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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선 넘는 남자: Chapter 11 - Chapter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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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뜨거운 입맞춤

주차장 입구, 남자는 익숙하게 조수석 문을 열어, 다영을 태웠다.차 문이 닫히고, 그에게 이제 어디로 가는지 한마디도 묻지 않은채 남자가 핸들을 돌리는 대로 목적지가 결정될 뿐이었다.계속되는 정적 속, 남자가 라디오를 틀었다.[이제 다시 사랑 안해..말하는 난 너와 같은 사람]하필 이 타이밍에 백지영의 사랑안해가 나올게 뭐람.남자가 적막함을 깨기 위해 튼 라디오를 다영이 거칠게 off 버튼을 눌렀다.그리고 그녀는 참았던 숨을 터뜨리며 남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배신감과 수치심, 그리고 알 수 없는 혼란이 뒤섞여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왜 그랬어요?""뭐가.""당신이 무슨 나를 쫓아다녀, 그런 말을 왜 해요?"빨간색 대기 신호에 차가 멈춰섰다.그제서야, 정하는 운전대에서 손을 땐 뒤 뻐근한 어깨를 매만지며 고개를 돌렸다."..내가 틀린 말 했나."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다영씨한테 3번만 만나달라고 매달린거 맞잖아."황당하다는 얼굴도 없이 왜 도와줬는데 화를 내냐고 따지지도 않는 그를 보자, 알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정하씨가 뭔데, 왜 알지도 못하면서 끼어들어!"다영이 분노에 가득찬 목소리로 그를 향해 쏘아붙였다. 하명그룹 사장이라는 거대한 배경 앞에서도, 지금의 다영에겐 그저 제 속을 뒤집어놓은 남자일 뿐이었다. "왜 날 더 비참하게 만들어..!"하명그룹 사장인 남자는 쏟아지는 다영의 분노를 가만히 받아내며, 그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고요한 시선이 다영을 더 미치게 만들었다."아니, 처음부터 왜 하정하라고 말해서..!"다영은 자신의 전남친이 그와 동명이인의 남자와 만난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않았다. 그러나. 사실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다.그저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이 하고 싶었을 뿐인데, 고맙다는 감정보다 그들에 대한 배신감이 배가 돼서 도저히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았다.쏟아지는 다영의 가쁜 숨소리만이 차 안을 채웠다.이윽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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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잘하는 남자

그가 능숙하게 그녀의 턱을 감싸쥔뒤 혀를 부드럽게 움직였다.이어진 입맞춤은 전과 비할 바 없이 짙고 뜨거웠다.그가 입술을 거듭 겹쳐오며 깊숙이 파고들자, 술기운으로 멍했던 다영의 정신이 점점 더 아득해졌다.단단한 혀가 그녀의 부드러운 입 속 안쪽을 쓸어내리고, 깊은 숨결을 모조리 들이마실 때마다 다영은 다리에 힘이 풀어져 그의 옷자락을 더욱 강하게 쥐어짤 수밖에 없었다.“하아...”짧게 터져 나온 다영의 가쁜 숨소리가 두 사람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정하는 다영이 숨을 쉴 틈조차 주지 않을 기세로 그녀를 압도했다.그의 커다란 손이 다영의 가녀린 어깨를 감싸 쥐더니, 거추장스럽게 걸쳐져 있던 겉옷을 미끄러뜨리듯 아래로 벗겨냈다.차가운 공기가 드러난 어깨 피부에 닿기도 전에, 그보다 훨씬 뜨거운 정하의 체온이 단숨에 다영을 밀착해 왔다.“..후회하지마."정하가 붉게 물든 다영의 입술 위로 나직하게 읊조렸다.그의 손길은 거칠면서도 지독하리만치 다정했다.그의 단단한 팔뚝이 다영의 허리를 거세게 감아쥐어 자신의 품 안으로 바짝 끌어당겼다.굳은살이 박여 있던 그의 두꺼운 손바닥이 다영의 허리선과 등줄기를 천천히 쓸어 올릴 때마다, 마찰하는 피부 위로 짜릿한 전율이 뜨겁게 새겨졌다.'..허다영.'그가 다영의 목덜미로 입술을 내리며 이름을 불렀다.귓가를 간지럽히는 낮고 단단한 목소리에 다영은 자기도 모르게 그에게 더 바짝 밀착했다.정하는 다영의 반응을 놓치지 않고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소파 위로 다영의 몸이 느리게 기울어졌고, 그 위를 온전히 가로막은 정하의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를 완벽히 가려주었다.장난스럽지만 지독하게 진심이 섞인 그의 귓속말에 다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정하는 다영의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방울을 입술로 부드럽게 훔쳐낸 뒤, 다시 한번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탁자 위에 놓여 있던 양주 잔은 이미 잊혀진 지 오래였다.차가운 위스키가 주었던 화끈거림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뜨거운 열기가 두 사람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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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하룻밤 꿈

아침 햇살이 창틈을 비집고 들어와 눈꺼풀을 간지럽혔다.다영은 아침 특유의 찌뿌둥함에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켰다.하지만 주위를 둘러본 순간, 사고 회로가 하얗게 정지했다.방 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바닥에는 허물 벗듯 내팽겨쳐진 겉옷과 민망하게 널브러진 속옷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허겁지겁 더듬어 쥔 핸드폰 화면을 켜자 부재중 전화 '엄마(20)'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소름이 돋아나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동시에 피부에 닿는 차가운 공기에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완벽한 알몸 상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어떻게 된 거지?'다영은 머리를 거머쥐며 아주 천천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옆자리에는 정하가 누워 있었다. 하얀 이불을 가슴까지 덮은 채, 세상 근심 하나 없다는 듯 천사 같은 얼굴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가지런한 속눈썹과 은은하게 숨을 쉴 때마다 솟아오르는 어깨라인.평소보다 한결 무방비하고 무해해 보이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다영의 머릿속에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명료한 경고등이 켜졌다.어제의 파편 같은 기억들이 뇌리를 스쳤다.독한 술향기, 가빠지던 숨소리, 서로를 향해 걷잡을 수 없이 엉키던 온기.다영은 비명이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것을 손으로 막아섰다.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어 아무런 생각도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정하가 깰세라 숨조차 죽인 채, 침대 아래로 기어 내려갔다.바닥에 지저분하게 흩어진 옷가가지들을 급하게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속옷을 꿰어차고 겉옷의 단추를 채우는 손가락이 미친 듯이 떨렸다.까치발을 들고 문고리를 돌린 뒤, 그녀는 거의 도망치듯 그 방을 빠져나와 자신의 집으로 달아났다.집에 도착해 거칠어진 숨을 내쉬며 현관문에 털썩 주저앉았다.스마트폰의 날짜를 확인했다. 다행히 오늘은 쉬는 날이었다."하아.."그나마 휴일이라는 사실에 위안을 삼아보려 했지만, 집 안의 정적은 어젯밤의 잔상을 더욱 선명하게 불러왔다.정하의 닿았던 촉감, 낮게 읊조리던 목소리, 시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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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새벽 내내 좋다고 소리 지른 사람

조심스럽게 도둑고양이처럼 현관문 도어락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거실 소파에 팔짱을 굳게 끼고 앉아 있던 엄마의 서늘한 목소리가 날아와 꽂혔다."허다영. 너 미쳤어? 왜 말도 없이 외박을 하고 이제 기어들어 오는 거야? 도대체 어딜 쏘다닌 거야!"화들짝 놀란 다영은 어깨를 크게 움찔하며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당장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얗게 맴돌았다.무의식적으로 입버릇처럼 가장 친한 절친이었던 차지연의 이름이 튀어나오려 했다."어, 그게… 어제 지연이…!"하지만 더이상 그 이름을 입에 올릴 수는 없었다.다영은 입을 다물고 멈칫하다가, 동공을 격렬하게 지진을 일으키며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 이름이나 급하게 뱉어내기 시작했다."아니, 아니! 지연이가 아니라 어제 민지! 그래, 대학교 동기 민지 만났어! 저녁에 오랜만에 만나서 고기 먹다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버려 가지고… 도저히 지하철 타고 집에 올 정신이 아니더라고. 그래서 그냥 민지네 자취방에서하루 자고 온 거야. 진짜야, 엄마!"거짓말을 늘어놓는 다영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지만, 엄마는 혀를 끌쯧끌쯧 차며 다가와 그녀의 등짝을 매섭게 후려쳤다."어휴, 이 화상아! 술 냄새 진동을 한다, 진동을 해. 다 큰 기집애가 밖에서 술이나 떡이 되도록 퍼마시고. 빨리 들어가서 씻기나 해!"엄마의 잔소리를 등 뒤로 흘려들으며 다영은 서둘러 도망치듯 자신의 방으로 쏙 들어가 방문을 철컥 잠갔다.문고리를 쥔 채로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녀는 온몸에 배어 있는 어젯밤의 찝찝함을 씻어내기 위해, 방 한가운데 서서 입고 있던 겉옷과 바지를 훌렁훌렁 벗어 던졌다.그런데 무심코 고개를 돌려 전신 거울을 본 순간, 다영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헉… 미쳤어, 진짜. 이게 다 뭐야…."자신의 몸에 남겨진 흔적들은 상상을 초월했다.쇄골 아래부터 목덜미, 심지어 가슴골 부근까지 어젯밤 그 남자가 집요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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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녀의 등장

"다영 씨…? 허다영 씨!""아… 네, 네! 부르셨어요?""무슨 일 있어? 아까부터 불렀는데 멍하니 모니터만 보고 있네. 안색도 안 좋고. 주말에 무슨 일 있었어?""아니요, 그냥 주말에 잠을 좀 못 자서요… 하하. 죄송합니다."어색하게 웃어 보인 다영은 황급히 키보드 위로 손을 올렸다.하지만 모니터 화면의 까만 글씨들은 개미 떼처럼 흩어질 뿐,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주말 동안 일어났던 일들이 마치 현실이 아닌 한여름 밤의 기묘한 꿈처럼 느껴졌다.술김에 저질렀던 뜨거운 하룻밤, 거울 앞에서 확인했던 선명하고 난잡한 붉은 자국들, 얇은 티셔츠 하나를 걸친 자신을 집어삼킬 듯 맹렬하게 노려보며 몰아붙이던 정하의 서늘한 눈빛과 뻔뻔한 목소리.그 폭풍 같았던 시간들이 아직도 머릿속을 헤집어놓고 있어 심장이 시도 때도 없이 널뛰었다.미쳤어, 진짜. 앞으로 얼굴을 어떻게 보려고. 복잡해진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식은 커피를 한 모금 삼키려던 찰나였다.파티션 너머로 의자를 바싹 당겨 앉은 동료 강사가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은밀하게 속삭였다."근데 다영 씨, 그 소문 들었어? 이번에 우리 과에 새로 오는 조교수 말이야.""조교수요? 이번 학기에 티오가 났었나요?""그러니까! 원래 없던 자리인데 갑자기 임용이 났잖아. 근데 그 자리에 누가 들어오는지 알아? 차병원장 딸이 바로 조교수로 꽂혔대! 아니, 이게 말이 돼? 세상에 낙하산도 이런 낙하산이 없지. 나이도 우리랑 비슷하다던데, 누구는 뼈 빠지게 고생해서 시간강사나 뛰며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너무 불공평하잖아."차병원장의 딸.그 단어가 귓가에 박히는 순간, 다영의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소름이 쫙 끼쳤다. 핏기가 가신 다영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차지연.그 세 글자가 뇌리에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왔다.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자신에게 이토록 가혹할 수 있단 말인가.다영은 숨이 턱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매 학기 학생들의 강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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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강의를 어떻게 마쳤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분필 가루가 묻은 손을 대충 털어내며 과사무실로 돌아가려던 다영의 걸음이 복도 모퉁이에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교무처 문 앞, 팔짱을 낀 채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차지연이 이쪽을 향해 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마치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한 여유로운 태도였다.순간, 다영의 머릿속에서 이성의 끈이 툭 하고 끊어졌다.그녀는 성큼성큼 다가가 지연의 얇은 손목을 거칠게 낚아챘다.“어머, 얘. 너 지금 뭐 하는…!”다영은 지연의 당황한 목소리를 무시한 채, 그녀를 질질 끌다시피 하여 복도 끝에 있는 빈 강의실로 밀어 넣고는 문을 쾅 닫아버렸다.적막한 강의실 안에 무거운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아, 진짜!”지연이 얼굴을 험악하게 구기며 자신의 손목을 신경질적으로 뿌리쳤다.그녀는 붉어진 손목을 탈탈 털며 어이없다는 듯 다영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무슨 기집애가 이렇게 무식하게 힘이 세? 너 요즘 투잡으로 물류센터 상하차라도 뛰니?”다영은 가쁘게 몰아쉬는 숨을 애써 억누르며, 피가 날 정도로 꽉 쥐고 있던 주먹을 바들바들 떨었다.“너, 내가 여기서 일하는 거 알고 왔지.”그녀의 쇳소리 나는 물음에 지연은 방금 전까지 구겨져 있던 표정을 지우고는, 이내 눈꼬리를 곱게 휘며 웃음을 터뜨렸다.“당연하지. 내가 네가 이 바닥에서 시간강사로 구르고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있겠니?”그 악의적인 당당함에 다영은 숨이 턱 막혔다.대체 언제까지, 얼마나 더 짓밟혀야 끝이 나는 걸까.“너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내 남자친구 뺏어가서 내 인생 시궁창에 처박아 놨으면 그걸로 된 거 아니야? 아직도 나한테 더 뜯어내고 괴롭힐 게 남았어? 도대체 날 이렇게까지 짐승처럼 물어뜯고 괴롭히는 이유가 뭔데!”다영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 빈 강의실을 날카롭게 찢었다.하지만 지연은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오히려 그녀는 배를 잡고 미친 사람처럼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우다, 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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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위험한 여자

기막힌 광경에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구역질 나는 그들의 애정행각을 더 이상 지켜볼 인내심조차 바닥난 다영은 기가 차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등진 채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그의 찌질한 목소리와, 그를 달래며 내뿜는 차지연의 가식적인 콧소리가 환청처럼 고막을 때렸지만,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그 끔찍한 캠퍼스를 빠져나왔다.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발목에 쇳덩이를 매단 것처럼 천근만근 무거웠다.퇴근 시간, 지옥철이라 불리는 열차 안은 숨통이 막힐 정도로 사람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옴짝달싹할 수 없는 좁은 공간, 낯선 사람들의 땀 냄새와 피로감이 뒤섞인 텁텁한 공기 속에서 이리저리 휩쓸리며 흔들리다 보니, 문득 지독한 현실 자각 타임이 해일처럼 밀려왔다.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도 초라하고 볼품없었다.하루 종일 칠판 앞에서 분필 가루를 마시며 목이 쉬어라 강의를 하고, 정규직 교수들의 눈치를 보며 굽신거려야 간신히 밥줄을 유지할 수 있는 월급쟁이 시간강사의 삶. 반면, 남의 남자를 빼앗고 친구의 등에 칼을 꽂은 차지연은 부모의 권력을 등에 업고 하루아침에 조교수가 되어 승리자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한 걸까. 난 대체 뭘 위해서 이렇게 아등바등 살고 있는 거지.'숨이 턱 막혔다. 도무지 맨정신으로는 이 엿 같은 하루를, 이 억울하고 비참한 현실을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동네 어귀에 도착하자마자 다영은 홀린 듯 편의점으로 향했다.야외에 덩그러니 놓인 낡은 플라스틱 테이블에 구겨지듯 주저앉아, 차가운 캔 맥주를 연거푸 따서 목구멍으로 들이부었다.쌉싸름하고 차가운 알코올이 타는 듯한 식도를 넘어갔지만, 꽉 막힌 명치는 조금도 뚫리지 않았다. 한 캔이 두 캔이 되고, 세 캔이 넘어갈 무렵. 테이블 위에는 어느새 찌그러진 빈 캔들이 난잡하게 널브러지기 시작했다.선선한 밤공기가 뺨을 스쳤지만, 다영의 얼굴은 술기운에 달아올라 홧홧하게 타올랐다.머릿속에서는 차지연이 자신의 낡은 캔버스화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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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그가 좋아했던 속옷

그의 넥타이를 확 잡아당기는 다영의 아찔한 도발에 정하의 숨결이 훅 엉켰다.풀어진 눈동자로 자신의 입술을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유혹.정하의 굳건했던 이성이 크게 출렁이며 넘어갈 뻔했으나, 그는 이내 작게 헛숨을 들이마시며 손을 들어 올렸다.딱!"아앗!"맑고 경쾌한 마찰음과 함께 다영이 이마를 감싸 쥐며 뒤로 물러났다.아픈 이마를 문지르며 이게 무슨 짓이냐는 듯 억울하게 올려다보는 그녀를 향해, 정하는 흐트러진 넥타이와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고쳐 매며 서늘하게 선언했다."이번에도 술기운 빌려서 사람 미치게해놓고 내일 아침에 또 기억 안 난다며 모른 척 도망갈 겁니까?""내가 언제요…!""당신이 맨정신일 때, 그때 아니면 안 해."그의 단호한 목소리 뒤에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지독하게 농밀한 속마음이 숨겨져 있었다.알코올에 취해 몽롱한 상태가 아니라, 오롯이 맨정신으로 수치심에 뺨을 붉히며 제 밑에서 쾌락에 울부짖는 그녀의 적나라한 표정을 두 눈에 똑똑히 담고 싶다는, 특유의 가학적이고 소유욕 넘치는 본능이었다.정하는 멍해진 다영의 손에서 핸드폰을 쓱 빼앗아 들었다.비밀번호가 풀려 있던 연락처 목록을 확인한 그의 미간이 삐딱하게 일그러졌다.전 남친이 '정하'고, 자신이 '정하2'라는 사실에 헛웃음을 친 그는 망설임 없이 수정 버튼을 눌렀다.잠시 후 그녀의 손에 다시 쥐여진 핸드폰 화면에는 '남치니'라는 세 글자가 하트 이모티콘과 함께 떡하니 박혀 있었다."남치니…?"경악한 다영이 미친 사람을 보는 듯한 끔찍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머리부터 발끝까지 각 잡힌 쓰리피스 수트를 빼입고, 피도 눈물도 없이 차가워 보이는 이 남자가 이딴 깜찍한 저장명을 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요즘 애들은 다들 이렇게 한다던데. 불만 있습니까?"'그놈의 요즘애들.'뻔뻔하게 턱을 치켜드는 그 무심한 표정과 멘트의 부조화에, 결국 다영은 참지 못하고 푸하학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우울하고 비참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날아가는 듯했다.얼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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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개새끼인건 알았는데

다영은 얄팍하게 휘어지던 입꼬리를 유지한 채, 쐐기를 박듯 나직하고 우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오빠는 할 때 머리카락이 길어야 잡는 맛이 있어서 좋다고 했는데, 너는 단발이니까 속옷이라도 취향에 맞춰주면 좋아할 것 같아서. 생각해서 챙겨준 건데, 마음에 안 들어?"분노로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지연이 매섭고 독한 눈빛으로 다영을 노려보았다.하지만 그 살기등등하던 시선도 잠시, 지연은 돌연 억울하다는 듯 콧날을 시리게 떨며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닭똥 같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자, 사색이 된 동기들이 서둘러 지연의 어깨를 토닥였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영이 실소하듯 피식 웃으며 가볍게 턱을 깼다."어머, 밤사정까지 세세하게 챙겨주는 친구가 세상에 어디 있다고 그래. 그렇게까지 부담스럽게 안 고마워해도 되는데."지연이 더욱 자지러지듯 서럽게 울먹이자, 눈치 없던 동기 중 한 명이 한숨을 쉬며 다영을 타박했다."다영아, 네가 어떤 마음으로 이랬는지 이해는 해. 속상했겠지. 만약에 얘네가 그냥 바람 피우는 거였다면 나도 같이 욕했을 거야. 근데 지금은 결혼까지 한다고 하잖아. 이건 좀 심했다. 오늘 너 선 넘었어."역시나. 이 자리에서 내 편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언제나 피해자는 그럴듯한 눈물로 포장되었고, 1차 가해는 묵인되었다.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서러움과 배신감에 목이 꽉 조여왔지만, 다영은 입술을 꽉 깨물며 눈물을 삼켰다."시끄러워."프라이빗 룸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전 남자친구 하정하가 숨을 몰아쉬며 뛰어들어왔다.상황 파악도 하기도 전에 그가 시선을 떨어뜨린 곳은 다영이 아니라 테이블 위에 널부러져 있던 하얗고 야한 란제리 박스였다.그 속옷의 촉감, 디자인, 그리고 자신이 직접 벗겨내며 몸에 새겼던 기억까지.그 속옷을 가장 잘 아는 장본인인 정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멘트처럼 잿빛으로 굳어지며 험악하게 일그러졌다.그는 곧바로 울며 떨고 있는 지연의 어깨를 품에 감싸 안으며 핏대를 세웠다."너 지금 여기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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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여기서 할까.

한바탕 폭풍 같은 소란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서울의 화려한 네온사인 불빛이 숨 막히도록 고요한 차 안을 주기적으로 밝혔다가 어둡게 물들였다.다영은 조수석에 앉아, 한 손으로 능숙하게 핸들을 쥐고 있는 정하의 터진 입술 모서리에 조심스럽게 연고를 발라주었다."...누가 그렇게 무식하게 주먹부터 날리래요? .. 도대체 왜 그런 거예요?"다영이 속상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타박하자, 정하가 어이없다는 듯 작게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어떤 미친놈이 자기 여자가 뺨을 맞았는데 거기서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습니까."그 담백하고 확고한 대답에 다영은 할 말을 잃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사실 다영은 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똑똑히 보았다.정하가 그 미친놈을 흠씬 두들겨 팰 때, 다영 자신이 맞았던 부위가 오른쪽 뺨이라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고는 다른 곳은 일절 건드리지 않은 채 오로지 그 자식의 오른쪽 뺨만 집중적으로 집요하게 박살 내버렸다는 것을.차라리 식당 가드들이 제때 말려주어 그 정도로 끝난 것이 천만다행일 정도였다.연고를 다 바르고 난 뒤, 차 안에는 다시 한참 동안 묵직한 정적이 흘러내렸다.오직 규칙적인 엔진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시선을 아래로 툭 떨어뜨린 채 만지작거리던 다영이 먼저 조심스럽게 침묵을 깼다."…나한테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봐요? 아까 거기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하지 않아요?"그녀의 물음에 정하는 전방을 주시하던 시선을 거두고, 신호 대기에 걸려 차가 멈춰 선 틈을 타 다영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한참의 깊은 정적이 이어진 끝에, 그가 무겁게 입을 뗐다."말하고 싶어 보이지 않아서요.""…….""말하기 싫으면 굳이 억지로 안 해도 됩니다."그 다정하고도 묵직한 배려.그 한마디가 다영의 마음속에 단단하게 쳐져 있던 방어벽을 속절없이 허물어버렸다.억지로 삼키려 했던, 남에게는 절대 보이고 싶지 않았던 비참한 바닥이 그에게만큼은 전부 털어놓고 싶어졌다.되레 말하기 싫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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