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스칼렛 / 레이븐의 시점머릿속이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내 주위를 분주히 오가는 치유사들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망연자실 서 있었다. 매끄러운 바닥 위로 우아한 드레스 자락이 스치고 지나갔고, 말쑥한 정장 차림들이 시야를 어지럽히며 들뜬 대화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잦아들었으나, 그 모든 것이 의미 없는 소음으로 흩어질 뿐이었다.만약 루칸이 나를 알아본다면?짧은 붉은 머리와 목덜미의 짓무른 흉터만으로는 본모습을 감추기에 역부족이라면 어쩌지?스칼렛 베인이라는 거짓을 꿰뚫어 보고, 제 앞에 선 여인이 자신이 내다 버렸던 루나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내가 품은 아이의 기운을 눈치채기라도 한다면?손이 본능적으로 배를 찾아가, 헐렁한 옷 아래 아직은 숨길 수 있을 만큼 완만하게 부풀어 오른 자리를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공포가 가슴을 사정없이 옥죄어왔다.머릿속에서 그 끔찍한 광경이 이미 펼쳐지고 있었다. 아이언클로로 질질 끌려가는 내 모습. 다시 루칸의 앞에 무릎 꿇려 세워지는 광경. 모두가 숨죽여 지켜보는 가운데 내 뺨을 후려치는 그의 손바닥의 서슬 퍼런 작열감까지.소름 끼치는 가정이 꼬리를 물고 밀려들며 숨이 가빠졌다. 아무리 떨쳐내려 발버둥 쳐도 파도처럼 덮쳐와, 그 무게 아래 산 채로 익사할 것만 같았다.다크문 부인이 시야를 가로막고 설 때까지 주변을 지나치는 사람들을 거의 인지하지 못했다.눈을 깜빡였다.처음 만난 이래 처음으로, 그녀는 내게 노골적인 경멸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표정은 애써 차분하게 다잡고 있었으나, 무언가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자세는 여전히 꼿꼿했지만, 앞으로 모아 쥔 두 손에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전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짙은 경계심이 그녀의 두 눈에 서려 있었다.그녀는… 조심스러워 보였다.“왜 의복을 갖춰 입지 않았지?” 평소보다 훨씬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순간 번뜩이는 묘수가 떠올랐고, 스스로 망설이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가벼운 기침을
스칼렛 / 레이븐의 시점등 뒤로 연결된 문을 닫고 몸을 기댔다. 차가운 나무 감촉이 등을 짓눌러왔다.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려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알파 디미트리가 남긴 마지막 말에 심장이 여전히 요동치고 있었다.아이언클로.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온몸에 서늘한 한기가 내달렸고, 아무리 필사적으로 묻어두려 애써도 루칸의 기억들이 걷잡을 수 없이 수면 위로 끌려 올라왔다.손으로 배를 감싸 쥔 채 떨리는 숨을 천천히 들이쉬며, 가슴을 짓누르는 공포를 억지로 가라앉히려 했다.잠. 잠을 자야 했다. 내가 준비되었든 아니든 내일은 어김없이 찾아올 터였다.후들거리는 다리로 방을 가로질러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목에 두른 스카프가 평소보다 더 답답하게 조여왔고, 거친 천 자락이 알레르기 반응이 남긴 두드러기 위를 스쳤다.눈을 감고 억지로 몸의 긴장을 풀어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잠에 빠져들려 할 때마다 루칸이 어김없이 나를 찾아왔다. 그의 서늘한 눈빛. 뺨을 후려치던 손찌검의 화끈거림. 내가 결코 될 수 없는 모든 것을 품고 있다는 듯 라일리를 바라보던 그의 시선까지.몸을 옆으로 돌려 본능적으로 배를 웅크려 감쌌다.만약 그가 나를 알아본다면?물들인 머리와 목덜미의 짓무른 흉터만으로는 본모습을 감추기에 역부족이라면 어쩌지?내가 그의 아이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눈치채기라도 한다면?그 생각에 온몸이 마비되는 듯했다. 숨은 가빠졌고 가슴이 답답하게 죄어들었다. 그를 피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필사적으로 찾으며 머리를 굴려보았으나, 생각은 언제나 같은 결론으로 되돌아왔다.나는 한낱 전속 치유사에 불과했다.다른 무리에서 방문한 알파와 같은 공간에 발을 들일 만큼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루칸의 눈에 띌 만큼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다.그저 아침 일찍 알파 디미트리의 상태를 진맥하고, 남은 하루는 치유소 깊숙한 곳에 숨죽이고 숨어있기만 하면 그만이었다.그렇게 간단한 일이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은가?그 생각이 가
스칼렛 / 레이븐의 시점온몸의 살갗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 얕은 숨만을 몰아쉬며 누워 있었다. 입술은 퉁퉁 부어올라 낯설게만 느껴졌다. 성난 두드러기가 돋아난 목덜미와 턱선을 따라 뜨거운 열기가 번져나갔다. 손이 힘없이 목덜미로 올라가 짓무른 살갗을 긁어대려다 가까스로 멈추었다. 매 호흡이 이전보다 더 무겁게 짓눌려왔다.알파 디미트리가 침대 곁에 서서 짙은 숲빛 눈동자로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 위로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턱 근육이 굳어지는 모양새가 마치 무슨 말이라도 내뱉으려는 듯 보였다.그러나 방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그가 즉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들어와라.”다크문 부인이 작은 쟁반을 받쳐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뚜껑이 덮인 음식 접시 옆에 놓인 찻잔에서는 탕약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따스한 육수와 갓 구운 빵의 구수한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여느 때 같았으면 군침이 돌았을 냄새였다. 하지만 지금은 뱃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메스꺼움이 미처 입맛을 느낄 틈도 없이 식욕을 짓눌러버렸다.그녀가 침대로 다가오자 알파 디미트리의 미간이 좁아졌다. “음식을 가져오라 명한 적은 없다만.”다크문 부인의 목소리는 내가 지금까지 들었던 그 어떤 어조보다 부드러웠다. 다정하기까지 했다. 그녀에게 그런 면모가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염려의 기색이 묻어나고 있었다.“환자에게는 제대로 된 영양 공급이 필요합니다, 알파.” 그녀가 말했다. “스칼렛의 건강이… 염려스러워 챙겨왔습니다.”헛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으나, 부어오른 목구멍에 걸려 소리가 되지 못했다.내가 알던 다크문 부인의 모습이 아니었다.내 간곡한 애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루 종일 내 목구멍 속으로 견과류를 억지로 쑤셔 넣던 여자가… 치유소 전체가 보는 앞에서 나를 처참하게 짓밟고 모욕하던 여자가… 이제 와서 불현듯 내가 살든 죽든 진심으로 신경 쓰는 척 굴고 있었다.대신 억지 미소를 지어
알파 디미트리의 시점그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천 가방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그녀의 몸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내가 먼저 움직였다. 무릎이 꺾이며 맥없이 허물어지는 그녀를 한쪽 팔로 감싸 안아 지탱하자, 축 늘어진 육신이 내게 와닿았다.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벼웠다.미간을 찌푸렸다.몇 걸음 만에 침대로 가닿았다.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를 매트리스 위에 뉘였다. 그녀의 짧은 붉은 머리칼이 어두운 침대 시트 위로 흐트러졌고, 그 선명한 결은 마치 흘린 피처럼 도드라져 보였다.시선으로 그녀의 온몸을 훑었다.입술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목덜미에는 시뻘건 두드러기가 얼룩덜룩 돋아나 스카프 자락 아래를 지나 턱선을 향해 번져가고 있었다. 그녀의 한쪽 손이 힘없이 목덜미로 올라오더니, 멈출 수 없다는 듯 손끝으로 부어오른 살갗을 긁어댔다.호흡은 마땅히 그래야 할 박자보다 훨씬 가빴다. 얕고 불규칙했으나, 다행히 기도가 완전히 막히지는 않은 상태였다. 창백했던 본래의 안색 위로 기이할 정도의 붉은 열꽃이 번져 있었다.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맥박이 빨라졌다.주먹을 꽉 쥔 채 침대 옆에 우두커니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그녀는 한낱 치유사일 뿐이었다. 오늘 밤 목숨을 잃는다 한들 내 처소에 다른 치유사를 배정하면 그만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내 강장제를 확인하고, 매일 밤 진맥을 올리며 똑같은 소임을 다하면 될 일이었다.말도 안 되는 헛된 생각이었다.수년간 수십 명의 치유사들이 나를 거쳐 갔다. 그들은 나를 살피고, 상태를 감시하며, 기력을 북돋아 주리라 믿는 온갖 강장제를 달여 올렸다. 하지만 그들 중 단 한 명도 내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 나는 그저 쉽게 피로해지거나 무리하게 일을 도맡는 알파로 보였을 뿐이었다. 의문을 품은 자도, 그 이면을 파고든 자도 아무도 없었다.오직 그녀만이 달랐다.남들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지나칠 때, 나를 마주하고 지병의 존재를 꿰뚫어
스칼렛 / 레이븐의 시점방 한가운데 놓인 낮은 의자에 앉아 있는 내 주위로, 쳐다보지 않으려 애쓰다 결국 실패한 치유사들이 둘러서 있었다. 잔혹한 구경거리의 원치 않는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아무도 말을 걸어오지 않았으나, 그들의 시선이 몇 번이고 내게로 닿는 것이 느껴졌다. 몇몇은 호기심 어린 눈빛이었고, 다른 이들은 거의 동정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대다수는 그저 거리를 유지했다.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고 어깨를 안으로 웅크리며, 최대한 작고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되려 애썼다.위장이 비틀리듯 쥐어짜며 날카로운 허기의 고통에 절로 낯이 찌푸려졌다. 밤새도록 차오른 굶주림은 이제 외면하기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당장이라도 바닥이 입을 벌려 나를 삼켜버렸으면 싶다가도, 탈진에 찌든 또 다른 내면은 이것도 엄연한 음식이라며 나를 다독였다.먹을거리를 찾아 헤매던 차에, 마침 알아서 음식이 내게로 오고 있지 않은가. 치유소 전체의 감시 어린 눈초리 아래서 한 접시 한 접시 맛을 보아야 한다는 사실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당장은 먹을 수만 있다면 그만이었다. 그 생각 하나에 매달려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버텼다.어느 젊은 치유사의 손에 들려 첫 번째 쟁반이 도착했다. 접시를 내려다보기도 전에 향긋한 냄새가 먼저 코끝을 스쳤다. 향기로운 약초로 간을 한 구운 고기, 빵 껍질 사이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따뜻한 빵, 아침 햇살 아래 번들거리는 버터에 버무린 채소들.입안에 침이 고였다.그 소중한 찰나의 순간, 그 밖의 모든 것이 시야에서 지워졌다.수색도. 엘비스도. 천 가방 속에 숨겨둔 책들도. 알파 디미트리의 비밀도.쟁반이 내 앞에 놓이는 순간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머릿속에는 오직 음식에 대한 생각뿐이었다.떨리는 손가락으로 작은 시식용 포크를 집어 들고 첫 조각을 입에 넣었다.고기는 혀 위에서 사르르 녹아내릴 만큼 연했고, 약초 향이 풍부하게 배어 있었으며 주방의 열기를 그대로 품고 있었다. 빵은 힘을 주지 않아도 부드럽게 찢어
스칼렛 / 레이븐의 시점치유소 서고 안으로 다시 발을 들이며 등 뒤로 조용히 문을 닫았다.마침내 잠금쇠가 맞물릴 때까지 열쇠를 쥔 손가락이 헛돌았다. 금속이 제자리를 찾아 미끄러지는 나직한 긁힘에 가슴속에 팽팽하게 엉켜 있던 긴장이 조금은 풀려나갔다. 내가 결코 손대서는 안 될 책들에 둘러싸여 있는 꼴을 누군가 들이닥쳐 보게 되는 일은 없을 터였다. 특히 다크문 부인은 더더욱. 그녀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이곳에서 나를 꿰뚫는 상상만으로도 속이 메스꺼웠다. 오늘 밤에는 또 다른 충돌을 감당해 낼 여력이 없었다.깊은 밤의 서고는 사뭇 다른 공기를 품고 있었다. 천장의 매립등이 서가 위로 창백한 불빛을 드리우며 좁은 통로마다 짙고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거치대에 꽂힌 태블릿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내가 스쳐 지날 때마다 검은 화면 위로 희미한 빛이 반사되었다. 서늘하고 고요한 공기 속에는 낡은 종이와 말린 약초 냄새, 그리고 전자기기 특유의 희미한 쇠 냄새가 배어 있었다. 서가 깊숙한 곳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매끄러운 돌바닥 위로 발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옆구리에 찬 천 가방이 조금씩 더 무거워지는 듯했다.분명한 목적을 품고 다시 수색을 시작했다. 서가에서 책을 한 권씩 뽑아 불빛 아래서 재빨리 내용을 훑어본 뒤, 천 가방에 집어넣을지 아니면 다시 선반에 꽂아둘지 가늠했다. 피로로 눈이 타들어 갈 듯 시렸지만 멈추지 않았다.어느 책 한 권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의학 전문서라기보다는 동화책에 더 가까워 보이는 얄팍한 책자였다. 삽화는 세월에 바래 있었고, 책장은 닳고 닳아 부드러웠다.그 책은 피가 기묘한 그림자에 집어삼켜진 어느 알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그저 민담에 불과함이 분명했고, 알파 디미트리를 괴롭히는 그 지병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그러나 그의 명령이 머릿속을 울렸다.‘모조리 찾아내 치워라.’요행을 바라고 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그 책은 내 천 가방 속으로 사라졌다.서가를 훑으며 태블릿의 데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