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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Author: 서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8 21:25:46

인천 외곽의 낡은 폐창고 앞에 검은 세단이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강수는 녹슨 철문 너머를 한동안 바라봤다. 죽었다던 놈이 살아 있다는 정민의 보고를 듣고도 별다른 표정 변화는 없었다. 다만 회사에서 직원들을 내려다보던 CH건설 회장의 눈은 사라지고, 수십 년간 사뇌파의 꼭대기를 지켜온 남자의 서늘한 눈빛만 남아 있었다.

덕배가 먼저 철문을 밀어 열었다.

안에는 하 부장과 낯선 남자 넷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구석에는 분명 죽었다던 조직원이 멀쩡히 서 있었다.

강수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죽었다며.”

“죄송합니다, 형님.”

“뭐가.”

하 부장이 마른침을 삼켰다.

“이렇게라도 해야 형님을 직접 뵐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덕배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 새끼가 아주 돌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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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온한 정착   184화

    강수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서희가 원하는 건 주소 하나였다. 알려주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이미 관계도 들켰고, 따로 지내는 집이 있다는 사실까지 말한 뒤였다. 그러나 그곳의 위치를 알려주는 건 강수에게 전혀 다른 문제였다.그 집에는 사라가 있었다.자신이 돌아가는 곳이었고, 지난 일 년 동안 두 사람의 생활이 차곡차곡 쌓인 공간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높은 수납장 앞에서 초코볼을 내려놓으라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여자까지.강수가 짧게 말했다.“나중에.”서희의 미간이 좁아졌다.“왜 나중에?”강수는 대답하지 않았다.“주소 하나 알려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오늘은 안 돼.”“왜?”또 침묵이었다.서희는 그 침묵을 바라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아까부터 똑같았다. 사라를 만나겠다고 하면 안 된다고 했고, 집을 알려달라고 하면 대답을 피했다.자신에게서 사라를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었다.이제는 감출 것도 없었다.지키고 있는 거였다.그 생각이 드는 순간 서희의 얼굴이 굳었다.“알겠어.”강수의 눈이 움직였다.서희는 소파 위에 놓아둔 자신의 휴대전화를 집었다.“오빠가 말 안 해주면 사라한테 물어보면 되지.”강수의 눈빛이 단번에 가라앉았다.“하지 마.”서희는 이미 연락처를 찾고 있었다.“왜? 사라는 내 친구야. 내가 사라한테 전화하는 것까지 오빠 허락받아야 해?”“김서희.”낮게 떨어진 이름에도 서희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사라와는 오랫동안 친구였다. 전화번호를 찾을 필요조차 없었다. 최근 통화 목록에도 이름이 남아 있었다.서희가 그대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연결음이 울렸다.한 번.두 번.강수가 움직였다.몇 걸음 되지 않는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서희가 반응하기도 전에 큰 손이 휴대전화를 가져갔다.“오빠!”강수는 화면을 확인하고 그대로 통화를 종료했다.사라가 받기 전이었다.거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서희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강수를 바라봤다.“지금 뭐 하는 거야?”강수는 휴대전화를

  • 불온한 정착   183화

    “어.”대답은 너무 빨랐다.생각할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다는 듯 떨어진 한마디에 오히려 서희가 말을 잃었다. 조금이라도 망설이거나, 오늘만은 여기 있겠다고 할 줄 알았던 기대가 없었다면 거짓말이었다.강수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이미 돌아갈 곳을 정해둔 사람처럼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주방에서 몸을 돌렸다. 그 움직임을 바라보던 서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침실 쪽으로 향했다.“……짐은?”강수가 멈췄다.“안 챙겨?”“필요 없어.”“옷도 있잖아.”“됐어.”정말 그뿐이었다.강수에게 이 집에 남아 있는 물건은 이제 꼭 필요한 것들이 아니었다. 자주 입는 셔츠와 양복은 이미 사라와 지내는 집에 있었고, 시계와 구두, 업무에 필요한 서류까지 하나둘 옮겨간 지 오래였다. 처음부터 계획하고 짐을 뺀 것은 아니었다.하룻밤 자고 출근하기 위해 셔츠를 가져다 놓았다.다음에는 구두가 생겼고, 며칠 뒤에는 양복이 걸렸다. 집에서도 처리할 일이 있다는 이유로 서류를 가져다 놓으면서 사라에게 주겠다고 했던 방 하나가 자신의 서재가 됐다.그러다 어느 순간 그곳에서 생활하기 위해 이 집으로 물건을 가지러 올 필요가 없어졌다.없는 게 필요하면 새로 사면 그만이었다.강수에게 돈으로 다시 살 수 있는 물건들은 애초에 붙잡고 있을 이유가 되지 못했다.서희의 눈이 천천히 흔들렸다.“아예 거기서 살고 있었구나.”강수는 부정하지 않았다.낮에 두 사람을 봤을 때부터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강수의 입을 통해 확인하는 것은 전혀 달랐다.사라에게 집을 사줬다.그 집에 강수의 옷이 있다.생활에 필요한 물건도 있다.그리고 오늘 밤에도 다시 그곳으로 간다.그 사실들을 하나씩 이어놓자 ‘만난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모양이 만들어졌다.둘은 이미 함께 살고 있었다.서희는 자신의 앞을 지나 현관으로 향하는 강수를 바라봤다.이상하게도 강수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강수 자신도 그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편했다.서희가 상처받는 것이

  • 불온한 정착   182화

    강수는 대답하지 못했다.서희가 사라를 만나면 안 되는 이유를 말로 꺼내는 순간, 자신이 누구부터 보호하려 하고 있는지가 너무 선명해질 것 같았다. 서희가 사라를 해칠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강수는 서희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화가 난다고 상대에게 함부로 상처를 주거나 감정을 쏟아내는 여자가 아니었다.그런데도 싫었다.서희가 사라를 찾아가는 것도, 둘이 마주 앉아 자신 때문에 상처를 주고받는 것도.무엇보다 사라가 어떤 얼굴을 할지 알고 싶지 않았다.강수가 굳은 얼굴로 서 있는 사이, 바지 주머니 안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이 시간에 연락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확인한 강수의 눈이 멈췄다.사라메시지가 연달아 올라와 있었다.초코볼이 손에 안 닿아!곧바로 하나가 더 왔다.의자 해도 왜 안 닿는지 이유를 말해볼래?강수의 미간이 좁아졌다.며칠 전 일이 바로 떠올랐다.저녁을 먹고도 뭔가 먹고 싶다며 주방을 뒤지던 사라가 초코볼 한 봉지를 발견했었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면서 하나씩 집어 먹기 시작하더니 손이 한 번도 쉬지 않았다. 처음에는 내버려뒀던 강수도 봉지가 절반 가까이 비었을 때 결국 옆으로 손을 뻗었다.사라는 순순히 주지 않았다.봉지를 품에 끌어안고 몸까지 반대쪽으로 틀었다.“내 거야.”“그만 먹어.”“싫어.”“내놔.”“내가 샀거든?”강수는 대꾸하지 않고 봉지를 빼앗았다. 체격 차이가 워낙 커 사라가 두 팔로 붙잡고 버텨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반 봉지쯤 남은 초코볼을 든 채 일어난 강수를 사라가 소파에서 올려다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진짜 뺏어?”“어.”“나 스물다섯 살이야.”“알아.”“스물다섯 살 성인의 간식을 왜 오빠가 뺏어?”강수는 그대로 주방으로 갔다.뒤에서 사라가 따라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평범한 찬장에 넣어두면 다시 찾아 먹을 게 뻔했다. 잠시 주방을 둘러본 강수는 가장 높은 수납장 문을 열어 안쪽 깊숙한 곳에 봉지를 올려놓았다

  • 불온한 정착   181화

    강수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얼마나 먼 미래를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사라에게조차 그런 약속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한곳에 머무는 여자가 아니었고, 누군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제 삶의 방향을 바꾸는 사람도 아니었다.그래서 강수는 사라에게 끝을 정해달라고 한 적도 없었다.다만 떠나려 할 때마다 붙잡았다.“사라가 허락하는 데까지.”서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뭐?”“걔가 가는 데까지.”짧고 낮은 대답이었다.서희는 한동안 강수를 바라봤다. 평생 함께하겠다거나 사라와 새 가정을 꾸리겠다는 말보다 이상하게 더 깊게 박혔다.차강수는 원래 누군가의 허락을 구하는 남자가 아니었다.원하는 게 있으면 가졌고, 결정하면 움직였다. 회사에서도, 자신의 세계에서도 다른 사람이 강수의 방향을 정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그런 남자가 사라에게만 선택권을 두고 있었다.“사라가 떠난다고 하면?”강수의 턱이 미세하게 굳었다.“잡아.”“그래도 간다고 하면?”잠깐의 침묵이 흘렀다.“또 잡아.”서희의 입술이 떨렸다.“끝까지?”강수는 더 대답하지 않았다.그러나 서희는 이미 충분히 들었다.사라가 강수에게 얼마나 깊이 들어와 있는지 이제는 굳이 사랑이라는 단어로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다. 낮에 봤던 행동도, 조금 전 자신이 집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사람의 이름부터 대답했던 것도 전부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그러면서 나랑은 안 헤어지겠다는 거야?”강수의 시선이 무겁게 내려앉았다.“그 말 안 했어.”서희가 숨을 멈췄다.강수는 더 붙이지 않았다.서희가 헤어질 생각이 없다고 말했을 때 자신은 알겠다고 하지 않았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에 시간을 준 것뿐이었다.그 차이를 서희도 뒤늦게 알아차렸다.“그럼 당신은…….”말끝이 흐려졌다.“나랑 헤어질 생각이야?”이번에는 침묵이 길었다.강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의 생활을 영원히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서희에게 남편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사라가 있는 집으로

  • 불온한 정착   180화

    “사라.”서희의 눈이 멈췄다.잠시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청담동 어디냐고, 두 사람이 지내는 집의 위치를 묻고 있었다. 아파트 이름이나 주소가 돌아올 거라 생각했던 질문에 강수는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뭐?”강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내 집.”짧은 두 글자가 뒤늦게 의미를 만들었다.서희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강수에게 집은 오래도록 별 의미가 없는 장소였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아버지가 있는 집은 돌아가고 싶은 곳이 아니었고, 어머니가 떠난 뒤에는 더더욱 그랬다. 돈을 벌고 조직을 키운 뒤에는 어디든 자신이 원하는 공간을 가질 수 있었지만 그저 자고, 씻고, 옷을 갈아입는 장소에 가까웠다.서희와 결혼하고 처음으로 달라졌었다.둘이 살 집을 직접 마련했고, 서희가 좋아할 만한 것으로 채웠다. 퇴근하면 돌아왔고 아침이면 같은 식탁에 앉았다. 그것이 자신이 선택한 정착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또 달라졌다.사라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처음에는 산속의 별장이었고, 그다음에는 자신이 사준 청담동의 아파트였다. 집이 작다는 핑계로 더 넓은 곳을 골랐지만 정작 그 공간을 채우기 시작한 건 강수 자신이었다.셔츠 한 장.구두 한 켤레.시계와 서류.그러다 양복이 늘고, 자신의 물건을 둘 방이 생겼다. 사라에게 주겠다고 했던 방은 어느새 자신의 서재가 되었고 아침에 눈을 뜨면 사라가 냉장고를 뒤지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그곳이어서 돌아간 게 아니었다.사라가 있어서 돌아갔다.“주소 말고.”강수의 목소리가 낮게 내려앉았다.“내가 돌아가는 데.”서희의 눈가가 다시 붉어졌다.“그게…… 사라라고?”“어.”망설임조차 없었다.그 대답이 서희의 가슴을 그대로 후벼 팠다.“그럼 나는?”강수의 눈빛이 무거워졌다.서희는 웃으려 했지만 입술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여기는 뭐였는데?”거실을 둘러봤다. 둘이 고른 가구가 있었고 함께 찍은 사진도 있었다. 결혼하고 처음 들여놓은 식탁도, 강수가 서희를 위해 고른 침실도 그대

  • 불온한 정착   179화

    강수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서희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는 알았다. 호텔이나 잠깐 머무는 장소가 있는지를 묻는 게 아니었다. 일 년 가까이 이어진 관계라면 두 사람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공간도 있을 거라는 생각까지 닿은 것이다.“있어.”서희의 손끝이 굳었다.“어디?”“청담동.”같은 동네였다.자신과 강수가 사는 이 집도 청담동이었다. 그 사실이 서희에게는 이상할 만큼 잔인하게 느껴졌다.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닌 같은 동네 어딘가에 자신이 모르는 강수의 생활이 하나 더 있었다.“사라 집이야?”강수는 서희를 바라보다 짧게 대답했다.“내가 샀어.”서희의 숨이 멎었다.잠깐 만나는 관계였다면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강수에게 돈은 큰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집은 달랐다. 더구나 낮에 봤던 두 사람의 익숙한 모습까지 겹치자 그곳이 단순히 사라에게 사준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당신도 거기서 지내?”“어.”그제야 강수가 집에 들어오는 날이 줄어든 이유까지 정확해졌다.출장이 아니었던 밤.늦는다고 했던 날.자신이 혼자 잠들었던 수많은 시간 동안 강수는 사라에게 돌아갔다.서희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더 울고 싶지 않았지만 눈가는 이미 젖어 있었다.“왜 사라야?”강수의 눈이 서희에게 향했다.“세상에 여자가 그렇게 많은데 왜 하필 사라야.”이번 질문에는 원망보다 이해할 수 없다는 마음이 더 컸다. 자신과 전혀 다른 여자. 한곳에 오래 머무는 것조차 답답해하고, 생각한 것을 그대로 말하며, 누구에게도 자기 삶을 맞추지 않는 여자였다.자신이 누구보다 잘 아는 친구였다.강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처음에는 자신도 몰랐다.사라가 왜 자꾸 눈에 밟히는지.겁을 먹어야 할 순간에도 자신을 똑바로 쳐다봤고, 마음대로 움직이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자신이 왜 그래야 하느냐고 물었다. 좋아한다고 해서 받아줘야 할 이유도 없고, 자신이 싫다고 해서 제 마음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던 여자였다.잡으면 빠져나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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