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아내를 다시 탐하기 시작했다: Chapter 51 - Chapter 60

210 Chapters

51.이번 주말에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정례가 반갑게 뛰어나왔다. 제시카는 유치원 꼬마로 돌아간 듯 정례의 품에 안겨 어리광을 부렸다. 준비한 용돈 봉투를 쥐여주며 투닥거리는 모습은 여전히 정겨웠고, 정례는 뉴욕으로 돌아갈 제시카를 위해 손수 담근 김치를 싸놓겠다며 주방으로 향했다.이윽고 안방 문을 열고 들어선 제시카가 뚝 멈춰 섰다.통창 너머로 양재천이 길게 흐르고, 거침없이 쏟아지는 오후 햇살이 수면 위에서 부서지고 있었다.“야, 안미래. 이게 집이야, 갤러리야?”제시카가 감탄하며 침실과 연결된 드레스룸, 그리고 욕실 문을 차례로 열었다. 욕실 통창으로 내다보이는 양재천의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미쳤다. 미래야, 우리 맨해튼 집보다 여기가 훨씬 맨해튼 같아.”미래가 쑥스러운 듯 웃으며 킹사이즈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제시카가 욕실 통창을 눈으로 훑으며 앙큼하게 툭 던졌다.“근데 여기, 비주얼이 장난 아니다? 그냥 샤워만 하기엔 너무 아까운 분위기인데?”“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미래가 붉어진 얼굴로 베개를 휙 던졌고, 제시카는 그것을 받아내며 깔깔대고 웃었다.정례가 들여다 준 따뜻한 커피를 손에 쥔 채, 두 사람은 안방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창밖의 강물처럼 아늑한 평화가 감돌 때쯤, 제시카가 낮게 입을 열었다.“미래야.”“응?”“유진희, 너 확실하게 좋아하더라.”미래는 짐짓 덤덤한 척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왜? 뭘 보고 그렇게 확신해?”“그냥, 여자의 직감이지.”“그냥이 어디 있어.”“야, 우리가 솔직히 남자 경험이 몇십 년째냐. 온갖 국적에 온갖 인종까지 다 겪어봤잖아.”제시카가 컵을 내려놓으며 미래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유진희 눈빛 딱 보면 견적 나와. 그 사람, 완전 빠졌어.”미래는 대답 대신 찻잔만 만지작거렸다.“그 사람, 지금 너 때문에 밤잠 꽤나 설치고 있을걸? 백 퍼센트야.”탁 트인 통창 너머로 유유히 흐르는 양재천을 바라보며, 미래는 오랜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제시카는 재촉하지 않고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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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벗을래?

띵.문이 열리고 김수연이 먼저 내렸다.혼자 남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미래는 차가운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한 자각에 휩싸였다.아…… 그 사람은 9살이나 어린 여자를 아무렇지 않게 만날 수 있는 남자였지.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유진희는 미혼이었고, 매력적이었으며, 그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당연함이 왜 이토록 낯설고 아프게 가슴을 후벼 파는지 알 수 없었다.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챙겨주고 서둘러 안방으로 들어왔다.욕실 문을 닫고 샤워기를 틀었다. 쏴아아, 뜨거운 물줄기가 사정없이 쏟아졌다.9살이나 어리고, 엄청 섹시한 여자.미래는 물줄기 아래 서서 눈을 감았다.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미래는 타월 한 장만 두른 채 거울 앞에 섰다.거울 속에는 마흔셋의 여자가 서 있었다. 언뜻 보면 서른 초반이라 해도 믿을 만큼 맑고 투명한 피부였다. 눈가에도, 목덜미에도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하고 유려한 선이 이어졌다.천천히 타월을 내렸다.거울 속에 비친 몸은 풍만하고 탄탄했다. 아이 둘을 낳았음에도 젊은 날의 탄력과 형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처진 곳 하나 없이, 오히려 시간이 흐르며 한층 짙어진 여성스러움이 온몸에 배어 있었다. 가느다란 허리와 선명하게 떨어지는 골반 라인까지.미래는 거울 속 자신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아직은 나쁘지 않았다. 괜찮았다.하지만…… 9살 어린 여자는 지금 몇 살일까. 스물여덟? 스물아홉?그 나이는 아무리 애를 써도 다시 가질 수 없는, 모든 세포가 탱탱하게 차오른 찬란한 시절이었다. 인생의 모든 가능성이 눈앞에 펼쳐진 나이. 유진희가 당당하게 손을 잡고 세상 어디든 데리고 다닐 수 있는 눈부신 나이.미래는 씁쓸하게 웃으며 다시 타월을 올렸다.아무리 동안이어도, 아무리 남들이 아름답다고 찬사해도, 결국 나는 아이 둘을 둔 마흔셋의 유부녀였다. 유진희라는 자유로운 사람 곁에 설 수 있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드레스룸에서 매끄러운 실크 슬립을 꺼내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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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유리창의 손자국

통창 너머, 밤의 양재천 불빛이 까만 수면 위에서 아롱대며 흔들리고 있었다.17년이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살아온 17년의 세월. 하지만 지금 수화기를 타고 흐르는 박성웅의 목소리는, 뉴욕과 서울 사이 14시간의 시차를 가로질러 매일 밤 서로의 숨소리를 탐닉했던 그 뜨거운 연애 시절의 목소리와 소름 끼치도록 똑같았다.미래는 가만히 숨을 고르며, 천천히 실크 슬립을 벗어 내렸다. 부드러운 천이 발아래 대리석 바닥으로 고요히 흘러내렸다.거대한 유리창 앞에 완전한 나체로 섰다. 통창 위로 미래의 전신 실루엣이 위태롭게 일렁였다. 풍만하면서도 유려하게 떨어지는 선, 허리에서 골반으로 매끄럽게 이어지는 곡선 위로 욕실의 은은한 조명이 내려앉았다. 보는 사람이 없어도 지독하게 아름다운 몸이었다.“……벗었어요.”[위스키 한 모금 마셔.]미래는 잔을 들어 깊게 들이켰다. 얼음을 타고 흘러든 술은 시리도록 차갑고 썼다. 목구멍을 타고 뜨겁게 번지며 내려가는 생소한 감각.수화기 너머, 박성웅이 낮게 말했다.[눈 감아. 그리고 내 목소리만 들어.]“……어디에요?”[알잖아. 네 바로 뒤에 있는 것처럼 생각해.]알았다. 긴 시간이 지났어도, 몸은 잔인할 정도로 그 호흡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천천히.]박성웅의 묵직한 음색이 귓가를 파고들자, 미래의 숨이 단숨에 흐트러졌다. 수만 킬로미터 떨어진 텍사스의 밤하늘 아래에서, 그 남자는 지금 이 순간을 고스란히 상상하고 있을 터였다. 바다를 건너온 그의 목소리가 온몸의 세포를 아찔하게 깨웠다. 잔인할 정도로 익숙한 그 이정표를 따라, 미래는 스스로 깊은 감각 속으로 빠져들었다.[한 모금 더 마셔.]미래는 순종하듯 위스키를 다시 머금었다. 차가운 술이 목을 적시며 내려가는데, 역설적이게도 몸은 걷잡을 수 없이 달아올랐다.[통창 봐. 양재천.]미래는 젖은 눈을 들어 창밖을 보았다. 나체로, 위스키 잔을 든 채, 철저히 혼자 서 있는 밤. 그런데 묘하게도 혼자가 아닌 것 같은 기묘한 충만감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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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안 설레세요?

아침이었다.언제 잠들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깊은 잠이었다. 미래가 눈을 떴을 때, 햇살이 통창을 뚫고 침대 머리맡까지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협탁 위의 휴대폰에 최수진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미래는 침대에서 일어나며 전화를 걸었다.“지호 어머니, 전화 주셨었네요.”[아, 다름이 아니라 뭐 좀 여쭤보려고요.]“네, 말씀하세요.”[어제 피부과에서 우연히 만났던 대치수학 원장님이랑 혹시 많이 친하세요?]미래는 기억을 더듬었다.“아뇨, 친한 건 아니고요. 예전에 같은 반 학부모여서 얼굴만 몇 번 본 사이예요.”[아, 그렇구나. 그 원장님이 저한테 애가 6학년이냐고 물어보시면서, 시간 나면 학원에 레벨 테스트 한번 받으러 오라고 명함을 주셨거든요. 덜컥 예약하기 전에 진원 어머니한테 미리 좀 여쭤보려고요.]미래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천천히 말했다.“대치수학은 우리 아이들이 직접 안 다녀봐서 정확하진 않은데, 엄마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확실하긴 해요. 보통 메이저 학원 입테 보기 전에 실전 감각 익히려고 가볍게 거쳐 가는 곳이기도 하고요.”[아…… 그렇군요.]수진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제는 제법 대치동 엄마다운 눈치로 행간을 알아차렸다.[무슨 뜻인지 딱 알겠어요! 그럼 우리 둥이들도 대형 학원 입테 보기 직전에나 경험 삼아 한번 보내볼게요.]미래가 부드럽게 웃었다.[참, 진원 어머니. 저 어제 유 원장님한테 직접 시술받았거든요?]“어머, 그러셨어요?”[진원 어머니는 평소에 뭐 받으시냐고 여쭤보니까, 똑같은 거 해달라고 하기도 전에 제 얼굴에 맞춰서 이것저것 추천해 주시더라고요. 홀린 듯이 패키지로 다 결제하고 왔잖아요.]수진의 쾌활한 목소리에 미래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근데 유 원장님 실물로 보니까 진짜 장난 아니게 잘생기셨더라고요. 시술 베드에 누워 있는데 속으로 엄청 설렜잖아요. 진원 어머니는 원장님이 그렇게 가까이서 봐주시는데 안 설레세요?]“…….”미래는 대답하려던 입술을 멈췄다.머릿속으로 기억들이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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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그분 만나러 가세요

아리가 맞은편에 앉으며 가방을 내려놓았다.“어머, 저 원장님 키 크시다는 얘기 듣고 일부러 높은 힐 신고 왔는데, 저보다 한참 큰 남자분을 만나다니요. 동양인 남자 중에 이런 피지컬은 처음 봐요.”유진희가 부드럽게 웃었다.“앉으면 다 똑같습니다.”“수연 언니가 엄청난 능력남에 훈남이라고 입이 마르도록 자랑해서요. 일부러 청담동에서 와인 리스트 제일 좋은 곳으로 골랐는데, 여기 마음에 드세요?”“네. 아주 좋습니다.”아리가 메뉴판을 시원시원하게 펼쳤고, 유진희도 다시 메뉴판으로 눈을 돌렸다.그 순간, 불현듯 스치는 얼굴이 있었다.조민희.몇 달 전 소개팅으로 만났던 사람이었다. 그녀 역시 키가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서구적인 미인이었다. 나쁜 구석은 전혀 없었지만, 결국 마음이 가지 않았던 사람.지금 제 앞에 앉은 김아리는 신기할 정도로 조민희를 닮아 있었다.큰 키도, 화려한 분위기도, 그리고 유진희의 심장이 완벽하게 침묵하고 있는 이 결과까지도.코스 요리가 시작되었다.아리가 화제를 던지면 유진희가 매끄럽게 받아쳤고,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아리는 영리한 여자였다. 뉴욕 유학파답게 예술과 음악, 해외 생활을 넘나들며 화려한 입담을 자랑했다.하지만 유진희의 마음은 자꾸만 이 테이블이 아닌 다른 곳을 떠돌았다.수영장의 푸른 물결.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던 미래, 시합이 끝난 뒤 벽에 기대 “졌네요” 하고 웃던 얼굴. 그리고 제시카가 진료실을 나가며 쐐기를 박듯 던졌던 한마디.우리 미래 잘 부탁드려요.이윽고 주문한 빈티지 와인이 서브되었다. 아리가 잔을 가볍게 돌려 향을 맡은 뒤 한 모금 축이고는, 고개를 들어 유진희를 빤히 바라보았다.그 눈빛이 어딘가 기묘했다. 상대의 패를 이미 전부 읽어버린 사람의 눈빛 같았다.아리가 와인잔을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저 사실 솔직하게 고백할 게 하나 있어요.”유진희가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다.“네, 말씀하세요.”“저 미국에서 거의 5년 동안 만났다 헤어졌다를 지독하게 반복했던 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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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너무 일찍

유진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어? 난 누구 있다고 말한 적 없는 것 같은데요.”“말은 안 하셨는데, 지금 오빠 눈빛이 딱 저랑 같은 마음이거든요.”아리가 담담하게 사실을 짚었다. 날을 세워 공격하는 게 아니라, 빤히 보이는 진실을 유쾌하게 인정하는 태도였다.유진희는 생전 처음으로 말문이 막히는 경험을 했다. 아리가 먼저 잔을 들며 분위기를 풀자, 유진희가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사과했다.“……미안합니다.”“아니에요, 정말로요. 저도 요즘 여러 사람 만나면서 제 진짜 마음을 조금씩 알아가던 중이었으니까요. 아, 오빠가 생각하는 그분은 아직 마음 모르나 봐요? 표정 보니까 제 상황이랑은 좀 달라 보여서.”“…….”“걱정 마세요. 수연 언니한테는 비밀로 해드릴게요.”“꼭 들킬까 봐 걱정하는 건 아닌데…….”“알아요, 농담이에요.”아리가 와인 리스트를 다시 활기차게 펼쳐 들었다.“오빠, 저 여기서 평소에 진짜 마셔보고 싶었던 올드 빈티지 하나 발견했는데, 이거 한 병 시켜도 되죠? 우리 오늘은 골치 아픈 감정은 다 접어두고, 맛있는 음식 먹으면서 친구로 마셔요.”앞에 앉은 스물여덟의 여자가 자신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다.유진희는 그 순간 묘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솔직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해. 김아리에게, 그리고 먼 곳에 홀로 서 있을 안미래에게.새 와인이 서브되었고, 아리가 잔을 기분 좋게 뻗었다.“건배해요. 우리 각자가 진짜 갈망하는 그 사람들을 위해서.”유진희가 잔을 들어 올렸다.쨍―.투명한 크리스털 소리가 고요한 다이닝 안으로 맑게 울려 퍼졌다.유진희는 와인을 깊게 삼켰다. 쌉싸름한 끝맛 위로 다시 안미래의 얼굴이 겹쳐졌다.결코 좋아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좋아한다는 말조차 입 밖에 내면 죄가 되는 높은 벽. 그녀는 엄연히 다른 남자의 아내였고, 대치동에서 아이 둘을 키우는 유부녀였다.그런데 잔인하게도, 서른일곱 해를 찾아 헤매던 이상형을 하필 그런 조건 속에서 만나버렸다.160 정도의 아담하고 품에 쏙 안길 듯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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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귀엽고 섹시한 여자

같은 시각, 65층.미래는 잠들지 못한 채 안방 창가에 서 있었다.손에 든 캐모마일은 이미 식어 있었다. 창밖으로 양재천이 까맣게 흐르고, 그 너머로 건너편 동의 창문들이 드문드문 불을 밝히고 있었다.A동. 45층.비가 쏟아지던 그날, 소파에 앉아 그를 기다렸던 그 층이었다. 어느 창이 그의 집인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그 층 어딘가가 캄캄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오늘이 소개팅이라고 했었다.아홉 살 어리고, 엄청 섹시하다는 여자.아직 그 여자와 함께 있는 걸까. 저 불 꺼진 창 너머 어딘가에서, 혹은 청담동의 어느 근사한 레스토랑에서.미래는 식은 찻잔을 창틀에 내려놓았다.그만하자, 안미래.손을 뻗어 스탠드 스위치를 눌렀다.딸깍.방 안이 어둠에 잠겼다. 미래는 그 어둠이, 건너편 어딘가에서 누군가 숨을 멎은 채 올려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월요일 점심이었다.김수연이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유 원장, 주말에 소개팅 어땠어?”유진희가 차트를 보면서 말했다.“나쁘지 않았어요.”“나쁘지 않은 게 뭐야. 좋았어, 안 좋았어?”“그냥 괜찮은 사람이었어요.”“괜찮은 사람?”김수연이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나 솔직하게 말해도 돼?”“하세요.”“아홉 살 어린 미녀 보고도 마음이 없다는 건,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건데.”유진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차트를 넘기는 손끝에 미세한 정적이 감돌았다.“맞지?”“형수.”“맞잖아. 솔직하게 말해봐. 도대체 이상형이 뭐야?”유진희가 잠깐 동작을 멈췄다.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 위로, 수영장의 푸른 물살과 피부과 복도에서 마주쳤던 누군가의 잔상이 스치듯 지나갔다.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귀엽고 섹시한 여자?”김수연이 눈을 크게 떴다.“있네. 있어. 그런 여자 지금 있는 거지?”유진희가 대답 대신 차트를 한 장 넘겼다.“아니, 근데 귀여운 거랑 섹시한 게 동시에 가능해?”유진희가 무표정한 얼굴로 차트를 툭 덮었다.“어딘가에 있겠죠.”“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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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하는 중에, 그 사람이 생각났어

다음 날 점심 무렵,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제시카가 “이모~!” 하며 뛰어 들어왔다.주방에서 서성이던 정례가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어머나, 수아야. 또 왔어?”제시카의 한국 이름은 수아였다. 압구정에서 미래와 한 동네에 살던 어린 시절부터, 정례에게 제시카는 늘 수아였다.“이모 김치찌개 먹고 싶어서요.”이윽고 식탁 위였다.정례가 뜨거운 김이 펄펄 나는 뚝배기를 식탁 한가운데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소리가 정겹게 울려 퍼졌다. 칼칼하고 붉은 국물 위로 숭덩숭덩 썬 두부와 큼직한 돼지고기가 가득했고, 송송 썬 파가 먹음직스럽게 어우러져 있었다.파와 맛살을 듬뿍 넣은 계란말이, 기름 자르르 구운 고등어와 옥돔, 바싹 구운 감태와 참기름장까지. 제시카가 한국에 올 때마다 특별 주문하는, 정례표 밥상이었다.제시카가 의자를 당겨 앉으며 황홀한 표정으로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이 냄새.”“맛있겠지?”“맨해튼에서는 이 냄새 못 맡아요.”정례가 고슬고슬한 흰쌀밥을 가득 떠놓으며 흐뭇하게 말했다.“많이 먹어. 요즘 너무 말랐어.”“이모 밥 먹으면 쪄요.”“쪄야지. 좀 쪄야 예뻐.”제시카가 익숙하게 숟가락을 들고 국물을 크게 떠 마셨다. 혀끝에 감기는 그리운 맛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이모.”“왜.”“나 이모 딸로 태어났어야 했어.”정례가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며 슬며시 미래의 눈치를 보았다.“그럼 우리 미래 사모님은?”“미래야, 우리 같이 정례 이모한테 태어날 걸 그랬어.”미래가 가볍게 눈을 흘기며 웃었다.세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숟가락을 움직였다. 뚝배기는 식지 않는 온기를 품은 채 여전히 보글보글 끓었고, 식탁 주변에는 오랜 세월이 만든 아늑함이 가득 고였다.정례가 앞치마를 풀고 일어서며 다정하게 말했다.“수아야, 나 이따 장 보러 가니까 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미리 준비해 놓을게.”제시카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정례를 올려다보았다.“이모.”“응?”“갈비찜이요.”“알았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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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원하는 건, 유진희

장난스럽던 제시카의 표정이 순간 가라앉았다.제시카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그저 깊고 고요한 눈으로 미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거운 정적이 한참 흐른 뒤에야 입을 열었다.“미래야.”“응.”“너 지금, 남편이랑 하면서 다른 남자 생각했다는 거잖아.”미래는 입술을 깨물 뿐, 어떤 변명도 하지 못했다.“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지?”“…….”“박성웅이 아무리 잘해줘도, 유진희가 머릿속에 들어온다는 건.”제시카가 아프도록 날카로운 진실을 미래의 눈앞에 똑바로 내밀었다.“미래야. 네 마음이 어디 있는지, 이제 알겠지?”미래는 뜨거운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손바닥이 타들어 갈 것 같았지만,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제시카는 흔들리는 친구의 눈빛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이내 긴장을 풀어주듯 픽 웃었다.“근데 미래야. 너 박성웅이랑 하면서 한 번도 못 느낀 적 없었잖아.”미래의 호흡이 찰나 멎었다.“응. 한 번도 없었어.”“연애 때부터?”“응.”“그게 보통 일이 아니야. 진짜로.”제시카의 장난기가 싹 가시고, 오랜 친구의 진지함이 묻어났다.“박성웅이 너를 그만큼 잘 안다는 거잖아.”“그렇지.”“근데 그 순간에, 유진희 생각이 났다는 거잖아.”미래가 다시 고개를 숙여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죄책감과 당혹감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응.”제시카가 미래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미래야. 몸은 박성웅을 기억하는데…… 원하는 건 유진희인 거 아니야?”미래는 대답하지 못했다. 찻잔을 쥔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제시카는 그저 조용히 미래를 바라볼 뿐이었다. ‘너 미쳤어?’, ‘바람이야?’ 같은 비난도, 섣부른 훈수도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고백을 한 친구에게, 그 몸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조용히 짚어주었을 뿐이었다.어떤 판단도, 정리도 하지 않은 채 친구의 혼란을 있는 그대로 품어주는 것.그것이 4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한 단 하나뿐인 친구의 무게였다.그 안도감 속에서, 미래가 비로소 작게 웃음을 흘렸다.“박성웅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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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방금, 누구랑 했지

전화가 연결됐다.“여보세요.”“저예요.”“응. 안 자?”“아직요.”“나도 전화하려다 말았어. 잘까 봐.”미래가 잠깐 숨을 멈췄다. 찰랑이는 물 너머로 붉은 와인 빛이 은은하게 번졌다.“저 지금 욕조에서 와인 마셔요.”박성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수화기를 타고 흐르는 그 기묘한 침묵은 길지 않았다.“미래야. 나 메일 하나만 보내고 다시 전화할게.”뚝, 연결이 끊겼다.미래는 휴대폰을 대리석 선반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다시 와인을 머금었다. 오퍼스 원의 잔향이 입안 가득 쌉싸름하게 맴돌았다. 오일이 녹아든 물이 부드럽게 피부를 감쌌고, 욕조 물은 여전히 온몸이 노곤해질 만큼 따뜻했다.문득 연애 때가 떠올랐다.뉴욕이 밤이면 서울은 오전이었다. 아니면 그 반대였다. 지독한 시차 때문에 늘 한쪽은 깊은 밤을, 한쪽은 이른 아침을 맞아야 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동이 틀 때까지 전화를 끊지 못했었다.지금 이 순간이, 그때와 똑같았다.휴대폰이 진동했다.“나야.”“네.”“여기 지금 아침이야. 오전엔 개인 업무 보고, 점심 미팅부터 있어. 지금 잠깐 시간 돼.”시차를 건너온 박성웅의 목소리가 한층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미래야.”“네.”“지금 어디 보고 있어?”미래가 고개를 뒤로 젖혀 욕실 천장을 바라보았다. 맺힌 물방울 위로 조명이 아롱댔다.“천장이요.”“거품 있어?”“아뇨. 오늘은 오일만 넣었어요.”미래가 좋아하는 르라보 오일 향과 오퍼스 원의 향에, 이미 취해 있었다.박성웅이 낮게 웃었다.그 웃음소리가 이상하리만치 따뜻하게 전해졌다. 늘 지시하고 군림하던 평소의 명령조가 아니었다. 텍사스의 낯선 호텔 방이 아니라, 이 욕조 바로 곁에 함께 있는 것 같은 다정한 목소리였다.“와인 맛은 어때? 뭐 꺼냈어?”“오퍼스 원 꺼냈어요.”“잘했어.”박성웅이 잠시 호흡을 고르더니, 묵직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미래야.”“네.”“나 지금 단단해.”순간 미래의 숨이 가파르게 달라졌다.“저도요.”그 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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