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일요일 아침, 이재는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에 잠에서 깼다.
경찰이었다.
전날 성림동에서 발생한 사건과 관련해 당분간 주거지 인근 순찰을 강화할 예정이며, 건물 보안팀과도 협조를 마쳤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이상한 사람을 보거나 조금이라도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라며 담당자 번호까지 남겼다.
전화를 끊고 거실로 나온 이재는 커튼을 걷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도로 위로 차가 드문드문 지나갔고, 산책하는 사람도 보였다.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알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라는 걸.
아버지가 보낸 사람들도 어젯밤부터 근처에 있었다. 이재가 불편하지 않도록 건물 안팎에서 거리를 두고 교대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창가에 서 있던 이재의 시선이 길 건너편에 멈췄다.
어제부터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검은색 세단이 한 대 있었다.
설마 저건가.
이재는 잠깐 바라보다 아버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사람 확인했어요. 경찰에서도 연락 왔고.]
조금 고민하다 한 줄을 덧붙였다.
[나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답장은 금방 왔다.
[알았다. 그래도 당분간은 아빠 말 좀 들어.]
이재의 입술이 슬쩍 비뚤어졌다. 아빠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네네.]
보내놓고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는데 다시 진동이 울렸다.
[오늘은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
이재의 손가락이 멈췄다.
오늘 저녁 일곱 시.
어제 잡은 약속이 떠올랐다.
[그건 안 돼.]
이번에는 답장이 없었다.
이재는 잠깐 기다리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전화가 올 것이다.
잔소리 들을 준비나 해야겠다.
***
십 년 전 기록은 생각보다 상태가 좋았다.
태혁은 책상 위에 펼쳐놓은 수색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서진우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건 새벽 두 시 십칠 분.
경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다 성림대교 인근에서 사고가 났고, 차량은 교량 진입부 난간을 들이받은 채 발견됐다.
차량 내부에서는 상당량의 혈흔이 나왔다.
서진우의 것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사고 차량에서 강변까지 이어진 혈흔.
끊긴 흔적.
그리고 목격자 한 명.
당시 인근을 지나던 택시기사는 난간 아래로 사람이 떨어지는 것을 봤다고 진술했다.
수색은 즉시 시작됐다.
수중 수색부터 하류까지 범위를 넓혔고, 며칠 뒤에는 인접 지역까지 확인했다.
그래도 시신은 나오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기존 기록이랑 같습니다.”
맞은편에 앉은 준호가 복사본을 넘겼다.
“추가로 나온 건?”
“없습니다. 원본이라고 뭐 숨겨진 페이지가 있는 건 아니네요.”
태혁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더 답답했다.
십 년 전에도 그랬다.
정황은 한 방향을 가리키는데 마지막 하나가 없었다.
죽었다고 보기에는 충분했지만 죽었다고 확정하기에는 부족했다.
그 차이가 십 년 만에 다시 문제가 됐다.
준호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팀장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뭘.”
“서진우요.”
태혁이 기록에서 눈을 떼고 준호를 쳐다봤다.
“진짜 살아 있다고 보세요?”
태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책상 한쪽에는 전날 현장에서 촬영한 사진들이 놓여 있었다.
그중 한 장을 집었다.
피해자의 집.
시신이 발견된 거실.
그리고 그곳에 놓여 있던 오래된 체크카드.
서진우.
십 년 전에 사라진 이름이 너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모르지.”
태혁이 사진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다시 보는 거고.”
준호도 사진을 집어 들었다.
“근데 이상하긴 합니다.”
“뭐가.”
“십 년 동안 흔적도 없던 인간이 돌아와서 제일 먼저 자기 이름부터 남긴다는 게.”
태혁의 시선이 사진으로 내려갔다.
자신도 그게 걸렸다.
카드는 숨겨져 있지 않았다.
찾기 어려운 곳에 떨어져 있지도 않았다.
감식반이 현장을 훑기 시작하자마자 발견할 수 있을 만큼 눈에 띄는 곳에 있었다.
꼭 일부러 보라고 놔둔 것처럼.
서진우가 정말 살아 있다면 십 년 만에 다시 범행을 시작하며 자신의 귀환을 알리고 싶었을 수도 있었다.
반대로 누군가 서진우라는 이름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라면.
태혁의 생각이 거기서 멈췄다.
아직은 어느 쪽도 가설이었다.
“피해자 쪽은?”
“아직 특별한 건 없습니다. 서진우하고 직접적인 접점도 안 나오고요. 가족관계, 직장, 금융 기록까지 다시 보고 있습니다.”
“최근 출입자.”
“확인 중입니다.”
“십 년 전 피해자들하고도 다시 대조해.”
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태혁은 사진을 다시 내려다봤다.
증거보다 먼저 결론을 내리는 건 가장 멍청한 짓이었다.
그때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태혁은 무심코 화면을 확인했다.
윤이재.
[늦지 마요.]
그 아래 식당 위치가 하나 첨부돼 있었다.
태혁은 시간을 확인했다.
여섯 시 십 분.
준호가 보고 있던 서류 위로 태혁의 손이 올라왔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네?”
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태혁은 이미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일요일이잖아. 너도 좀 쉬어라.”
준호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이상했다.
오늘 강태혁은 아무래도 좀 이상했다.
일요일에 사람 불러내 놓고 해가 지기도 전에 먼저 들어가라는 것도 그랬지만, 가만 보니 아침부터 묘하게 달랐다.
셔츠는 평소보다 반듯했고, 머리도 평소처럼 대충 손으로 넘긴 모양새가 아니었다.
준호가 태혁을 위아래로 한번 훑었다.
그러다 코끝에 희미하게 걸리는 향에 눈을 가늘게 떴다.
“팀장님.”
“왜.”
“향수 뿌리셨어요?”
태혁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닌데.”
“아니긴요.”
준호가 자리에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형사를 속입니까?”
“뭐 하는 거야.”
“잠깐만 있어 봐요.”
준호가 정말 코를 킁킁거리며 다가왔다.
태혁이 질색하며 한 발 물러났다.
“너 미쳤냐?”
“맞는데.”
“뭐가 맞아.”
“향수요.”
태혁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
정말 별생각 없이 뿌린 거였다.
평소 거의 손대지 않던 병이 세면대 위에 보여서.
한 번.
딱 한 번 뿌렸다.
그게 뭐라고.
“가십니까?”
준호가 묘하게 웃는 얼굴로 물었다.
“어.”
태혁은 재킷을 집어 들었다.
“빨리 들어가라.”
“네.”
더 대꾸하지 않고 태혁이 나갔다.
문이 닫혔다.
준호는 한동안 그쪽을 바라봤다.
여섯 시 십오 분.
향수.
단정한 머리.
일요일이니까 쉬라는 강태혁.
준호가 천천히 의자에 등을 기댔다.
“……와.”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저 인간도 데이트를 하는구나.
***
옷장 문을 연 지 한참인데 이재는 아직 아무것도 고르지 못했다.
손은 벌써 세 번째 옷걸이에 가 있었다.
검은 원피스를 꺼내 몸 앞에 대봤다가 슬그머니 밀어 넣었다.
이건 좀.
오늘 처음 만나는 사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한 약속도 아닌데 너무 마음먹고 나온 사람 같았다.
이번에는 옆에 걸린 니트를 꺼냈다.
거울 앞에 대보자마자 다시 넣었다.
이건 또 너무 안 꾸민 느낌이었다.
이재는 옷장 문에 기대 한동안 옷들을 노려봤다.
이상했다.
출근할 때도 이 정도로 고민하지 않았다. 중요한 미팅이 있는 날조차 옷을 두 번 갈아입은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하나를 고르면 다른 하나가 나아 보이고, 그걸 꺼내면 처음 게 다시 눈에 밟혔다.
“……뭐 하는 거지.”
그냥 밥이었다.
어젯밤에는 술까지 마신 얼굴로 설렁탕도 같이 먹었다. 오늘 오후에는 화장은커녕 자다 깨서 머리도 엉망인 꼴까지 보여줬다.
새삼 잘 보일 게 뭐가 있다고.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그 얼굴 그대로 나가기가 싫었다.
결국 후보 두 벌만 침대 위에 남았다.
이재는 사진을 찍은 뒤 메시지 앱을 열어 클로이에게 보냈다.
[You up?]
[자니?]곧이어 사진 두 장을 연달아 보냈다.
[If you're awake, pick one. 1 or 2.]
[안 자면 골라줘. 1번, 2번.]답장은 없었다.
이재가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는데 채 삼 분도 지나지 않아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진짜 안 잤네.”
통화를 받자 산발이 된 금발과 베개 자국이 선명한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이재가 웃었다.
“Isn't it like two in the morning there?”
“거기 새벽 두 시 아니야?”클로이는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화면으로 얼굴부터 들이밀었다.
“You knew that when you texted me.”
“알면서 연락한 거 아니었어?”“Just checking if you were awake.”
“안 자나 물어본 거지.”“At two in the morning?”
“새벽 두 시에?”이재가 입을 다물었다.
클로이가 하품을 하더니 사진을 다시 확인했다.
“You going on a date?”
“데이트 가?”“No.”
“아니.”“With a man?”
“남자 만나?”“……Yes.”
“……응.”“Alone?”
“둘이?”“Yes.”
“응.”클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Date.”
“데이트네.”“I said no.”
“아니라니까.”“Two.”
“2번.”너무 빨라서 이재가 오히려 눈썹을 올렸다.
“Isn't it a little too much?”
“좀 과하지 않아?”클로이가 피식 웃었다.
“That's the point.”
“그러니까 그거 입어.”“Why?”
"왜?"
“Girl, if you're waking me up at two in the morning to ask, you obviously want to try.”
“야, 새벽 두 시에 나 깨워서 물어볼 정도면 너도 작정하고 싶은 거 아니야?”할말이 없었다. 클로이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Hair down. My earrings.”
“머리 풀고. 내가 준 귀걸이 하고.”“Anything else, Mom?”
“또 뭐 없어, 엄마?”“Yeah. Admit it's a date.”
“응. 데이트인 거 인정해.”“Good night.”
“잘 자.”“Send me a picture!”
“사진 보내!”이재는 통화를 끊었다.
잠깐 조용해진 방에서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진짜 데이트 아닌데...
이재는 결국 2번 옷을 집었다.
검은 원피스였다.
옷걸이에 걸려 있을 때는 조금 과해 보였는데 막상 입고 나니 생각보다 더 그랬다.
매끈한 검은 천이 가느다란 어깨에서 허리까지 군더더기 없이 내려오다가 잘록한 곳에서 한 번 부드럽게 모였다. 걸음을 옮기면 무릎 아래로 떨어진 치맛자락이 느리게 따라왔다.
노출이 많은 옷도 아니었다.
오히려 목선도, 길이도 단정했다.
그런데 평소 입던 옷보다 몸의 선이 훨씬 또렷했다.
이재는 거울 속 자신을 보다가 괜히 허리께를 한 번 쓸어내렸다.
분명 예뻤다.
그래서 문제였다.
“……그냥 밥인데.”
그렇다고 벗지는 않았다.
거울 앞에 앉아 화장을 시작했다.
피부는 얇게 정리하고, 눈매는 원래 선을 해치지 않을 정도로만 또렷하게 잡았다. 립을 하나 골라 발랐다가 너무 진한 것 같아 닦아냈고, 결국 평소보다 조금 혈색이 도는 색으로 다시 골랐다.
거울 속 얼굴을 한참 보다가 스스로 어이가 없어졌다.
립을 두 번이나 바꿨다.
윤이재가.
남자랑 밥 한 끼 먹겠다고.
“미쳤나 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귀걸이까지 했다.
클로이가 몇 년 전 생일에 선물한 작은 다이아 귀걸이였다.
머리는 말대로 풀었다. 정돈한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마지막으로 향수를 집었다.
손목에 한 번 뿌렸다.
은은한 향이 피부 위에서 천천히 퍼졌다.
이재는 손목을 목덜미 가까이에 가져갔다가 문득 멈췄다.
어제 가까이 섰을 때 강태혁에게서도 좋은 냄새가 났었다.
현관에서 자신을 붙잡았을 때, 얼굴이 가까워지고, 그의 손이 허리에 닿았던 순간.
깨끗하고 서늘한 향이 아주 희미하게 났다.
그때는 정신이 없어 제대로 의식하지도 못했는데 이상하게 그게 지금 떠올랐다.
이재는 향수를 든 채 몇 초간 가만히 있었다.
그러고 보니 냄새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미쳤네, 진짜.”
이재는 향수병을 내려놓았다.
휴대폰 화면에 여섯 시 삼십오 분이 떠 있었다.
더 고민하다가는 옷을 또 갈아입을 것 같았다.
이재는 가방을 들었다.
그냥 밥이었다.
진짜로.
***
태혁은 약속 시간보다 십 분 먼저 도착했다.
예약자 이름을 확인한 직원이 안쪽으로 안내하려 했지만, 태혁은 입구 근처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낮은 조명 아래 테이블 간격이 넉넉했다. 창밖으로는 저녁빛이 내려앉은 도심이 한눈에 들어왔다.
비싼 걸 사겠다는 말이 허풍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태혁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여섯 시 오십오 분.
조금 전까지 보던 수색 기록이 머릿속 한편에 남아 있었다.
서진우.
차량.
혈흔.
강변에서 끊긴 흔적.
그리고 체크카드.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맞춰본 조각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입구 쪽에서 직원이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태혁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다.
윤이재였다.
검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평소보다 길게 풀어놓은 머리 사이로 작은 귀걸이가 반짝였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검은 치맛자락이 가느다란 다리를 따라 느리게 흔들렸다.
그 정도만 눈에 들어왔다.
그다음부터는 잘 모르겠다.
이재가 자신을 발견했다.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웃었다.
태혁은 그대로 멈췄다.
예뻤다.
그 단순한 생각이 어이없을 만큼 늦게 들었다.
원래 예쁜 여자인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했다.
이재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짧은 순간이 괜히 길었다.
가까워질수록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도 애매해졌다.
그래서 그냥 얼굴을 봤다.
그게 더 문제였다.
“많이 기다렸어요?”
희미한 향이 함께 스쳤다.
태혁의 시선이 잠깐 흔들렸다.
준호에게 들킨 향수 냄새가 문득 떠올랐다.
자신도 오늘 평소에는 하지 않던 짓을 하나 했다는 사실이 이제야 조금 우스워졌다.
이재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강태혁 씨?”
태혁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아니요.”
한 박자 늦었다.
늘 먼저 보고, 먼저 판단하고, 먼저 움직이던 남자가.
아주 드물게.
직원이 두 사람을 안쪽 자리로 안내했다.창가를 따라 낮은 조명이 길게 이어진 곳이었다. 이재가 먼저 걸었고, 태혁은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몇 걸음인데 이상하게 시선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검은 원피스는 가까이서 보니 더 그랬다. 노출이 많은 것도 아닌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느다란 몸의 선이 고스란히 따라 움직였다.태혁은 괜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오늘따라 서울 야경이 볼 만했다.자리에 도착하자 직원이 이재의 의자를 빼주었다. 이재가 앉고 태혁도 맞은편에 자리했다.메뉴판이 놓였다.이재는 바로 펼쳤지만 태혁은 한 박자 늦었다.“여기 괜찮죠?”“네.”“메뉴는요?”대답은 하는데 정작 메뉴판은 보지 않았다.이재가 눈을 들었다.태혁의 시선이 자신에게 있었다.“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아뇨.”그제야 태혁이 메뉴판을 펼쳤다.“좋은데.”“근데 왜 안 봐요?”“보고 있었습니다.”“나를 보고 있었잖아요.”태혁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이재가 웃었다.“뭐 먹고 싶은데요?”“윤이재 씨 먹고 싶은 걸로 골라요.”“내가 사니까?”“그건 아니고.”“그럼?”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태혁은 물잔만 들었다.뭐야.아까부터.이재는 메뉴판으로 시선을 내리면서도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는 걸 느꼈다.그러고 보니 이쪽만 평소와 다른 것도 아니었다.오늘따라 반듯한 셔츠에, 평소보다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 가까이 섰을 때 느꼈던 향도 어제보다 조금 선명했다.괜히 옷장을 몇 번이나 열었다 닫은 게 자기뿐은 아닌 모양이었다.그 사실을 깨닫자 조금 전부터 붕 떠 있던 기분이 더 이상해졌다.“강태혁 씨.”“네.”“향수 뿌렸어요?”“네.”대답이 너무 순순했다.“왜요?”태혁이 눈을 들었다.“나는 향수 뿌리면 안 됩니까?”“아니, 그런 건 아닌데.”“그럼 됐네요.”“그게 아니라…….”이재는 말을 고르다 웃었다.“그런 거 성가셔할 것 같아서.”“평소에는 그렇죠.”평소에는.이재의 손가락이 메뉴판 위에서
일요일 아침, 이재는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에 잠에서 깼다.경찰이었다.전날 성림동에서 발생한 사건과 관련해 당분간 주거지 인근 순찰을 강화할 예정이며, 건물 보안팀과도 협조를 마쳤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이상한 사람을 보거나 조금이라도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라며 담당자 번호까지 남겼다.전화를 끊고 거실로 나온 이재는 커튼을 걷었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도로 위로 차가 드문드문 지나갔고, 산책하는 사람도 보였다.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그런데 이제는 알고 있었다.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라는 걸.아버지가 보낸 사람들도 어젯밤부터 근처에 있었다. 이재가 불편하지 않도록 건물 안팎에서 거리를 두고 교대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창가에 서 있던 이재의 시선이 길 건너편에 멈췄다.어제부터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검은색 세단이 한 대 있었다.설마 저건가.이재는 잠깐 바라보다 아버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사람 확인했어요. 경찰에서도 연락 왔고.]조금 고민하다 한 줄을 덧붙였다.[나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답장은 금방 왔다.[알았다. 그래도 당분간은 아빠 말 좀 들어.]이재의 입술이 슬쩍 비뚤어졌다. 아빠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네네.]보내놓고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는데 다시 진동이 울렸다.[오늘은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이재의 손가락이 멈췄다.오늘 저녁 일곱 시.어제 잡은 약속이 떠올랐다.[그건 안 돼.]이번에는 답장이 없었다.이재는 잠깐 기다리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어차피 조금 있으면 전화가 올 것이다.잔소리 들을 준비나 해야겠다.***십 년 전 기록은 생각보다 상태가 좋았다.태혁은 책상 위에 펼쳐놓은 수색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서진우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건 새벽 두 시 십칠 분.경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다 성림대교 인근에서 사고가 났고, 차량은 교량 진입부 난간을 들이받은 채 발견됐다.차량 내부에서는 상당량의 혈흔이 나
눈을 떴다.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이재는 한동안 소파에 누운 채 눈만 깜빡였다. 블라인드 사이로 오후의 햇빛이 길게 들어와 거실 바닥에 걸쳐 있었다.이렇게 낮에 저절로 잠든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십 년 전 사건 이후 잠은 이재에게 꽤 번거로운 일이었다. 피곤하다고 자연스럽게 잠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누워서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 약을 먹는 날이 많았고, 어쩌다 잠들어도 작은 소리에 쉽게 깼다.낮잠은 더더욱 없었다.그런데 오늘은 이상할 만큼 깊게 잤다.이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맑았다. 몸에 오래 눌어붙어 있던 피로가 조금 걷힌 것처럼 개운했다.낮잠이 원래 이렇게 개운한 거였나.그 순간 무언가가 허벅지 아래로 미끄러졌다.검은 재킷.“…….”강태혁 거였다.아까 소파 등받이에 걸어놓았던.소파에 기대 휴대폰을 보다가 살짝 잠이 든 모양이었다. 태혁은 식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고, 자신은 정말 잠깐만 눈을 감으려고 했다.정말 잠깐이었는데.이재는 테이블 위 휴대폰을 집었다.오후 세 시가 조금 넘었다.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대충 정리하며 거실을 둘러봤다.식탁이 비어 있었다.서류도 없었다.“……강태혁 씨?”대답이 없었다.조금 전까지 느긋하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설마 갔나.이재는 소파에서 급하게 일어나 넓은 거실을 가로질렀다.현관에 도착해 가장 먼저 바닥을 내려다봤다.강태혁의 신발이 그대로 있었다.다행이다.그 생각을 한 순간 잠이 덜 깬 발이 엉켰다.“어…….”몸이 옆으로 기울었다.넘어지기 거의 직전이었다. 이재의 허리를 단단한 팔이 받쳤다. 거의 동시에 다른 손이 팔뚝을 잡아 세웠다.“조심해요.”귓가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이재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고개를 들자 태혁의 얼굴이 보였다.가까웠다.허리를 받친 손바닥의 온기가 얇은 옷 너머로 선명했다. 이재는 그것을 의식한 순간 오히려 움직이지 못했다.시선이 마주쳤다.잠이 덜 깬 탓인지 머리가 평소보다 느리게 움직였
태혁은 정말 남았다.재킷을 소파 등받이에 걸어두고,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던 사진부터 다시 봉투에 넣었다. 서진우의 이름이 가장 마지막으로 사라졌다.그 뒤로는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태혁은 식탁 한쪽에 가져온 서류를 펼쳐놓고 휴대폰으로 몇 통의 전화를 돌렸다.이재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둘 사이에는 식탁 하나가 놓여 있었고, 태혁은 긴 다리를 의자 아래로 조금 접어 넣은 채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 혼자 쓰던 식탁에 덩치 큰 남자가 마주 앉아 있으니, 여섯 명은 넉넉히 앉는 테이블이 이상하게 좁아 보였다.“차량은?”태혁이 낮게 물었다.잠깐의 침묵이 흘렀다.“거기서 끊겼으면 반경 넓혀. 도보로 들어왔다고 도보로 빠졌다고 생각하지 말고.”일할 때는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이재는 턱을 괸 채 태혁을 바라봤다.생각보다 더 차가웠다.자신과 이야기할 때도 살가운 남자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눈썹이 움직이거나,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거나, 아주 가끔은 웃기도 했다.지금은 달랐다. 표정이 거의 없다고 해야 하나.필요한 것만 물었고, 상대가 보고하는 동안에는 말을 끊지 않았다. 듣고 판단한 뒤 곧바로 다음 지시를 내렸다.“피해자 금융 기록은?”태혁의 손이 서류 한 장에서 멈췄다.“최근 것만 보지 말고 첫 사건 전까지 넓혀.”목소리에도 높낮이가 거의 없었다.새벽부터 살인 현장에 있었고, 몇 시간 전에는 십 년 전 죽은 줄 알았던 연쇄살인범의 물건까지 발견했다.그런데도 흐트러지는 게 없었다.십 년 전에는 그저 어른처럼 보였다.열여덟 살의 자신에게 스물다섯은 충분히 그런 나이였으니까.지금 보니 꽤…….이재의 시선이 태혁의 손으로 내려갔다.서류를 넘기는 길고 반듯한 손가락을 따라가다가 다시 얼굴로 올라왔다.턱을 괴고 있던 손가락이 입술 아래를 한번 눌렀다.생각은 거기까지만 하기로 했다.“뭘 그렇게 봐요.”이재의 어깨가 움찔했다.태혁은 여전히 서류를 보고 있었다.“뭐, 뭐가요?”그제야 태혁이 눈을 들었다.시선이 정확하게
성림동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주말 아침의 주택가는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높은 담장과 잘 다듬어진 정원수 사이로 수입차 몇 대가 드문드문 지나갔고, 골목 어귀에는 새벽 배송을 마친 냉장 탑차가 비상등을 켠 채 서 있었다. 운동복 차림으로 개를 산책시키던 남자가 폴리스라인 앞에서 걸음을 늦췄다가 경찰의 시선을 받고 다시 움직였다.서울에서도 손꼽히는 부촌의 아침이었다.그 지나치게 반듯한 풍경 한가운데 경찰차 세 대가 서 있었다.태혁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현장으로 걸었다.“팀장님.”대문 앞에서 기다리던 준호가 다가왔다.“신고는?”“아침 여섯 시 십칠 분. 피해자 동생이 발견했습니다. 오늘 같이 등산 가기로 했는데 연락이 안 돼서 왔다가.”“피해자 혼자 살고?”“네. 오십팔 세 남성. 이혼했고 자녀는 따로 삽니다.”태혁이 덧신을 받아 신었다.“출입문.”“파손 없습니다.”대문도, 현관문도 멀쩡했다. 잠금장치에 억지로 손댄 흔적도 없었다.태혁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벌써 익숙한 시작이었다.“CCTV는.”“수빈이가 보고 있습니다. 집 앞 하나, 골목 진입로 두 개 더 확보 중이고요.”태혁이 안으로 들어갔다.현관에서 거실까지 이어진 바닥은 지나치게 깨끗했다. 신발장도 닫혀 있었고 넘어지거나 깨진 물건 하나 없었다. 이 집에서 밤사이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만 떼어놓으면, 누군가 강제로 들어왔다는 흔적부터 찾기가 어려웠다.그리고 거실 끝.식탁 옆 바닥에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하얀 장갑을 낀 감식반 직원들이 주변을 촬영하고 있었다.준호가 목소리를 낮췄다.“정확한 사인은 부검 들어가야 합니다. 현재는 경부 쪽 손상으로 보고 있고, 사망 추정 시각은 어젯밤 열한 시에서 오늘 새벽 두 시 사이입니다.”태혁은 시신보다 먼저 주변을 봤다.창문.현관.식탁.가구 배치.그리고 거실장 위 액자.시선이 멎었다.“준호야.”“네.”“저거 원래 위치 확인해.”준호도 곧 액자를 봤다.피해자와 성인
본사에서 두 블록쯤 떨어진 횟집 안은 이미 제법 시끄러웠다.잔 부딪치는 소리와 웃음이 칸막이 너머까지 뒤섞였고, 처음에는 정갈했던 테이블도 빈 술병과 접시로 제법 어수선해져 있었다.한국에 돌아온 뒤 처음 참석한 팀 회식이었다.회장 딸이랍시고 첫 회식부터 술까지 빼면 사람들이 더 어려워할 것 같아 오는 잔을 적당히 받아 마셨는데, 문제는 그 적당히가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는 데 있었다.“윤 대리님.”옆자리 과장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진짜 미국에서 십 년을 있었어요?”“네.”“근데 한국말을 진짜 잘하시네.”이재가 잠시 과장을 바라봤다.“……한국인이니까요.”맞은편의 다은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과장님.”“어?”“진짜 장난 아니고, 똑같은 질문 세 번째 하신 거 알아요?”과장이 눈을 크게 떴다.“내가? 진짜?”“네. 진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또옥같았어요.”“야, 김다은. 너 취한 거 아냐?”이재가 웃음을 참으며 둘을 번갈아 봤다.“과장님이 다은 씨보다 조금 더 취한 것 같기는 해요.”“거봐요.”다은이 냉큼 이재 쪽으로 붙었다.과장이 헛웃음을 터뜨렸다.“둘이 벌써 한 편을 먹었네.”이재는 이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입사 초기만 해도 이재가 출근하면 괜히 모니터부터 확인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같은 농담에 웃고, 취한 얼굴까지 보여줄 정도는 됐으니까.“자자, 슬슬 2차 가실 분들은 가시죠.”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강요 아닙니다. 집에 갈 사람은 집에 가고. 신나게 놀 사람들은 더 놀고.”누군가 바로 받았다.“팀장님이 제일 신나게 놀고 싶으신 것처럼 들리는데요.”“내가 언제.”웃음이 터지는 틈에 이재는 가방을 챙겼다.다은이 고민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대리님 가세요?”“네. 저는 여기까지.”“저는 어떡하죠. 사회생활을 좀 하긴 해야 할 것 같고……. 따라가면 또 취할 것 같고.”“가서 안 취하면 되죠.”“그게…… 될까요?”“그걸 해내는 것도 사회생활 능력이에요.”다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