 있었다.설마 저건가.이재는 잠깐 바라보다 아버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사람 확인했어요. 경찰에서도 연락 왔고.]조금 고민하다 한 줄을 덧붙였다.[나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답장은 금방 왔다.[알았다. 그래도 당분간은 아빠 말 좀 들어.]이재의 입술이 슬쩍 비뚤어졌다. 아빠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네네.]보내놓고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는데 다시 진동이 울렸다.[오늘은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이재의 손가락이 멈췄다.오늘 저녁 일곱 시.어제 잡은 약속이 떠올랐다.[그건 안 돼.]이번에는 답장이 없었다.이재는 잠깐 기다리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어차피 조금 있으면 전화가 올 것이다.잔소리 들을 준비나 해야겠다.***십 년 전 기록은 생각보다 상태가 좋았다.태혁은 책상 위에 펼쳐놓은 수색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서진우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건 새벽 두 시 십칠 분.경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다 성림대교 인근에서 사고가 났고, 차량은 교량 진입부 난간을 들이받은 채 발견됐다.차량 내부에서는 상당량의 혈흔이 나

  • 다정한 지옥   12화

    눈을 떴다.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이재는 한동안 소파에 누운 채 눈만 깜빡였다. 블라인드 사이로 오후의 햇빛이 길게 들어와 거실 바닥에 걸쳐 있었다.이렇게 낮에 저절로 잠든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십 년 전 사건 이후 잠은 이재에게 꽤 번거로운 일이었다. 피곤하다고 자연스럽게 잠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누워서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 약을 먹는 날이 많았고, 어쩌다 잠들어도 작은 소리에 쉽게 깼다.낮잠은 더더욱 없었다.그런데 오늘은 이상할 만큼 깊게 잤다.이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맑았다. 몸에 오래 눌어붙어 있던 피로가 조금 걷힌 것처럼 개운했다.낮잠이 원래 이렇게 개운한 거였나.그 순간 무언가가 허벅지 아래로 미끄러졌다.검은 재킷.“…….”강태혁 거였다.아까 소파 등받이에 걸어놓았던.소파에 기대 휴대폰을 보다가 살짝 잠이 든 모양이었다. 태혁은 식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고, 자신은 정말 잠깐만 눈을 감으려고 했다.정말 잠깐이었는데.이재는 테이블 위 휴대폰을 집었다.오후 세 시가 조금 넘었다.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대충 정리하며 거실을 둘러봤다.식탁이 비어 있었다.서류도 없었다.“……강태혁 씨?”대답이 없었다.조금 전까지 느긋하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설마 갔나.이재는 소파에서 급하게 일어나 넓은 거실을 가로질렀다.현관에 도착해 가장 먼저 바닥을 내려다봤다.강태혁의 신발이 그대로 있었다.다행이다.그 생각을 한 순간 잠이 덜 깬 발이 엉켰다.“어…….”몸이 옆으로 기울었다.넘어지기 거의 직전이었다. 이재의 허리를 단단한 팔이 받쳤다. 거의 동시에 다른 손이 팔뚝을 잡아 세웠다.“조심해요.”귓가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이재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고개를 들자 태혁의 얼굴이 보였다.가까웠다.허리를 받친 손바닥의 온기가 얇은 옷 너머로 선명했다. 이재는 그것을 의식한 순간 오히려 움직이지 못했다.시선이 마주쳤다.잠이 덜 깬 탓인지 머리가 평소보다 느리게 움직였

  • 다정한 지옥   11화

    태혁은 정말 남았다.재킷을 소파 등받이에 걸어두고,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던 사진부터 다시 봉투에 넣었다. 서진우의 이름이 가장 마지막으로 사라졌다.그 뒤로는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태혁은 식탁 한쪽에 가져온 서류를 펼쳐놓고 휴대폰으로 몇 통의 전화를 돌렸다.이재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둘 사이에는 식탁 하나가 놓여 있었고, 태혁은 긴 다리를 의자 아래로 조금 접어 넣은 채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 혼자 쓰던 식탁에 덩치 큰 남자가 마주 앉아 있으니, 여섯 명은 넉넉히 앉는 테이블이 이상하게 좁아 보였다.“차량은?”태혁이 낮게 물었다.잠깐의 침묵이 흘렀다.“거기서 끊겼으면 반경 넓혀. 도보로 들어왔다고 도보로 빠졌다고 생각하지 말고.”일할 때는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이재는 턱을 괸 채 태혁을 바라봤다.생각보다 더 차가웠다.자신과 이야기할 때도 살가운 남자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눈썹이 움직이거나,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거나, 아주 가끔은 웃기도 했다.지금은 달랐다. 표정이 거의 없다고 해야 하나.필요한 것만 물었고, 상대가 보고하는 동안에는 말을 끊지 않았다. 듣고 판단한 뒤 곧바로 다음 지시를 내렸다.“피해자 금융 기록은?”태혁의 손이 서류 한 장에서 멈췄다.“최근 것만 보지 말고 첫 사건 전까지 넓혀.”목소리에도 높낮이가 거의 없었다.새벽부터 살인 현장에 있었고, 몇 시간 전에는 십 년 전 죽은 줄 알았던 연쇄살인범의 물건까지 발견했다.그런데도 흐트러지는 게 없었다.십 년 전에는 그저 어른처럼 보였다.열여덟 살의 자신에게 스물다섯은 충분히 그런 나이였으니까.지금 보니 꽤…….이재의 시선이 태혁의 손으로 내려갔다.서류를 넘기는 길고 반듯한 손가락을 따라가다가 다시 얼굴로 올라왔다.턱을 괴고 있던 손가락이 입술 아래를 한번 눌렀다.생각은 거기까지만 하기로 했다.“뭘 그렇게 봐요.”이재의 어깨가 움찔했다.태혁은 여전히 서류를 보고 있었다.“뭐, 뭐가요?”그제야 태혁이 눈을 들었다.시선이 정확하게

  • 다정한 지옥   10화

    성림동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주말 아침의 주택가는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높은 담장과 잘 다듬어진 정원수 사이로 수입차 몇 대가 드문드문 지나갔고, 골목 어귀에는 새벽 배송을 마친 냉장 탑차가 비상등을 켠 채 서 있었다. 운동복 차림으로 개를 산책시키던 남자가 폴리스라인 앞에서 걸음을 늦췄다가 경찰의 시선을 받고 다시 움직였다.서울에서도 손꼽히는 부촌의 아침이었다.그 지나치게 반듯한 풍경 한가운데 경찰차 세 대가 서 있었다.태혁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현장으로 걸었다.“팀장님.”대문 앞에서 기다리던 준호가 다가왔다.“신고는?”“아침 여섯 시 십칠 분. 피해자 동생이 발견했습니다. 오늘 같이 등산 가기로 했는데 연락이 안 돼서 왔다가.”“피해자 혼자 살고?”“네. 오십팔 세 남성. 이혼했고 자녀는 따로 삽니다.”태혁이 덧신을 받아 신었다.“출입문.”“파손 없습니다.”대문도, 현관문도 멀쩡했다. 잠금장치에 억지로 손댄 흔적도 없었다.태혁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벌써 익숙한 시작이었다.“CCTV는.”“수빈이가 보고 있습니다. 집 앞 하나, 골목 진입로 두 개 더 확보 중이고요.”태혁이 안으로 들어갔다.현관에서 거실까지 이어진 바닥은 지나치게 깨끗했다. 신발장도 닫혀 있었고 넘어지거나 깨진 물건 하나 없었다. 이 집에서 밤사이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만 떼어놓으면, 누군가 강제로 들어왔다는 흔적부터 찾기가 어려웠다.그리고 거실 끝.식탁 옆 바닥에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하얀 장갑을 낀 감식반 직원들이 주변을 촬영하고 있었다.준호가 목소리를 낮췄다.“정확한 사인은 부검 들어가야 합니다. 현재는 경부 쪽 손상으로 보고 있고, 사망 추정 시각은 어젯밤 열한 시에서 오늘 새벽 두 시 사이입니다.”태혁은 시신보다 먼저 주변을 봤다.창문.현관.식탁.가구 배치.그리고 거실장 위 액자.시선이 멎었다.“준호야.”“네.”“저거 원래 위치 확인해.”준호도 곧 액자를 봤다.피해자와 성인

  • 다정한 지옥   9화

    본사에서 두 블록쯤 떨어진 횟집 안은 이미 제법 시끄러웠다.잔 부딪치는 소리와 웃음이 칸막이 너머까지 뒤섞였고, 처음에는 정갈했던 테이블도 빈 술병과 접시로 제법 어수선해져 있었다.한국에 돌아온 뒤 처음 참석한 팀 회식이었다.회장 딸이랍시고 첫 회식부터 술까지 빼면 사람들이 더 어려워할 것 같아 오는 잔을 적당히 받아 마셨는데, 문제는 그 적당히가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는 데 있었다.“윤 대리님.”옆자리 과장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진짜 미국에서 십 년을 있었어요?”“네.”“근데 한국말을 진짜 잘하시네.”이재가 잠시 과장을 바라봤다.“……한국인이니까요.”맞은편의 다은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과장님.”“어?”“진짜 장난 아니고, 똑같은 질문 세 번째 하신 거 알아요?”과장이 눈을 크게 떴다.“내가? 진짜?”“네. 진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또옥같았어요.”“야, 김다은. 너 취한 거 아냐?”이재가 웃음을 참으며 둘을 번갈아 봤다.“과장님이 다은 씨보다 조금 더 취한 것 같기는 해요.”“거봐요.”다은이 냉큼 이재 쪽으로 붙었다.과장이 헛웃음을 터뜨렸다.“둘이 벌써 한 편을 먹었네.”이재는 이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입사 초기만 해도 이재가 출근하면 괜히 모니터부터 확인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같은 농담에 웃고, 취한 얼굴까지 보여줄 정도는 됐으니까.“자자, 슬슬 2차 가실 분들은 가시죠.”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강요 아닙니다. 집에 갈 사람은 집에 가고. 신나게 놀 사람들은 더 놀고.”누군가 바로 받았다.“팀장님이 제일 신나게 놀고 싶으신 것처럼 들리는데요.”“내가 언제.”웃음이 터지는 틈에 이재는 가방을 챙겼다.다은이 고민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대리님 가세요?”“네. 저는 여기까지.”“저는 어떡하죠. 사회생활을 좀 하긴 해야 할 것 같고……. 따라가면 또 취할 것 같고.”“가서 안 취하면 되죠.”“그게…… 될까요?”“그걸 해내는 것도 사회생활 능력이에요.”다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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