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소리 없이 말하는 이별 / Chapter 1 - Chapter 10

All Chapters of 소리 없이 말하는 이별: Chapter 1 - Chapter 10

11 Chapters

제1화

눈앞의 스테이크를 밀어냈다. 더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이들에게 맞춰 주고 싶지 않았다.내가 일어서자 강지환도 서둘러 몸을 일으켜 무슨 일이냐고 수어로 물었다.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말했다."시간이 늦었네. 난 집에 가서 쉴게."강지환이 따라나서려 하자 친구들이 붙잡았다."몸도 안 좋다는데 푹 쉬게 해 줘. 너까지 벌써 가려고?""그러게. 서윤이 곧 온다잖아. 하루 못 봤는데 보고 싶지도 않아?"딸도 강지환의 소매를 당겼다."아빠, 나 서윤 이모 보고 싶어. 엄마 따라 안 가면 안 돼?"강지환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내 표정이 달라지지 않은 걸 보고서야 미간을 찌푸렸다."채원 앞에서 서윤 얘기 하지 마.""왜? 엄마는 안 들리잖아."딸의 말을 듣고 나는 강지환을 다시 의자에 앉혔다."혼자 가도 돼. 너희는 더 있다 와."그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붙잡을 틈조차 주지 않았다.문밖으로 나와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차서윤이 빠른 걸음으로 홀에 들어오는 게 보였다.일부러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몸이 휘청했다.별실로 들어간 차서윤은 두 팔을 내미는 딸을 익숙하게 안아 올렸다."채아야, 하루 못 봤는데 이모 보고 싶었어?""그럼요!"차서윤이 작게 웃었다."그럼 상 줘야지."딸은 곧장 차서윤의 얼굴을 감싸고 뽀뽀했다.너무나 익숙한 모습이었다.'누가 보면 저 둘이 친모녀인 줄 알겠다.'딸을 내려놓은 차서윤이 이번에는 강지환을 끌어안고 눈웃음을 쳤다.강지환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내게는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표정이었다.입을 열기도 전에 차서윤이 발뒤꿈치를 들고 입을 맞췄다. 뜨겁고 깊은 입맞춤이었다."야, 됐다. 벌써 몇 달째면서 아직도 그렇게 좋아?"친구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딸도 익숙하다는 듯 재미있게 구경하고 있었다.가슴 한구석이 싸늘하게 식었다.'두 사람이 진작부터 그런 사이였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구나. 나만 몰랐던 거구나.'놀리는 소리에 차서윤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
Read more

제2화

내 이름이 나오자 강지환의 웃음이 굳었다. 얼굴에서 순식간에 온기가 사라졌다."채원한테까지 들어가게는 하지 마."친구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껄껄 웃었다.딸이 큰 소리로 말했다."아빠, 걱정하지 마. 엄마는 모를 거야. 귀가 안 들리잖아."안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문밖에서 굳은 채 움직일 수 없었다.얼마 뒤, 뒤에서 다가온 직원이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혹시 도움이 필요하세요?"그 말에 별실 안이 뚝 조용해졌다.일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특히 강지환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차서윤의 허리에 둘렀던 손을 황급히 떼더니 시선을 피했다.왜 돌아왔느냐고 수어로 물으며, 차서윤은 그저 학교 후배일 뿐이라고 설명했다.정작 자기 입가에 차서윤의 립스틱이 잔뜩 묻어 있다는 건 모르는 모양이었다. 차서윤의 손도 여전히 그의 허리를 꼭 감싸고 있었다.나를 향한 차서윤의 눈빛에는 은근한 비웃음과 뻔뻔함이 배어 있었다.떠날 마음을 굳혔는데도, 막상 눈앞에서 보니 숨이 막히도록 아팠다.억지로 웃으며 말했다."열쇠 주러 왔어. 재밌게 놀아."열쇠를 탁자에 내려놓고 밖으로 나왔다.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는 돌아보지 않았다.거리는 오가는 차들로 붐볐다. 양옆으로 번쩍이는 불빛 속에서 나만 홀로 추웠다.어디로 가야 할지 보이지 않았다. 귀에도 아무 소리가 들어오지 않았다.문득 칠 년 전, 막 연애를 시작했을 때 함께 인적 드문 산으로 여행을 갔던 일이 떠올랐다.우리는 길을 잃고 꼬박 하루 낮과 밤을 걸었다.아무 소리도 없는 적막 속에서 내가 붙잡고 있던 건 강지환의 손뿐이었다.그때 강지환은 두 손으로 말했다. 함께 죽는 것도 우리 사랑의 끝으로는 나쁘지 않겠다고.늘 그랬다. 죽을 때까지 사랑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하지만 이제 사랑은 끝났고, 우리도 끝에 다다랐다.집에 돌아오자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머릿속이 텅 빈 채 천장만 멍하니 바라보았다.강지환을 처음 만난 건 채용 박람회였
Read more

제3화

몇 주 전이었다면 참지 못하고 받아 줬을 것이다.지금은 속이 뒤집힐 만큼 역겨웠다.일주일 전, 청력을 되찾고 집에 돌아왔다. 남편과 딸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려던 참이었다.그런데 침실 옆방에서 강지환의 격한 신음이 들렸다.온몸이 얼어붙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침실에 들어가기도 전에 딸이 숙제를 봐 달라며 나를 가로막았다. 늘 나를 귀찮아하던 아이였다.나를 밀어내며 중얼거리기까지 했다."서윤 엄마랑 좋은 시간 보내는데 방해하게 둘 순 없지."그제야 알았다. 딸이 그토록 나 대신 다른 엄마를 원하고 있었다는 걸.그들은 내가 여전히 듣지 못하니 완벽하게 속였다고 믿었다.하나도 빠짐없이 듣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그날 나는 외딴 산골 마을의 교육 봉사에 지원하고 비행기 표를 샀다.한때 우리가 약속했던 대로, 그의 삶에서 완전히 사라질 생각이었다.남편도 딸도 더는 필요 없었다.옆방에서 들었던 두 사람의 격한 소리가 순간 귓가를 메웠다.벌떡 일어나 강지환을 밀쳤다. 비명과 함께 쿵, 바닥에 떨어졌다.멈칫했다. 반사적으로 일으켜 주려다가, 끝내 손을 뻗지 않았다.강지환은 화를 내기는커녕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채원아, 왜 그래?"대답하려던 순간 떠올랐다. 그의 눈에 나는 아직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이었다.강지환도 뒤늦게 깨달았는지 수어를 쓰기 시작했다."아무것도 아니야. 몸이 좀 안 좋아서."뭔가 떠오른 듯 강지환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내 앞으로 달려와 수어로 정신없이 해명했다."채원아, 차서윤은 정말 그냥 학교 후배야. 오해하지 마."늘 침착하던 사람이 오늘은 차서윤 때문에 몇 번이나 평정을 잃었다.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무심히 말했다."피곤해. 오늘은 그만 자자."그러고는 옆으로 돌아누웠다. 강지환은 잠시 굳어 있더니 한참 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채원아, 사랑해. 정말 많이 사랑해.""절대 날 떠나지 마. 그러면 나 죽어."눈가에서 눈물이 자꾸만 흘러내렸다.'사랑한다면서, 왜
Read more

제4화

딸은 내 품에 안겨 마냥 들떠 있었다.마지막으로 강지환이 붉은 실팔찌 세 개를 사서 우리 손목에 하나씩 매어 주었다."이러면 우리 가족은 영원히 안 헤어지는 거야."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지환은 내 손을 잡아 제 가슴에 얹었다."채원아, 느껴져? 이 안에는 널 사랑하는 마음밖에 없어. 내 마음은 영원히 네 거야."딸도 옆에서 신나게 거들었다."가족은 영원히 같이 있어야지. 나 너무 좋아!"기대에 찬 두 얼굴을 보자, 눌러 두었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말로는 사랑한다면서, 둘이 같이 날 배신해?''다른 여자한테 네 아이까지 갖게 해 놓고, 왜 나한테 영원을 약속하는데?''내가 대체 뭘 잘못했길래 이렇게 벌을 줘?'말없이 앉아 있는 내 안색을 보더니 강지환도 웃음을 거뒀다. 그러고는 방금 했던 말을 수어로 옮겼다.잊을 뻔했다. 강지환은 내가 이제 들을 수 있다는 걸 몰랐다.무표정하게 바라보며 차갑게 물었다."정말 네 마음에 나밖에 없어?"강지환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스쳤다. 곧 억지웃음을 지었다."당연히 우리 딸도 있지! 너희 둘밖에 없어!"딸도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엄마, 설마 나 질투하는 거야?"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벨 소리가 울렸다. 움직이던 손짓도 멎었다.강지환은 한쪽으로 걸어갔다가 금세 돌아왔다.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가득했다."채원아, 미안해. 회사에 처리할 일이 좀 생겼어."강지환이 딸을 바라보자, 딸이 재빨리 말했다."아빠, 나도 같이 갈래."강지환은 딸의 손을 잡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돌아서는 순간, 휴대폰 화면에 뜬 발신자 이름이 보였다. 차서윤.나는 일어나 손목의 붉은 실팔찌를 풀었다.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린 뒤 밖으로 걸어갔다.'그렇게 차서윤이 좋으면 내가 비켜 줄게.''앞으로 너희 네 식구, 잘 살아.'그 뒤 며칠 동안 강지환과 딸은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어쩌다 한 번 집에 들어와도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내게 들키기 싫은지 몰래 드나들었다.나도
Read more

제5화

강지환의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손에 쥔 건 교육 봉사 승인서였다.강지환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나는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대답했다."나연이 거야. 집에서 워낙 엄하게 해서 못 가게 하거든.""그래서 내 인적 사항으로 신청한 거야. 이제 승인이 났으니까 내가 갖다주려고."반신반의하는 눈빛을 받으며 서류를 건네받았다.그제야 강지환이 안도했다.옆에서 딸이 웃으며 물었다."엄마, 우리 뭐 가져왔게?"잠시 멈칫하다가 천천히 대답했다."아빠가 직접 만든 초콜릿 케이크.""어떻게 알았어?"딸의 눈에 놀란 빛이 스쳤다.'모를 리가 있나?'연애할 때 강지환은 갖가지 디저트를 만들어 주곤 했다.포동포동하게 살을 찌워 놓으면 아무도 자기한테서 나를 빼앗아 가지 못할 거라면서.하지만 강지환이 만든 케이크는 쓰고 느끼했다. 그래도 그가 만들었다는 이유 하나로 맛있게 먹었다. 언제나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그러다 한 번은 그 사실을 알고, 강지환이 울면서 나를 안았다."이렇게 쓴데 왜 다 먹었어?"그 품에 얼굴을 묻고 비비며 웃었다."쓰긴 뭐가 써. 나 사랑하는 마음이 여기 다 들어 있잖아. 이렇게 달기만 한데.""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맛있는 케이크도 물리는 법이야."회상이 아득히 멀어졌다. 어느새 케이크 한 조각을 꺼낸 강지환이 다정하게 말했다."역시 너한테는 아무것도 못 숨기겠네."나는 웃으며 한 마디 한 마디 또렷이 말했다."맞아. 나한테는 아무것도 못 숨겨."강지환은 순간 움찔한 듯했다. 곧 억지웃음을 지었다."채원아, 이번에는 설탕을 더 넣었어. 좀 더 달 거야. 얼른 먹어 봐."나는 말없이 그 손에 들린 케이크만 바라보았다.시간이 너무 지났는지 초콜릿이 조금 녹아 있었다.엉망이 된 우리 사랑을 보는 것 같았다."아직 배 안 고파. 냉장고에 넣어 두자."보기만 해도 느끼한 케이크를 건네받아 안으로 들어갔다.몇 분 뒤 다시 나오자, 멀지 않은 곳에 차서윤이 서 있었다.이제는 이 집에 버젓이 찾아올 만큼 대담해졌을 줄이야
Read more

제6화

말을 마친 차서윤이 발뒤꿈치를 들고 강지환에게 입을 맞췄다.강지환은 밀어내려다 몇 번 버텼지만 이내 받아들였다.두 사람을 본 딸이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왔다.딸이 돌아오는 걸 보고 나도 구경을 그만뒀다. 케이크 한 조각을 잘라 거실에 앉아, 아무 일도 없었던 척했다.딸이 무심코 사탕 하나를 까 입에 넣으려다 뭔가 생각난 듯 작은 소리로 물었다."엄마, 하나 먹어도 돼?"딸은 사탕을 좋아했다. 하지만 치아가 좋지 않아 많이 먹으면 아파했으므로, 내가 자주 못 먹게 했다.나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도 그 때문이었을까?고개를 끄덕였다."마음껏 먹어. 이제 말리는 사람 없을 테니까."딸은 의아한 눈으로 나를 한 번 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신나게 먹었다.곧 강지환이 들어왔다. 입에 사탕을 가득 넣은 딸을 보고 의아해했다."채원아, 요즘 회사 일이 좀 많네. 한 번 더 나가 봐야겠어.""집에서 기다려. 걱정 말고. 이것만 끝나면 며칠은 집에서 꼬박 같이 있을게."내 대답을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 기대를 채워 줄 일은 없었다."가 봐. 네 일 해.""채아야, 아빠 따라 회사 놀이방에 가서 놀아. 엄마도 할 일이 좀 있거든."딸이 멍하니 나를 보았다. 내 목소리에는 더는 딸을 귀여워하는 기색이 없었고, 바라보는 눈길에도 애정이 사라져 있었다.강지환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바깥에서 빵, 경적이 울렸다.차서윤이 재촉하는 소리라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나는 고개를 숙여 케이크를 먹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두 사람도 완전히 안심한 듯했다.더는 의심하지 않고 손만 흔든 뒤 나갔다.입 안의 쓴 케이크를 쓰레기통에 뱉고 입가를 닦았다.교육 봉사 승인서와 미리 싸 둔 여행 가방을 챙겨 문밖으로 향했다.문 앞에 다다르자 강지환에게서 문자가 왔다.[채원아, 나랑 딸이 깜짝 선물을 준비했어. 분명 마음에 들 거야.]문자를 보고 웃음이 났다.'처음에는 차서윤, 그다음에는 그 여자 배 속에 네 아이까지.''이 정도
Read more

제7화

그런 악순환이 오래 이어지면서, 이곳은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처럼 됐다.교장 선생님은 칠 년 만에 자원해서 찾아온 사람이 나 하나뿐이라고 했다.문득 죄책감이 들었다.순전히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서 온 게 아니었으니까. 강지환과 딸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싶었을 뿐이었다.교장 선생님을 따라 학교에 갔다. 형편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칠판은 말뚝으로 고정한 커다란 돌판이었다.옆에는 글씨를 쓸 숯 조각들이 놓여 있었다.수업은 사방에서 바람이 새어 드는 작은 나무집에 대강 자리를 마련해 진행하고 있었다.해진 옷을 입은 아이 몇이 앉아 있었다. 교탁 앞의 어르신은 비틀거리며 온 힘을 다해 글씨를 썼지만, 칠판에는 흐릿한 자국만 남았다."부모들은 날마다 일하느라 바빠요. 낮에는 아이들을 여기 맡겨 공부하게 하죠.""저녁에 돌아와서 데려가고요.""교육 봉사를 하면 이력서에 한 줄 더 쓸 수 있으니까 오는 거겠죠. 알아요.""하지만 여기서는 버티는 것부터가 힘들어요."학교보다는 아이들을 맡아 주는 곳에 가까웠다.나조차 포기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 마음은 잠깐이었다. 남기로 했다.주눅 든 아이들의 눈길을 받으며 천천히 칠판 앞으로 갔다. 숯을 집어 들고 돌판에 내 이름을 썼다."양, 채, 원. 선생님 이름은 양채원이야.""이제부터 선생님이 너희를 가르칠 거야. 선생님 이름이 뭔지 말해 볼 사람 있어?"용기를 북돋우려 아이들을 바라보았다.배우는 것 자체가 어려운 건 아니었다. 문제는 그 눈에 밴 두려움이었다. 수없이 거절당하며 스스로 움츠러든 마음.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도 서두르지 않고 계속 웃으며 기다렸다.이윽고 온몸이 지저분한 아이 하나가 손을 들었다.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선생님은 양, 채, 원. 양채원 선생님이에요.""맞았어. 다른 친구들은? 이제 알겠니?"한 아이가 말하자 다른 아이들도 곧 따라 했다."양, 채, 원. 양채원 선생님이에요."저마다 먼저 대답하겠다며 나서는 아이들을 보며 웃고 고개를
Read more

제8화

날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곳곳을 함께 걸었다.가끔 예전 친구들에게서 편지가 왔다.내가 떠난 뒤 강지환과 딸이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굴었다고 했다.날마다 친구들을 찾아가 내 행방을 캐묻고 있었다.몇 번이나 담당 기관 사무실까지 찾아가 소란을 피웠지만, 끝내 아무 소득이 없었다고 했다.강지환은 차서윤과 헤어지고 배 속의 아이도 지우게 했다고 했다. 온 도시 사람들 앞에서 내게 사과까지 했다.바람을 피우지 말았어야 했다고. 내가 사랑해 준다는 이유로 그렇게 멋대로 굴어서는 안 됐다고.딸은 매일 울며 이제 사탕을 먹지 않겠다고, 엄마 말을 안 들어서 잘못했다고 했다.두 사람을 향한 온 도시의 시선이 순식간에 달라졌다.냉정한 대표였던 강지환에게 이제는 아내를 배신한 쓰레기라는 낙인이 찍혔다.딸도 은혜를 모르는 아이라며 누구에게나 손가락질을 받았다.회사까지 영향을 받아 주가가 폭락했다.그래도 강지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온 도시의 광고 공간을 사들여 내게 사과했다.내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했다.왜 저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스스로 배신을 택해 놓고, 이제 와서 왜 그렇게 사랑하는 척하는 걸까?친구들은 한 번 만나 제대로 이야기해 보라고 권하기도 했다.하지만 이미 분명히 말했었다. 배신하면 완전히 떠나겠다고.복잡한 생각을 떨쳐 냈다.아름다운 호숫가를 바라보아도 속은 답답했다.손 닿는 곳의 돌을 집어 호수에 던졌다. 퐁, 물결이 둥글게 번졌다."표정이 안 좋아 보여요. 괜찮으면 저한테 말해 볼래요?"샘물처럼 맑은 목소리에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정지후가 옅게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짙은 갈색 눈을 바라보다 잠시 넋을 놓았다.사랑 때문은 아니었다. 호수처럼 맑은 눈빛에 빠져들었을 뿐.빤히 보는 게 쑥스러웠는지 정지후가 고개를 돌렸다.내가 실례했다는 생각에 얼른 미안한 웃음을 지었다.사과하려는데 정지후가 내 옆에 앉았다.거리가 가까웠다. 몸에서 나는 은은한 향이 느껴질 만큼."여기는 마을 사람들이 소중하
Read more

제9화

생각이 더 이어지기도 전에 정지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선생님, 걱정 마세요. 무슨 일이 생겨도 제가 지켜 드릴게요."바라보자 정지후의 눈빛이 한층 단단해졌다.나는 그저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여기에 남는 것도 괜찮은 선택일 것 같았다.적어도 이곳 사람들은 진심이었다. 나를 속이지 않을 사람들이었다.그러던 어느 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뜻밖의 두 사람이 나타났다."엄마!""채원아, 역시 여기 있었구나."오랜만에 보는 강지환과 딸이었다. 이렇게 초라한 모습은 처음이었다.예전의 강지환은 왕자처럼 기품이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그런데 지금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흩어져 있었고, 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다.눈 밑에는 거뭇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딸도 늘 말끔하고 밝아서 작은 공주 같았는데, 지금은 온몸에 진흙이 묻어 꼬질꼬질한 아이가 돼 있었다.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두 사람이 곧장 내게 달려들었다.강지환은 나를 꽉 끌어안고 체면도 잊은 채 흐느꼈다."왜 나 혼자 두고 떠났어? 내 마음 뻔히 알면서.""채원아, 사랑해. 정말 많이 사랑해. 너 없으면 나 죽어.""엄마, 왜 나 버렸어? 엄마!"앉아 있던 학생들이 일제히 우리를 보았다. 정지후도 당황한 눈빛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답답해진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두 사람을 한꺼번에 밀어냈다."강지환 씨, 행동 좀 조심해 주세요.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요. 괜히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게 하지 말고요."강지환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그러고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채원아, 그러지 마.""네가 날 삼 년이나 쫓아다녔고, 우리는 칠 년을 같이 살았어. 평생에 십 년이 몇 번이나 있겠어?""내가 잘못해서 화난 거 알아. 정말 잘못했어."강지환은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네가 날 삼 년 쫓아다녔으니까, 난 십 년이라도 쫓아다닐게. 네가 용서해 줄 때까지.""널 사랑하는 마음은 진짜야. 평생 사랑할 거야."눈
Read more

제10화

"벽 하나 사이에 두고 바람피우던 그 집? 애초에 내 자리는 없었던 그 집?""입만 열면 사랑한다고 하면서, 바람피울 때 내 생각은 했어? 우리 약속은 한 번이라도 떠올렸냐고.""너도. 아빠 바람피우는 거 도와줄 때, 내가 네 엄마라는 생각은 했니?"내가 똑바로 노려보자 강지환도 딸도 아무 말 하지 못했다.강지환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계속 고개를 저었다. 딸은 이미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었다.그런데도 조금도 불쌍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스웠다.'해서는 안 될 짓은 다 해 놓고, 이제 불쌍한 척하면 용서해 줄 것 같아?''그럼 나도 대놓고 바람피운 다음 미안하다고 한마디만 하면 없던 일이 되는 거야?'"아니야, 엄마. 그런 거 아니야. 아빠는 엄마 정말 많이 사랑해. 나도 사랑해.""이번 한 번만 아빠 용서해 주면 안 돼?"딸의 손을 뿌리치며 차갑게 말했다."놔. 너희 둘 다 역겨워.""마지막으로 말할게. 강지환, 강채아. 너희는 내 인생에서 사라졌어. 완전히."마지막 말이 떨어지자 두 사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가엾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지경이 됐으니 수업도 더 이어 갈 수 없었다.언젠가 찾아올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밖에서 구경하던 어르신들이 내 주위를 에워쌌다.수군대며 손가락질하는 모습이, 평범한 내가 어떻게 저렇게 남부러울 것 없는 남자의 마음을 얻고 딸까지 낳았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나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렇게 깊이 사랑했다면 애초에 바람을 피우지 않았을 텐데.그런데 바람을 피우기로 했으면서, 왜 이렇게 붙잡는 걸까?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걸까?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다시는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나는 이미 마음을 굳혔다.그들과 이어진 인연은 여기까지였다.강지환이 내 팔을 꽉 붙잡고 놓지 않았다. 이를 악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주먹을 세게 쥔 손가락 틈으로 피가 어른거렸다.그래도 마음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여기서 어
Read more
PREV
12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