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partir

11화

Autor: 홍피코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09-04 11:58:21

태혁은 정말 남았다.

재킷을 소파 등받이에 걸어두고,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던 사진부터 다시 봉투에 넣었다. 서진우의 이름이 가장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그 뒤로는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

태혁은 식탁 한쪽에 가져온 서류를 펼쳐놓고 휴대폰으로 몇 통의 전화를 돌렸다.

이재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

둘 사이에는 식탁 하나가 놓여 있었고, 태혁은 긴 다리를 의자 아래로 조금 접어 넣은 채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 혼자 쓰던 식탁에 덩치 큰 남자가 마주 앉아 있으니, 여섯 명은 넉넉히 앉는 테이블이 이상하게 좁아 보였다.

“차량은?”

태혁이 낮게 물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거기서 끊겼으면 반경 넓혀. 도보로 들어왔다고 도보로 빠졌다고 생각하지 말고.”

일할 때는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이재는 턱을 괸 채 태혁을 바라봤다.

생각보다 더 차가웠다.

자신과 이야기할 때도 살가운 남자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눈썹이 움직이거나,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거나, 아주 가끔은 웃기도 했다.

지금은 달랐다. 표정이 거의 없다고 해야 하나.

필요한 것만 물었고, 상대가 보고하는 동안에는 말을 끊지 않았다. 듣고 판단한 뒤 곧바로 다음 지시를 내렸다.

“피해자 금융 기록은?”

태혁의 손이 서류 한 장에서 멈췄다.

“최근 것만 보지 말고 첫 사건 전까지 넓혀.”

목소리에도 높낮이가 거의 없었다.

새벽부터 살인 현장에 있었고, 몇 시간 전에는 십 년 전 죽은 줄 알았던 연쇄살인범의 물건까지 발견했다.

그런데도 흐트러지는 게 없었다.

십 년 전에는 그저 어른처럼 보였다.

열여덟 살의 자신에게 스물다섯은 충분히 그런 나이였으니까.

지금 보니 꽤…….

이재의 시선이 태혁의 손으로 내려갔다.

서류를 넘기는 길고 반듯한 손가락을 따라가다가 다시 얼굴로 올라왔다.

턱을 괴고 있던 손가락이 입술 아래를 한번 눌렀다.

생각은 거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뭘 그렇게 봐요.”

이재의 어깨가 움찔했다.

태혁은 여전히 서류를 보고 있었다.

“뭐, 뭐가요?”

그제야 태혁이 눈을 들었다.

시선이 정확하게 마주쳤다.

“아니면 말고.”

그리고 다시 서류로 돌아갔다.

이재만 할 말을 잃었다. 사람을 민망하게 만들어놓고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재는 괜히 식탁 위 커피잔을 들었다. 잔을 입에 대면서도 시선은 슬쩍 맞은편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안 들킨 것 같았다. 아마도.

***

한동안 태혁의 통화가 이어졌다.

이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자 달걀과 식빵이 보였다.

아침부터 현장에 있었으니 뭘 제대로 먹었을 리 없었다. 저렇게 정신없이 일하는 사람한테 먹었느냐고 물어봤자 괜찮다는 대답부터 돌아올 것 같았다.

그냥 뭐라도 해주자.

팬에 버터를 녹이고 식빵을 올렸다. 고소한 냄새가 퍼지는 동안 옆에는 달걀 두 개를 깨뜨렸다.

토스트와 계란 프라이.

요리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간단했다. 

뒤쪽에서는 여전히 태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확인되면 바로 보내.”

이재가 뒤집개를 든 채 거실 쪽을 돌아봤다.

식탁에 앉은 태혁이 한 손으로 전화를 받으며 다른 손으로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매일 보던 풍경이 묘하게 낯설었다. 이재는 시선을 거두고 달걀을 뒤집었다.

잠시 후 접시를 들고 식탁으로 돌아왔다.

“이거…….”

태혁이 고개를 들었다.

이재는 접시를 그의 서류 옆에 내려놓았다.

“드시면서 하시라고요.”

태혁의 시선이 토스트에 닿았다가 이재에게 올라왔다.

잠깐이었다.

“잘 먹을게요.”

생각보다 순순한 대답이었다.

“네.”

이재는 맞은편에 앉았다.

태혁은 통화를 마무리한 뒤 포크를 들었다. 토스트를 한입 먹고, 계란을 잘랐다. 별말은 없었지만 꽤 잘 먹었다.

이재는 휴대폰을 보는 척하다가 슬쩍 눈을 들었다.

태혁이 또 한입 먹었다.

“어때요?”

태혁이 씹던 것을 삼켰다.

“맛있어요.”

“진짜?”

“뭘 그렇게 놀라요.”

“뭐…… 별 게 없으니까.”

“맛있다니까.”

이번에는 조금 단호했다.

이재가 괜히 입술을 눌렀다.

“그럼 됐어요.”

접시는 금방 비었다.

태혁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잘 먹었습니다.”

이재가 빈 접시를 집어 들며 무심코 말했다.

“다음에는 제대로 해줄게요.”

태혁이 이재를 바라봤다. 동시에 이재의 움직임도 멈췄다.

다음.

어젯밤에도 다음이었다.

다음에는 자기가 비싼 걸 사겠다고 했다.

오늘은 또 다음에 뭘 해주겠다고 한다.

요 며칠 사이 강태혁과 자꾸 다음이 생겼다.

“아니.”

이재가 접시를 고쳐 잡았다.

“내가 또 제대로 하면 잘하거든요."

태혁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가는 게 보였다.

“왜 웃어요?”

“안 웃었는데.”

“방금 웃었잖아요.”

“그랬나.”

태혁이 그녀를 잠깐 보다가 말했다.

“그럼 다음엔 제대로 먹어보죠.”

이재가 할말을 잃었다.

본인이 꺼낸 말이었는데 이상하게 돌려받은 쪽이 더 민망했다.

태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서류를 펼쳤다.

이재는 접시를 들고 주방으로 돌아갔다.

귀가 뜨거운 게 기분 탓은 아닌 것 같았다.

***

설거지를 거의 끝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아버지였다.

“응, 아빠.”

―오늘 집으로 들어와라.

인사도 없었다.

평소보다 단단한 목소리에 이재가 싱크대 물을 잠갔다.

“왜.”

―왜긴 왜야.

정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성림동에서 사람이 죽었어. 십 년 전 사건이랑 비슷하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는데 네가 지금 혼자 있을 때야?

“경찰에서도 연락 왔어요.”

―알아. 그러니까 들어와.

“저 괜찮아요.”

―안 괜찮아.

대답이 단호했다.

―네가 괜찮다고 할 상황이 아니야. 당분간 혼자 있으면 안 되겠다. 사람 보낼 테니까 준비해.

“아버지.”

―이번에는 고집부리지 마.

평소에는 이재의 뜻을 웬만하면 꺾지 않는 아버지였다. 그래서 저 말투가 더 낯설었다.

이재는 거실 쪽을 한번 봤다.

“나 혼자 아니에요.”

정호가 잠깐 말을 멈췄다.

―그럼. 누구랑 있는데.

“친구요.”

말하고 나니 묘했다.

강태혁을 친구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누구.

이재가 피식 웃었다.

“있어요. 아빠가 내 친구를 다 알아?”

―친구 나오는 시간에 맞춰 사람 보내마. 같이 내려와.

이재의 입이 먼저 움직였다.

“그게... 친구가 오늘 밤까지 같이 있기로 해서...”

식탁 쪽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멎었다.

아주 잠깐이었다.

이재는 괜히 그쪽을 보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의 정호도 조용했다.

―……남자냐?

“아빠.”

이재가 미간을 눌렀다.

“나도 사생활이라는 게 있어요.”

―지금 사생활 따질 때냐.

“그 친구가 같이 있기로 했고 경찰에서도 보안인력 붙여준다고 했어요.”

정호가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우리 쪽에서 사람은 붙일 거다.

이쯤 되면 더 버텨봐야 아버지가 이길 게 뻔했다.

이재가 순순히 물러났다.

“알겠어요.”

―오늘은 혼자 있지 말고.

“네.”

―내일 다시 전화하마.

통화를 끊었다.

이재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태혁이 보고 있었다.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왜요.”

“내가 친구입니까?”

역시 들었나보다. 

이재는 태연한 척 식탁으로 돌아왔다.

“아빠한테 형사랑 집에 단둘이 있다고 할 순 없잖아요.”

태혁은 잠깐 이재를 바라보다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그 친구, 오늘 밤까지 있어줘야겠네요.”

이재가 멈췄다.

……역시 그것도 들었다.

“그건...! 아버지 진정시키려고 그런 거구요.”

“알아요.”

너무 쉽게 넘어가니 오히려 머쓱했다. 이재가 의자 등받이에 손을 얹었다.

“바쁜 일 있으면 가요, 그럼.”

태혁은 잠시 멈추더니 고개를 들어 이재와 눈을 마주했다. 

“진짜?”

“바쁘시잖아요.”

“바쁘죠.”

이재가 입술을 다물었다. 역시 괜히 말했다.

“그럼 가면 되겠네요.”

태혁이 몇 초쯤 그녀를 봤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서류 한 장을 넘겼다.

“안 갑니다.”

“왜요.”

“있어달라면서요.”

낮은 목소리였다. 장난을 치는 투도 아니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이재는 괜히 의자를 조금 당겨 앉았다.

“……그래도 일은 해야 되잖아요.”

“하고 있잖아요.”

태혁은 정말 다시 서류를 보고 있었다. 마치 애초부터 갈 생각이 없었던 사람처럼.

이재는 잠깐 그를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는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경찰도 붙을 거고, 아버지가 붙인 회사 쪽 사람도 오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제 충분히 안전해야 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남자가 있는 이 집은 어쩌면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겠다고.

Continúa leyendo este libro gratis
Escanea el código para descargar la App

Último capítulo

  • 다정한 지옥   14화

    직원이 두 사람을 안쪽 자리로 안내했다.창가를 따라 낮은 조명이 길게 이어진 곳이었다. 이재가 먼저 걸었고, 태혁은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몇 걸음인데 이상하게 시선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검은 원피스는 가까이서 보니 더 그랬다. 노출이 많은 것도 아닌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느다란 몸의 선이 고스란히 따라 움직였다.태혁은 괜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오늘따라 서울 야경이 볼 만했다.자리에 도착하자 직원이 이재의 의자를 빼주었다. 이재가 앉고 태혁도 맞은편에 자리했다.메뉴판이 놓였다.이재는 바로 펼쳤지만 태혁은 한 박자 늦었다.“여기 괜찮죠?”“네.”“메뉴는요?”대답은 하는데 정작 메뉴판은 보지 않았다.이재가 눈을 들었다.태혁의 시선이 자신에게 있었다.“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아뇨.”그제야 태혁이 메뉴판을 펼쳤다.“좋은데.”“근데 왜 안 봐요?”“보고 있었습니다.”“나를 보고 있었잖아요.”태혁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이재가 웃었다.“뭐 먹고 싶은데요?”“윤이재 씨 먹고 싶은 걸로 골라요.”“내가 사니까?”“그건 아니고.”“그럼?”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태혁은 물잔만 들었다.뭐야.아까부터.이재는 메뉴판으로 시선을 내리면서도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는 걸 느꼈다.그러고 보니 이쪽만 평소와 다른 것도 아니었다.오늘따라 반듯한 셔츠에, 평소보다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 가까이 섰을 때 느꼈던 향도 어제보다 조금 선명했다.괜히 옷장을 몇 번이나 열었다 닫은 게 자기뿐은 아닌 모양이었다.그 사실을 깨닫자 조금 전부터 붕 떠 있던 기분이 더 이상해졌다.“강태혁 씨.”“네.”“향수 뿌렸어요?”“네.”대답이 너무 순순했다.“왜요?”태혁이 눈을 들었다.“나는 향수 뿌리면 안 됩니까?”“아니, 그런 건 아닌데.”“그럼 됐네요.”“그게 아니라…….”이재는 말을 고르다 웃었다.“그런 거 성가셔할 것 같아서.”“평소에는 그렇죠.”평소에는.이재의 손가락이 메뉴판 위에서

  • 다정한 지옥   13화

    일요일 아침, 이재는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에 잠에서 깼다.경찰이었다.전날 성림동에서 발생한 사건과 관련해 당분간 주거지 인근 순찰을 강화할 예정이며, 건물 보안팀과도 협조를 마쳤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이상한 사람을 보거나 조금이라도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라며 담당자 번호까지 남겼다.전화를 끊고 거실로 나온 이재는 커튼을 걷었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도로 위로 차가 드문드문 지나갔고, 산책하는 사람도 보였다.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그런데 이제는 알고 있었다.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건 아니라는 걸.아버지가 보낸 사람들도 어젯밤부터 근처에 있었다. 이재가 불편하지 않도록 건물 안팎에서 거리를 두고 교대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창가에 서 있던 이재의 시선이 길 건너편에 멈췄다.어제부터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검은색 세단이 한 대 있었다.설마 저건가.이재는 잠깐 바라보다 아버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사람 확인했어요. 경찰에서도 연락 왔고.]조금 고민하다 한 줄을 덧붙였다.[나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답장은 금방 왔다.[알았다. 그래도 당분간은 아빠 말 좀 들어.]이재의 입술이 슬쩍 비뚤어졌다. 아빠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네네.]보내놓고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는데 다시 진동이 울렸다.[오늘은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이재의 손가락이 멈췄다.오늘 저녁 일곱 시.어제 잡은 약속이 떠올랐다.[그건 안 돼.]이번에는 답장이 없었다.이재는 잠깐 기다리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어차피 조금 있으면 전화가 올 것이다.잔소리 들을 준비나 해야겠다.***십 년 전 기록은 생각보다 상태가 좋았다.태혁은 책상 위에 펼쳐놓은 수색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서진우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건 새벽 두 시 십칠 분.경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다 성림대교 인근에서 사고가 났고, 차량은 교량 진입부 난간을 들이받은 채 발견됐다.차량 내부에서는 상당량의 혈흔이 나

  • 다정한 지옥   12화

    눈을 떴다.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이재는 한동안 소파에 누운 채 눈만 깜빡였다. 블라인드 사이로 오후의 햇빛이 길게 들어와 거실 바닥에 걸쳐 있었다.이렇게 낮에 저절로 잠든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십 년 전 사건 이후 잠은 이재에게 꽤 번거로운 일이었다. 피곤하다고 자연스럽게 잠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누워서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 약을 먹는 날이 많았고, 어쩌다 잠들어도 작은 소리에 쉽게 깼다.낮잠은 더더욱 없었다.그런데 오늘은 이상할 만큼 깊게 잤다.이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맑았다. 몸에 오래 눌어붙어 있던 피로가 조금 걷힌 것처럼 개운했다.낮잠이 원래 이렇게 개운한 거였나.그 순간 무언가가 허벅지 아래로 미끄러졌다.검은 재킷.“…….”강태혁 거였다.아까 소파 등받이에 걸어놓았던.소파에 기대 휴대폰을 보다가 살짝 잠이 든 모양이었다. 태혁은 식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고, 자신은 정말 잠깐만 눈을 감으려고 했다.정말 잠깐이었는데.이재는 테이블 위 휴대폰을 집었다.오후 세 시가 조금 넘었다.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대충 정리하며 거실을 둘러봤다.식탁이 비어 있었다.서류도 없었다.“……강태혁 씨?”대답이 없었다.조금 전까지 느긋하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설마 갔나.이재는 소파에서 급하게 일어나 넓은 거실을 가로질렀다.현관에 도착해 가장 먼저 바닥을 내려다봤다.강태혁의 신발이 그대로 있었다.다행이다.그 생각을 한 순간 잠이 덜 깬 발이 엉켰다.“어…….”몸이 옆으로 기울었다.넘어지기 거의 직전이었다. 이재의 허리를 단단한 팔이 받쳤다. 거의 동시에 다른 손이 팔뚝을 잡아 세웠다.“조심해요.”귓가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이재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고개를 들자 태혁의 얼굴이 보였다.가까웠다.허리를 받친 손바닥의 온기가 얇은 옷 너머로 선명했다. 이재는 그것을 의식한 순간 오히려 움직이지 못했다.시선이 마주쳤다.잠이 덜 깬 탓인지 머리가 평소보다 느리게 움직였

  • 다정한 지옥   11화

    태혁은 정말 남았다.재킷을 소파 등받이에 걸어두고,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던 사진부터 다시 봉투에 넣었다. 서진우의 이름이 가장 마지막으로 사라졌다.그 뒤로는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태혁은 식탁 한쪽에 가져온 서류를 펼쳐놓고 휴대폰으로 몇 통의 전화를 돌렸다.이재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었다.둘 사이에는 식탁 하나가 놓여 있었고, 태혁은 긴 다리를 의자 아래로 조금 접어 넣은 채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평소 혼자 쓰던 식탁에 덩치 큰 남자가 마주 앉아 있으니, 여섯 명은 넉넉히 앉는 테이블이 이상하게 좁아 보였다.“차량은?”태혁이 낮게 물었다.잠깐의 침묵이 흘렀다.“거기서 끊겼으면 반경 넓혀. 도보로 들어왔다고 도보로 빠졌다고 생각하지 말고.”일할 때는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이재는 턱을 괸 채 태혁을 바라봤다.생각보다 더 차가웠다.자신과 이야기할 때도 살가운 남자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눈썹이 움직이거나,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거나, 아주 가끔은 웃기도 했다.지금은 달랐다. 표정이 거의 없다고 해야 하나.필요한 것만 물었고, 상대가 보고하는 동안에는 말을 끊지 않았다. 듣고 판단한 뒤 곧바로 다음 지시를 내렸다.“피해자 금융 기록은?”태혁의 손이 서류 한 장에서 멈췄다.“최근 것만 보지 말고 첫 사건 전까지 넓혀.”목소리에도 높낮이가 거의 없었다.새벽부터 살인 현장에 있었고, 몇 시간 전에는 십 년 전 죽은 줄 알았던 연쇄살인범의 물건까지 발견했다.그런데도 흐트러지는 게 없었다.십 년 전에는 그저 어른처럼 보였다.열여덟 살의 자신에게 스물다섯은 충분히 그런 나이였으니까.지금 보니 꽤…….이재의 시선이 태혁의 손으로 내려갔다.서류를 넘기는 길고 반듯한 손가락을 따라가다가 다시 얼굴로 올라왔다.턱을 괴고 있던 손가락이 입술 아래를 한번 눌렀다.생각은 거기까지만 하기로 했다.“뭘 그렇게 봐요.”이재의 어깨가 움찔했다.태혁은 여전히 서류를 보고 있었다.“뭐, 뭐가요?”그제야 태혁이 눈을 들었다.시선이 정확하게

  • 다정한 지옥   10화

    성림동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주말 아침의 주택가는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높은 담장과 잘 다듬어진 정원수 사이로 수입차 몇 대가 드문드문 지나갔고, 골목 어귀에는 새벽 배송을 마친 냉장 탑차가 비상등을 켠 채 서 있었다. 운동복 차림으로 개를 산책시키던 남자가 폴리스라인 앞에서 걸음을 늦췄다가 경찰의 시선을 받고 다시 움직였다.서울에서도 손꼽히는 부촌의 아침이었다.그 지나치게 반듯한 풍경 한가운데 경찰차 세 대가 서 있었다.태혁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현장으로 걸었다.“팀장님.”대문 앞에서 기다리던 준호가 다가왔다.“신고는?”“아침 여섯 시 십칠 분. 피해자 동생이 발견했습니다. 오늘 같이 등산 가기로 했는데 연락이 안 돼서 왔다가.”“피해자 혼자 살고?”“네. 오십팔 세 남성. 이혼했고 자녀는 따로 삽니다.”태혁이 덧신을 받아 신었다.“출입문.”“파손 없습니다.”대문도, 현관문도 멀쩡했다. 잠금장치에 억지로 손댄 흔적도 없었다.태혁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벌써 익숙한 시작이었다.“CCTV는.”“수빈이가 보고 있습니다. 집 앞 하나, 골목 진입로 두 개 더 확보 중이고요.”태혁이 안으로 들어갔다.현관에서 거실까지 이어진 바닥은 지나치게 깨끗했다. 신발장도 닫혀 있었고 넘어지거나 깨진 물건 하나 없었다. 이 집에서 밤사이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만 떼어놓으면, 누군가 강제로 들어왔다는 흔적부터 찾기가 어려웠다.그리고 거실 끝.식탁 옆 바닥에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하얀 장갑을 낀 감식반 직원들이 주변을 촬영하고 있었다.준호가 목소리를 낮췄다.“정확한 사인은 부검 들어가야 합니다. 현재는 경부 쪽 손상으로 보고 있고, 사망 추정 시각은 어젯밤 열한 시에서 오늘 새벽 두 시 사이입니다.”태혁은 시신보다 먼저 주변을 봤다.창문.현관.식탁.가구 배치.그리고 거실장 위 액자.시선이 멎었다.“준호야.”“네.”“저거 원래 위치 확인해.”준호도 곧 액자를 봤다.피해자와 성인

  • 다정한 지옥   9화

    본사에서 두 블록쯤 떨어진 횟집 안은 이미 제법 시끄러웠다.잔 부딪치는 소리와 웃음이 칸막이 너머까지 뒤섞였고, 처음에는 정갈했던 테이블도 빈 술병과 접시로 제법 어수선해져 있었다.한국에 돌아온 뒤 처음 참석한 팀 회식이었다.회장 딸이랍시고 첫 회식부터 술까지 빼면 사람들이 더 어려워할 것 같아 오는 잔을 적당히 받아 마셨는데, 문제는 그 적당히가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는 데 있었다.“윤 대리님.”옆자리 과장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진짜 미국에서 십 년을 있었어요?”“네.”“근데 한국말을 진짜 잘하시네.”이재가 잠시 과장을 바라봤다.“……한국인이니까요.”맞은편의 다은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과장님.”“어?”“진짜 장난 아니고, 똑같은 질문 세 번째 하신 거 알아요?”과장이 눈을 크게 떴다.“내가? 진짜?”“네. 진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또옥같았어요.”“야, 김다은. 너 취한 거 아냐?”이재가 웃음을 참으며 둘을 번갈아 봤다.“과장님이 다은 씨보다 조금 더 취한 것 같기는 해요.”“거봐요.”다은이 냉큼 이재 쪽으로 붙었다.과장이 헛웃음을 터뜨렸다.“둘이 벌써 한 편을 먹었네.”이재는 이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입사 초기만 해도 이재가 출근하면 괜히 모니터부터 확인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같은 농담에 웃고, 취한 얼굴까지 보여줄 정도는 됐으니까.“자자, 슬슬 2차 가실 분들은 가시죠.”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강요 아닙니다. 집에 갈 사람은 집에 가고. 신나게 놀 사람들은 더 놀고.”누군가 바로 받았다.“팀장님이 제일 신나게 놀고 싶으신 것처럼 들리는데요.”“내가 언제.”웃음이 터지는 틈에 이재는 가방을 챙겼다.다은이 고민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대리님 가세요?”“네. 저는 여기까지.”“저는 어떡하죠. 사회생활을 좀 하긴 해야 할 것 같고……. 따라가면 또 취할 것 같고.”“가서 안 취하면 되죠.”“그게…… 될까요?”“그걸 해내는 것도 사회생활 능력이에요.”다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Más capítulos
Explora y lee buenas novelas gratis
Acceso gratuito a una gran cantidad de buenas novelas en la app GoodNovel. Descarga los libros que te gusten y léelos donde y cuando quieras.
Lee libros gratis en la app
ESCANEA EL CÓDIGO PARA LEER EN LA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