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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도 내 다리에 매달려 울었다."엄마, 가지 마. 엄마, 제발."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옆에 있던 정지후가 앞으로 나섰다."싫다잖아요. 그런데 왜 계속 붙잡아요?""게다가 새 남자 친구도 있어요. 이러셔 봐야 아무 소용 없어요."강지환과 딸이 사나운 눈으로 정지후를 보았다.정지후는 잠깐 움찔했다. 그러고는 침을 삼키고 몸을 꼿꼿이 세웠다."뭘 봐요? 제가 그 남자 친구인데요. 왜요?"강지환이 정지후를 보며 비웃음을 터뜨렸다."이 사람이 누군지나 알아? 내 아내야..."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지후의 또렷한 목소리가 교실을 울렸다."양, 채, 원. 양채원이에요."긴장하면서도 물러서지 않는 정지후의 눈을 보자 웃음이 터졌다.강지환의 낯빛이 달라졌다. 내게 확인이라도 받으려는 듯 억지웃음을 지었다."거짓말이지? 채원아, 아니라고 말해. 다 거짓말이라고."딸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엄마, 저 사람 거짓말하는 거지?"정지후의 맑은 눈에는 기대와 두려움이 함께 어려 있었다.한숨을 내쉬고 정지후의 어깨를 감싸며 조용히 말했다."봤잖아. 이 사람, 내가 다른 남자랑 말하는 거 싫어해. 그러니까 그만 가.""하지만..."강지환이 더 말하려 하자 내가 끊었다."사랑한다면 붙들고 늘어지는 게 아니라 놓아줘야 하는 거야.""너한테 해 주고 싶은 말이야. 너랑 맞는 사람도 빨리 찾았으면 좋겠어."강지환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는 기회가 없다는 걸 안 모양이었다.정말로 없었다.누굴 탓할 수 있겠나?강지환은 딸을 데리고 넋이 나간 듯 떠났다. 나는 정지후 곁에 남았다.정지후는 겁먹은 눈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나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그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났다.'아까는 그렇게 용감하더니, 지금은 한마디도 못 하네.'"지후 씨..."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지후가 눈을 꼭 감고 급히 말했다."아까는 도와드리고 싶어서 그랬어요. 다른 생각은 없었어요. 걱정 마세요. 이 일로 붙들고 늘어지
"벽 하나 사이에 두고 바람피우던 그 집? 애초에 내 자리는 없었던 그 집?""입만 열면 사랑한다고 하면서, 바람피울 때 내 생각은 했어? 우리 약속은 한 번이라도 떠올렸냐고.""너도. 아빠 바람피우는 거 도와줄 때, 내가 네 엄마라는 생각은 했니?"내가 똑바로 노려보자 강지환도 딸도 아무 말 하지 못했다.강지환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계속 고개를 저었다. 딸은 이미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었다.그런데도 조금도 불쌍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스웠다.'해서는 안 될 짓은 다 해 놓고, 이제 불쌍한 척하면 용서해 줄 것 같아?''그럼 나도 대놓고 바람피운 다음 미안하다고 한마디만 하면 없던 일이 되는 거야?'"아니야, 엄마. 그런 거 아니야. 아빠는 엄마 정말 많이 사랑해. 나도 사랑해.""이번 한 번만 아빠 용서해 주면 안 돼?"딸의 손을 뿌리치며 차갑게 말했다."놔. 너희 둘 다 역겨워.""마지막으로 말할게. 강지환, 강채아. 너희는 내 인생에서 사라졌어. 완전히."마지막 말이 떨어지자 두 사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가엾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지경이 됐으니 수업도 더 이어 갈 수 없었다.언젠가 찾아올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밖에서 구경하던 어르신들이 내 주위를 에워쌌다.수군대며 손가락질하는 모습이, 평범한 내가 어떻게 저렇게 남부러울 것 없는 남자의 마음을 얻고 딸까지 낳았는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나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렇게 깊이 사랑했다면 애초에 바람을 피우지 않았을 텐데.그런데 바람을 피우기로 했으면서, 왜 이렇게 붙잡는 걸까?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걸까?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다시는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나는 이미 마음을 굳혔다.그들과 이어진 인연은 여기까지였다.강지환이 내 팔을 꽉 붙잡고 놓지 않았다. 이를 악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주먹을 세게 쥔 손가락 틈으로 피가 어른거렸다.그래도 마음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여기서 어
생각이 더 이어지기도 전에 정지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선생님, 걱정 마세요. 무슨 일이 생겨도 제가 지켜 드릴게요."바라보자 정지후의 눈빛이 한층 단단해졌다.나는 그저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여기에 남는 것도 괜찮은 선택일 것 같았다.적어도 이곳 사람들은 진심이었다. 나를 속이지 않을 사람들이었다.그러던 어느 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뜻밖의 두 사람이 나타났다."엄마!""채원아, 역시 여기 있었구나."오랜만에 보는 강지환과 딸이었다. 이렇게 초라한 모습은 처음이었다.예전의 강지환은 왕자처럼 기품이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그런데 지금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흩어져 있었고, 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다.눈 밑에는 거뭇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딸도 늘 말끔하고 밝아서 작은 공주 같았는데, 지금은 온몸에 진흙이 묻어 꼬질꼬질한 아이가 돼 있었다.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두 사람이 곧장 내게 달려들었다.강지환은 나를 꽉 끌어안고 체면도 잊은 채 흐느꼈다."왜 나 혼자 두고 떠났어? 내 마음 뻔히 알면서.""채원아, 사랑해. 정말 많이 사랑해. 너 없으면 나 죽어.""엄마, 왜 나 버렸어? 엄마!"앉아 있던 학생들이 일제히 우리를 보았다. 정지후도 당황한 눈빛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답답해진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두 사람을 한꺼번에 밀어냈다."강지환 씨, 행동 좀 조심해 주세요.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요. 괜히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게 하지 말고요."강지환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그러고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채원아, 그러지 마.""네가 날 삼 년이나 쫓아다녔고, 우리는 칠 년을 같이 살았어. 평생에 십 년이 몇 번이나 있겠어?""내가 잘못해서 화난 거 알아. 정말 잘못했어."강지환은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네가 날 삼 년 쫓아다녔으니까, 난 십 년이라도 쫓아다닐게. 네가 용서해 줄 때까지.""널 사랑하는 마음은 진짜야. 평생 사랑할 거야."눈
날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곳곳을 함께 걸었다.가끔 예전 친구들에게서 편지가 왔다.내가 떠난 뒤 강지환과 딸이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굴었다고 했다.날마다 친구들을 찾아가 내 행방을 캐묻고 있었다.몇 번이나 담당 기관 사무실까지 찾아가 소란을 피웠지만, 끝내 아무 소득이 없었다고 했다.강지환은 차서윤과 헤어지고 배 속의 아이도 지우게 했다고 했다. 온 도시 사람들 앞에서 내게 사과까지 했다.바람을 피우지 말았어야 했다고. 내가 사랑해 준다는 이유로 그렇게 멋대로 굴어서는 안 됐다고.딸은 매일 울며 이제 사탕을 먹지 않겠다고, 엄마 말을 안 들어서 잘못했다고 했다.두 사람을 향한 온 도시의 시선이 순식간에 달라졌다.냉정한 대표였던 강지환에게 이제는 아내를 배신한 쓰레기라는 낙인이 찍혔다.딸도 은혜를 모르는 아이라며 누구에게나 손가락질을 받았다.회사까지 영향을 받아 주가가 폭락했다.그래도 강지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온 도시의 광고 공간을 사들여 내게 사과했다.내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했다.왜 저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스스로 배신을 택해 놓고, 이제 와서 왜 그렇게 사랑하는 척하는 걸까?친구들은 한 번 만나 제대로 이야기해 보라고 권하기도 했다.하지만 이미 분명히 말했었다. 배신하면 완전히 떠나겠다고.복잡한 생각을 떨쳐 냈다.아름다운 호숫가를 바라보아도 속은 답답했다.손 닿는 곳의 돌을 집어 호수에 던졌다. 퐁, 물결이 둥글게 번졌다."표정이 안 좋아 보여요. 괜찮으면 저한테 말해 볼래요?"샘물처럼 맑은 목소리에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정지후가 옅게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짙은 갈색 눈을 바라보다 잠시 넋을 놓았다.사랑 때문은 아니었다. 호수처럼 맑은 눈빛에 빠져들었을 뿐.빤히 보는 게 쑥스러웠는지 정지후가 고개를 돌렸다.내가 실례했다는 생각에 얼른 미안한 웃음을 지었다.사과하려는데 정지후가 내 옆에 앉았다.거리가 가까웠다. 몸에서 나는 은은한 향이 느껴질 만큼."여기는 마을 사람들이 소중하
그런 악순환이 오래 이어지면서, 이곳은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처럼 됐다.교장 선생님은 칠 년 만에 자원해서 찾아온 사람이 나 하나뿐이라고 했다.문득 죄책감이 들었다.순전히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서 온 게 아니었으니까. 강지환과 딸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싶었을 뿐이었다.교장 선생님을 따라 학교에 갔다. 형편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칠판은 말뚝으로 고정한 커다란 돌판이었다.옆에는 글씨를 쓸 숯 조각들이 놓여 있었다.수업은 사방에서 바람이 새어 드는 작은 나무집에 대강 자리를 마련해 진행하고 있었다.해진 옷을 입은 아이 몇이 앉아 있었다. 교탁 앞의 어르신은 비틀거리며 온 힘을 다해 글씨를 썼지만, 칠판에는 흐릿한 자국만 남았다."부모들은 날마다 일하느라 바빠요. 낮에는 아이들을 여기 맡겨 공부하게 하죠.""저녁에 돌아와서 데려가고요.""교육 봉사를 하면 이력서에 한 줄 더 쓸 수 있으니까 오는 거겠죠. 알아요.""하지만 여기서는 버티는 것부터가 힘들어요."학교보다는 아이들을 맡아 주는 곳에 가까웠다.나조차 포기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 마음은 잠깐이었다. 남기로 했다.주눅 든 아이들의 눈길을 받으며 천천히 칠판 앞으로 갔다. 숯을 집어 들고 돌판에 내 이름을 썼다."양, 채, 원. 선생님 이름은 양채원이야.""이제부터 선생님이 너희를 가르칠 거야. 선생님 이름이 뭔지 말해 볼 사람 있어?"용기를 북돋우려 아이들을 바라보았다.배우는 것 자체가 어려운 건 아니었다. 문제는 그 눈에 밴 두려움이었다. 수없이 거절당하며 스스로 움츠러든 마음.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도 서두르지 않고 계속 웃으며 기다렸다.이윽고 온몸이 지저분한 아이 하나가 손을 들었다.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선생님은 양, 채, 원. 양채원 선생님이에요.""맞았어. 다른 친구들은? 이제 알겠니?"한 아이가 말하자 다른 아이들도 곧 따라 했다."양, 채, 원. 양채원 선생님이에요."저마다 먼저 대답하겠다며 나서는 아이들을 보며 웃고 고개를
말을 마친 차서윤이 발뒤꿈치를 들고 강지환에게 입을 맞췄다.강지환은 밀어내려다 몇 번 버텼지만 이내 받아들였다.두 사람을 본 딸이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왔다.딸이 돌아오는 걸 보고 나도 구경을 그만뒀다. 케이크 한 조각을 잘라 거실에 앉아, 아무 일도 없었던 척했다.딸이 무심코 사탕 하나를 까 입에 넣으려다 뭔가 생각난 듯 작은 소리로 물었다."엄마, 하나 먹어도 돼?"딸은 사탕을 좋아했다. 하지만 치아가 좋지 않아 많이 먹으면 아파했으므로, 내가 자주 못 먹게 했다.나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도 그 때문이었을까?고개를 끄덕였다."마음껏 먹어. 이제 말리는 사람 없을 테니까."딸은 의아한 눈으로 나를 한 번 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신나게 먹었다.곧 강지환이 들어왔다. 입에 사탕을 가득 넣은 딸을 보고 의아해했다."채원아, 요즘 회사 일이 좀 많네. 한 번 더 나가 봐야겠어.""집에서 기다려. 걱정 말고. 이것만 끝나면 며칠은 집에서 꼬박 같이 있을게."내 대답을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 기대를 채워 줄 일은 없었다."가 봐. 네 일 해.""채아야, 아빠 따라 회사 놀이방에 가서 놀아. 엄마도 할 일이 좀 있거든."딸이 멍하니 나를 보았다. 내 목소리에는 더는 딸을 귀여워하는 기색이 없었고, 바라보는 눈길에도 애정이 사라져 있었다.강지환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바깥에서 빵, 경적이 울렸다.차서윤이 재촉하는 소리라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나는 고개를 숙여 케이크를 먹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두 사람도 완전히 안심한 듯했다.더는 의심하지 않고 손만 흔든 뒤 나갔다.입 안의 쓴 케이크를 쓰레기통에 뱉고 입가를 닦았다.교육 봉사 승인서와 미리 싸 둔 여행 가방을 챙겨 문밖으로 향했다.문 앞에 다다르자 강지환에게서 문자가 왔다.[채원아, 나랑 딸이 깜짝 선물을 준비했어. 분명 마음에 들 거야.]문자를 보고 웃음이 났다.'처음에는 차서윤, 그다음에는 그 여자 배 속에 네 아이까지.''이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