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아내를 다시 탐하기 시작했다: Chapter 41 - Chapter 50

210 Chapters

41. 우리끼리

새벽이었다.박성웅은 늘 그렇듯 알람보다 먼저 눈을 떴다.품 안에 아내가 잠들어 있었다. 그의 손등 위에 제 손을 얹은 채였다.성웅은 한참 동안 아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 눈가에 희미하게 말라붙은 눈물 자국.십오 년 전, 그 사람을 찾아갔던 날이 떠올랐다.미래가 그 집의 사랑받는 막내딸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 날. 한 번도 틀린 적 없던 자신의 눈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된 날.그날 이후 그는 아내를 보지 않았다. 아내를 볼 때마다 자신의 오점이 보였으니까.그런데 오점은 미래가 아니었다.이 여자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속이지 않았다. 그저 말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묻지 않는 것이 예의였던 집에서 자란 아이가, 말하지 않는 법밖에 배우지 못했을 뿐이었다.틀린 것은 그날의 판단이 아니었다. 그 뒤에 등을 돌린 자신의 선택이었다.며칠 전 엘리베이터 안, 낯선 강아지에게 건네던 아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를, 자신은 언제 마지막으로 들었던가.그리고 “오늘은 싫어요.”처음으로 자신의 손을 붙잡아 멈추게 하던 아내의 손.그제야 알았다. 자신이 등을 돌리고 있는 사이, 이 여자도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는 것을.늦지 않았다. 늦지 않았을 것이다.성웅은 잠든 아내의 이마에 조용히 입술을 댔다.돌려놓자. 이 여자를 원래 있던 자리로.그리고 이번에는, 마음껏 사랑하자.박성웅은 선택을 틀려본 적이 없는 남자였다. 이번에도 틀리지 않을 생각이었다.성웅은 아내의 어깨 위로 이불을 끌어올리고, 조용히 침대를 빠져나왔다.그는 알지 못했다.아내의 귀 뒤에 남은 온기가, 자신의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미래가 눈을 떴을 때 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거실에서 소리가 났다. 아이들 목소리였다. 박성웅 목소리도 들렸다. 웃음소리. 미래는 몽롱한 상태로 그 소리를 들었다. 그냥 따뜻했다. 다시 잠이 들었다.눈을 떴을 때 시계가 아홉 시였다. 미래가 벌떡 일어났다.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거실로 나왔다. 식탁에 박성웅과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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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생각해볼게요

신라호텔 수영장이었다.체크인을 마치자마자 김수연에게서 전화가 왔다.“언니, 어디세요? 저희 지금 수영장 들어가려고요.”“우리 바로 갈게요.”아이들이 벌써 탈의실로 뛰어갔다. 미래는 수영 가방을 들고 따라가면서 생각했다. 오늘 하루가 이상하게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수영장에 들어서자 규리가 진원이한테 달려왔다. 서윤이도 규리 손을 잡았다. 세 아이가 순식간에 물속으로 뛰어들었다.미래와 김수연은 선베드에 나란히 앉았다.미래가 웃었다. 오랜만이었다.샴페인이 왔다. 차갑고 깔끔했다. 아이들이 물 튀기는 소리가 들렸다. 햇살이 수면 위에서 반짝였다. 오랜만에 느끼는 온도였다.김수연이 잔을 들며 말했다.“언니, 건배요. 우리 오늘 잘 쉬어요.”잔이 가볍게 부딪혔다.한동안 둘이서 아무 말 없이 아이들을 바라봤다. 진원이가 규리를 물속에서 번쩍 들어 올렸다. 규리가 소리를 질렀다. 서윤이가 웃었다.수연이 유진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삼촌, 이따가 뷔페 올 거죠? 예약해 놨어. 진수 씨는 학회가 늦게 끝나서 같이 못 먹는대. 위층 미래 언니네랑 같이 있어. 애들 수영하는데 지금 안 올래요?”전화기 너머로 진희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형수, 내가 데이트가 없다고 해서 할 일이 없는 건 아닌데요.”잠시 뒤,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이따 밥 먹으러는 갈게요. 규리랑 보드게임이나 해주죠, 뭐.”전화기 너머의 그 목소리가, 미래에게는 이상하게 새롭게 들렸다.저녁이었다.뷔페 식당 앞이었다.유진희가 먼저 와 있었다.미래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쿵, 소리가 난 것 같았다.유진희가 멋쩍게 웃었다.“또 뵙네요.”“네.”미래가 대답했다. 짧게. 그런데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티가 안 났기를 바랐다.미래는 속으로 당황했다.어젯밤이었다. 성웅이 그렇게 안아준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연애 때처럼. 신혼 때처럼. 열다섯 해 만에 처음인 것 같았다. 몸이 아직도 그 열기를 기억하고 있었다.그런데 지금, 이 사람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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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둘만의 수영장

식사가 끝난 뒤, 김수연네 객실이었다.규리는 벌써 침대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수연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다시 운을 뗐다.“아까 그 소개팅, 진짜 생각해 봐요. 오늘 내가 구제해 줬잖아.”“오늘 구제해 준 건 나인 것 같은데요.”유진희가 피식 웃었다.“형 학회가 이 시간까지 안 끝나서, 나 없었으면 형수 혼자 애들 보느라 힘들었을걸요.”“그래, 알았어, 알았어.”“형 얼굴은 못 보고 가겠네요. 배가 너무 불러서, 수영 좀 하고 바로 집에 갈게요.”유진희가 일어섰다.“주무세요.”김수연이 잠깐 유진희를 봤다. 뭔가를 말하려다 말았다.“조심히 가요.”유진희가 나갔다.같은 시각, 미래네 객실.서윤이와 진원이가 각자 휴대폰을 들고 소파에 누워 있었다.미래가 일어서며 말했다.“얘들아, 우리 수영하러 가자.”진원이가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싫어. 나 이 게임 해야 해.”서윤이도 마찬가지였다.“엄마, 난 읽던 책 마저 읽어야 해요.”미래는 혼자 수영복을 챙겨 나왔다. 복도가 조용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수영장 층으로 내려갔다. 탈의실에서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4월 마지막 주였다. 아직 공기가 차가웠다.수영장이 조용했다.유진희는 풀 사이드에 서서 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간 조명이 수면 위에서 흔들렸다. 4월의 밤이었다. 아직 차가웠다. 사람이 없었다.어제, 바람에 날리던 미래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준 것이 떠올랐다.그냥 떠올랐다. 물이 반짝일 때마다. 조명이 수면 위에서 번질 때마다. 이 감정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멈추지 않고 있었다.그때였다.정적을 깨고 수영장 유리문이 매끄럽게 열렸다.유진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숨을 멈췄다.방금까지 물 위에서 환영처럼 떠올렸던 미래가, 거짓말처럼 그곳에 서 있었다.가운을 벗어두고 들어서던 미래 역시 선베드 옆에 서 있는 유진희를 발견하고는 순간 눈이 살짝 커졌다.밤 조명 아래 드러난 미래의 자태는 진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매혹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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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걱정하세요?

“수영 좋아하세요?”유진희가 먼저 물었다.미래가 잠깐 유진희를 봤다.“아.”유진희가 멋쩍게 웃었다.“맞다. 물 좋아하시죠.”양재천이 떠올랐다. 비. 벤치. 바람. 두 사람 모두 같은 순간 같은 기억이 스쳤다는 걸, 서로는 몰랐다.미래가 피식 웃었다.“저 수영도 모범생이거든요.”“네?”“아주 우수한 학생이었어요. 고등학교 때.”말하면서 미래가 풀 사이드로 걸어갔다.유진희는 그 걸음을 봤다.걸을 때마다 수영복 위로 몸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어깨에서 허리로 이어지는 라인, 허리에서 엉덩이로 이어지는 곡선. 부드럽게 풍만하다가 어느 지점에서 단단한 근육이 드러났다. 저렇게 귀여운 얼굴에 저런 몸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눈을 뗄 수 없었다.유진희는 시선을 거뒀다.미래가 입수했다.첨벙 소리도 없이. 물속으로 그냥 스며드는 것처럼.유진희도 따라 입수했다.나란히 레인에 섰다. 미래가 먼저 출발했다.자유형이었다.유진희도 따라 출발했다. 그런데 첫 바퀴가 끝날 무렵 이미 달랐다. 턴을 하고 돌아오는 속도, 물을 가르는 방식이 달랐다. 팔이 수면 위로 나왔다가 들어가는 타이밍. 발차기의 리듬. 호흡의 간격.군더더기가 없었다. 오래 훈련한 사람의 몸이었다.두 바퀴.세 바퀴.유진희는 어느 순간 수영을 멈췄다.자기도 모르게.풀 사이드 벽에 기댔다. 그리고 미래를 바라봤다.수면 위를 가르는 미래.팔이 물 위로 올라올 때마다 어깨 근육이 살짝 드러났다. 턴할 때마다 수면 위로 올라오는 옆얼굴. 입술 사이로 터지는 호흡. 가쁘고 짧고 리드미컬했다. 멈추지 않았다. 흐트러지지 않았다.네 바퀴.다섯 바퀴.유진희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처음엔 수영 실력에 놀랐다. 그다음엔 저 집중력에 놀랐다. 그런데 지금은 그냥 미래를 보고 있었다. 이유 없이. 그냥.이상했다.숨이 가빠지는 것 같았다. 수영을 하지도 않는데.저 사람이 물속에서 숨을 참고 움직이는 것처럼, 유진희는 저 사람을 보면서 숨을 참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몰랐다. 가슴이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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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사랑이었다

유진희가 먼저 시선을 거뒀다.“듣고 있어요.”낮게. 침착하게.미래가 잠깐 유진희를 봤다가 다시 정면을 봤다.“그렇게 안 들리는 것 같은데요.”“다 들었어요. 뉴욕 인터스쿨 2등.”미래가 피식 웃었다.“들으셨네요.”유진희는 대답하지 않았다.물 위에서 조명이 흔들렸다. 4월의 밤이었다. 수영장 안에 둘밖에 없었다. 미래의 숨소리가 이제 완전히 고르게 돌아왔다.유진희는 그 숨소리를 들었다.이미 늦었다는 걸 알았다.이 사람의 웃음이 들리는 곳에 있고 싶었다. 이 사람이 물속에서 숨차게 움직이는 걸 볼 수 있는 곳에 있고 싶었다. 그냥 이 거리에 있고 싶었다.그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했다.그리고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한 번 더 해요.”유진희가 말했다.“시합이요?”미래가 웃었다.“이기면 제가 뭔가 사드려야 하나요?”“지면 되죠.”미래가 풀 사이드로 걸어갔다. 유진희도 따라 일어났다.나란히 레인 앞에 섰다.미래가 고개를 돌렸다.“준비됐어요?”“네.”둘이 동시에 입수했다.출발했다.유진희가 전력으로 팔을 저었다. 첫 바퀴는 나란했다. 팔꿈치가 스칠 것 같은 거리였다. 물속에서 미래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리드미컬했다. 흐트러지지 않았다.턴.두 번째 바퀴였다.미래가 반 박자 앞서기 시작했다.유진희는 속도를 올렸다. 그런데 물속에서 이상했다. 미래와 나란히 수영하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이 거리. 이 온도. 물속에서 느껴지는 미래의 움직임.그때였다.잡생각이 들어왔다.조명이 번지는 물속. 미래와 나란히 있는 이 공간. 지금 이 거리라면. 지금 이 물속이라면.미래를 멈춰 세우는 상상. 물속에서 미래가 고개를 돌리는 상상. 그 달아오른 뺨이 이 거리에 있는 상상. 그리고 그냥.키스하는 상상.물속에서. 숨을 참고. 조명이 번지는 물속에서. 미래의 입술에. 진하게.유진희는 팔을 저었다.안 됐다.이 생각을 하면 안 됐다.그런데 수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멈추면 안 됐다. 지금 물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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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언페이스풀

집에 들어와 불을 켰다. 조용했다. 늘 그랬듯이.유진희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캔을 따고 소파에 앉았다. TV를 켜자 유럽 축구가 흘러나왔다. 좋아하는 팀이 뛰고 있었다.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가웠다.화면에서는 선수들이 뛰고, 해설이 들리고, 관중의 함성이 들렸다. 그런데 그 어느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대신 수영장이 아른거렸다. 물을 가르던 미래, 호흡할 때마다 벌어지던 입술, 시합이 끝나고 벽에 기댄 채 웃던 얼굴. 달아오른 뺨과 이마에 붙은 젖은 머리카락까지.유진희는 맥주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화면에서 골이 들어가고 관중이 환호했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미래가 웃던 게 떠올랐다. 졌네요, 하면서. 그 웃음이 자꾸만.유진희는 등받이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잠깐만, 잠깐만 눈을 감으면 될 것 같았다.TV 소리가 서서히 멀어지고, 대신 물소리가 들려왔다.수영장이었다. 4월의 밤, 야간 조명이 수면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유진희는 풀 사이드에 서 있었고, 그 앞에 미래가 있었다. 달아오른 뺨과 젖은 머리카락, 살짝 벌어진 입술로 유진희 쪽을 보고 있었다.유진희가 손을 뻗었다. 미래의 젖은 뺨으로.닿으려는 그 순간이었다.맥주캔이 테이블에서 굴러떨어졌다.유진희가 눈을 떴다. TV에서는 하프타임 휘슬이 울리고 있었다. 소파였다. 집이었다.유진희는 천장을 바라보았다.잠깐 눈을 감았을 뿐인데.사춘기도 아닌 내가, 하며 그는 손으로 얼굴을 덮은 채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일어나서 베란다 문을 열자 4월의 밤공기가 차갑게 들어왔다. 양재천이 보였다. 야경 위로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유진희는 난간에 기댄 채 미래를 떠올렸다.이번엔 수영장에서 본 모습만이 아니었다. 오늘 하루 동안의 미래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뷔페 식당에서 옆에 앉아 있던 것, 김수연의 소개팅 이야기에 포크를 멈추던 것, 선베드에서 고등학교 수영부 이야기를 하며 웃던 것, 물속에서 헤엄치던 것, 시합이 끝나고 벽에 기댄 채 졌네요, 하고 웃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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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진희 씨..."

그녀가 침대 끝에 조용히 걸터앉아 있었다.수영장에서처럼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모습으로, 아무 말 없이 오직 진희만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래도록 이 순간을 기다려온 것 같은, 애틋하고도 투명한 눈빛이었다.진희는 눈을 뗄 수 없었다.“……어떻게, 여기에.”잠긴 목소리가 낮고 느리게 흘러나왔다.미래는 답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진희를 응시할 뿐이었다. 뭔가를 말하려는 것 같기도 했고, 그냥 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했다. 오래 기다렸던 사람의 눈빛 같기도 했다.유진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미래는 도망치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이 거리였다.처음 엘리베이터 어둠 속에서 서로를 붙들었던 것, 유모차 두 대 사이에서 등 뒤로 체온이 느껴졌던 것, 비를 맞으며 함께 뛰었던 것, 벤치에서 바람이 불던 것, 수영장에서 물을 가르던 것. 그 모든 순간이 지금 이 거리 안에 있었다.유진희의 손이 천천히 올라가 미래의 얼굴로 향했다.이마, 눈, 코, 볼, 입술, 턱 끝까지. 하나씩, 천천히.이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오래 봐도 되는지 몰랐다. 미래는 눈을 감은 채 숨을 참고 있었다. 그 얼굴이 너무 아름다웠다.유진희는 그 순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그냥, 이 사람이었다.손끝이 미래의 뺨에 닿자 미래가 눈을 살짝 감았다. 유진희의 입술이 천천히 가까워졌다.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사라졌다.유진희의 숨이 닿자, 미래가 더 깊게 호흡했다.그런데.미래가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가까워졌다. 아주 조금, 그런데 분명하게. 유진희를 향해서. 마치 오래 기다렸던 것처럼. 이 순간을, 이 거리를, 이 입술을.유진희는 그 순간 알았다.이 사람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입술이 말하고 있었다.기다렸다고.유진희는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미래가 사라질 것 같았다. 이 온기가, 이 숨소리가, 이 사람이. 그래서 멈출 수 없었다.더 깊이 스며들었다. 서로의 달콤함에 취해 미래의 숨소리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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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몸이 기억할 때

눈을 떴을 때, 방 안은 희부옇게 밝아오고 있었다.침대 끝이 비어 있었다.진희는 한참 동안 그 자리를 바라보았다. 누군가 앉아 있다 일어난 것처럼, 이불 끝이 아주 조금 눌려 있는 것 같았다. 착각이었다. 밤새 뒤척이며 제 발로 밀어낸 자국일 뿐이었다.바닥에 빈 와인병이 쓰러져 있었다. 켜진 채로 밤을 새운 TV에서는 소리 없는 새벽 뉴스가 흐르고 있었다.꿈이었다.진희는 손을 들어 제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미래의 뺨에 닿았던 손. 달빛 아래서 가녀린 어깨를 감싸 안았던 손.아직 따뜻했다.진희 씨.귓가에 남은 그 목소리를, 그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미래는 그를 늘 ‘원장님’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꿈속의 목소리는 이상할 만큼 선명했다. 마치 언젠가 정말로 듣게 될 날이 올 것처럼.진희는 다시 눈을 감았다.조금만 더.그 목소리가 사라지기 전에.월요일 아침, 청담동 필라테스 센터였다.통유리 너머로 아침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미래와 제시카가 나란히 개인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섰다. 강사 이지연이 두 사람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어머, 오늘은 두 분 같이 오셨네요. 오랜만에 2대1 수업이에요.”이지연이 미래의 골반을 잡았다. 가볍게. 전문가의 손이었다. 그러더니 잠깐 멈췄다.“어머.”“왜요?”“오늘 코어가 다르네요.”이지연이 살짝 웃었다.“탄력이 달라요. 골반 쪽 근육이 이완됐는데 오히려 더 살아 있어요.”동작을 하느라 눈을 감고 있던 미래가 눈을 떴다.“네?”“딱 이럴 때가 있거든요. 몸이 좋은 걸 기억할 때.”이지연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회원님, 요즘 달라지고 있어요.”옆에서 제시카가 리포머를 멈췄다.“미래야.”“…….”“야.”이지연이 제시카 쪽으로 가면서 말했다.“친구분도 운동을 정말 제대로 하신 몸이네요. 라인이 완벽해요. 안미래 회원님도 그렇고 친구분도 그렇고, 전문가가 봤을 때 두 분 다 정말 완벽한 몸이세요.”제시카가 미래를 봤다. 의미심장한 눈빛이었다.수업이 끝나고 사우나였다.뜨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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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뱃고동

미래는 한참 동안 뜨거운 나무 바닥을 내려다보았다.상자 속의 항공권. 증여 대상에서 지워진 이름. 그리고 그날 이후 자신을 보지 않던 남편의 눈.그 모든 걸 이 뜨거운 공기 속에서 꺼낼 수는 없었다.미래가 고개를 들고 웃었다.“그 얘긴…… 나중에.”제시카가 미래의 얼굴을 한참 살폈다. 그 웃음 뒤에 무언가가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더 묻지 않았다.“그래. 나중에 꼭.”제시카가 벌떡 일어섰다.“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압구정 로데오, 뱃고동이었다.계단을 내려가니 낯익은 공간이 나왔다. 30년이 넘은 집이었다. 테이블도, 냄새도, 사장님 얼굴도 바뀐 게 없었다.사장님이 두 사람을 보자마자 반갑게 말했다.“어? 오늘은 같이 왔네?”“네~ 저 이거 먹고 싶어서 뉴욕에서 왔잖아요.”제시카가 메뉴판도 보지 않고 말했다.“낙지불고기랑 오징어튀김이요. 그리고 볶음밥 꼭 해주세요.”잠시 후 돌판이 나오고, 양념된 낙지가 올려졌다. 지글지글 소리와 함께 매콤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제시카가 젓가락을 들며 눈을 빛냈다.“왔다.”둘이서 진지하게 먹기 시작했다. 낙지가 돌판 위에서 익어가고, 옆에 나온 오징어튀김은 바삭했다. 제시카가 튀김을 한 입 베어 물더니 눈을 감았다.“죽겠다. 진짜.”미래도 웃으면서 먹었다.제시카가 낙지를 뒤적이며 말했다.“참, 너 대학 때 남친 쏘니 있잖아. 엄청 잘생겼던 흑인 남친 쏘니.”“쏘니?”“나 쏘니 소식 알아. 맨해튼에서 갤러리 하거든. 첼시 쪽에. 요즘 완전 잘나가. 현대미술 경매도 하고 아트페어도 나가고. 아트 바젤에도 나갔대.”미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쏘니가?”“쏘니가 무려 아트 바젤에 나가는 디렉터가 됐더라고. 우리 대학 동창 중에 아트 바젤 클래스가 나올 줄 누가 알았겠냐?”미래가 웃음을 터트렸다.“그러게.”웃으면서도 가슴 한쪽이 아주 잠깐 저릿했다.첼시의 갤러리. 아트 바젤. 전시 오프닝의 조명과 샴페인 잔 부딪히는 소리.상자 속 사진 속에서 기획안을 들고 웃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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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보고 싶다고

월드베스트스킨 피부과 로비였다. 미래와 제시카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이었다.“어머, 서윤 어머니!”윤아 어머니였다.“어머니, 안녕하세요.”“서윤이 은명에서 잘하고 있죠? 서윤이는 잘할 거예요.”“감사해요. 윤아도 잘 있죠?”“네. 외고가 힘들긴 한데 잘 버티고 있어요.”엘리베이터가 열려 셋이 같이 탔다. 윤아 어머니가 먼저 내리며 인사했다.“이따가 가기 전에 또 봬요~”“네, 또 봬요~”문이 닫히자 제시카가 미래를 봤다.“이따가 어디서 또 만나?”“여긴 이렇게 마무리 인사하는 거야.”“아~ 대치동 언어야?”복도를 걸으며 제시카가 조용히 속삭였다.“근데 저 엄마, 샤넬 재킷이랑 루이비통 구두 너무 티 나.”미래가 웃음을 꾹 참으며 제시카의 팔을 잡았다.“쉿. 들려.”“짝퉁 티 안 나는 줄 아나 봐. 그것도 동시에 두 개를.”“제시카.”미래가 팔을 잡아끌었지만, 끝내 참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였다. 둘이서 속닥속닥 웃으며 진료실 앞에 섰다. 직원이 고개를 들었다.“제시카 님~ 들어오세요.”아직 웃음이 남은 얼굴로 두 사람이 문을 열었다.유진희는 차트를 보고 있었다. 아니, 보는 척을 하고 있었다. 오늘 미래도 올 거라는 걸, 그냥 알았다.수영장 이후 처음이었다.진희 씨.그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다. 꿈이었다. 분명히 꿈이었다. 그런데 꿈에서 깼을 때조차 손끝이 따뜻했다. 그게 문제였다.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미래였다. 그리고 미래 옆에 제시카.그런데 유진희가 본 건 그게 아니었다.미래가 웃고 있었다. 뭔가 웃긴 이야기를 하다가 들어온 얼굴이었다.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뺨이 발그스름했다. 아직 웃음이 다 가시지 않은 얼굴.진료실 공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원장님~ 안녕하셨어요!”특유의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성큼 들어선 제시카가 손에 든 커피 캐리어를 유진희의 책상 위에 툭 올려놓았다. 안에서 달그락, 시원한 얼음 소리가 울렸다.“저희가 오면서 커피를 마셨는데, 거기가 머신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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