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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불온한 정착: Chapter 21 - Chapter 30

322 Chapters

21화

인천 외곽의 낡은 폐창고 앞에 검은 세단이 멈춰 섰다.차에서 내린 강수는 녹슨 철문 너머를 한동안 바라봤다. 죽었다던 놈이 살아 있다는 정민의 보고를 듣고도 별다른 표정 변화는 없었다. 다만 회사에서 직원들을 내려다보던 CH건설 회장의 눈은 사라지고, 수십 년간 사뇌파의 꼭대기를 지켜온 남자의 서늘한 눈빛만 남아 있었다.덕배가 먼저 철문을 밀어 열었다.안에는 하 부장과 낯선 남자 넷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구석에는 분명 죽었다던 조직원이 멀쩡히 서 있었다.강수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죽었다며.”“죄송합니다, 형님.”“뭐가.”하 부장이 마른침을 삼켰다.“이렇게라도 해야 형님을 직접 뵐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덕배가 헛웃음을 흘렸다.“이 새끼가 아주 돌았네.”강수의 시선은 하 부장에게서 벗어나지 않았다.“삼십억.”하 부장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그 작은 반응 하나로 충분했다.“네가 했네.”“형님, 제 말 좀 들어보십시오.”“누가 시켰어.”낮고 평온한 목소리에 오히려 하 부장의 얼굴이 굳어졌다.그때 창고 밖에서 차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곧이어 철문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회장님!”강수의 미간이 단숨에 구겨졌다.“……민사라.”사라는 한 손에 휴대전화를 들고 성큼성큼 들어왔다.“이거 놓고 갔잖아요. 급하게 나가더니 업무용 폰을 두고 가면 어떡해요?”“너 여기 어떻게 왔어.”“그건 나중에. 자요.”주변에 서 있는 험상궂은 남자들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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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강수만에 봐서요?” 사라는 턱을 잡힌 채 눈만 위로 굴려 강수를 올려다봤다. 강수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뭐?” “혼자 따라오지 말라면서요. 회장님만 있으면 따라와도 되냐고.” “그 말이 그렇게 들려?” “네.” 대답은 망설임도 없었다. 강수는 잠시 말없이 사라를 내려다보다 손을 놓았다. 목 옆으로 난 상처는 다행히 깊지 않았다. 가느다란 붉은 선을 따라 맺혔던 피도 어느새 멎어 있었다. “병원부터 가.” “이걸로 무슨 병원을 가요. 밴드 붙이면 되지.” “민사라.” “멀쩡하다니까요.” 사라는 오히려 목을 좌우로 돌려 보이더니 아무렇지 않게 강수의 손에 업무용 휴대전화를 쥐여주었다. 그사이 창고 안에서는 덕배와 정민이 남은 일을 정리하고 있었다. 하 부장의 휴대전화와 장부, 외부에서 끌어들인 놈들까지 확인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강수는 창고 안을 한번 돌아본 뒤 정민에게 말했다. “여긴 너희가 정리해.” “형님은요?” “회사 간다.” 덕배가 강수 옆에 서 있는 사라를 보더니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이쁜이 데려다주게요?” 강수의 시선이 날아왔다. “입 닥치고 일해.” “예, 형님.” 덕배는 대답하면서도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사라는 먼저 자신이 끌고 온 차로 향했다. 운전석 문을 열려는데 뒤따라온 강수가 차 키를 빼앗았다. “제가 운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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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며칠 뒤. 늦은 밤, 서울 시내의 한 호텔 객실에는 침대 옆에 켜둔 작은 조명만 희미하게 번지고 있었다. 바닥에는 급하게 벗어놓은 옷가지가 흐트러져 있었고,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있던 정민은 한동안 말없이 휴대전화를 내려다봤다. 평소와 다른 침묵을 먼저 알아챈 건 사라였다. “왜요?” “우리 이제 그만하죠.” 사라가 눈을 들었다. 놀라지도, 기분 나빠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유가 궁금하다는 얼굴이었다. “갑자기?” “여자친구가 눈치채는 것 같습니다.” “아.” 짧은 대답이 전부였다. 정민은 오히려 그 반응에 사라를 바라봤다. 몇 번이나 같은 호텔방에 들어왔고 서로의 사적인 영역까지 공유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처음부터 연애라는 이름이 붙은 적이 없었다. 보고 싶다는 연락도, 누구와 있는지 묻는 간섭도 없었다. 필요할 때 만나고 돌아서면 각자의 생활로 돌아가는 것. 그게 둘 사이에 암묵적으로 정해진 전부였다. “알겠어요.” 사라가 너무 쉽게 대답하자 정민의 눈썹이 올라갔다. “끝입니까?” “그럼 울어요?” “섭섭하긴 할 줄 알았죠.” “여자친구랑 헤어지고 저랑 만나겠다는 것도 아닌데 뭐가 섭섭해요.” 사라는 침대 옆에 놓인 생수병을 집어 한 모금 마셨다. 그러다 문득 객실을 둘러보더니 테이블 위에 놓인 숙박 영수증으로 시선이 갔다. “근데 돈 아깝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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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왜요?” 강수와 눈이 마주친 사라가 먼저 물었다. 회장실로 들어가려던 강수의 걸음이 멈췄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이유를 묻는 얼굴에는 찔리는 구석 하나 없었다. 그 옆에 앉은 정민 역시 평소와 다름없이 오전 일정을 확인하고 있었다. 강수의 시선이 두 사람 사이를 한번 훑었다. “뭐가.” “방금 저 쳐다봤잖아요.” “보면 안 되냐.” “아뇨. 너무 빤히 보길래.” 사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책상 서랍을 열었다. 안쪽을 뒤적이더니 작은 밴드 하나를 꺼내 목에 붙이려 했다. 며칠 전 칼끝에 스쳤던 상처였다. 거울도 보지 않고 대충 붙이려는 탓에 밴드는 상처와 엉뚱한 곳에 붙었다. 강수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게 거기냐.” “네?” “상처.” 사라가 손끝으로 목을 더듬었다. “여기 아니에요?” “반대.” “아.” 사라는 아무렇지 않게 밴드를 떼었다. 강수는 그 모습을 잠시 내려다보다 회장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사라는 다시 정민에게 몸을 돌렸다. “실장님, 붙여줘요.” 정민이 밴드를 받아 들었다. “고개 좀 돌리세요.” 사라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겼다. 정민은 목에 남은 가느다란 상처 위로 밴드를 반듯하게 붙여주고 손을 뗐다. “됐습니다.” “역시 손재주 좋아.” “밴드 하나 붙이는 데 무슨 손재주가 필요합니까.” “저는 방금 실패했잖아요.” 사라는 만족스럽게 목을 한번 만지더니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둘 사이에는 어젯밤 호텔에서 관계를 끝냈다는 흔적도, 어색함도 없었다. 사라는 정말 아무렇지 않았고 정민 역시 사적인 감정을 회사까지 끌고 오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평소 같았다. 회장실 안에서 서류를 펼치던 강수의 손이 멈췄다. 유리 너머로 정민이 사라의 목에 밴드를 붙여주는 모습이 보였다. 별것 아닌 행동이었다. 비서실장과 보조 비서. 다친 곳에 밴드 하나 붙여준 것뿐이었다. 강수는 다시 서류로 눈을 내렸다. 그런데 글자가 좀처럼 들어오지 않았다. 잠시 후 노크 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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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둘이요?” 사라의 눈이 동그래지자 강수는 잠깐 말을 멈췄다. 자신이 먼저 저녁을 먹자고 해놓고도 그 질문을 받고서야 말이 하나 빠졌다는 걸 알아차린 얼굴이었다. “서희도.” “아.” 사라는 길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또 둘이 데이트하자는 줄 알았네.” “미쳤냐.” “왜요? 회장님 정도면 데이트 한 번 해줄 수 있는데.” 농담을 던진 사라는 아무렇지 않게 웃었지만 강수의 눈썹은 미세하게 꿈틀했다. 며칠 전 칼을 목에 대고도 태연하던 여자답게 말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더구나 상대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의 남편이었다. 사라에게는 그저 장난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강수는 이상하게 그 말을 한 번 더 곱씹었다. “일이나 해.” “네, 회장님.” 사라가 문을 닫고 나가자 강수는 한동안 손에 든 서류를 넘기지 않았다. 그러다 별것 아니라는 듯 휴대전화를 집어 서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녁 약속은 그렇게 셋이 되었다. 퇴근 후 강수가 예약한 한식당 별실에는 서희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사라를 보자 반갑게 손을 흔든 서희는 곧바로 목에 붙은 밴드를 발견했다. “사라야, 목은 괜찮아?” “응. 이거 진짜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도 흉지면 어떡해.” 서희의 손끝이 조심스럽게 밴드 가장자리를 만졌다. 사라는 그런 친구의 손을 잡아 내리며 웃었다. “나 원래 튼튼해.” 맞은편에 앉은 강수는 물을 마시며 두 사람을 바라봤다. 서희는 그날 창고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사라가 업무 중 작은 사고를 당했다는 정도로만 들었고, 사라 역시 굳이 설명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음식이 들어오자 분위기는 금세 평범해졌다. 서희가 강수의 앞접시에 갈비를 덜어주자 강수는 자연스럽게 가시를 발라낸 생선을 서희 쪽으로 밀어줬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아는 부부의 익숙한 손길이었다. 사라는 그 모습을 보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둘이 되게 잘 산다.” “갑자기?” “그냥. 보기 좋다고.” “부러워?” “전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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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잠시 후 회장실 문이 열렸다. 사라는 한 손에 먹다 만 과자를 든 채 안으로 들어왔다. 입안에 남은 걸 급히 씹어 삼키면서도 다른 손에는 메모장과 펜을 야무지게 챙겨 들고 있었다. “부르셨어요?” 강수는 대답 대신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턱짓했다. “봐.” “뭘요?” “일본어 잘한다며.” 사라가 서류를 집어 들었다. “시험 보는 거예요?” “보면 알아.” 사라는 소파에 앉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첫 장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던 얼굴이 두 번째 장을 넘기면서 조금씩 진지해졌다. 평소 장난기 가득하던 눈빛도 사라졌다. 정민이 일본 거래처에서 보내온 메일을 함께 내밀었다. “계약서 수정안도 같이 보세요.” “네.” 회장실이 조용해졌다. 사라는 메일과 계약서를 번갈아 읽으며 중요한 부분에 표시했다. 강수는 그런 사라를 말없이 바라봤다. 일본어를 조금 한다기에 여행 다니면서 익힌 회화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읽는 속도부터 예상과 달랐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사라가 서류를 내려놓았다. “이거 우리 쪽에 불리한데요.” 정민이 눈을 들었다. “어떤 부분이요?” “납품 일정만 바꾼 것처럼 보이는데 책임 범위도 슬쩍 건드렸어요.” 사라가 계약서 한쪽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요. 일정 변경 때문에 발생하는 추가 비용을 사실상 우리 쪽에서 부담하게 해놨어요. 그리고 이 문장은 애매하게 써놨는데, 현지에서 문제 생기면 책임을 CH 쪽으로 넘길 수도 있어요.” 정민이 표시된 부분을 다시 확인했다. 이미 법무팀에서 검토 중인 내용이었다. 그런데 사라는 몇 분 만에 문장 안에 숨겨진 조건부터 찾아냈다. 강수가 물었다. “확실해?” “네.” 사라는 바로 대답했다. “일본 계약서가 원래 표현을 좀 돌려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건 일부러 애매하게 만든 것 같아요.” “회화는?” “해요.” “비즈니스 회화.” 사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저 지금 무시해요?” “묻잖아.” “전화해봐요?” 강수의 눈썹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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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사라가 회장실을 나간 뒤에도 강수의 시선은 한동안 유리벽 너머에 머물렀다. 일본 측과는 납품 일정과 비용 부담, 현지 공정까지 얽혀 있었다. 수정 계약서만으로 끝내기엔 금액도 컸다. 정민이 태블릿으로 일정을 확인했다. “가장 빠르면 다음 주 화요일 출국 가능합니다. 일본 측에서도 그날 오후부터 미팅 가능하다고 합니다.” “인원은.” “저하고 해외사업팀 박 부장, 통역 한 명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강수는 대답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원래라면 전문 통역을 붙이는 게 맞았다. 그러나 계약 문구의 차이까지 짚어내며 일본 담당자를 상대하던 사라가 떠올랐다. “통역 잡지 마.” 정민이 눈을 들었다. “그럼?” “민사라 데려가.” 그날 오후부터 일본 출장 준비가 시작됐다. 아무것도 모르던 사라는 정민이 넘긴 일본 거래처 자료를 받아 들고 눈을 깜빡였다. “이걸 제가 왜 봐요?” “다음 주 일본 출장 자료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왜 제가…….” 정민이 태연하게 말을 잘랐다. “사라 씨도 갑니다.” 입을 벌린 사라가 몇 초 동안 그대로 굳었다. “저 일본 가요?” “네.” “진짜?” “회장님 지시입니다.” 그제야 사라의 얼굴이 환해졌다. “출장비 회사에서 다 내줘요?” “출장이니까 당연하죠.” “호텔도?” “네.” “밥도?” 정민이 안경도 쓰지 않았는데 관자놀이를 누르고 싶은 표정을 지었다. “놀러 가는 거 아닙니다.” “알아요. 일하러 가는 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입꼬리가 내려오지 않았다. 사라는 자료를 품에 끌어안고 곧장 회장실로 향했다. 노크 두 번 뒤 문이 열렸다. “회장님.” 강수가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 “왜.” “저 일본 데려가요?” “정민이한테 들었잖아.” “왜 저를요?” “일본어 한다며.” “그건 맞는데 전문 통역도 있잖아요.” 강수가 펜을 내려놓았다. “전문 통역이 계약서 문제까지 찾아내진 않아.” 사라의 표정이 아주 잠깐 멈췄다. 칭찬인지 아닌지 애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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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일본 측에서 민사라의 협상 참석을 요청했다는 말에 강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이번 출장에 사라를 데려가기로 결정한 뒤였다. 다만 상대 측에서 먼저 그녀를 지목했다는 건 예상 밖이었다. “이유는.” 정민이 메일을 다시 확인했다. “오늘 통화한 담당자가 민사라 씨를 높게 평가한 것 같습니다. 계약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고 의사소통도 빠르니 가능하면 같은 담당자가 참석했으면 좋겠답니다.” 강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진행해.” “출장 인원은 회장님, 저, 박 부장, 민사라 씨까지 네 명으로 잡겠습니다.” “그래.” 다음 날 아침. 출근한 사라의 책상 위에는 일본 출장 일정표가 놓여 있었다. 파일을 펼친 그녀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2박 3일?” “네.” 정민이 대답했다. “짧다.” “출장입니다.” “일본까지 가는데 관광도 못 하고?” “놀러 가는 게 아니라니까요.” 사라는 아쉬운 얼굴로 일정을 살폈다. 첫날 도착하자마자 현지 지사 미팅, 둘째 날 오전 거래처 협상과 현장 방문, 마지막 날 추가 협의 후 귀국까지 빽빽했다. “온천도 못 가겠네.” “시간 나면 혼자 가세요.” “실장님 같이 가요.” “싫습니다.” “왜요?” “사라 씨랑 쉬는 시간까지 붙어 있고 싶진 않습니다.” 사라가 피식 웃었다. “우리 이제 안 자니까 철벽 치는 거예요?” 정민의 손이 멈췄다. “회사에서 그런 말 좀 하지 마세요.” “아무도 없잖아요.” “벽 너머에 회장님 계십니다.” 사라가 유리벽을 힐끗 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들으면 어때요. 우리 잔 것도 모르는데.” 정민은 대꾸하지 않고 출장 서류를 그녀 앞으로 밀었다. “일이나 하세요.” 그날 사라는 일본 측에서 보내온 자료를 다시 정리했다. 단순 통역만 맡을 생각은 없는 듯 계약 조건과 현지 공정 자료까지 파고들었고, 오후가 되자 정민의 책상 위에는 사라가 직접 정리한 예상 질문과 답변까지 올라왔다. 강수도 그 자료를 받아봤다. 첫 장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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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일본 출장을 하루 앞둔 오후, CH건설 비서실은 평소보다 분주했다. 정민은 국내에 남아 있는 일정까지 조정하느라 계속해서 전화를 받았고, 사라는 일본 측에서 마지막으로 보내온 수정 계약서와 기존 자료를 나란히 펼쳐놓고 있었다. 계약 조건은 상당 부분 조율됐지만 현지 운송비와 공정 지연에 따른 책임 범위는 여전히 애매하게 남아 있었다. “여기 또 말 바꿨네.” 사라가 모니터를 향해 중얼거렸다. 정민이 통화를 끝내고 돌아봤다. “어디요?” “현지 운송비요. 자기들이 부담한다고 해놓고 조건 하나 붙였어요. 일정 바뀌면 다시 협의한다고.” “결국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놓은 거네요.” “그러니까요.” 사라는 해당 부분에 표시하고 일본어로 짧은 메모를 달았다. 처음 출장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호텔과 음식, 온천부터 묻던 여자였지만 막상 업무가 시작되자 누구보다 꼼꼼했다. 회장실에서 나온 강수가 두 사람 앞에 멈췄다. “준비 끝났어?” “거의요.” 사라가 서류를 내밀었다. “이거 내일 꼭 다시 확인해야 돼요. 현장에서 말 바꿀 수도 있어요.” 강수가 표시된 부분을 훑었다. “알았어.” “그리고 저 창가 자리 주세요.” 강수의 눈이 서류에서 떨어졌다. “뭐?” “비행기요. 저 창가 좋아해요.” “정민한테 말해.” “실장님이 자리 없대요.” 정민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늦게 말했잖습니까.” 사라가 억울한 얼굴로 강수를 바라봤다. “회장님 자리 창가죠?” “그래서.” “바꿔줘요.” “싫어.” 단호한 대답에 사라가 입을 삐죽였다. “치사한 들소.” “회사다.” “치사한 회장님.” 강수는 기가 막힌 듯 사라를 한번 바라보다 회장실로 돌아갔다. 퇴근 후 사라는 서희에게 불려 강수의 집으로 향했다. 거실에는 작은 여행용 가방이 펼쳐져 있었다. 서희는 강수의 셔츠와 넥타이, 필요한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해 넣고 있었다. “넌 출장 가는 사람이 왜 이렇게 빈손으로 왔어?” “내 건 집에서 싸면 되지.” 사라는 소파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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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창가 자리 내놔요.” 사라가 당당하게 손을 내밀자 강수는 탑승권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아침부터 캐리어를 끌고 뛰어와 숨까지 헐떡이는 주제에 남의 자리부터 탐내는 모습이 기가 막혔다. “싫어.” “저 비행기 타면 창밖 보는 거 좋아해요.” “그래서.” “회장님은 맨날 타잖아요. 전 오랜만이고.” “네 자리 가.” 강수는 그대로 출국장으로 걸어갔다. 사라는 포기하지 않고 캐리어를 끌며 졸졸 따라붙었다. “회장님.” “왜.” “들소.” “회사다.” “지금 공항인데?” 강수의 걸음이 멈췄다. 뒤따라오던 정민이 고개를 돌려 웃음을 삼켰고, 박 부장은 두 사람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눈치만 살폈다. 결국 비행기가 이륙할 때 창가에 붙어 앉은 건 사라였다. 강수는 제 자리를 빼앗긴 채 옆자리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 사라는 창문 밖으로 작아지는 도시를 내려다보며 연신 감탄하다가 구름 위로 올라오자 휴대전화까지 꺼내 사진을 찍었다. “예쁘죠?” “어.” “안 봤잖아요.” “봤어.” “서류 봤잖아.” 강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조용히 안 해?” “출장 가는데 왜 이렇게 예민해.” “누구 때문에.” 사라는 피식 웃더니 이번에는 기내식을 기다렸다. 음식이 나오자 강수의 디저트까지 자연스럽게 가져갔다. “그건 왜 가져가.” “회장님 단 거 안 좋아하잖아요.” “내가 준다고 했냐.” “남의 게 더 맛있다니까.” 언젠가 똑같은 말을 들었던 기억에 강수는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일본에 도착한 뒤부터 분위기는 달라졌다. 현지 지사 직원들이 마중 나와 있었고, 사라는 차에 오르자마자 일본 측에서 보내온 수정안을 다시 확인했다. 조금 전까지 창가 자리와 디저트를 두고 떠들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첫 일정은 현지 지사 회의였다. 사라는 강수와 일본 담당자 사이에서 단순히 말을 옮기는 데 그치지 않았다. 상대가 애매하게 돌려 말하는 부분은 정확한 의미를 확인했고, 운송비 이야기가 나오자 준비해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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