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아내를 다시 탐하기 시작했다: Chapter 21 - Chapter 30

210 Chapters

21. 좋아하니까요

처음이었다.병원이라는 공적인 공간을 벗어나, 하얀 가운도 없이 단둘이 마주 앉은 것은.수연이 나간 뒤 넓은 룸 안에 어색하고도 달콤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미래는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고, 진희는 그 가느다란 손끝을 바라보다 뒤늦게 시선을 거두었다.병원에서 보던 안미래와는 또 달랐다. 환자도, 화보 속 완벽한 아내도 아닌 한 여자와 마주 앉아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심장을 두드렸다.미래 역시 진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가운을 벗은 그는 생각보다 훨씬 젊고 편안해 보였다. 단정하게 걷어 올린 셔츠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목과 찻잔을 감싼 긴 손가락이 이상할 만큼 눈에 들어왔다.시선을 들자,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진희와 눈이 마주쳤다.두 사람 모두 곧바로 피하지 못했다.고작 몇 초였다. 그러나 그 사이에 또 만났다는 반가움과 단둘이 남았다는 설렘, 이 순간을 은근히 기다렸다는 들켜서는 안 될 마음까지 모두 오갔다.미래가 먼저 눈을 내리깔았다. 찻잔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천천히 쓸었다. 하얗던 귀 끝이 붉어지는 것을 본 진희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그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물었다.“무릎은 이제 완전히 괜찮으십니까?”미래가 풋 웃었다.“만날 때마다 무릎 얘기예요?”“저한테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왜요?”장난스러운 질문에 진희의 대답이 잠시 늦어졌다.그는 웃고 있는 눈매와 살짝 올라간 입술, 대답을 기다리며 자신에게 온전히 향한 맑은 눈동자를 천천히 담았다.“모범 환자시잖아요.”다분히 의사다운 대답이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의사의 것이 아니었다.미래도 그것을 알아차렸다.진희가 찻잔을 들었다. 하지만 차를 마시지는 않았다. 미래를 향한 시선을 감추듯 잠시 입가에 가져다 댔을 뿐이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얽혔다.진희의 눈동자가 조금 더 깊어졌다. 미래는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눈빛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고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대화가 끝났는데도 누구도 먼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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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눈동자 속의 남자

아침의 정적을 깨고 단톡방이 울렸다.[최수진: 어머님들, 궁금한 게 있는데요😊 축구 개인 레슨은 보통 어디서 받아요? 지호가 친구들이 축구랑 농구 개인 레슨을 다 받는다고 했다네요. 공부할 시간도 없는데 정말 다들 그걸 소화하는 거예요?😭 저희는 이번에 간신히 영어학원 들어갔는데 숙제만 해도 밤이 너무 짧은 것 같아서요.][읽음 7][읽음 31]그러나 답장은 없었다.수진은 휴대폰을 들고 한참 화면만 바라봤다. 읽음 숫자는 늘어나는데 누구도 엄지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모두가 같은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처럼.삼 분쯤 지났을 때, 회장 어머니가 마지못한 듯 짧은 답글을 남겼다.[회장 엄마: 축구 개인은 김○○ 선생님, 박○○ 선생님 많이 해요. 필요하시면 개인톡으로 번호 드릴게요.]그 한 줄이 올라오자 수진은 급히 답장을 달았다.[최수진: 어머, 감사합니다! 제가 너무 아무것도 모르고 여쭤봤네요ㅠㅠ 개인톡 드릴게요.]하지만 그 뒤로 단톡방은 다시 깊은 물속처럼 고요해졌다.축구 레슨을 묻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었다. 다만 이곳에서는 ‘아이들이 무엇을 한다’는 정보가 단순한 정보로 끝나지 않았다. 누가 더 먼저 시작했는지, 누가 더 좋은 선생님을 알고 있는지, 누가 아이의 시간을 얼마나 촘촘하게 채워놓았는지까지 드러내는 조용한 경쟁이 되곤 했다.수진은 그 사실을 몰랐다.그래서 저토록 맑은 목소리로, ‘공부할 시간도 없는데 정말 다들 그걸 해요?’라고 물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잠시 뒤, 미래에게 수진의 개인 메시지가 도착했다.[최수진: 진원 어머니…… 저 또 실수한 거 있나요? 아무도 댓글을 안 다셔서 지금 식은땀이 나네요ㅠㅠ]미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답장을 보냈다.[안미래: 실수한 건 아니에요. 다만 다음부터 궁금한 건 저한테 먼저 물어봐요. 제가 아는 건 다 알려드릴게요.][최수진: 아아…… 네. 괜히 단톡방에서 시끄럽게 했나 봐요.][안미래: 아니에요. 물어보실 수 있죠. 그리고 축구 개인 레슨은 꼭 다 시켜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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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들켜버린 눈빛

제시카는 미래의 말을 재촉하지 않았다.“남편은 내가 필요할 때만 나를 찾아. 사랑하는 아내라서가 아니라…… 자기 욕구를 비우려고.”평생 남편 험담을 하지 않던 친구였다. 제시카는 그 한마디가 나오기까지 미래가 얼마나 오래 혼자였는지 알 것 같았다.“나도 캐빈이랑 서로 한눈판 적 있어.”미래가 고개를 들었다.“사람이 다른 곳을 보는 건 꼭 상대가 나빠서가 아니야. 자기 안의 어떤 방이 너무 오래 비어 있을 때도 그래.”제시카가 물었다.“너 지금 그런 거야?”미래는 대답하지 못했다.“참, 나 피부과나 데려가.”분위기를 바꾸듯 던진 말에 미래는 휴대폰을 켰다. 월드베스트스킨 피부과 예약 창을 열어 망설임 없이 시간을 골랐다. 제시카는 그 손가락을 보고만 있었다.제시카는 병원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공간을 압도하는 특별한 공기를 지니고 있었다. 로비를 우아하게 한 번 둘러본 그녀가 미래를 향해 생긋 웃었다.“여기 분위기 참 좋다, 미래야.”그때 미래를 발견한 대표원장이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로비로 걸어 나왔다.“안미래 님, 오셨어요?”“네, 원장님. 오늘 뉴욕에서 온 제 친구 데려왔어요. 제시카예요.”제시카가 세련된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건넸다.“우리 미래가 여기가 최고라고 칭찬하더라고요.”“안미래 님 친구분이시라면 더더욱 최고로 모셔야죠.”대표원장의 싹싹한 환대에 미래는 그저 피식,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진료실. 제시카의 피부를 꼼꼼히 살피던 대표원장이 차트를 보며 제안했다.“색소 집중 치료를 먼저 하시고, 줄기세포 리프팅을 받아보시는 걸 추천드려요. 요즘 저희 병원에서 가장 사랑받는 시술인데, 결과가 아주 확실하거든요. 아, 마침 제가 내일부터 일주일 동안 일본 출장이라…… 줄기세포 시술은 저희 유진희 원장에게 특별히 부탁해 놓겠습니다. 유 원장이 손끝이 아주 섬세하고 꼼꼼하거든요.”그 이름을 듣는 순간 미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슴 저릿한 서늘함이 밀려와, 그녀는 창밖 풍경 속으로 마음을 숨겨버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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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다섯 사람의 로비

레이저 시술을 마친 유진맘과 민서맘은 파우더룸에서 마무리 정리를 하고 있었다.“원장님 손길이 닿기만 하면 피부가 아주 꿀광이 된다니까요. 호호.”“그러게요. 언니, 오늘 진짜 피부 맑아졌어.”두 사람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진료실 쪽을 나섰다.운명의 장난처럼, 로비에서 다섯 사람의 동선이 겹쳤다.민서맘, 유진맘, 안미래, 제시카, 그리고 유진희.숨 막히는 대치 속에서 유진맘이 진희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유 원장님! 아까 제가 말씀드린 VVIP가 바로 이분이에요.”예상치 못한 소개에 미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네……?”유진맘이 친근하게 웃으며 얼른 말을 받았다.“아니, 우리가 진원 어머니 평소에 피부 관리를 어떻게 하시기에 저렇게 꿀광이 흐르나 궁금했거든요. 마침 유 원장님한테 똑같은 프로그램으로 해달라고 조르려던 참이었어요, 호호.”살벌하던 공기가 한풀 꺾였다. 미래는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며, 부끄러운 듯 시선을 살짝 피하고 생긋 웃어 보였다.진희의 깊은 눈동자가 천천히 미래를 향해 멎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얽히는 찰나, 온 세상이 멈춘 듯한 고요 속에서 짜릿할 만큼 깊고 설레는 눈빛이 서로를 향해 왈칵 쏟아졌다.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애틋함과 그리움이 담긴 그 눈빛을,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던 제시카가 순식간에 포착했다.미래가 요즘 우연히 만났다는 그 남자.단 한 번의 눈빛 교환만으로도 제시카의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이 섬뜩할 정도로 완벽하게 맞춰졌다.설마…… 저 남자가 바로 그 남자였어?심장이 쿵 내려앉는 확신이 제시카의 등골을 쓸고 지나갔다.“아…… 안미래 님이셨군요.”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음성이 너무 부드럽고 다정해서, 마치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그리워해 온 사람을 부르는 듯했다.미래가 말한 남자가 유진희 원장이라는 사실이, 이제 제시카의 머릿속에 의심의 여지 없는 사실로 박혔다.제시카가 생긋 웃으며 진희를 바라보았다.“어머, 그럼 저도 다음 주에 유진희 원장님 손에서 완전히 다시 태어나는 건가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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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오늘은 싫어요

순간 미래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져 내렸다. 너무 놀라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민서맘과 유진맘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제시카가 아주 자연스럽고 위트 있게 말을 덧붙였다.“너 저번에 나한테 수분 관리 정말 잘해준다고 칭찬했던 그 원장님 맞냐고.”“아, 맞아요!”민서맘이 맞장구를 쳤고, 유진맘도 고개를 끄덕였다.“유 원장님이 수분 관리도 진짜 기가 막히게 하시죠.”얼어붙을 뻔했던 공기가 사르르 녹아내렸다.미래는 여전히 귓가를 때리는 거친 심장 소리를 진정시키느라 애써 시선을 바닥에 묻었다. 하지만 제시카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이 비밀스럽고 달콤한 기류를.달리는 차 안, 선글라스를 벗은 제시카가 운전대를 잡은 미래를 돌아보았다.“언제부터야?”미래가 정면만 응시하며 침착함을 가장했다.“뭐가.”“아까 그 의사, 유진희 원장 말이야.”미래는 한참 동안 운전에만 집중하는 척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친구의 깊은 눈빛 앞에서는 결국 무장해제될 수밖에 없었다.멈춰버린 엘리베이터에서의 첫 만남, 자전거에 다친 양재천의 약국, 피부과에서의 은밀한 시선, 상처를 치료해 주던 진료실 커튼 속, 조선팰리스에서의 숨 막히던 시간, 그리고 오늘까지. 쌓여온 시간의 파편들을 전부 쏟아냈다.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제시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미래의 이름을 불렀다.“미래야.”“응.”“나 방금 확신했어.”미래가 고개를 돌려 친구를 보았다.“너, 그 남자 좋아해.”미래는 차마 부정하지 못했다. 제시카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덤덤하게, 그러나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아까 병원에서 그 유진희 원장, 너 보던 눈빛이 장난 아니더라. 네 이름을 부르는 숨소리부터 달랐어. 그리고 그 사람을 바라보던 네 눈빛…… 꼭 우리 스무 살 때 같았고.”미래의 가슴속에서 파도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제시카는 미래의 동공이 잘게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그 원장도 너한테 마음 있어. 그리고 너도 그 남자 좋아해. 서로 아주 눈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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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안미래의 남편

성웅은 말없이 그녀를 보다가 돌아누웠다.미래는 등을 돌린 채 눈을 감았다. 남편의 체온보다 다른 남자의 눈빛이 먼저 떠올랐다.같은 밤, 오랜만에 모인 의대 동기 넷의 술자리는 무르익어가고 있었다.안과, 성형외과, 정형외과 원장 친구들 사이에서 진희는 엷은 미소를 지은 채 앉아 있었다. 안과 원장이 맥주잔을 부딪치며 한숨을 쉬었다.“우리 아들은 우리 본과 때만큼 공부를 하는 것 같아. 게다가 하는 게 엄청 많아서, 벌써부터 사는 게 피곤해 보여.”정형외과 원장이 껄껄 웃었다.“스펙을 얼마나 쌓아주길래 그래?”안과 원장이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공부 외에 치아랑 턱 교정에, 성장 호르몬 주사에, 밤마다 드림렌즈까지…… 아주 풀코스지.”“하하하! 야, 넌 아들 하나를 아주 인위적으로 키우는구나?”유쾌한 대화 속에 술잔이 바쁘게 오갔다. 성형외과 원장이 씁쓸하게 잔을 비우며 말을 이었다.“난 너무 오래 연애하고 결혼해서 그런가, 결혼하니까 이상하게 성욕이 뚝 떨어지더라.”안과 원장이 장난스레 받아쳤다.“원래 가족끼리는 그러는 거 아니야, 인마.”유부남들의 철없는 웃음소리가 번졌다. 정형외과 원장도 한마디 거들었다.“난 아무리 돈이 많아도 외모랑 몸매가 안 받쳐주면 아예 마음이 안 생기더라고.”와글와글한 웃음소리 너머로 진희는 그저 잔을 만지작거렸다.친구들이 뱉어내는 ‘결혼’, ‘아내’, ‘가족’이라는 평범한 단어들이 공중에 흩어질 때마다, 진희의 마음속에는 오직 한 사람, 안미래라는 이름이 아프게 파고들었다.내 여자가 될 수 없는 사람. 다가설 수 없는 견고한 성벽 너머의 사람이라는 걸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하지만 심장은 이성보다 솔직하고 잔인했다.그녀를 온전히 갖고 싶었다.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그 여자가 맞이하는 아침의 색깔은 어떨지, 그 고운 입술이 만드는 웃음은 얼마나 싱그러울지, 그녀가 좋아하는 사소한 것들까지 전부…… 하나도 빠짐없이 알고 싶어 가슴이 타들어 갔다.모임이 끝나고 친구들은 비틀거리며 택시를 잡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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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우리 와이프

박성웅은 유진희의 예상보다 훨씬 인상적인 남자였다.칼같이 다려진 셔츠, 군더더기 없는 자세, 손목 위에서 과하지 않게 빛나는 시계. 성공을 증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의 여유가 몸에 배어 있었다.“안녕하세요. 박성웅입니다.”먼저 내민 손의 악력도 단단했다.“유진희입니다.”“대표원장님도 그렇고, 우리 와이프도 유 원장님 실력이 좋다고 칭찬하더군요.”우리 와이프.세상 가장 평범하고 당연한 호칭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세 글자가 송곳처럼 날아와 박혔다.안미래는 저 남자의 아내였다. 머리로는 알고 있던 당연한 사실이, 왜 이제야 날것 그대로의 현실이 되어 숨을 조여오는지 알 수 없었다.시술은 지극히 무난하고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침대에 누운 박성웅은 깔끔했고, 합리적이었으며, 매너가 몸에 배어 있었다. 차라리 무례한 인간이었다면 마음이 편했을까. 남자가 완벽할수록 진희의 속은 묘하게 불편해졌다.“수고 많으셨습니다.”“출장 전에 타이밍 좋게 잘 받았네요.”“일정이 꽤 많으신가 봅니다.”“예, 출장이 좀 몰려 있어서요.”자랑도, 과장도 없는 담백한 대답. 하지만 그 태도가 지닌 무게감이 오히려 진희를 짓눌렀다.남자가 나가고 문이 닫힌 뒤에도, 진희는 한동안 다음 차트를 넘기지 못했다.안미래는…… 이런 남자와 살아왔구나.그 생각이 잔상처럼 남아 가슴을 무겁게 가라앉혔다.다음 날 아침, 양재천.진희는 답답한 마음을 털어내려는 듯 평소보다 조금 빠른 페이스로 달리고 있었다. 강물 위로 부서지는 아침 햇살이 유난히 눈부셨다.그때, 저 멀리서 달리는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안미래였다.진희는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늦췄다. 마침 숨을 고르던 미래 역시 그를 발견하고 고개를 돌렸다.“어머.”그녀가 환하게 웃었다.“원장님.”단지 그 웃음 하나였을 뿐인데, 어제 하루 종일 진희를 지배했던 지독한 찌꺼기들이 한순간에 증발하는 기분이었다.“아침 일찍 나오셨네요.”“네. 원장님도요?”“저도요. 매일 뛰는 코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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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우산 가지러 간 사람들 -1-

몇 분 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진희가 걸어 나왔다.그런데 그의 손에 들린 건 커다란 스포츠 타월 한 장이 전부였다.미래가 황당하다는 듯 눈을 홉뜨며 웃었다.“원장님, 우산은요?”진희가 제 손을 보더니 허탈하게 웃었다.“그러게요……. 마음이 급했나 봅니다. 수건만 달랑 들고 왔네요.”바보 같은 실수가 웃겨 두 사람은 한참을 마주 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진희가 타월로 미래의 젖은 어깨와 머리를 조심스레 감싸주며 낮게 속삭였다.“같이 올라가실래요?”“우산 가지러요?”“네. 혼자 다시 올라가려니…… 심심해서요.”너무나 투명하고 뻔한 핑계였다. 하지만 미래는 그 다정한 핑계가 전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심장이 기분 좋게 간지러웠다.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순간이었다. 문이 닫히려는 찰나, 저 멀리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잠깐만요! 저희 좀 탈게요!”거대한 유모차 두 대가 연달아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가뜩이나 좁은 공간이 순식간에 유모차와 아기 짐들로 가득 찼다.“아, 죄송합니다.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갈게요.”공간이 극도로 좁아진 순간, 진희가 반사적으로 미래의 어깨를 감싸며 그녀를 엘리베이터 구석 벽 쪽으로 이끌었다.그리고 문이 닫혔다.“……!”미래는 숨을 들이켰다. 너무 가까웠다.피할 곳 없는 좁은 모퉁이. 진희는 미래를 유모차로부터 보호하려는 듯 그녀의 등 뒤를 완전히 감싼 채 밀착해 있었다. 그의 넓은 가슴이 미래의 등에 빈틈없이 맞닿았다.깊숙이 백허그를 한 것 같은 자세였다.두 사람 모두 온몸이 비에 젖어 있어, 얇고 축축한 옷 너머로 서로의 체온이 날것 그대로 엉켜왔다. 미래의 부드러운 등 곡선에 진희의 단단하고 뜨거운 가슴팍이 묵직하게 밀착됐다. 조금만 숨을 크게 쉬어도 서로의 몸 굴곡이 서로를 파고드는 거리였다.사락―.젖은 옷감이 스치는 작은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진희는 차마 고개를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지 못했다. 시선을 내리면 당장이라도 하얗게 드러난 그녀의 젖은 목덜미에 입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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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우산 가지러 간 사람들 -2-

45층, 진희의 집이 있는 층이었다.엘리베이터 앞에는 양재천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거대한 통창이 있었다. 조용하고 은밀한 미니 로비. 외부인의 발길이 닿지 않는 층이라 소파 하나와 화분 하나가 전부였지만, 이상하리만큼 아늑하고 차분한 공간이었다.“잠깐 여기 앉아서 기다려요. 금방 가져올게요.”진희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그가 현관 너머로 사라지자, 미래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유리창 밖을 보았다. 거센 빗줄기가 양재천 위로 사정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미래의 안방에서 보던 풍경과 같은 물줄기였지만, 각도가 달라지니 모든 것이 생경했다.낯선 공간인데,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여전히 왼쪽 가슴 아래가 쿵쾅거렸다. 미래는 그 기묘한 떨림을 모른 척 덮어두기로 했다.금세 진희가 커다란 우산을 들고 나왔다.다시 함께 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진희는 자연스럽게 미래의 가느다란 손목을 감싸 쥐며 안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야 살며시 손을 놓았다. 아무런 말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하지만 미래는 그가 쥐었던 손목의 자리가 낙인이라도 찍힌 듯 여전히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45층에서 로비로 내려가는 동안, 미래는 비에 젖은 자신의 꼴이 뒤늦게 민망해졌다. 엉망이 된 운동복, 뺨에 붙은 젖은 머리, 민낯. 진희는 옆에 선 미래에게 자신의 거친 숨소리가 들릴까 봐 연신 마른침을 삼켰다.띵―. 로비.문이 열리는 순간, 두 사람의 어깨에서 팽팽했던 긴장이 동시에 스르륵 빠져나갔다.그런데 반전이 있었다.조금 전까지 세상이 무너질 듯 쏟아지던 장대비가 거짓말처럼 그쳐 있었다. 구름 사이로 투명한 햇빛까지 내리쬐고 있었다.두 사람은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우산 가지러 올라간 사람들, 완전히 바보 됐네요.”“그러게요. 완전히요.”조금 전 엘리베이터를 짓누르던 숨 막히는 어색함은 눈 녹듯 사라졌다. 대신 둘만이 공유하는 은밀하고 다정한 미소가 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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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미가

말이 거기서 탁 끊겼다.정례가 스스로 놀란 듯 손을 멈추고 타월을 급히 반으로 접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 숨겨둔 본심이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정례는 황급히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미래는 창밖을 묵묵히 응시했다. 그 말이 품은 뼈아픈 진실을 알았다. 정례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 안타까움을 속으로 삼켜왔는지, 이 차가운 집에서 대표 부부의 쇼윈도 같은 삶을 가장 많이 목격한 이가 누구인지 알기에. 위로도 부정도 모두 기만이 될 것 같아 미래는 입을 다물었다.“이모.”미래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오늘 저녁 서윤 아빠도 없는데, 우리 둘이 개포동 미가 가서 따끈하게 대구탕 먹고 올까요?”정례의 굳었던 얼굴이 금세 환하게 풀렸다.“아이고, 그래요, 사모님! 얼른 이른 저녁 먹고 와요. 안 그래도 비 오길래 아구탕이라도 끓일까 했는데, 우리 둘뿐이니 나가서 시원하게 먹어요, 어서.”단골집 미가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주방에서 사장님의 활기찬 목소리가 날아왔다.“어머, 사모님! 이모님! 어서 오세요!”오래된 맛집 특유의 정겨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진하게 끓여낸 육수, 달큰한 대파, 깊은 간장 향. 언제 와도 같은 자리, 같은 온도로 반겨주는 곳.미래가 이 집을 사랑하는 건 음식 맛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래 알고 지낸 죽마고우 같은 편안함, 겉돌기만 하던 미래의 시린 마음을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깊은 인정이 이 공간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었다. 차가운 현실에 지쳐 마음 둘 곳 없을 때, 언제든 말없이 품을 내어주는 안식처 같은 곳이었다.미가 사장님이 물수건을 내려놓으며 물었다.“오늘 박대표님은 같이 안 오셨네요? 저번처럼 댁에 가셔서 끓이기만 하시게 포장해 드릴까요?”정례가 미래의 눈치를 살폈다.“사장님은 오늘 밖에서 드시고 온다고 하셨어요. 사모님, 어떻게 할까요?”미래는 대답하려다 숨을 멈췄다.조금 전까지 온통 유진희라는 남자의 잔상으로 가득 차 있던 머릿속에, ‘남편’이라는 지독한 현실의 단어가 불쑥 끼어들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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