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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불온한 정착: Chapter 101 - Chapter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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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와인바를 나오자 밤공기가 훅 끼쳐왔다. 강수의 등에 업힌 사라는 그것도 좋은지 얼굴을 들었다. “시원하다아.” 목덜미에 따뜻한 숨이 닿았다. 강수는 사라의 다리를 받쳐 올렸다. “가만있어. 떨어져.” “안 떨어져요.” 대답과 동시에 목을 감은 팔에 힘이 더 들어갔다. “내가 꽉 잡았는데 어떻게 떨어져.” “취했어.” “조금.” “많이.” “오빠는 자꾸 나 취했대.” “취했으니까.” 주차장까지 가는 내내 사라는 등에 붙어서 조잘거렸다. 강수는 대꾸를 하다가도 문득 조용해졌다. 좋으니까 안고 있겠지. 조금 전 사라가 했던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술김에 나온 말이었다. 내일이면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좋았다. 적어도 오늘의 민사라는 자신에게 안겼다. 친구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차에 도착한 강수가 사라를 조수석에 내려놓았다. 안전벨트를 채우려 몸을 숙이자 사라가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우리 들소 씨.” “또 시작이네.” “왜 들소 씨인지 알아요?” “알아.” “뭔데?” “네가 줬잖아.” 사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뭘?” “열쇠고리.” 강수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냈다. 작은 들소 모양 열쇠고리가 달랑 흔들렸다. 사라가 눈을 크게 떴다. “우와.” 곧장 손을 뻗어 들소를 잡았다. “아직도 있네?” “있다고 전에 봤잖아.” “그랬나?” “봤어.” 사라는 기억을 더듬는 듯 눈을 굴리다 금세 포기했다. “귀엽다.” “네가 사놓고.” “그러니까 잘 샀네.” 강수가 헛웃음을 흘렸다. 일본에서 아무 생각 없이 사서 제 주머니에 넣어놓고는 버릴 줄 알았다고 했던 물건이었다. 정작 준 사람은 잊어버리고. 받은 자신만 계속 가지고 있었다. 사라는 들소를 손가락으로 흔들었다. “얘랑 오빠랑 닮았어.” “뭐가.” “크고.” “또.” “무섭고.” 강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라가 키득거렸다. “힘도 세고.” “칭찬이냐?” “응.” 사라는 들소 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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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그럼 아직 내려주지 마.” 강수의 걸음이 멈췄다. 등에 업힌 사라는 눈을 감고 있었다. 잠꼬대인지. 취해서 하는 말인지. 강수는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도어록 앞에 서서 말했다. “비밀번호.” “알잖아요.” “내가 어떻게 알아.” “몰라요?” 사라가 등에 붙은 채 한참 고민했다.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강수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내려줘.” “아직 내려주지 말라며.” “문 열어야 되잖아.” “말로 해.” “싫어.” 강수가 헛웃음을 흘렸다. 결국 사라를 내려놓자마자 작은 몸이 휘청했다. 강수의 팔이 곧바로 허리를 감았다. 사라는 아무렇지 않게 그 품에 기대 비밀번호를 눌렀다. 삐빅. 문이 열렸다. “이제 들어가자, 들소 씨.” “그 소리 언제까지 할 거야.” “계속?” 사라가 신발을 벗다 말고 강수를 올려다봤다. “싫어요?” “아니.” “그럼 됐네.” 사라는 안으로 두 걸음 가더니 가방부터 소파에 던졌다. 그다음은 자신이었다. 털썩. 소파에 엎어진 사라를 보며 강수가 재킷을 벗었다. “물 마셔.” “싫어.” “마셔.” “오빠가 가져와.” 강수의 눈썹이 올라갔다. “민사라.” “왜애.” “손발 멀쩡해.” 사라는 소파에 얼굴을 묻은 채 손 하나만 달랑 들어 흔들었다. “지금은 안 멀쩡한데.” 결국 강수가 주방으로 갔다. 생수를 가져오자 사라가 몸을 일으켰다. 두 손으로 받아 몇 모금 마시더니 다시 강수에게 내밀었다. “됐어.” “더.” “배불러.” “물 몇 모금 먹고?” “오늘 고기도 먹고 와인도 먹고 엄청 많이 먹었단 말이야.” 강수가 병을 내려놓았다. “씻고 자.” 사라는 강수를 올려다봤다. 눈가가 발갛게 풀려 있었다. “귀찮아.” “그럼 그냥 자.” “화장 지워야 돼.” “지워.” “귀찮다고.” 강수는 한동안 사라를 내려다봤다. “내가 해줘?” 그제야 사라의 얼굴이 환해졌다. “응.” 강수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진짜 손 하나 까딱하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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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강수가 사라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목에 감겨 있던 팔은 떨어지지 않았다. “민사라.” “응.” “놔.” “싫어.” 눈도 제대로 뜨지 않은 채 대답했다. 강수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사라의 팔에 오히려 힘이 들어갔다. 결국 한쪽 무릎을 침대에 짚은 어정쩡한 자세로 멈췄다. “안 잘 거야?” “잘 건데.” “그럼 놔.” “같이 자요.” 강수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사라는 눈을 감은 채 제 품 쪽으로 그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옷 갈아입어야 돼.” “나중에.” “씻어야 되고.” “내일 씻어.” “너는 아까 화장까지 지워달라며.” “나는 했잖아.” 기가 막힌 논리였다. 강수가 헛웃음을 흘리며 결국 침대에 누웠다. 그러자 사라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굴려왔다. 폭. 가슴에 얼굴부터 묻었다. 다리까지 슬쩍 걸치고 두 팔로 허리를 끌어안았다. 작은 몸이 완전히 달라붙었다. 강수가 이불을 끌어올려 사라의 어깨까지 덮어줬다. “이제 자.” “응.” 대답은 했는데 잠들지는 않았다. 사라가 가슴팍에 코끝을 묻은 채 꼼지락거렸다. 한 번. 두 번. 마치 냄새라도 맡는 것처럼. 강수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뭐 해.” “오빠.” “왜.” “향수 뭐 써?”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향수?” “응.” 사라가 고개를 조금 들었다. 취기로 풀린 눈이 강수를 올려다봤다. “아무리 찾아도 없던데.” 강수의 미간이 좁혀졌다. “뭘 찾아.” “오빠가 쓰는 향수.” “그걸 왜 찾아봤어.” “좋은 냄새 나니까.” 사라는 다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 냄새.” 강수의 손이 사라의 머리 위에서 멈췄다. “무슨 향수인지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없었어.” “없으니까.” “왜?” “향수 안 써.” 사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진짜?” “어.” “그럼 이거 뭐야?” “뭐가.” “좋은 냄새.” 강수가 헛웃음을 흘렸다. “네가 알겠지.” “이상하네.” 사라는 정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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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아침 햇빛이 거실 창을 타고 주방까지 길게 들어왔다. 강수는 먼저 일어나 커피를 준비하고 있었다. 자신이 마실 진한 커피 한 잔. 그리고 우유를 넉넉히 넣은 사라의 바닐라 라테. 시럽을 넣으려던 순간, 뒤에서 느릿한 발소리가 들렸다. 강수가 돌아보기도 전에 허리에 두 팔이 감겼다. 등에 작고 따뜻한 몸이 폭 붙었다. 헝클어진 긴 머리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사라였다. “깼어?” “응…….” 잠긴 목소리로 대답한 사라가 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가만히 숨을 들이마셨다. “좋은 냄새.” 강수의 손이 멈췄다. “또?” “응.” “뭐가 좋은데.” 사라가 졸음 가득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오빠 냄새.” 강수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몸을 돌리자 허리를 안고 있던 사라도 함께 딸려왔다. 강수는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사라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좋은 아침.” “응.” 그러곤 허리를 잡아 그대로 번쩍 들어 올렸다. “어?” 사라의 몸이 가볍게 들렸다. 강수는 싱크대 옆 넓은 조리대 위에 그녀를 앉혔다. “뭐 해요?” “커피 만들고 있잖아.”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다시 귀 뒤로 넘겨줬다. “조금만 기다려.” “내 것도?” “바닐라 라테.” 사라의 입꼬리가 금세 올라갔다. “역시 우리 들소 씨.” 강수의 눈썹이 들렸다. “그건 기억나?” “뭐가?” “어젯밤.” 사라가 멈칫했다. “……내가 뭐 했는데요?” 강수는 대답 대신 커피를 마저 만들었다. “두 번 업어달라고 했고.” “내가?” “안아달라고도 했어.” “거짓말.” “내 품이 편하다더라.” 사라의 표정이 서서히 이상해졌다. 강수는 완성된 바닐라 라테를 그녀의 손에 쥐여줬다. “그리고 내 향수도 찾아봤다며.” 빨대를 물려던 사라가 그대로 굳었다. “……뭐?” “좋은 냄새 난다고.” 강수는 자신의 커피를 들었다. “아무리 찾아도 내가 쓰는 향수를 못 찾겠다고 했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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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입술이 떨어진 건 잠깐이었다. 사라가 눈을 뜨자 바로 앞에 강수의 얼굴이 있었다. 아침 햇빛 아래 오른쪽 얼굴을 길게 가로지른 흉터와 단단한 턱선이 선명했다. 사라가 그의 뺨을 감쌌다. “오빠.” “왜.” “아침부터 이래도 돼요?” “먼저 안긴 건 너야.” “그건 냄새 맡은 건데.” “목까지 끌어안고?” 사라가 잠깐 생각하다 눈을 접었다. “덤?” 강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말은 잘해.” “오빠한테 배웠지.” 강수가 가까워지자 사라가 손바닥으로 입술을 막았다. “잠깐. 나 아직 양치 안 했는데.” “나도 안 했어.” “그럼 둘 다 더럽네.” “이제 와서?” “아, 그러네.” 이미 몇 번이나 입을 맞춘 뒤였다. 사라가 웃으며 다시 셔츠 깃을 잡았다. 이번에는 먼저 입을 맞췄다. 가볍게 한 번, 떨어졌다 다시 한 번. 강수의 눈빛이 달라졌다. “민사라. 장난치지 마.” “장난 아닌데.” 사라가 웃었다. “좋아서 하는 건데.” 어젯밤에는 술에 취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강수의 손이 허리를 감싸 끌어당겼다. 길어진 입맞춤에 사라의 두 팔도 자연스럽게 그의 목을 감쌌다. 한참 뒤 사라가 강수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와…… 우리 아침부터 너무 열심히 사는 거 아니야?” “네가 시작했잖아.” “자꾸 내 탓하네.” 사라는 그의 목덜미에 코끝을 묻고 다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또 맡아?” “응.” “뭐가 그렇게 좋아.” “몰라. 그냥 좋아.” 사라의 손끝이 오른쪽 뺨의 흉터를 천천히 쓸었다. “얼굴도 이게 오빠 얼굴이고.” 다시 목 가까이 코끝을 가져갔다. “냄새도 이게 오빠 냄새고.” “그래서.” “그래서 뭐.” “좋다며.” “응. 좋다고.” 거창한 고백은 아니었다. 좋으니까 좋다고 했다. 그래서 강수에게는 오히려 더 진짜처럼 들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입술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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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그날 이후 사라는 강수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 “오빠, 이거 먹을래?” “오늘 몇 시에 끝나?” “퇴근할 때 나 데리러 와.” 며칠 지나자 반말은 완전히 자연스러워졌다. 강수도 그 편이 마음에 들었다. 다만 회사 문을 통과하는 순간은 달랐다. “회장님, 오전 회의 자료입니다.” “회장님, 법무팀 검토본 올라왔습니다.” “회장님, 오후 세 시 일정 변경됐습니다.” 꼬박꼬박 회장님. 말끝에는 깔끔하게 존댓말까지 붙었다. 강수가 서류를 받으며 사라를 내려다봤다. “끝이야?” “네, 회장님. 추가로 필요한 거 있으십니까?” “없어.”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뻔뻔하게 고개까지 숙인 사라가 돌아섰다. 잠시 뒤 휴대전화가 울렸다. [꼬박꼬박 회장님이네.] 사라가 피식 웃었다. [회사잖아.] [둘만 있을 때도 그렇게 해봐.] [싫은데, 회장님.] 일부러 마지막 호칭만 붙여 보내고 휴대전화를 엎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강수는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퇴근하면 자연스럽게 사라의 오피스텔로 향했고, 아침이면 함께 출근했다. 회사 근처에서 따로 내리는 선만 지켰다. 사라는 그것에도 별 의미를 붙이지 않았다. 오면 문을 열어줬고, 먼저 퇴근하면 제 할 일을 했다. 그날 점심 무렵. 회장실 앞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정민이 고개를 들었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모님?” 서희가 환하게 웃었다. 한 손에는 큰 쇼핑백, 다른 손에는 도시락 가방이 들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어쩐 일이십니까?” “강수 씨 보러 왔어요.” 서희가 쇼핑백을 살짝 들어 보였다. “며칠째 집에 못 들어오잖아요. 갈아입을 옷도 없을 것 같아서 가져왔어요.” “점심도 같이 먹으려고요. 요즘 많이 바쁜가 봐요.” “아…… 예.” 마침 복도 끝에서 서류를 들고 오던 사라가 걸음을 멈췄다. 서희가 먼저 손을 흔들었다. “사라야!” “서희야? 웬일이야?” 사라는 금세 웃으며 다가갔다. “강수 씨 점심 챙겨주려고 왔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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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강수의 젓가락이 잠깐 멈췄다. 맞은편에서는 사라가 계란말이를 집어 입에 넣고 있었다. “음! 맛있어.” “진짜?” “응. 하나 더 먹어도 돼?” “많이 먹어. 너 먹으라고 넉넉하게 했어.” 서희가 웃으며 계란말이 접시를 아예 사라 쪽으로 밀어줬다. 사라는 기다렸다는 듯 하나를 더 집었다. “역시 서희밖에 없다.” “아까는 강수 씨 남자친구처럼 잘 챙겨준다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강수의 눈이 사라에게 향했다. 사라가 아무렇지도 않게 불고기를 집어 먹었다. “회장님도 드세요.” 회사라서 회장님. 그런데 말투는 조금 전까지의 반말이 튀어나올 뻔했는지 어딘가 미묘했다. 강수가 눈을 가늘게 뜨자 사라가 태연하게 덧붙였다. “식사 안 하십니까?” 서희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 왜 갑자기 더 딱딱해졌어.” “직장생활 잘하는 중이야.” 사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한 숟갈 더 떴다. 강수는 결국 젓가락을 들었다. “오늘은 들어갈게.” 그제야 서희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진짜?” “어.” “다행이다. 며칠째 얼굴도 제대로 못 봤잖아.” 목소리에 서운함보다 걱정이 먼저 묻어 있었다. “바쁜 건 알겠는데 잠은 집에서 자. 회사에서 자면 제대로 쉬지도 못하잖아.” “알았어.” 사라는 옆에서 김치를 집었다. 회사에서 잔 적은 없었다. 며칠 동안 강수는 자기 집에서 잤다. 그렇다고 굳이 그 사실을 곱씹지도 않았다. 서희가 그렇게 알고 있구나. 딱 거기까지였다. “사라야, 이것도 먹어.” “뭔데?” “잡채.” “줘.” 사라가 냉큼 그릇을 내밀었다. 강수가 그 모습을 바라봤다. 정작 불편한 사람은 자신뿐인 것 같았다. 아내는 제 가장 친한 친구가 밥을 잘 먹는다며 좋아했고, 여자친구는 아내가 만든 도시락을 맛있다며 두 그릇째 먹고 있었다. “근데 사라야.” “응?” “요즘도 그 오피스텔 좋아?” 강수의 시선이 즉시 들렸다. 사라는 입안의 음식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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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현관문을 열자 익숙한 불빛이 강수를 맞았다. 며칠 만이었다. “여보?” 거실에서 나오던 서희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왔어?” “어.” “진짜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서희가 자연스럽게 강수의 팔을 잡았다. 강수는 회사에서 가져온 쇼핑백을 내려놓고 그녀의 머리를 한번 쓸어주었다. “미안해.” “알면 됐어.” 서희는 웃었다. “밥은?” “저녁은 아직.” “그럴 줄 알았어. 손 씻고 와. 데워줄게.” 식탁에는 된장찌개와 생선구이, 몇 가지 반찬이 차려져 있었다. 강수가 앉자 서희가 밥그릇을 앞으로 밀어줬다. “오늘 점심은 사라가 거의 다 먹은 것 같지?” “잘 먹더라.” “원래 잘 먹어. 조그마한 애가 먹는 건 얼마나 잘 먹는지.” 서희가 웃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사라 회사에서는 잘하지?” “잘해.” “사고 안 치고?” 강수가 잠깐 생각했다. “그건 장담 못 하고.” “역시.” 서희가 웃음을 터뜨렸다. 강수도 입꼬리를 올렸다. 식사를 마친 뒤 두 사람은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서희가 보던 드라마가 이어졌다. 어깨를 맞대고 앉아 있던 서희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강수에게 기대었다. “이거 앞부분 봤어?” “아니.” “그럼 내용 모르겠네.” “네가 알려줘.” “저 남자가 바람피운 거 들켰거든.” 강수의 시선이 화면에 멈췄다. 서희는 아무것도 모른 채 화면을 가리켰다. “근데 계속 아니라고 거짓말해. 완전 나쁘지?” “그러네.” “저럴 거면 왜 결혼했대.” 서희는 혀를 차고 다시 드라마에 집중했다. 강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서희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여보.” “왜.” “나 안 보고 드라마만 볼 거야?” 강수가 시선을 내렸다. 서희의 눈이 웃고 있었다. “며칠 만에 왔는데.” 손끝이 강수의 셔츠 소매를 잡았다. 끌어당기는 힘은 약했지만 의미는 분명했다. 강수가 리모컨을 들어 화면을 껐다. 거실이 조용해졌다. “이제 됐어?” “응.” 서희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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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강수는 침실로 향하던 걸음을 잠시 멈췄다. 서희는 이미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소파 위 휴대전화를 집어 메시지를 열었다. [오빠 내일 출근할 때 내 딸기우유 하나 사다 줘.] 강수의 입꼬리가 느리게 올라갔다. 고작 딸기우유였다. 보고 싶다는 것도 아니었고, 뭐 하냐고 묻지도 않았다. 자기가 오늘 집에 간다는 걸 알고 있으니 연락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필요한 게 생기자 아무렇지도 않게 메시지를 보낸 모양이었다. [갑자기 딸기우유는 왜.] 답장은 금방 왔다. [먹고 싶으니까.] 역시 민사라다운 대답이었다. [편의점 가기 귀찮아.] [그래.] [큰 걸로.] [알았어.] 잠시 뒤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오빠 아직 안 자?] 강수의 손이 멈췄다. [어.] [나도 안 자.] 그리고 끝이었다. 강수는 화면을 내려다봤다. 다음 말이 올 줄 알았는데 오지 않았다. [그게 끝이야?] [응.] 강수가 헛웃음을 흘렸다. [왜.] [뭐가 왜야ㅋㅋ 그냥 안 잔다고.] [보고 싶다는 줄 알았지.] 이번에는 답장이 조금 늦었다. [오늘 봤잖아.] 강수의 미간이 좁아졌다. [나는 보고 싶은데.] [그럼 내일 봐.] 아쉬움이라고는 한 톨도 없는 대답이었다. 강수는 혀끝으로 볼 안쪽을 밀었다. 사귄다고 달라진 줄 알았더니 이런 데서는 여전했다. 좋으면 좋다고 했다. 안고 싶으면 안겼고, 입 맞추고 싶으면 먼저 입을 맞췄다. 그런데 떨어져 있는 시간까지 상대에게 매달리지는 않았다. 자기 생활은 자기 생활대로 굴러갔다. [오빠.] 다시 메시지가 왔다. [왜.] [딸기우유 잊지 마.] 강수가 결국 웃었다. [안 잊어.] [잘 자.] [너도.] 잠깐 고민하다 하나를 더 보냈다. [내일 보자.] 사라가 곧 답했다. [응. 내일 봐.] 그제야 강수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침실로 들어가자 서희는 침대에 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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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강수는 조수석을 한번 바라봤다. 커다란 딸기우유 하나. 그 옆에는 괜히 집어 든 딸기 과자까지 놓여 있었다. 휴대전화에는 웃음이 붙은 사라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 [말하는 거 깜빡했어ㅋㅋ] 강수가 짧게 숨을 뱉었다. [어디야.] 답은 금방 왔다. [집.] [뭐 해.] [자려고.] 아침 여덟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방금 일어난 게 아니고?] [응. 밤새 영화 봤어.] 그럴 줄 알았다. 강수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운전석의 기사가 룸미러로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회장님, 회사로 모실까요?” 강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아니.” 차가 출발했다. “청담으로 가.” 회사와는 반대 방향이었다. 사라의 오피스텔 앞에 도착한 강수는 딸기우유와 과자 봉지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에는 망설임도 없었다. 문을 열자 집 안은 조용했다. 거실에는 어젯밤 사라가 먹은 과자 봉지와 빈 맥주 캔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텔레비전에는 영화의 엔딩 화면이 멈춰 있었다. 강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민사라.” 대답이 없었다. 침실 문을 열자 이불 속에서 작은 몸 하나가 둥글게 말려 있었다. 강수는 침대 옆에 서서 내려다봤다. “사라야.” “으응…….” “일어나.” 사라가 얼굴도 내놓지 않은 채 이불을 더 끌어당겼다. “싫어.” “딸기우유.” 이불이 슬쩍 내려갔다. 헝클어진 긴 머리 사이로 눈 하나가 나타났다. “샀어?” “어.” “큰 거?” “네가 큰 거 사라며.” 그제야 사라가 눈을 조금 더 떴다. 그러다 침대 옆에 서 있는 강수를 발견하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오빠가 왜 여기 있어?” “딸기우유 배달.” “회사 안 가?” “간다.” “근데 여기까지 왔어?” “누가 사다 달라며.” 사라가 잠시 강수를 쳐다보다 픽 웃었다. “회사에서 달라는 거였지.” “연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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