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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불온한 정착: Chapter 141 - Chapter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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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화

정민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서희의 눈에는 아직 눈물이 가득했다.“실장님…… 사라가 다친 걸 왜 여보가 저렇게까지 무서워해요?”정민의 시선이 강수가 사라진 병실 쪽으로 잠깐 향했다.어떻게 말해야 할지는 어렵지 않았다.거짓말을 길게 할 필요도 없었다.차강수라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됐다.정민이 조금 난처한 듯 웃었다.“사모님도 아시잖아요.”“뭘요?”“형님 원래 저러시는 거.”서희의 눈썹이 살짝 모였다.정민이 벽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자기 사람이라고 생각 들면 저러십니다.”“……자기 사람?”“예.”정민은 아무렇지 않게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저한테도 그러시는데요.”일부러 웃음까지 섞었다.“제가 어디 가서 칼이라도 한 번 맞고 오면 난리 납니다. 덕배 형 다쳐도 마찬가지고요.”옆에 있던 덕배가 코웃음을 쳤다.“난 안 챙겨.”“형님이 사고를 너무 많이 치니까 그렇죠.”“뒤질 정도 아니면 사고도 아니지.”평소와 다를 것 없는 두 사람의 대화였다.서희의 굳었던 표정이 아주 조금 풀렸다.정민이 말을 이었다.“사라 씨도 이제 회사 사람이고, 저희랑 같이 위험한 일까지 겪었잖습니까.”지난번에도 사라는 강수 일에 휘말려 칼을 든 남자에게 붙잡힌 적이 있었다.그때도 강수가 직접 움직였다.“게다가 이번에는 진짜 죽을 뻔했고요.”정민이 병실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형님 눈앞에서 바다에 가라앉았으니 놀라셨겠죠.”말이 안 되는 설명은 아니었다.오히려 너무 그럴듯했다.서희 역시 강수가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강한 책임감을 가지는지 알고 있었다.정민도.덕배도.오랫동안 강수 곁에 있던 사람들이었다.그 안에 이제 사라까지 들어갔다고 생각하면 됐다.그런데도 마음 한구석에 걸리는 게 있었다.“그래도…….”서희가 병실을 바라봤다.“나한테 소리친 건 처음이에요.”정민의 입이 잠시 다물렸다.그건 자신도 둘러댈 말이 없었다.그때 덕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덕배가 화면을 확인하는 순간 표정이 달라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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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화

“……오빠.”희미한 목소리가 들리자 강수는 바로 병실로 들어갔다.침대 위 사라가 천천히 눈을 뜨고 있었다.약기운이 남아 초점이 흐렸다.강수가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민사라.”사라의 눈동자가 목소리를 따라 움직였다.강수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굳어 있던 표정이 조금 풀렸다.“오빠…….”“어.”“있었네.”“있다 했잖아.”강수가 손을 내밀었다.사라가 기다렸다는 듯 잡았다.붕대가 감긴 손목 때문에 힘도 제대로 주지 못하면서 손가락만 그의 손에 얽었다.“나 얼마나 잤어?”“얼마 안 됐어.”“검사는?”“끝났어.”“나 멀쩡해?”“어.”사라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그러다 문득 손목을 들어보려다 얼굴을 찡그렸다.“아파.”“움직이지 마.”“이거 흉터 남으려나?”강수의 시선이 붕대로 향했다.“치료하면 돼.”사라가 입술을 삐죽였다.“나 피부 예쁜데.”“알아.”“흉터 생기면?”“생겨도 돼.”사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내 손인데 왜 오빠 마음대로 돼도 된대?”“예쁘니까.”사라가 잠깐 멈췄다.강수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침대 옆 물을 집어 빨대를 꽂아 입 앞으로 가져왔다.“마셔.”사라는 순순히 몇 모금 마셨다.평소 같으면 자기가 한다고 뺏었을 텐데 오늘은 얌전했다.그때 병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강수의 시선이 돌아갔다.서희였다.사라의 눈이 커졌다.“서희야?”서희는 그 한마디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야, 민사라!”곧장 침대로 달려왔다.“너 미쳤어? 어떻게 된 거야!”“아…….”사라가 놀라 눈을 깜빡였다.서희가 안아주려다 붕대 감긴 손목을 보고 급하게 멈췄다.“많이 아파?”“좀?”“좀은 무슨 좀이야!”서희는 울면서도 사라의 얼굴부터 살폈다.“바다에 빠졌다며. 진짜 죽을 뻔했다며.”사라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물.컨테이너.차오르던 바닷물.숨을 쉴 수 없던 순간.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강수의 손이었다.강수가 즉시 사라를 봤다.“사라야.”“……응.”“나 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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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화

병실 안이 잠깐 조용해졌다.사라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희를 바라봤다.“……뭐?”“덕배 이사님.”“덕배 오빠가 왜?”서희가 조금 머뭇거렸다.“네 남자친구 아니야?”사라의 입이 벌어졌다.잠시 뒤.“푸흡.”결국 웃음이 터졌다.“뭐야. 왜 웃어?”“아니, 잠깐만.”사라는 손목이 아픈 것도 잊고 몸을 들썩이다 얼굴을 찡그렸다.“아, 아파.”강수의 손이 바로 어깨를 눌렀다.“가만있어.”“알았어.”“눕고.”사라가 다시 베개에 머리를 붙였다.그러면서도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덕배 오빠가 내 남자친구라고?”“아니야?”“아니야.”즉답이었다.서희가 눈을 깜빡였다.“진짜?”“응. 완전 아니야.”사라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서희는 괜히 민망해졌다.“아까 사라 다쳤다고 엄청 화내면서 나갔단 말이야.”“덕배 오빠가?”“응. 감히 우리 이쁜이를 그랬나?”사라가 다시 웃었다.“아, 그 오빠 원래 나 이쁜이라고 불러.”바로 옆에서 강수의 미간이 구겨졌다.사라는 보지 못했다.서희가 말했다.“그리고 너도 덕배 오빠라고 하잖아.”“정민 실장님한테도 실장님이라고 했다가 밖에서는 오빠라고 하는데?”“그런가?”“응.”사라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덕배 오빠 여자 엄청 좋아해. 나한테 관심 없어.”강수가 낮게 끼어들었다.“그 얘기 그만해.”두 여자의 시선이 동시에 향했다.강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사라의 눈에 장난기가 아주 잠깐 올라왔다.왜 저러는지 자신은 알았다.하지만 서희 앞이었다.사라는 모르는 척 입을 다물었다.서희 역시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친구가 죽을 뻔했는데 병실에서 남자친구가 누구냐고 캐묻고 있었으니 강수가 듣기엔 한심할 수도 있었다.“알았어.”서희가 사라의 이불을 정리해줬다.그러다 문득 다시 생각났다.“그럼 네 남자친구는?”사라의 눈이 멈췄다.강수도 움직이지 않았다.“누군데?”“그건…….”“나중에 말해준다며.”서희가 입술을 삐죽였다.“친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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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화

며칠 뒤.사라는 퇴원했다.검사 결과 큰 이상은 없었다.양쪽 손목은 아직 붕대가 감겨 있었지만 상처도 조금씩 아물고 있었다.문제는 다른 쪽이었다.사라는 전보다 강수 곁에 자주 붙어 있었다.회사에 복귀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일할 때는 멀쩡했다.평소처럼 떠들고, 밥시간이 되면 메뉴부터 찾고, 정민과 장난도 쳤다.회사 안에서는 강수에게 꼬박꼬박 회장님이라 불렀다.그런데 잠깐이라도 쉴 때면 달랐다.회장실 소파에서 서류를 보다 잠들기도 했고, 퇴근하면 자연스럽게 강수 옆에 붙었다.밤에는 더했다.잠들었다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는 날이 있었다.“헉……!”숨부터 몰아쉬었다.어두운 방 안을 정신없이 둘러보다 옆에 있는 강수를 확인하고서야 멈췄다.강수는 그런 날이면 묻지 않았다.악몽 꿨냐고.괜찮냐고.계속 캐묻지도 않았다.그저 사라가 숨을 고를 때까지 등을 쓸어내렸다.“오빠.”“어.”“있지?”“어.”그걸로 끝이었다.사라가 다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면 팔을 둘러 안았다.말은 여전히 짧았다.달라진 건 행동뿐이었다.그리고 다음 날이면 사라는 또 멀쩡했다.“배고파.”눈뜨자마자 그 소리부터 했다.강수는 그런 사라를 굳이 건드리지 않았다.사라가 아무렇지 않은 날에는 자신도 아무렇지 않게 굴었다.그날 저녁도 마찬가지였다.퇴근 후 옷을 갈아입던 사라가 갑자기 제 손목을 내려다봤다.양쪽 모두 하얀 붕대가 감겨 있었다.한참 바라보던 얼굴이 구겨졌다.“아.”강수가 넥타이를 풀며 돌아봤다.“왜.”“내 팔찌.”강수의 손이 멈췄다.“없어.”“…….”“오빠가 사준 거.”사라가 붕대 감긴 손목을 들어 보였다.“병원에도 없고 내 가방에도 없어.”그날 바다에 빠지면서 잃어버린 모양이었다.사라의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나 그거 진짜 좋아했는데.”“알아.”“맨날 했잖아.”“어.”“똑같은 거 다시 사줘.”강수는 대답하지 않았다.“듣고 있어?”“듣고 있어.”“그럼 대답을 해야지.”강수가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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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

“으아악!!”비명이 창고 안을 찢었다.“살려줘! 제발…… 살려주세요!”강수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다리를 벌리고 앉은 채 팔꿈치를 무릎 위에 얹고,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내려다봤다.표정은 없었다.사라 앞에서 밤마다 등을 쓸어주던 남자는 여기 없었다.사뇌파 두목.차강수만 있었다.덕배가 남자의 뒷덜미를 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형님 물으시잖아.”“저, 저는 시킨 대로만 했습니다!”강수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정민이 불을 붙였다.길게 한 모금.연기가 천천히 흩어졌다.“누가.”두 글자였다.남자의 입술이 떨렸다.“그게…….”강수의 눈이 움직였다.그뿐이었다.“말해.”“모릅니다!”덕배가 피식 웃었다.“모른대.”“진짜입니다! 진짜 얼굴도 못 봤습니다!”강수는 담배를 한번 털었다.“다음.”옆에 묶여 있던 남자가 끌려왔다.첫 번째 남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잠깐! 회장님!”강수의 손이 멈췄다.창고가 조용해졌다.남자가 헐떡였다.“회장님이 시켰습니다.”“이름.”“저희도 모릅니다. 진짜 회장님이라고만…….”강수는 말없이 바라봤다.남자가 그 침묵을 견디지 못했다.“사, 사전에 사진을 받았습니다! 여자 사진이랑 차 회장님 사진이랑!”“민사라.”“예!”“죽이라 했어?”남자가 침을 삼켰다.“처음부터 죽이라는 건 아니었습니다.”강수의 눈이 가늘어졌다.“처음부터?”“겁을 주고…… 차 회장님한테 영상 보내라고 했습니다.”“그다음.”남자가 울먹였다.“상황 봐서…….”강수가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구두 끝으로 천천히 비벼 껐다.남자의 말이 멎었다.“상황 봐서 뭐.”“……죽여도 된다고.”정민의 표정이 싸늘해졌다.덕배는 아예 웃음을 지웠다.강수만 달라지지 않았다.“컨테이너는.”“저희가…….”“누구 생각이야.”남자가 고개를 숙였다.“회장님이…… 물을 쓰라고 했습니다.”강수의 시선이 멈췄다.“왜.”“그건 모릅니다.”강수가 일어났다.189센티미터의 거대한 몸이 일어서자 남자는 본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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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화

“너였네.”민상철의 손이 굳었다.휴대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낮았다.누구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차강수 회장?”“어.”짧은 대답.민상철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어떻게 내 번호를…….”“민사라.”그 이름에 민상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강수가 물었다.“왜 그랬어.”“…….”“대답해.”민상철이 헛웃음을 흘렸다.“그 애가 말을 안 하던가?”강수의 눈이 가늘어졌다.“뭘.”“역시.”민상철의 시선이 엎어진 가족사진으로 향했다.“자기한테 불리한 얘기는 안 했나 보군.”강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민상철이 사진을 바로 세웠다.어린 사라.그리고 그 옆의 서후.“내 아들이 죽었어.”강수의 표정이 멈췄다.“민서후?”“그래.”강수가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사라가 아직도 좋아한다고 했던 남자.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착하고 싶었다던 사람.“사라가 열여덟이던 해였다.”민상철의 목소리가 갈라졌다.“집에 불이 났어.”강수의 눈빛이 달라졌다.처음 듣는 이야기였다.“그 애 때문에.”“확실해?”민상철이 이를 악물었다.“내 아들이 그 애를 구하러 다시 들어갔다.”강수의 손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그리고 못 나왔어.”짧은 침묵.“사라는.”“살았지.”민상철이 비틀린 웃음을 흘렸다.“항상 그렇듯이.”강수의 얼굴에서 감정이 사라졌다.“말 조심해.”“뭐?”“그 뒤.”민상철의 눈이 흔들렸다.강수는 똑같은 목소리로 반복했다.“사라한테 뭘 했어.”“내 아들이 죽었다!”민상철의 고함이 터졌다.그러나 강수의 목소리는 오히려 더 낮아졌다.“그래서.”“…….”“열여덟짜리한테 뭘 했냐고.”민상철이 입을 다물었다.강수의 머릿속에 하나씩 조각이 맞춰졌다.열여덟에 죽은 민서후.그 뒤 시작된 사라의 긴 여행.어디에도 정착하지 않는 여자.좋으면 머물고 싫으면 떠나면 된다고 웃던 여자.정착하면 또 잃을 것 같아서 떠나는 게 편하다는 진짜 이유까지는 아직 몰랐다.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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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화

민상철의 저택 앞에 검은 차가 멈췄다.강수가 내렸다.정민도 뒤따랐지만 휴대전화에서는 계속 자료가 들어오고 있었다.6년 전 화재.사라 열여덟.민서후 스물셋.오래된 사건이라 남은 자료가 많지는 않았다.하지만 돈은 흔적을 남겼다.“형님.”강수가 걸음을 멈췄다.정민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찾았습니다.”“말해.”“화재 전에 보험이 여러 건 들어갔습니다.”강수의 눈이 가라앉았다.“누구.”“민사라 씨.”정민이 화면을 넘겼다.“당시 미성년자라 계약과 수익자 구조에 양부모가 들어가 있습니다. 금액이 큽니다.”“민서후는.”정민이 잠시 침묵했다.“있습니다.”강수의 시선이 멈췄다.“그쪽도 거액입니다.”저택 문이 열렸다.강수는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민상철이 거실에 서 있었다.“정말 왔군.”강수는 인사도 하지 않았다.소파에 앉지도 않았다.“장재희 어디 있어.”민상철의 얼굴이 굳었다.“내 아내는 왜.”뒤따라 들어온 정민이 강수에게 휴대전화를 건넸다.“형님.”추가 자료였다.당시 보험 설계 과정.납입 계좌.그리고 화재 직전 장재희가 처분하려 했던 자산과 회사의 자금 사정.정민이 낮게 말했다.“당시 민 대표 회사 자금 상황이 상당히 안 좋았습니다.”민상철의 표정이 변했다.“무슨 소리야.”정민은 그를 보지 않았다.“부도 직전까지 갔습니다. 급하게 필요한 돈이 있었고요.”“그게 지금 무슨…….”“보험금이면 막을 수 있었습니다.”민상철의 입이 닫혔다.강수가 물었다.“화재 원인.”“당시에는 실화로 종결됐습니다.”“당시는.”정민이 화면을 넘겼다.“다시 보니까 이상합니다.”화재가 시작된 위치.사라가 있었다고 알려진 곳과 달랐다.그리고 당시 진술 중 몇 개가 서로 맞지 않았다.그 중심에 장재희가 있었다.정민이 계속했다.“화재 며칠 전, 민서후 씨와 장재희 씨 사이에 큰 다툼이 있었다는 진술도 찾았습니다.”민상철이 정민을 바라봤다.“서후가?”“예.”“왜.”정민이 잠깐 강수를 봤다.“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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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화

장재희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거실 한가운데 선 민상철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눈앞의 아내를 바라보는 눈이 텅 비어 있었다.육 년.아들을 묻은 뒤부터 단 하루도 잊지 못했다.불길 속으로 들어간 서후.살아서 나온 사라.그 두 장면만 붙들고 살았다.왜 네가 살아서 나왔냐고.왜 내 아들이 너 때문에 죽어야 했냐고.그 원망으로 사라를 밀어냈고, 육 년이 지나 다시 나타난 사라에게 또 분노했다.결국 사람까지 붙여 죽이려 했다.그런데 시작부터 잘못돼 있었다.“여보…….”재희가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상철이 뒤로 물러났다.“말해.”재희의 눈물이 떨어졌다.“그때 회사가 정말 위험했어. 당장 돈을 막지 못하면 다 넘어갈 상황이었어.”사라에게 들어 있던 거액의 보험.미성년자인 사라의 보호자라는 위치.사라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들어올 돈.처음에는 생각뿐이었다.그러다 서후와 사라의 관계를 알게 됐다.스물셋의 서후는 숨기지 않았다.사라를 좋아한다고.사라도 자신을 좋아한다고.하지만 사라는 아직 열여덟이었다.그래서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그 뒤에 정식으로 허락받고 함께하겠다고.모든 걸 어머니에게 털어놨다.재희에게 그 말은 사랑이 아니었다.배신이었다.“남매로 키웠어.”재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부족한 것 없이 키워줬는데 걔가 서후까지 넘봤다고!”강수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하지만 입은 열리지 않았다.벽에 기대선 채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그래서 불을 냈어?”상철의 목소리가 갈라졌다.재희가 입을 다물었다.“대답해.”“……죽으면 사고로 만들 수 있을 줄 알았어.”상철의 입술이 떨렸다.“보험금도 나오고…….”그날 서후는 늦게 돌아올 예정이었다.상철은 회사에 있었다.재희 역시 집을 비웠다.집에는 사라 혼자.그래야 했다.불이 나고 사라가 죽으면 사고였다.딸을 잃은 부모처럼 울면 됐다.그리고 보험금으로 무너지는 회사를 막으면 됐다.하지만 서후가 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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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화

현관문이 열렸다.소파에 엎드려 있던 사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오빠!”맨발로 쪼르르 달려왔다.발목에서는 새로 채워진 발찌가 반짝였다.강수의 손에는 아이스크림 봉투가 들려 있었다.그걸 발견한 사라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어디 갔다 와~~ 배고파 죽는 줄 알았네.”강수는 말없이 봉투를 내밀었다.사라가 냉큼 받아 안을 들여다봤다.“초코 맞지?”“어.”“역시.”만족스럽게 웃더니 강수의 팔을 잡아끌었다.“갈비찜 왔어. 오빠 기다리느라 나 아직 안 먹었어.”강수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평소 같으면 혼자 먼저 먹고도 남았을 여자였다.“왜.”“같이 먹으려고.”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한 사라가 식탁으로 갔다.강수는 그 작은 뒷모습을 바라봤다.열여덟의 사라.불타는 집.자신을 죽이려고 만든 불이라는 것도 모르고 살아남은 아이.서후가 자신 때문에 죽었다고 믿었을지도 모르는 여자.그 모든 걸 알게 된 뒤에도 눈앞의 사라는 똑같았다.“오빠 빨리.”“가.”“내가 갈비 많은 쪽 줄게.”“네가 먹어.”“왜? 나 원래 고기 양보 잘 안 하는데?”사라는 의자를 빼며 히죽 웃었다.“오늘 특별히 주는 거야.”강수가 맞은편에 앉았다.사라는 정말 큼지막한 갈비 하나를 그의 그릇에 올려줬다.그리고 제 몫을 먹기 시작했다.잘 먹었다.볼이 빵빵해질 만큼 밥을 넣고, 고기를 뜯고, 국물까지 떠먹었다.강수는 평소보다 조용했다.사라가 젓가락을 멈췄다.“왜 자꾸 봐.”“그냥.”“오늘 이상한데.”“먹어.”“응.”정말 다시 먹었다.강수는 피식 웃지도 못했다.민상철에게 들은 말보다 정민이 찾아낸 기록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육 년 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을 사라에게 그 사실을 알려야 하는지.알린다면 누가 말해야 하는지.자신이 먼저 꺼낼 이야기는 아니었다.그건 사라의 과거였다.사라가 묻지 않은 문을 자신이 마음대로 열 수는 없었다.식사를 끝낸 사라는 기다렸다는 듯 냉동실을 열었다.“아이스크림!”초코 아이스크림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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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화

그날 이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사라의 손목에서 붕대가 사라지고 상처가 옅어질 무렵.강수가 느닷없이 말했다.“집 옮겨.”소파에 누워 과자를 먹던 사라가 눈만 들었다.“왜?”“좁아.”사라가 제 오피스텔을 둘러봤다.혼자 살기에는 충분했다.“안 좁은데?”“내가 좁아.”“오빠가 큰 거잖아.”정답이었다.강수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며칠 뒤 사라는 강수의 차에 실려 청담동으로 갔다.최상층.문이 열리자 넓은 거실과 한강이 한눈에 들어왔다.사라가 현관에서 멈췄다.“……여기 몇 평이야?”“팔십.”“미쳤네.”강수는 안으로 들어갔다.사라는 뒤늦게 따라붙었다.“잠깐만. 여기서 나보고 살라고?”“어.”“혼자?”강수가 돌아봤다.사라도 그를 봤다.잠시 뒤 입꼬리가 올라갔다.“아니네.”강수는 대꾸하지 않았다.그날부터 집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소파도 같이 골랐다.침대도.식탁도.냉장고와 세탁기, TV까지 전부 둘이 돌아다니며 골랐다.사라는 디자인을 먼저 봤고 강수는 크기와 성능부터 봤다.“이게 예쁘잖아.”“작아.”“뭐든 큰 것만 좋아해.”“작으면 네가 불편해.”“나는 작은데?”강수가 사라를 내려다봤다.“알아.”결국 냉장고는 강수가 고르고 소파는 사라가 골랐다.침대는 강수가 가장 큰 것으로 주문했다.사라는 웃었다.“역시 오빠 때문에 집이 좁았던 거 맞네.”방도 많았다.강수가 방문 하나를 열었다.“여긴 네가 써.”“내가?”“하고 싶은 대로.”사라는 눈을 반짝였다.“진짜?”“어.”“그럼 옷방 할까? 작업실? 아니면 노래방?”그날은 분명 사라의 방이었다.그런데 몇 주 뒤.문을 연 사라가 멈춰 섰다.커다란 책상.책장.강수의 노트북과 서류.벽 한쪽에는 그의 재킷까지 걸려 있었다.사라가 문틀에 기대섰다.“차강수.”“왜.”“내가 쓰고 싶은 대로 쓰라며.”“어.”“근데 이게 왜 오빠 서재야?”강수는 서류에서 눈도 들지 않았다.“필요해서.”“내 방을?”“방 많잖아.”기가 막힌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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