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12화

Author: 홍피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4 13:18:39

“역시 대리님밖에 없어요.”

“한 시간 넘으면요?”

다은이 잠깐 고민했다.

“그때는 조금 미워할게요.”

“조금이면 괜찮네요.”

결국 조금 미움받을 시간은 생겼다. 수정된 데이터를 다시 돌리고 보고서에 들어간 숫자까지 전부 맞춰본 뒤에야 이재는 모니터 전원을 껐다. 열 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옆자리에서는 다은이 가방을 챙기며 기지개를 켰다.

“내일 아침의 제가 오늘의 저를 엄청 싫어하겠죠?”

“오늘의 다은 씨가 사고 쳤으니까 감수해야죠.”

“대리님까지 왜 그래요.”

“저도 피해자잖아요.”

“아.”

다은이 억울해할 명분을 잃었다. 이재가 웃으며 가방을 챙겼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다은은 말을 걸 때마다 묘하게 허리를 세웠다.

회장 딸과 같은 팀.

그 사실 하나가 사람을 꽤 불편하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요 며칠 사이에는 적어도 농담 한 번 할 때마다 표정부터 살피는 일은 없어졌다. 이재로서는 그쪽이 훨씬 편했다.

사무실을 나서자 센서가 사람을 따라 조명을 밝혔다. 낮에는 통화 소리와 키보드 소리가 끊이지 않던 공간이 지금은 조용했다. 빈 책상 위로 꺼진 모니터만 줄지어 서 있었다.

둘은 엘리베이터 앞에 나란히 섰다. 다은이 휴대폰을 확인했다.

“저 택시 거의 왔어요. 대리님은요?”

“차 가져왔어요.”

“이렇게 피곤한데 운전 괜찮으세요?”

“이 정도는 괜찮아요.”

“다행이다.”

그러더니 다은이 문득 덧붙였다.

“저는 왠지 기사님이 데리러 오실 줄 알았어요.”

이재가 고개를 돌렸다. 다은의 표정에 한 박자 늦게 후회가 떠올랐다.

“……방금 제가 굉장히 편견에 찬 발언을 한 것 같은데요.”

“도대체 회장 딸이 나오는 드라마를 얼마나 본 거예요?”

“많이는 아니고요.”

“몇 개나 봤는데요.”

“……꾸준히?”

“많이 봤네.”

다은이 웃음을 참다가 결국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요.”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다은이 먼저 올라탔다.

“대리님 생각보다 은근히 짓궂으시네요.”

“생각보다?”

다은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이것도 편견인가.”

“오늘 많이 배우네요.”

“내일은 입 조심할게요.”

“그럼 재미없어요.”

다은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1층에서 문이 열렸다.

“내일 봬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택시 타면 연락하고.”

“네!”

다은이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문이 다시 닫혔다. 혼자 남은 이재가 지하 3층 버튼을 눌렀다.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웃음이 거울처럼 반사되는 엘리베이터 벽 안에서 천천히 가라앉았다.

***

지하 3층은 조용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어두웠던 통로의 센서등이 하나씩 들어왔다. 낮이면 차량과 사람이 쉴 새 없이 오가는 곳이었다. 열 시가 넘으니 같은 공간이 괜히 넓어 보였다.

이재는 가방에서 차 키를 꺼냈다. 차는 안쪽에 세워뒀다. 구두 굽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소리가 길게 울렸다.

또각.

또각.

자신의 차가 보이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그 앞에 세워져 있던 검은 세단의 헤드라이트가 갑자기 켜졌다. 이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시동이 걸렸다. 차가 나가려는 모양이었다. 별다른 생각 없이 지나치려는데. 운전석 문이 열렸다.

남자가 내렸다.

정장을 입은 젊은 남자였다.

회사에서 몇 번 본 얼굴 같기도 했다. 이재는 그대로 지나쳤다.

철컥.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곧 발소리가 들렸다.

또각.

저벅.

이재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같은 회사 직원일 수도 있었다. 주차장에서 같은 방향으로 걷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가 걸렸다. 차에 타고 있던 사람이 왜 하필 자신이 지나가자 내렸을까.

이재는 차 키를 눌렀다. 멀리 세워둔 차의 불빛이 두 번 깜빡였다.

뒤의 발소리가 조금 빨라졌다. 손가락이 차 키 위에서 멈췄다.

별일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하필 어제 들은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쳤다.

가족사진. 같이 사는 사람. 귀가 시간. 누군가는 십 년 전 사건을 알고 있었다.

아무도 알려준 적 없는 것까지.

이재는 제 차 앞까지 갔다가 그대로 지나쳤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뒤의 발소리가 멎었다.

순간 안도할 뻔했다.

철컥. 차 문이 다시 닫히는 소리.

그리고.

저벅. 저벅.

이번에는 분명히 자신을 따라왔다. 심장이 세게 내려앉았다.

이재는 걸음을 재촉했다. 뒤에서도 빨라졌다. 머리로는 아직 아무것도 확정되지 않았다. 그런데 몸은 달랐다.

손끝이 식었다. 입 안이 말랐다. 등 뒤에서 구두가 바닥을 칠 때마다 전혀 다른 소리가 겹쳤다.

쿵.

문을 내리치던 소리.

철컥.

미친 듯이 돌아가던 손잡이.

―열어.

이재는 입술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아니다. 여기는 그 집이 아니다. 저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다.

자신은 열여덟도 아니었다.

휴대폰을 꺼냈다. 엄지손가락이 112 위에 올라갔다, 멈췄다.

아직 아무 일도 없었다.

경찰이 회사까지 오면 일이 커진다.

보안팀을 거쳐 보고라도 올라가면 아버지가 알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건 싫었다.

그때 어제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애매하면 해요.

―별일 아니면요.

―그건 내가 판단할게요.

통화 기록을 열었다. 맨 위에 이름이 있었다.

강태혁.

이번에는 고민하지 않았다.

눌렀다. 신호가 한 번 갔다. 바로 연결됐다.

―무슨 일 있어요?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다정한 지옥   76화

    이재는 잠시 태혁을 바라봤다. “네.”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태혁이 이재를 끌어안았다. 숨이 막힐 만큼 세게. 이재도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익숙한 체온과 향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반년이나 지났는데 몸은 너무 쉽게 기억해냈다. 이재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태혁 씨.” “네.” “좀 세요.” 팔에 들어간 힘이 조금 풀렸다. “미안합니다.” 이재가 태혁의 셔츠를 움켜쥐었다. “놓으라는 건 아닌데.” 잠시 멈췄던 팔이 다시 등을 감쌌다. 이번에는 조금 덜 세게. 이재가 웃었다. “말 잘 듣네.” “그래야 될 것 같아서.” “이제 와서요?” “늦었습니까?” 이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가까웠다. 태혁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재가 먼저 발끝을 들어 입을 맞췄다.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태혁은 한동안 이재를 바라보기만 했다. “왜요.” “…….” “뭐 할 말 있어요?” 태혁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갔다. 방금 닿았던 입술에 머물렀다. “아닙니다.” 이번에는 이재가 웃었다. “아까부터 자꾸 아니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태혁이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다시 맞닿았다. 이번에는 짧지 않았다. 반년 동안 참았던 시간을 한꺼번에 되찾으려는 것처럼 몇 번이고 입술이 겹쳤다. 이재의 손이 그의 어깨를 감싸자 허리를 끌어당기는 팔에도 힘이 들어갔다. 숨이 흐트러졌다. 입술이 떨어졌다가 다시 닿았다. 그 사이 이재는 몇 번이나 웃었다. 태혁도 그때마다 따라 웃었다. 겨우 입술이 떨어졌을 때 이재가 그의 턱을 만졌다. 까슬했다. “따가워.” “아까 깎고 온다고 했잖아요.” “그러게요.” “지금이라도 깎고 올까요?” 이재가 피식 웃었다. “지금은 됐어요.” “마음대로네.” “원래 그랬잖아요.” 태혁도 작게 웃었다. 그 얼굴을 보자 이재는 괜히 한 번 더 입을 맞췄

  • 다정한 지옥   75화

    태혁은 잠시 이재를 바라보다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네.” 이재가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익숙한 현관에 둘만 남았다. 구두를 벗던 이재가 발밑을 봤다. 없었다. 예전에 자신의 슬리퍼가 놓여 있던 자리에는 태혁의 것만 남아 있었다. 반년이나 지났으니 당연했다. 이재가 맨발로 올라서려는데 태혁이 신발장을 열었다. “잠깐.” 안쪽에서 슬리퍼 한 켤레를 꺼냈다. 분홍색. 이재의 슬리퍼였다. 태혁은 아무렇지 않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신어요.” 이재가 슬리퍼를 내려다봤다. “안 버렸네요.” “네.” “왜요?” 태혁이 신발장 문을 닫았다. “버릴 이유가 없어서.” 이재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슬리퍼에 발을 넣었다. 반년 만이었다. *** 집은 기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소파도, 식탁도 그대로였다. “뭐 마실래요?” “물.” 태혁이 주방으로 향하다 돌아봤다. “얼마나 마셨어요?” “쪼금.” “……쪼금?” “네.” 태혁이 이재를 가만히 봤다. “그 쪼금 때문에 반년 만에 남의 집까지 온 겁니까?” 이재의 눈이 가늘어졌다. “남의 집?” 태혁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재가 발끝을 내려다봤다. “슬리퍼까지 꺼내주고?” “…….” “남의 집이었구나.” 태혁은 더 대꾸하지 않고 주방으로 향했다. “물이나 마셔요.” 이재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여전했다. 태혁이 물을 가져왔다. 이재는 잔을 받아 들고 소파에 앉았다. 태혁도 조금 떨어진 옆자리에 앉았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반년 만인데 막상 얼굴을 보고 있으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잘 지냈어요?” “네.” “태혁 씨는요?” “저도요.” 이재는 물을 한 모금 마시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살 빠졌어요?” “조금.” “바빴나 보네.” “네.” 시선이 턱에 멈췄다. “수염도 기르고.” 태혁이 턱을 한번 쓸었다. “기른 거 아니에요. 오늘 안 깎은 겁니다.” “다행이다

  • 다정한 지옥   74화

    첫눈이 온 지도 며칠이 지났다. 잠깐 내려앉았던 겨울은 거짓말처럼 물러갔다. 기온은 다시 올랐고, 길가에 남았던 눈도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전부 녹았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즈음이었다. “대리님.” 다은이 파티션 너머로 얼굴을 내밀었다. 표정부터 수상했다. “왜요.” “제가 저번에 추천한 영화 있잖아요.” “왜요. 환불해주게요?” “그거 평점 난리 났대요. 그래서 영화관에서도 거의 다 내렸잖아요.” “잘됐네요.” “그래서 약간 사죄의 의미로.” 다은이 두 손을 모았다. “오늘 저녁 제가 살게요.” 이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밥을요?” “네.” “영화표보다 비싼데?” “대신 술은 대리님이 사주셔야 돼요.” “그럼 사죄가 아니잖아요.” 다은이 웃었다. “싫으세요?” 이재는 잠시 생각했다. “좋아요.” “진짜요?” 다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바로 예약해요.” “업무 보고 보내는 거 잊지 말고.” “아.” 다은이 다시 얌전히 앉았다. “네.” 이재가 웃으며 다시 모니터를 보려는데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비서실이었다. [회장님께서 잠시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이재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다은 씨.” “네?” “먼저 내려가 있어요. 금방 갈게요.” “넵.” *** 회장실 문을 열자 윤정호가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 “왔니.” “네.” 이재가 맞은편에 앉자 윤정호가 서류 하나를 앞으로 밀었다. “다음 달 싱가포르 건이다.” 이재는 서류를 펼쳤다. 신규 호텔 운영사와의 협의 일정이었다. 자신이 몇 달 전부터 맡아온 프로젝트였다. “일정이 길어질 것 같더구나.” “네. 현지에서 최종 협의까지 하면 일주일 정도 예상하고 있어요.” 윤정호가 이재를 바라봤다. “네가 직접 갈 생각이니?” 이재의 손이 서류 위에서 멈췄다. 예전 같았으면 이미 결정되고도 남았을 일이었다. 네가 갈 필요 없다. 다른 사람을 보내겠다. 그렇게 통보하고 끝났을 것이다. 요즘은 달랐다.

  • 다정한 지옥   73화

    “대리님.” 다은의 목소리에 이재가 모니터에서 눈을 뗐다. 다은은 대답 대신 창밖을 가리켰다. “우와!” 사무실 여기저기에서 비슷한 탄성이 터졌다. 이재도 창밖을 봤다. 통유리 너머로 하얀 눈이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유리에 닿자마자 녹아 없어지던 것이 어느새 제법 눈에 보일 만큼 많아졌다. 다은은 벌써 휴대전화를 들고 창가로 달려갔다. “첫눈이에요.” “아.” “반응이 왜 그래요?” 이재는 창밖을 한 번 더 봤다. “오늘 운전 어떻게 하지.” “…….” “길 막히겠네.” 다은이 혀를 찼다. “진짜 낭만 없다.” “눈이잖아요.” “첫! 눈이잖아요.” 이재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메일 한 통을 마저 쓰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회의가 하나 있었고, 수정해야 할 보고서가 두 개 생겼다. 첫눈이라고 별일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오후가 저물수록 눈발은 조금씩 굵어졌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즈음에는 맞은편 건물의 불빛 사이로 흰 눈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재가 노트북을 덮고 코트를 입자 다은이 물었다. “대리님 오늘 바로 집 가세요?” “그래야죠.” “첫눈이 온 날인데요?” 이재가 가방을 들었다. “그러니까 더 빨리 가야죠.” “와.” 다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심하다.” 이재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봐요.” “네. 운전 조심하세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특별한 연락은 없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에 탔다. 시동을 켜자 내비게이션에 집까지 40여 분이 찍혔다. 평소보다 10분 정도 더 걸리는 수준이었다. 이재는 잠시 화면을 보다가 기어를 넣었다. 집으로 향하던 차는 두 번째 교차로에서 방향을 바꿨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왠지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밤이었다. *** 큰맘 먹고 본 영화치고 내용은 그저 그랬다. 단지 슬픈 영화라서는 아니었다. 러닝타임 내내 사람을 그렇게 고생시켜놓고 마지막까지 불행한 건 좀

  • 다정한 지옥   72화

    이재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기다리라고 하기에는 미안했고, 기다리지 말라고 하기에는 마음에 남은 게 너무 많았다. 좋아하지 않아서 떠나는 게 아니었다. 그 반대라서 어려웠다. “기다리지 마요.” 태혁의 눈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이재는 그걸 보고도 말을 바꾸지 않았다. 한참 뒤 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날 밤은 이상하리만큼 평범하게 지나갔다. 태혁은 거실에서 잤고, 이재는 침대에 누웠다. 처음 이 집에서 잤던 밤처럼 문을 열어두지도 않았다. 불을 끄고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금방 잠들었다. *** 다음 날 아침. 이재가 캐리어를 끌고 나오자 태혁은 이미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칫솔도, 화장품도, 옷도 전부 캐리어 안에 들어 있었다. 이재가 신발을 신는 동안 태혁이 손잡이를 가져갔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재는 말리지 못했다. 복도로 나오자 캐리어 바퀴가 낮게 굴렀다.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한 태혁이 버튼을 눌렀다. 둘 사이에 캐리어 하나가 놓였다. 이재는 내려오는 숫자를 바라보다 괜히 옷소매 끝을 만지작거렸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태혁이 캐리어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재가 뒤따라 들어서려는데 태혁은 손잡이를 놓지 않았다. “정말 안 데려다줘도 돼요?” “네. 경호팀이 밑에서 기다린대요.” 태혁은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손을 놓았다. “알았어요.” 이재가 안으로 들어섰다. 태혁은 문밖으로 물러났다. 닫힘 버튼을 누르지 않았는데도 문은 알아서 움직였다. “도착하면…….” 태혁이 말을 멈췄다. 이재가 고개를 들었다. 몇 초쯤 그렇게 서로를 보고 있었다. 무슨 말을 삼킨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연락해요.” 이재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태혁의 표정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읽기 어려웠다.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문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좁아지는 틈 사이로 태혁이 보였

  • 다정한 지옥   71화

    태혁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이 이상하게 길었다. “십 년 전부터 의심했습니다.” 이재의 눈이 조금 커졌다. “십 년 전부터요?” “네.” “그때부터 아빠가 표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네.” 대답은 짧았다. 이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걸 확신하게 된 건 언제예요?” 이번에는 대답이 늦었다. “……며칠 전입니다.” 며칠 전. 이재는 가만히 태혁을 바라봤다. “그럼 내가 세림호텔 얘기 물어봤을 때는요?” 태혁의 시선이 멈췄다. “그때도 이미 확인한 뒤였어요?” 잠시 후 대답이 돌아왔다. “……네.” 차 안에서 자신이 물었다. 왜 하필 우리 호텔일까요. 그때 태혁은 확인할 게 있다고 했다. 확인되면 말해주겠다고. 그보다 전에는 서진우의 아버지가 세림호텔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자신이 먼저 알아냈다. 그때도 물었다. 지금도 아무 연결이 없느냐고. 태혁은 다시 확인하고 있다고 했다. 이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그때 다시 확인하고 있다고 한 건…….” “김현석하고 현재 사건이 어디까지 연결돼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는 뜻이었어요.” “아빠가 서진우의 표적이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고요.” “……네.” 이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머릿속은 차분했다. “왜 말 안 했어요?” 태혁의 입술이 굳었다. “김현석 쪽도 더 확인해야 했고, 지금 사건과 어디까지 연결되는지 확실하지 않았어요.” “그게 다예요?” 대답이 없었다. 이재가 그를 바라봤다. “내가 알면 힘들까 봐요?” 태혁은 끝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네.” 이재는 그 대답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낯설지 않은 말이었다. 오늘 아침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빠도 그렇게 말했어요.” “…….” “내가 알아서 좋을 게 없다고.” 태혁의 표정이 굳었다. “아빠는 오늘 나한테 거짓말했어요.” 서진우가 자신을 찾아오겠다고 직접 연락했다는 걸 숨긴 채, 몰랐다고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