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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불온한 정착: Chapter 161 - Chapter 170

322 Chapters

161화

“나 이제 사무실 들어가 봐야 돼.”건물 앞에 도착한 사라가 휴대전화를 확인하며 말했다.서희가 아쉬운 얼굴을 했다.“조금만 더 놀다 가지.”“안 돼. 오전에 빠져나왔잖아.”“회장님이 뭐라고 해?”“회장님보다 정민 오빠가 뭐라고 하지.”서희가 웃었다.“그래. 가봐.”“너는?”“나도 집에 가려고.”사라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서희의 팔을 잡았다.“근데 너.”“응?”“아까 그 점쟁이 말 너무 신경 쓰지 마.”서희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사라는 그걸 못 본 척했다.“그냥 점이잖아.”“알아.”“차강수가 성질 더러운 건 맞고.”“야.”서희가 결국 웃었다.사라도 따라 웃었다.“가. 전화해.”“응.”서희가 차에 올라타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사라는 몸을 돌렸다.회사까지는 걸어서 십 분 남짓이었다.몇 걸음 걷는데 문득 배에서 묘한 느낌이 들었다.아픈 건 아니었다.그냥 조금 불편했다.사라가 무심코 배를 한번 문질렀다.그러다 걸음이 느려졌다.며칠째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음식.좋아하던 것조차 생각만 하면 당기지 않았다.아침에는 속도 묘하게 울렁거렸다.그리고 점집에서 자꾸 자기 배만 바라보던 여자.잘 지켜.“…….”사라가 걸음을 멈췄다.아니.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갑자기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생리.마지막으로 언제 했지?사라가 눈을 깜빡였다.휴대전화를 열었다.캘린더를 넘겼다.이번 달.지난달.손가락이 멈췄다.“어?”다시 봤다.날짜를 하나씩 세었다.하나.둘.셋.입술에서 웃음이 사라졌다.“잠깐만.”잘못 센 것 같았다.처음부터 다시 셌다.이번에는 휴대전화 계산기까지 켰다.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예정일이 꽤 지나 있었다.사라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미쳤나 봐.”자기가 어떻게 이걸 잊고 있었지.원래 날짜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편은 아니었다.여행 다닐 때는 생활이 불규칙해서 며칠씩 밀린 적도 있었다.그래서 신경 쓰지 않았다.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입맛이 없어진 시기까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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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화

병원에 오는 내내 사라는 말이 없었다.조수석에 앉아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렸다.캘린더를 열었다 닫았다.다시 날짜를 세었다가 화면을 껐다.신호에 걸린 차가 멈출 때마다 강수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평소 같으면 운전하는 강수 옆에서 쉴 새 없이 떠들었을 사라였다.오늘은 조용했다.병원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접수를 하고 대기실에 앉자 사라의 다리가 작게 흔들렸다.강수가 그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움직임이 멎었다.사라가 옆을 봤다.“오빠.”“왜.”“아니면 어떡해?”강수는 가만히 바라봤다.“그럼 나오면 되지.”“그렇긴 한데.”잠시 후.“민사라 님.”이름이 불렸다.사라가 일어났다.두 걸음쯤 가다가 돌아왔다.강수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같이 가.”“어.”진료실에 들어가 의사와 마주 앉았다.마지막 생리일.평소 주기.최근 증상.하나씩 대답할수록 사라의 손가락이 자꾸 꼬였다.강수는 옆에 앉아 거의 말하지 않았다.검사가 이어졌다.그리고 다시 의사 앞에 앉았을 때였다.모니터를 확인하던 의사가 웃었다.“축하드려요.”사라가 눈을 깜빡였다.“네?”“임신 맞으세요.”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사라가 멍하니 의사를 바라봤다.강수도 움직이지 않았다.“지금 크기로 보면…….”의사가 화면을 조금 더 살폈다.“8주 정도 됐네요.”사라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8주요?”“네.”“두 달?”“대략 그 정도로 생각하시면 돼요.”사라가 강수를 돌아봤다.강수의 시선은 모니터에 박혀 있었다.미동도 없었다.“오빠.”그제야 강수가 사라를 봤다.사라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나 임신했대.”“들었어.”“8주래.”“어.”대답은 평소처럼 짧았다.그런데 사라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사라가 아래를 내려다봤다.자기 손을 완전히 감싸고 있는 커다란 손.그걸 한참 보다가 다시 제 배를 내려다봤다.아무것도 달라 보이지 않았다.그 안에 아이가 있다는 말이 도무지 현실처럼 느껴지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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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화

병원 밖으로 나왔는데도 귓가에 그 소리가 남아 있었다.빠르고 작은 심장 소리.사라는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든 채 한참 내려다봤다.검은 화면 안의 작은 형체.아무리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저게 자기 배 안에 있었다.벌써 여덟 주나.강수가 차 문을 열었다.사라는 타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강수의 시선이 내려왔다.“왜.”사라는 초음파 사진을 들었다.“이게 진짜 우리 애래.”“어.”“심장도 뛰어.”“들었어.”“엄청 빨리 뛰던데.”강수는 대답하지 않았다.사라는 또 사진을 내려다봤다.신기했다.그런데 신기한 감정이 조금 가라앉자 그제야 현실이 밀려왔다.강수.자기.그리고 서희.사라의 얼굴에서 조금씩 웃음이 사라졌다.강수가 그 변화를 보고 있었다.“오빠.”“왜.”사라가 한참 입술만 달싹였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처음으로 그 질문을 했다.둘이 처음 선을 넘었을 때도 하지 않았다.연애를 시작했을 때도.강수의 물건이 하나둘 자기 집을 채우고, 어느 순간 그 집을 ‘우리 집’이라고 부르게 됐을 때조차 묻지 않았다.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사라는 원래 그런 여자였다.좋으면 만났다.싫으면 돌아섰다.내일의 마음을 오늘 약속하지 않았다.그런데 이제는 달랐다.둘 사이에 하나가 더 생겼다.강수의 시선이 사라의 배로 내려갔다.아직 평평했다.겉으로는 어제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강수가 손을 뻗었다.큰 손바닥이 배 위에 조심스럽게 닿았다.사라가 그 손을 내려다봤다.“나도 모르겠어.”처음이었다.사라가 그렇게 말하는 건.“좋은 건지, 무서운 건지도 모르겠어.”강수의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아까 심장 소리 들을 때는 되게 이상했어.”사라가 작게 웃었다.“진짜 내 안에 사람이 있구나 싶어서.”잠깐 침묵했다.“근데 나오니까 갑자기 생각할 게 너무 많아.”강수의 턱이 굳었다.사라가 그를 올려다봤다.그리고 결국 입 밖으로 꺼냈다.“서희도 있잖아.”바람이 지나갔다.강수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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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화

집에 도착해서도 사라는 한동안 현관에 서 있었다.강수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는데도 따라오지 않았다.손은 여전히 배 위에 있었다.평평했다.아무리 내려다봐도 달라진 건 없었다.그런데 그 안에 심장이 하나 더 뛰고 있었다.여덟 주.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사라야.”사라가 고개를 들었다.강수가 거실에서 보고 있었다.“왜 거기 있어.”“그냥.”그제야 신발을 벗었다.소파까지 걸어가 털썩 앉았다.평소 같으면 다리를 올리고 드러누웠을 텐데 오늘은 얌전히 앉아 있었다.강수가 물을 가져왔다.뚜껑까지 열어 건넸다.사라는 몇 모금 마시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강수는 맞은편에 앉지 않았다.사라 옆에 앉았다.가까웠다.그런데도 사라는 그에게 기대지 않았다.한참 동안 자기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강수도 재촉하지 않았다.먼저 입을 연 건 사라였다.“오빠.”“어.”“우리 애.”말하고 잠깐 멈췄다.우리 애.병원에서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입 밖으로 직접 꺼내놓으니 이상하게 가슴이 울렸다.사라가 입술을 한번 깨물었다.“지워야겠지……?”강수의 움직임이 멎었다.사라는 그를 보지 않았다.“아무래도 그러는 게 맞겠지?”대답이 없었다.“오빠는 결혼했고.”손가락이 더욱 세게 꼬였다.“서희도 있고.”그제야 처음으로 현실이 또렷하게 입 밖으로 나왔다.사라는 웃으려 했다.늘 하던 것처럼 별것 아닌 일로 만들어버리려고.그런데 입꼬리가 제대로 올라가지 않았다.“우리 상황이 좀 그렇잖아.”강수의 시선이 사라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그러니까…….”사라가 배를 한번 내려다봤다.“지우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강수의 손이 움직였다.꼬여 있던 사라의 손가락을 잡아 풀었다.사라가 그제야 그를 봤다.“왜.”강수가 짧게 물었다.“뭐가?”“네가 원하는 게 그거냐.”사라가 대답하지 못했다.“…….”“지우고 싶어?”또 침묵했다.이번에는 더 길었다.사라가 시선을 피했다.“그렇게 물으면 모르겠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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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화

“내가 말해.”강수의 대답은 거기까지였다.사라는 한동안 그를 바라봤다.그리고 기다렸다.뭔가 더 말할 줄 알았다.아이가 생겼다는 걸 알았을 때도 강수는 별말이 없었다.심장 소리를 들으면서도.병원에서 나오면서도.집에 돌아와 자신이 아이를 못 지울 것 같다고 했을 때도.표정 하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원래 그런 남자인 걸 안다.좋아한다는 말보다 찾아오는 게 먼저였고, 보고 싶다는 말보다 어느새 옆에 앉아 있는 남자였다.말보다 행동.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사라였다.그런데 오늘은.조금쯤 달라도 되지 않나.사라의 시선이 강수의 얼굴을 살폈다.“오빠.”“왜.”“아이…… 싫어?”강수의 눈썹이 움직였다.“뭐?”“싫냐고.”“아니.”또 짧았다.사라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그런데 왜 그래?”“뭘.”그 말에 괜히 더 서운해졌다.뭘이라니.자기 배 안에 둘의 아이가 생겼는데.병원에서 심장까지 듣고 왔는데.이 남자는 평소랑 똑같았다.사라는 몰랐다.강수의 머릿속에서는 병원에서부터 단 한 순간도 생각이 멈춘 적이 없었다.여덟 주.사라가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기쁨보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서희에게 말해야 했다.더는 두 집을 오가며 아무 일 없는 남편처럼 행동할 수 없었다.사라를 지금처럼 숨어 있게 둘 수도 없었다.그리고 아이.강수에게는 지켜야 할 사람이 하나 더 생겼다.그 사실이 무엇보다 무거웠다.사라 한 사람을 잃을 뻔했을 때도 그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바다에 뛰어들어 축 늘어진 작은 몸을 끌어안았던 감각은 아직도 선명했다.그런 사라의 몸 안에 지금은 더 작은 생명이 있었다.기뻤다.생각했던 것보다 훨씬.초음파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할 만큼.그 작은 심장 소리를 기억해버릴 만큼.그래서 오히려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좋다는 말 한마디로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사라와 아이를 어디에 둘지.어떻게 지킬지.서희에게 언제, 어떻게 모든 것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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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화

그날 이후 달라진 건 사라보다 강수 쪽이었다. 말은 여전히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뜬 사라에게 몸은 어떠냐고 몇 번씩 묻지도 않았고, 배를 붙잡고 호들갑을 떨지도 않았다. 그런데 집 안에 먹을 게 늘었다. 사라가 며칠 동안 입맛을 잃었을 때는 냉장고를 열어도 먹고 싶은 게 없었다. 이제 조금씩 입맛이 돌아오기 시작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오빠. 나 복숭아 먹고 싶어.” 그날 저녁 냉장고에 복숭아가 들어왔다. 다음 날에는 출근하다 갑자기 호두과자가 먹고 싶다고 했더니 오후에 회장실 테이블 위에 호두과자가 놓였다. 딸기. 크래커. 치즈. 작게 포장된 견과류와 과일. 사라가 한두 번 잘 먹은 것들은 며칠 뒤에도 어김없이 채워졌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류를 들고 회장실에 들어간 사라가 책상 한쪽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작은 샌드위치와 과일 컵이 있었다. “이거 뭐야?” 강수는 서류에서 눈도 들지 않았다. “먹어.” “나 밥 먹었는데?” “알아.” “근데 또 먹으라고?” 대답은 없었다. 사라는 과일 컵을 집어 들었다. “딸기도 있네.” 포크로 하나 찍어 먹었다. 달았다. 결국 소파에 앉아 절반을 먹었다. 강수는 그제야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아침. 드레스룸에서 옷을 입던 사라가 구두를 꺼냈다. 그 순간 뒤에서 큰 손이 구두를 가져갔다. “뭐 해?” 강수는 구두를 다시 선반에 넣었다. 대신 아래쪽에 있던 운동화를 꺼내 사라 앞에 내려놨다. “이거 신어.” “왜?” 강수의 시선이 높은 굽에 한번 닿았다. “불편해.” “나 안 불편한데?” “신어.” 사라가 황당한 얼굴로 쳐다봤다. “나 임신했지 발목 부러진 거 아니거든?” 강수는 이미 재킷을 입고 있었다. 대꾸도 없었다. “차강수.” “늦어.” 결국 운동화를 신었다. 회사에 도착해서도 사라는 자기 발을 내려다봤다. 짧은 원피스에 운동화. 나쁘지는 않았다. 그런데 뭔가 억울했다. 더 황당한 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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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화

사라는 딸기를 하나 더 집어 먹었다.그러면서도 강수를 계속 흘겨봤다.커피 머신까지 없애버린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했다.“오빠.”대답이 없다.“차강수.”그제야 서류를 넘기던 손이 멈췄다.“왜.”“나 임신한 거지 환자 아니거든?”“알아.”“근데 왜 다 못 하게 해.”“뭘.”사라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구두 못 신게 하지. 커피 못 마시게 하지. 간식은 하루 종일 먹이지.”잠깐 생각하다 덧붙였다.“아침에 계단 내려갈 때 내 허리도 잡았지.”강수는 다시 서류를 넘겼다.“미끄러워.”“안 미끄러웠어.”“미끄러워.”사라가 기가 막혀 웃었다.저렇게 우기면 끝이었다.그때 책상 위 강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강수가 화면을 확인했다.정민이었다.“어.”잠깐 듣는다.“보내.”끝.사라가 딸기를 씹으며 물었다.“뭘 보내?”강수는 대답하지 않았다.잠시 후 사라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정민에게서 온 메시지였다.파일 하나를 열어본 사라의 눈이 점점 커졌다.산부인과 진료 일정.정기 검진 시기부터 받아야 할 검사까지 날짜별로 정리되어 있었다.“……뭐야, 이거.”강수는 태연했다.“병원.”“그건 나도 알아.”사라가 화면을 위아래로 내렸다.“이걸 왜 정민 오빠가 보내?”“내가 시켰어.”사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내 병원인데?”“어.”“내가 알아서 다닐 수 있는데?”“알아.”또 안다는 소리다.사라는 휴대전화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근데 왜 오빠가 다 해?”이번에는 강수의 시선이 올라왔다.“같이 갈 거니까.”사라의 입이 다물렸다.너무 당연하게 말해서 오히려 할 말이 없었다.“매번?”“어.”“오빠 바쁘잖아.”“빼면 돼.”“회의 있으면?”“옮겨.”“출장이면?”강수의 대답이 잠깐 늦었다.“안 잡아.”사라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차강수 일정 하나 움직이는 게 얼마나 큰 일인지 모를 리 없었다.해외 사업부터 CH건설, 그 뒤에 있는 사뇌파 일까지.그런 남자가 산부인과 진료 날짜에 맞춰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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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화

“서희한테…… 언제 말할 거야?”사라의 질문에 강수의 손이 멈췄다.잠깐의 침묵.“아직은 아니야.”사라가 눈을 깜빡였다.“아직?”“어.”강수는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임신 사실을 안 지 이제 며칠도 되지 않았다.사라조차 이제야 자기 배 안에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서희에게 말하는 순간 모든 게 움직인다.더는 되돌릴 수도, 잠시 멈춰 세울 수도 없었다.강수는 피할 생각이 없었다.다만 순서가 필요했다.사라와 아이가 먼저였다.병원에서 확인해야 할 것들.사라의 몸 상태.그리고 자신이 정리해야 할 것들까지.그걸 사라에게 하나하나 늘어놓지는 않았다.“내가 알아서 해.”사라가 가만히 바라봤다.예전 같으면 저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내가 알아서 해.혼자 결정하고 혼자 처리하겠다는 차강수 특유의 말.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들렸다.회피하는 얼굴이 아니었다.이미 뭔가를 정리하기 시작한 얼굴이었다.사라는 더 묻지 않았다.“알았어.”강수의 시선이 올라왔다.“오빠가 알아서 해.”그리고 딸기를 하나 더 입에 넣었다.우물우물 씹던 사라가 문득 자기 배를 내려다봤다.평평했다.여전히 신기했다.“근데 오빠.”“왜.”“얘 계속 애라고 부를 거야?”강수가 사라의 배를 봤다.“그럼.”“태명 지어야지.”“태명?”사라의 눈이 동그래졌다.“설마 몰라?”강수는 말이 없었다.정말 몰랐던 모양이다.사라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뱃속에 있을 때 부르는 이름 있잖아. 태명.”강수가 다시 배를 내려다봤다.“지어.”“같이 지어야지. 오빠 애 아니야?”“맞아.”사라는 의자를 끌어 강수 책상 옆에 바짝 붙었다.일은 이미 뒷전이었다.“뭐가 좋지?”강수는 서류를 봤다.“생각해.”“생각하고 있잖아.”“…….”“튼튼이?”강수의 미간이 미세하게 움직였다.“너무 흔해.”자기가 말하고 자기가 탈락시켰다.“복덩이?”이번에도 혼자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너무 옛날 사람 같아.”강수는 아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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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화

오전부터 회장실은 조용했다.강수는 책상에 앉아 결재 서류를 보고 있었고, 사라는 맞은편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렸다.테이블에는 오늘도 간식이 있었다.잘라놓은 사과와 크래커.사라가 크래커 하나를 집어 먹었다.“오빠.”“왜.”“뜬금이가 사과보다 이게 좋대.”강수의 시선이 잠깐 올라왔다.“네가 좋아하는 거겠지.”“뜬금이가 그렇다는데?”대꾸는 없었다.사라가 킥킥 웃으며 다시 노트북을 봤다.그때 강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화면을 본 강수의 손이 멈췄다.사라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평소와 조금 달랐다.강수는 몇 초 동안 화면만 내려다봤다.그리고 전화를 받았다.“네.”사라의 손이 멈췄다.존댓말.강수가 사적인 전화에서 저렇게 말하는 상대는 많지 않았다.“그래. 나다.”나이 든 여자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강수의 어머니였다.어릴 적 부모는 이혼했다.아버지의 폭력은 오래됐고 어머니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갔다.그날 어린 강수는 현관에서 어머니의 옷자락을 붙잡았다.가지 말라고.자기도 데려가 달라고.울면서 매달렸다.하지만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손을 하나씩 떼어냈다.그리고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강수에게 남은 건 폭력적인 아버지와 텅 빈 집이었다.아버지가 죽었을 때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강수는 혼자 장례를 치렀고.혼자 남은 짐을 짊어졌고.그렇게 컸다.성인이 된 뒤에도 먼저 찾아간 적은 없었다.두 사람을 다시 이어놓은 건 서희였다.결혼하고 그의 과거를 알게 된 서희가 몇 번이나 등을 떠밀었다.어머니도 많이 힘드셨을 거라고.용서까지는 못 해도 얼굴은 보고 살자고.그 등쌀에 강수는 가끔 어머니가 혼자 사는 시골집에 내려갔다.가서 밥 한 끼 먹고.필요한 것만 채워놓고.다시 올라오는 게 전부였다.“무슨 일 있으세요.”강수가 물었다.전화기 너머에서 어머니가 한참 뜸을 들였다.“내가 간밤에 꿈을 하나 꿨는데.”강수의 눈이 서류에서 떨어졌다.“큰 나무가 하나 있더라.”어머니의 목소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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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화

사라는 잠시 강수를 바라봤다.더 물어봐야 할 것 같기도 했다.하지만 지금 답이 나올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강수는 한번 입을 닫으면 억지로 벌린다고 열리는 사람이 아니었다.무엇보다 오늘은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사라의 시선이 책상 위 간식으로 내려갔다.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사라가 느닷없이 말했다.“오빠.”“왜.”“점심 뭐 먹어?”강수의 눈이 올라왔다.방금 전까지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사라는 이미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있었다.“나 먹고 싶은 거 생겼어.”“뭔데.”“전에 외국 바이어들이랑 갔던 한정식집 있잖아.”강수는 잠시 생각했다.“청담?”“응, 거기.”사라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떡갈비 먹고 싶어.”강수는 시계를 봤다.점심시간까지 아직 조금 남아 있었다.“가.”너무 바로 나온 대답에 사라가 눈을 깜빡였다.“지금?”강수는 이미 책상 위 서류를 덮었다.“먹고 싶다며.”“그렇긴 한데.”사라가 슬쩍 웃었다.“오빠 회의 없어?”“있어.”“근데?”강수는 휴대전화를 들었다.정민에게 전화가 연결됐다.“점심 회의 미뤄.”끝이었다.사라가 황당하게 쳐다봤다.“아니, 떡갈비 때문에 회의를 미루면 어떡해.”강수는 재킷을 집었다.“먹으러 가.”“차강수 진짜.”입으로는 뭐라 하면서도 사라는 벌써 신이 났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음식 이름만 들어도 속이 묘했다.좋아하던 떡볶이도.냉면도.고기도 몇 점 먹지 못했다.그랬던 입맛이 돌아온 뒤부터는 반대였다.뭐 하나 생각나면 꼭 먹고 싶었다.오늘은 아침부터 이상하게 달큰하고 짭짤한 떡갈비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사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수를 따라갔다.그러다 문 앞에서 자기 발을 내려다봤다.오늘도 운동화였다.“나 언제까지 이것만 신어?”강수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계속.”“싫어.”“그럼 낮은 거.”“내 구두들 다 울겠다.”강수는 문을 열었다.“놔둬.”사라가 그의 등을 노려보다 뒤따라 나갔다.“뜬금아. 아빠 때문에 엄마 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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