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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Autor: 홍피코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09-04 13:18:39

눈을 떴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이재는 한동안 소파에 누운 채 눈만 깜빡였다. 블라인드 사이로 오후의 햇빛이 길게 들어와 거실 바닥에 걸쳐 있었다.

이렇게 낮에 저절로 잠든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십 년 전 사건 이후 잠은 이재에게 꽤 번거로운 일이었다. 피곤하다고 자연스럽게 잠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누워서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 약을 먹는 날이 많았고, 어쩌다 잠들어도 작은 소리에 쉽게 깼다.

낮잠은 더더욱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할 만큼 깊게 잤다.

이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맑았다. 몸에 오래 눌어붙어 있던 피로가 조금 걷힌 것처럼 개운했다.

낮잠이 원래 이렇게 개운한 거였나.

그 순간 무언가가 허벅지 아래로 미끄러졌다.

검은 재킷.

“…….”

강태혁 거였다.

아까 소파 등받이에 걸어놓았던.

소파에 기대 휴대폰을 보다가 살짝 잠이 든 모양이었다. 태혁은 식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고, 자신은 정말 잠깐만 눈을 감으려고 했다.

정말 잠깐이었는데.

이재는 테이블 위 휴대폰을 집었다.

오후 세 시가 조금 넘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대충 정리하며 거실을 둘러봤다.

식탁이 비어 있었다.

서류도 없었다.

“……강태혁 씨?”

대답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 느긋하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갔나.

이재는 소파에서 급하게 일어나 넓은 거실을 가로질렀다.

현관에 도착해 가장 먼저 바닥을 내려다봤다.

강태혁의 신발이 그대로 있었다.

다행이다.

그 생각을 한 순간 잠이 덜 깬 발이 엉켰다.

“어…….”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넘어지기 거의 직전이었다. 이재의 허리를 단단한 팔이 받쳤다. 거의 동시에 다른 손이 팔뚝을 잡아 세웠다.

“조심해요.”

귓가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재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고개를 들자 태혁의 얼굴이 보였다.

가까웠다.

허리를 받친 손바닥의 온기가 얇은 옷 너머로 선명했다. 이재는 그것을 의식한 순간 오히려 움직이지 못했다.

시선이 마주쳤다.

잠이 덜 깬 탓인지 머리가 평소보다 느리게 움직였다.

눈.

코.

입술.

태혁의 시선도 이재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몇 초쯤 그렇게 있었을까.

태혁이 먼저 손을 뗐다.

“덜 깼네.”

그제야 이재도 한 발 물러났다.

“……어디 있었어요?”

“주방에.”

“가버린 줄 알았어요.”

태혁의 눈이 이재에게 잠시 머물렀다.

“말도 없이 가는 나쁜 놈 아닙니다.”

“…….”

왜 저런 말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이재는 괜히 먼저 거실로 돌아섰다.

***

이재는 소파로 돌아가 떨어져 있던 재킷을 집어 들었다.

“나 덮어준 거예요?”

“추워 보여서.”

“내 방에 담요 있는데.”

“집주인 허락도 없이 어떻게 방에 들어갑니까.”

“깨워서 물어보지.”

태혁이 이재를 한번 봤다.

“그렇게 곤히 자는데 어떻게 깨웁니까.”

이재는 더 할 말이 없어졌다.

다시 소파에 앉아 재킷을 무릎 위에 올렸다. 태혁의 시선이 잠깐 그쪽으로 향했다가 돌아갔다. 이재는 소파에 몸을 푹 묻었다.

“낮잠이 이렇게 개운한 거였구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태혁은 별말 없이 서류를 넘겼다.

“저 이상한 잠버릇 같은 건 없었죠?”

이번에는 태혁의 손이 멈췄다.

잠깐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있었는데.”

이재의 눈이 커졌다.

“뭔데요?”

“말 안 할 겁니다.”

“왜요?”

“알면 창피할 텐데.”

“진짜 있었어요?”

태혁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이재는 그제야 눈을 가늘게 떴다.

“……거짓말이죠.”

태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강태혁 씨.”

“네.”

“진짜 재수 없는 거 알아요?”

“그런 말 가끔 들어요.”

저 얼굴로 저러니까 더 얄미웠다.

그런데 웃음이 났다.

이재는 결국 소파에 등을 기대며 작게 웃었다.

왜 저 남자랑 있는 시간이 이렇게 재밌지.

큰일이었다.

***

저녁 무렵 태혁에게 전화가 왔다.

“어.”

전화를 받은 순간 얼굴이 다시 달라졌다.

이재는 소파에 앉아 그를 바라봤다.

“찾았어?”

상대의 말을 듣던 태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본도?”

잠시 뒤 태혁이 짧게 대답했다.

“알았어. 손대지 말고 둬. 내가 가서 확인할게.”

통화를 끊은 태혁이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재는 무릎 위에 덮고 있던 재킷을 내려다봤다.

“가봐야 돼요?”

“네.”

“뭐 찾았대요?”

“십 년 전 수색 기록 원본이요.”

태혁이 서류를 한데 모았다.

“내가 가서 확인할게요.”

이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요.”

이번에는 붙잡지 않았다.

태혁이 서류를 챙기는 동안 이재도 소파에서 일어났다.

여태 덮고 있던 재킷을 두 손으로 대충 접어 그에게 내밀었다.

“여기.”

태혁은 재킷을 받아 망설임 없이 팔을 끼워 넣었다.

익숙하지 않은 향이 희미하게 스쳤다.

태혁의 손이 재킷 깃에서 아주 잠깐 멈췄다.

향수처럼 선명한 냄새는 아니었다. 샴푸인지, 섬유유연제인지 알 수 없는 깨끗하고 부드러운 향이 옷깃 안쪽에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이재가 덮고 있던 옷이었다.

태혁은 괜히 깃을 한 번 더 바로잡았다.

“경찰은 십 분 안에 올 겁니다.”

태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했다.

“네.”

“아버지가 보낸 사람도 온다고 했죠.”

“그렇대요.”

“확인하고 문 열어줘요.”

이재가 어이없다는 듯 그를 봤다.

“저 스물여덟이에요.”

“알아요.”

“근데 왜 자꾸 열여덟 살 취급해요.”

태혁은 재킷을 정리하던 손을 멈췄다.

“열여덟 살이었으면.”

시선이 마주쳤다.

“혼자 안 두고 갑니다.”

순간 이재가 할 말을 잃었다.

저 말은 무슨 뜻이지.

열여덟 살이 아니라서 두고 간다는 건지.

스물여덟인 지금은 믿는다는 건지.

아니면—

이재는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태혁은 이미 현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재도 뒤따라갔다.

태혁이 신발을 신고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그런데 둘 다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재는 현관 안쪽에 서 있었고, 태혁은 반쯤 몸을 돌린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이상하게 길었다. 몇 초일 뿐인데도.

“전화해요.”

태혁이 먼저 말했다.

“무슨 일 있으면…….”

“아니어도.”

이재의 말이 끝나기 전에 태혁이 말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이재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문이 닫혔다.

이재는 그대로 현관에 서 있었다.

무슨 일 없어도 전화하라고?

닫힌 문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이재가 작게 중얼거렸다.

“……진짜.”

사람 헷갈리게 하네.

***

엘리베이터 숫자가 하나씩 내려갔다.

태혁은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가 떴다.

피곤했다.

새벽부터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그런데 머릿속에 남은 건 사건 현장이 아니었다.

소파에서 잠든 윤이재였다.

처음에는 자는 줄 몰랐다.

한동안 조용하길래 고개를 들었더니 휴대폰을 느슨하게 쥔 채 잠들어 있었다.

몸을 소파 한쪽에 작게 웅크린 채였다. 가느다란 발목이 소파 끝에 반쯤 걸쳐 있었고, 긴 검은 머리카락이 쿠션 위로 흐트러져 있었다.

태혁은 자기도 모르게 한동안 시선을 두었다.

평소의 이재는 눈부터 선명했다.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맑은 눈동자에 그대로 비쳤다. 화가 나면 서늘해졌고, 당황하면 금세 물기를 머금었다. 그래서 얼굴을 볼 때면 늘 눈이 먼저 들어왔다.

잠든 지금은 그 눈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들이 보였다.

오후의 빛을 받은 피부는 희다 못해 옅은 빛이 비치는 듯했고, 길게 내려앉은 속눈썹 아래로 가느다란 그림자가 졌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뺨을 타고 내려와 붉은 입술 가까이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눈 아래, 작은 점 하나.

하나하나 떼어놓고 볼 이유도 없는 것들이 이상할 만큼 눈에 들어왔다.

태혁은 소파 등받이에 걸어둔 재킷을 집었다.

깨우지 않게 천천히 몸을 숙여 재킷을 덮었다.

가까워지자 이재가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눈꺼풀이 희미하게 떨렸다.

잠에서 깬 줄 알고 태혁의 움직임이 멈췄지만, 이재는 다시 고른 숨을 내쉬었다.

태혁은 잠깐 그대로 있었다.

십 년 전의 얼굴이 겹쳐질 법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러지 않았다.

열여덟 살 때의 윤이재는 늘 젖은 눈을 하고 있었다.

겁을 먹고도 울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유난히 크고 맑아 보이던 눈이었다.

그때는 그 눈이 자신을 따라오는 이유를 알았다.

무서우니까.

자신이 그나마 안전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떠오르는 얼굴은 달랐다.

잠에서 깨어 자신을 올려다보던 얼굴.

잠기운이 남아 물을 머금은 듯 느리게 깜빡이던 눈.

허리를 붙잡았을 때 한동안 피하지 않던 시선.

태혁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는 벽에서 등을 떼고 지하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차로 향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영 불편했다.

출입 보안이 철저한 건물이었다.

십 분 안에 경찰이 올 예정이고, 윤정호가 보낸 사람도 도착할 것이다.

객관적으로 따지면 지금까지 중 가장 안전했다.

그런데도 혼자 두고 나오는 게 싫었다.

자신도 그게 이해되지 않았다.

태혁이 차 문을 열었다.

잡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

태혁이 나가고 나니 식탁은 다시 원래 크기로 돌아왔다.

이재는 주방에서 물을 따라오다 그 앞에 잠깐 멈춰 섰다.

아침부터 널려 있던 서류도 없었고, 식은 커피잔도 치웠다. 태혁이 먹은 접시도 이미 설거지를 끝냈다.

원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너무 컸다.

조용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에도 늘 이랬다.

혼자 사는 집이니 당연했다.

오히려 이 조용함을 좋아했다.

그런데 몇 시간 사람이 있었다고 벌써 낯설었다.

이재는 식탁 의자를 빼 앉았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태혁에게 온 연락은 없었다.

당연했다.

일하러 갔으니까.

화면을 끄고 내려놓았다가 십 초도 지나지 않아 다시 집어 들었다.

메시지 창을 열었다.

[도착했어요?]

쓰고 나서 잠깐 고민했다.

괜히 묻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번에는 지우지 않았다. 이재는 그대로 전송 버튼을 눌렀다. 보내고 나니 조금 민망했다.

이재는 휴대폰을 뒤집어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동이 울렸다.

바로 집어 들었다.

[네.]

한 글자.

이재는 화면을 빤히 봤다.

“…….”

진짜 강태혁답다.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는데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친구가 가서 어떡해요.]

이재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러게요. 약속해놓고.]

이번에는 답장이 조금 늦었다.

[다시 갈까요?]

이재의 손이 멈췄다.

그냥 하는 말일 것이다.

아마도.

그런데 오늘 강태혁이 했던 말들을 생각하면 확신이 안 섰다.

안 갑니다.

있어달라면서요.

아니어도 전화해요.

그리고.

다시 갈까요?

이재는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잠깐 고민하다 답장을 보냈다.

[아뇨. 일해야죠.]

이번에는 답장이 바로 왔다.

[내일 저녁 약속 있어요?]

이재가 눈을 깜빡였다.

[없는데요.]

[그럼 내일 저녁 시간 내요.]

몇 초 뒤 하나가 더 왔다.

[나한테 빚진 게 좀 있잖아요.]

이재가 웃었다.

[알았어요.]

손가락을 움직이다 한 줄을 덧붙였다.

[내일은 내가 진짜 살게요.]

잠깐 고민하다가 또 하나.

[비싼 걸로.]

답장이 왔다.

[기대할게요.]

약속은 생각보다 쉽게 정해졌다.

내일 저녁.

사건 때문에 만나는 것도 아니고, 보호 때문에 같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재는 휴대폰을 내려다보다 검색창을 열었다.

기왕 사는 거 정말 비싼 데로 가야지.

손가락이 익숙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검색 버튼을 누르기 직전 멈췄다.

[서울 데이트 맛집]

이재는 검색창에 찍힌 글자를 한동안 바라봤다.

“…….”

비싼 식당을 찾으면 되는 건데 왜 하필 데이트 맛집을 검색하고 있는지는.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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Último capítulo

  • 다정한 지옥   14화

    직원이 두 사람을 안쪽 자리로 안내했다.창가를 따라 낮은 조명이 길게 이어진 곳이었다. 이재가 먼저 걸었고, 태혁은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몇 걸음인데 이상하게 시선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검은 원피스는 가까이서 보니 더 그랬다. 노출이 많은 것도 아닌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느다란 몸의 선이 고스란히 따라 움직였다.태혁은 괜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오늘따라 서울 야경이 볼 만했다.자리에 도착하자 직원이 이재의 의자를 빼주었다. 이재가 앉고 태혁도 맞은편에 자리했다.메뉴판이 놓였다.이재는 바로 펼쳤지만 태혁은 한 박자 늦었다.“여기 괜찮죠?”“네.”“메뉴는요?”대답은 하는데 정작 메뉴판은 보지 않았다.이재가 눈을 들었다.태혁의 시선이 자신에게 있었다.“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아뇨.”그제야 태혁이 메뉴판을 펼쳤다.“좋은데.”“근데 왜 안 봐요?”“보고 있었습니다.”“나를 보고 있었잖아요.”태혁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이재가 웃었다.“뭐 먹고 싶은데요?”“윤이재 씨 먹고 싶은 걸로 골라요.”“내가 사니까?”“그건 아니고.”“그럼?”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태혁은 물잔만 들었다.뭐야.아까부터.이재는 메뉴판으로 시선을 내리면서도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는 걸 느꼈다.그러고 보니 이쪽만 평소와 다른 것도 아니었다.오늘따라 반듯한 셔츠에, 평소보다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 가까이 섰을 때 느꼈던 향도 어제보다 조금 선명했다.괜히 옷장을 몇 번이나 열었다 닫은 게 자기뿐은 아닌 모양이었다.그 사실을 깨닫자 조금 전부터 붕 떠 있던 기분이 더 이상해졌다.“강태혁 씨.”“네.”“향수 뿌렸어요?”“네.”대답이 너무 순순했다.“왜요?”태혁이 눈을 들었다.“나는 향수 뿌리면 안 됩니까?”“아니, 그런 건 아닌데.”“그럼 됐네요.”“그게 아니라…….”이재는 말을 고르다 웃었다.“그런 거 성가셔할 것 같아서.”“평소에는 그렇죠.”평소에는.이재의 손가락이 메뉴판 위에서

  • 다정한 지옥   13화

    일요일 아침, 이재는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에 잠에서 깼다.경찰이었다.전날 성림동에서 발생한 사건과 관련해 당분간 주거지 인근 순찰을 강화할 예정이며, 건물 보안팀과도 협조를 마쳤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이상한 사람을 보거나 조금이라도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라며 담당자 번호까지 남겼다.전화를 끊고 거실로 나온 이재는 커튼을 걷었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도로 위로 차가 드문드문 지나갔고, 산책하는 사람도 보였다.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그런데 이제는 알고 있었다.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라는 걸.아버지가 보낸 사람들도 어젯밤부터 근처에 있었다. 이재가 불편하지 않도록 건물 안팎에서 거리를 두고 교대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창가에 서 있던 이재의 시선이 길 건너편에 멈췄다.어제부터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검은색 세단이 한 대 있었다.설마 저건가.이재는 잠깐 바라보다 아버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사람 확인했어요. 경찰에서도 연락 왔고.]조금 고민하다 한 줄을 덧붙였다.[나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답장은 금방 왔다.[알았다. 그래도 당분간은 아빠 말 좀 들어.]이재의 입술이 슬쩍 비뚤어졌다. 아빠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네네.]보내놓고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는데 다시 진동이 울렸다.[오늘은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이재의 손가락이 멈췄다.오늘 저녁 일곱 시.어제 잡은 약속이 떠올랐다.[그건 안 돼.]이번에는 답장이 없었다.이재는 잠깐 기다리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어차피 조금 있으면 전화가 올 것이다.잔소리 들을 준비나 해야겠다.***십 년 전 기록은 생각보다 상태가 좋았다.태혁은 책상 위에 펼쳐놓은 수색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서진우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건 새벽 두 시 십칠 분.경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다 성림대교 인근에서 사고가 났고, 차량은 교량 진입부 난간을 들이받은 채 발견됐다.차량 내부에서는 상당량의 혈흔이 나

  • 다정한 지옥   12화

    눈을 떴다.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이재는 한동안 소파에 누운 채 눈만 깜빡였다. 블라인드 사이로 오후의 햇빛이 길게 들어와 거실 바닥에 걸쳐 있었다.이렇게 낮에 저절로 잠든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십 년 전 사건 이후 잠은 이재에게 꽤 번거로운 일이었다. 피곤하다고 자연스럽게 잠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누워서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 약을 먹는 날이 많았고, 어쩌다 잠들어도 작은 소리에 쉽게 깼다.낮잠은 더더욱 없었다.그런데 오늘은 이상할 만큼 깊게 잤다.이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맑았다. 몸에 오래 눌어붙어 있던 피로가 조금 걷힌 것처럼 개운했다.낮잠이 원래 이렇게 개운한 거였나.그 순간 무언가가 허벅지 아래로 미끄러졌다.검은 재킷.“…….”강태혁 거였다.아까 소파 등받이에 걸어놓았던.소파에 기대 휴대폰을 보다가 살짝 잠이 든 모양이었다. 태혁은 식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고, 자신은 정말 잠깐만 눈을 감으려고 했다.정말 잠깐이었는데.이재는 테이블 위 휴대폰을 집었다.오후 세 시가 조금 넘었다.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대충 정리하며 거실을 둘러봤다.식탁이 비어 있었다.서류도 없었다.“……강태혁 씨?”대답이 없었다.조금 전까지 느긋하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설마 갔나.이재는 소파에서 급하게 일어나 넓은 거실을 가로질렀다.현관에 도착해 가장 먼저 바닥을 내려다봤다.강태혁의 신발이 그대로 있었다.다행이다.그 생각을 한 순간 잠이 덜 깬 발이 엉켰다.“어…….”몸이 옆으로 기울었다.넘어지기 거의 직전이었다. 이재의 허리를 단단한 팔이 받쳤다. 거의 동시에 다른 손이 팔뚝을 잡아 세웠다.“조심해요.”귓가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이재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고개를 들자 태혁의 얼굴이 보였다.가까웠다.허리를 받친 손바닥의 온기가 얇은 옷 너머로 선명했다. 이재는 그것을 의식한 순간 오히려 움직이지 못했다.시선이 마주쳤다.잠이 덜 깬 탓인지 머리가 평소보다 느리게 움직였

  • 다정한 지옥   11화

    태혁은 정말 남았다.재킷을 소파 등받이에 걸어두고,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던 사진부터 다시 봉투에 넣었다. 서진우의 이름이 가장 마지막으로 사라졌다.그 뒤로는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태혁은 식탁 한쪽에 가져온 서류를 펼쳐놓고 휴대폰으로 몇 통의 전화를 돌렸다.이재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둘 사이에는 식탁 하나가 놓여 있었고, 태혁은 긴 다리를 의자 아래로 조금 접어 넣은 채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 혼자 쓰던 식탁에 덩치 큰 남자가 마주 앉아 있으니, 여섯 명은 넉넉히 앉는 테이블이 이상하게 좁아 보였다.“차량은?”태혁이 낮게 물었다.잠깐의 침묵이 흘렀다.“거기서 끊겼으면 반경 넓혀. 도보로 들어왔다고 도보로 빠졌다고 생각하지 말고.”일할 때는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이재는 턱을 괸 채 태혁을 바라봤다.생각보다 더 차가웠다.자신과 이야기할 때도 살가운 남자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눈썹이 움직이거나,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거나, 아주 가끔은 웃기도 했다.지금은 달랐다. 표정이 거의 없다고 해야 하나.필요한 것만 물었고, 상대가 보고하는 동안에는 말을 끊지 않았다. 듣고 판단한 뒤 곧바로 다음 지시를 내렸다.“피해자 금융 기록은?”태혁의 손이 서류 한 장에서 멈췄다.“최근 것만 보지 말고 첫 사건 전까지 넓혀.”목소리에도 높낮이가 거의 없었다.새벽부터 살인 현장에 있었고, 몇 시간 전에는 십 년 전 죽은 줄 알았던 연쇄살인범의 물건까지 발견했다.그런데도 흐트러지는 게 없었다.십 년 전에는 그저 어른처럼 보였다.열여덟 살의 자신에게 스물다섯은 충분히 그런 나이였으니까.지금 보니 꽤…….이재의 시선이 태혁의 손으로 내려갔다.서류를 넘기는 길고 반듯한 손가락을 따라가다가 다시 얼굴로 올라왔다.턱을 괴고 있던 손가락이 입술 아래를 한번 눌렀다.생각은 거기까지만 하기로 했다.“뭘 그렇게 봐요.”이재의 어깨가 움찔했다.태혁은 여전히 서류를 보고 있었다.“뭐, 뭐가요?”그제야 태혁이 눈을 들었다.시선이 정확하게

  • 다정한 지옥   10화

    성림동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주말 아침의 주택가는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높은 담장과 잘 다듬어진 정원수 사이로 수입차 몇 대가 드문드문 지나갔고, 골목 어귀에는 새벽 배송을 마친 냉장 탑차가 비상등을 켠 채 서 있었다. 운동복 차림으로 개를 산책시키던 남자가 폴리스라인 앞에서 걸음을 늦췄다가 경찰의 시선을 받고 다시 움직였다.서울에서도 손꼽히는 부촌의 아침이었다.그 지나치게 반듯한 풍경 한가운데 경찰차 세 대가 서 있었다.태혁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현장으로 걸었다.“팀장님.”대문 앞에서 기다리던 준호가 다가왔다.“신고는?”“아침 여섯 시 십칠 분. 피해자 동생이 발견했습니다. 오늘 같이 등산 가기로 했는데 연락이 안 돼서 왔다가.”“피해자 혼자 살고?”“네. 오십팔 세 남성. 이혼했고 자녀는 따로 삽니다.”태혁이 덧신을 받아 신었다.“출입문.”“파손 없습니다.”대문도, 현관문도 멀쩡했다. 잠금장치에 억지로 손댄 흔적도 없었다.태혁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벌써 익숙한 시작이었다.“CCTV는.”“수빈이가 보고 있습니다. 집 앞 하나, 골목 진입로 두 개 더 확보 중이고요.”태혁이 안으로 들어갔다.현관에서 거실까지 이어진 바닥은 지나치게 깨끗했다. 신발장도 닫혀 있었고 넘어지거나 깨진 물건 하나 없었다. 이 집에서 밤사이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만 떼어놓으면, 누군가 강제로 들어왔다는 흔적부터 찾기가 어려웠다.그리고 거실 끝.식탁 옆 바닥에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하얀 장갑을 낀 감식반 직원들이 주변을 촬영하고 있었다.준호가 목소리를 낮췄다.“정확한 사인은 부검 들어가야 합니다. 현재는 경부 쪽 손상으로 보고 있고, 사망 추정 시각은 어젯밤 열한 시에서 오늘 새벽 두 시 사이입니다.”태혁은 시신보다 먼저 주변을 봤다.창문.현관.식탁.가구 배치.그리고 거실장 위 액자.시선이 멎었다.“준호야.”“네.”“저거 원래 위치 확인해.”준호도 곧 액자를 봤다.피해자와 성인

  • 다정한 지옥   9화

    본사에서 두 블록쯤 떨어진 횟집 안은 이미 제법 시끄러웠다.잔 부딪치는 소리와 웃음이 칸막이 너머까지 뒤섞였고, 처음에는 정갈했던 테이블도 빈 술병과 접시로 제법 어수선해져 있었다.한국에 돌아온 뒤 처음 참석한 팀 회식이었다.회장 딸이랍시고 첫 회식부터 술까지 빼면 사람들이 더 어려워할 것 같아 오는 잔을 적당히 받아 마셨는데, 문제는 그 적당히가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는 데 있었다.“윤 대리님.”옆자리 과장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진짜 미국에서 십 년을 있었어요?”“네.”“근데 한국말을 진짜 잘하시네.”이재가 잠시 과장을 바라봤다.“……한국인이니까요.”맞은편의 다은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과장님.”“어?”“진짜 장난 아니고, 똑같은 질문 세 번째 하신 거 알아요?”과장이 눈을 크게 떴다.“내가? 진짜?”“네. 진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또옥같았어요.”“야, 김다은. 너 취한 거 아냐?”이재가 웃음을 참으며 둘을 번갈아 봤다.“과장님이 다은 씨보다 조금 더 취한 것 같기는 해요.”“거봐요.”다은이 냉큼 이재 쪽으로 붙었다.과장이 헛웃음을 터뜨렸다.“둘이 벌써 한 편을 먹었네.”이재는 이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입사 초기만 해도 이재가 출근하면 괜히 모니터부터 확인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같은 농담에 웃고, 취한 얼굴까지 보여줄 정도는 됐으니까.“자자, 슬슬 2차 가실 분들은 가시죠.”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강요 아닙니다. 집에 갈 사람은 집에 가고. 신나게 놀 사람들은 더 놀고.”누군가 바로 받았다.“팀장님이 제일 신나게 놀고 싶으신 것처럼 들리는데요.”“내가 언제.”웃음이 터지는 틈에 이재는 가방을 챙겼다.다은이 고민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대리님 가세요?”“네. 저는 여기까지.”“저는 어떡하죠. 사회생활을 좀 하긴 해야 할 것 같고……. 따라가면 또 취할 것 같고.”“가서 안 취하면 되죠.”“그게…… 될까요?”“그걸 해내는 것도 사회생활 능력이에요.”다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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