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13년 전 회사로 돌아왔습니다.: Chapter 21 - Chapter 30

74 Chapters

21화. 삭제된 한 줄

부산공장 2호라인.작년 가을, 회장님이 직접 와서 테이프를 끊은 신형 라인이었다. 사내 소식지 표지에도 실렸다. 사진 속의 라인은 반짝였다. 새 기계, 새 도색, 새 바닥.그리고 첫 번째 삶에서.석 달 뒤에 멈춰 선 라인이었다.* * *“고객사가 일정 3주 당겨달래.”월요일 아침 주간회의.장성호가 화이트보드에 날짜를 쭉 그었다. 매직이 끽끽 소리를 냈다.“원래 6주 테스트 잡혀 있던 거. 3주로 줄여. 신규 고객이야. 첫 단추 잘 끼워야 돼.”회의실이 조용해졌다.생산팀장이 한숨을 쉬었다. 설비 담당 조현석 파트장은 천장을 봤다. 장구미 선배는 노트에 뭔가를 적는 척했다.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첫 번째 삶에서도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나도.그리고 석 달 뒤. 그 3주가 모든 걸 날렸다.* * *“팀장님.”손을 들었다.장성호의 눈썹이 올라갔다. 회의에서 내가 먼저 입을 여는 건 드문 일이었다.“3주로 하겠습니다. 대신 조건 하나만 넣겠습니다.”“조건?”“테스트하다가 이상한 게 나오면. 품질이 출하를 멈출 수 있게. 그 한 줄만요.”장성호가 피식 웃었다.“김 주임. 고객사가 급하다는데 멈추긴 뭘 멈춰. 우리가 갑이야?”“안 멈추면 제일 좋죠. 멈출 수 있기만 하면 됩니다. 보험입니다.”보험이라는 단어에 생산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장성호의 얼굴에 짜증이 스쳤다. 그리고 곧, 귀찮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알았어. 써서 올려.”* * *그날 밤 열한 시.사무실에 혼자 남아 계획서를 썼다.3주 테스트 일정. 그리고 맨 아래 한 줄.이상 발견 시 품질 판단으로 출하 보류 가능.첫 번째 삶의 나는 이 계획서를 장성호에게만 보냈다.장성호가 한 줄을 지웠다.그리고 사고가 났을 때. 그 한 줄은 처음부터 없었던 게 됐다.“품질이 멈췄어야지. 김 주임 뭐 했어.”그 한마디로 끝이었다.이번에는.받는 사람 장성호.참조 장구미, 조현석.그리고 한 줄 더.본부 품질 공용 주소.본부 사람들 아무도 안 읽는 주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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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철호 형의 공책

“기리야. 나 그만둔다.”흡연실 뒤편. 철호 형이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알고 있었다. 노트에 적혀 있었으니까.봄. 철호 형 퇴사.그런데도.직접 들으니까. 명치 어딘가가 저렸다.* * *박철호.설비 13년 차.2호라인 기계들을 옛날 공장에서 이 공장으로 옮겨온 사람. 어느 볼트를 얼마나 조여야 하는지, 어느 기계가 여름에 열을 먹는지, 어느 모터가 비 오는 날 소리가 바뀌는지. 전부 머리에 넣고 다니는 사람.신입 때 내가 설비 쪽 질문을 하면 귀찮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끝까지 설명해주던 사람.그리고 인사카드에.전환 검토.“왜요.”알면서 물었다.형이 웃었다.“회의 초대가 끊겼어. 메일 참조에서도 빠졌고. 진급은 세 번 누락. 그리고 요즘은 내가 하던 일을 신입한테 넘기래.”형이 새 담배를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사람이 투명해지는 느낌 알아?”* * *알았다.첫 번째 삶의 서른여덟. 나도 그랬다.회의실 문이 내 앞에서 닫혔다. 후배가 내 보고서로 발표했다.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점심은 늘 혼자였다.그때 나는 나가지도 못했다.나가면 뭘 하나. 경력도 애매하고, 나이는 많고, 돈도 없고.그래서 버텼다.그리고 그 버틴 끝이. 횡단보도였다.형은.나간다.“어디 가시는데요.”“몰라. 작은 데라도 알아봐야지. 설비쟁이 받아줄 데는 있겠지.”형이 웃었다.첫 번째 삶에서 형은. 몇 년 뒤 어느 작은 회사에 다닌다고 들었다. 오래 못 있었다는 얘기도.그게 마지막 소식이었다.* * *“형.”“응.”“2호라인 기계. 형만 아는 거 있잖아요.”형이 멈췄다.“공책. 좀 보여주세요.”형이 나를 한참 봤다.“그거 왜.”“형 나가면. 그거 아는 사람이 없잖아요.”형이 작업복 주머니에서 공책을 꺼냈다.A5 크기. 표지는 원래 파란색이었을 텐데 기름때와 손때로 회색에 가까웠다.* * *날짜. 증상. 원인. 조치.5년 치 손글씨.그리고 맨 오른쪽. 형이 직접 그어 만든 칸 하나.다음에.다음에 : 여름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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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동팔이의 첫 비행기

출국 전날 밤 열한 시.공장 창고.형광등 절반이 꺼진 창고 구석에 초도 출하용 샘플 박스가 쌓여 있었다. 원래 규정대로라면 출하 사흘 뒤 폐기될 것들.나는 박스를 하나씩 열었다.샘플 봉투마다 매직으로 적었다.생산 날짜. 생산 시각. 기계 번호.그리고 박스마다 빨간 딱지를 붙였다.폐기 금지. 품질 김기리.첫 번째 삶에서 나는 이 샘플들을 규정대로 버렸다. 그래서 사고가 났을 때 어느 기계에서 나온 불량인지 찾는 데 2주가 걸렸다. 그 2주 동안 고객사는 우리 물건 전부를 의심했다.불량은 못 막는다. 출하를 멈출 권한은 장성호가 지웠으니까.그렇다면.막을 수 없는 건. 좁힌다.마지막 박스에 딱지를 붙였을 때. 창고 문 쪽에서 발소리가 났다.야간 창고 반장이었다.“누구야. 이 시간에.”“품질 김기리입니다.”“뭐 해.”“샘플 좀 챙겨두려고요. 버리지 말아주세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반장이 빨간 딱지들을 한참 봤다.“……휴가 간다며.”“네. 그래서 미리요.”반장이 고개를 저었다.“품질이 별걸 다 하네.”그래도 딱지를 떼지는 않았다.* * *다음 날 아침.“여권.”“있어.”“지갑.”“있어.”“휴대폰.”“있다고!”“김동팔.”“왜!”“넌 왜 아직 한국이냐.”김해공항 출국장.동팔이가 자동출입국 심사대에 여권을 거꾸로 넣고 있었다. 세 번째였다.뒤에 선 아주머니가 한숨을 쉬었다. 나는 동팔이 손에서 여권을 뺏어 뒤집어 넣었다.삑.문이 열렸다.“……이게 되네.”“원래 되는 거야.”* * *김동팔.고등학교 친구. 학원 다니다 그만두고, 알바 하다 그만두고, 스물여섯까지 아무것도 안 하던 녀석.첫 번째 삶에서 이 녀석은 서른아홉까지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어머니를 비행기 한 번 못 태워드렸다고 술만 마시면 울었다.두 번째 삶에서 나는 이 녀석한테 간호학과 원서를 내밀었다. 억지로. 싸우면서.녀석은 3년 동안 공부했다. 시험에 붙었다. 대학병원 간호사 2년 차.그리고 오늘.인생 첫 해외여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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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사고는 기억대로 온다

월요일 아침 일곱 시 사십 분.정문을 지나자마자 알았다.2호라인 셔터가 반쯤 내려와 있었다.그 앞에 노란 테이프. 멈춘 지게차 두 대. 담배를 피우며 서성이는 야간조 사람들.평소라면 정문까지 들리던 프레스 소리가.없었다.공장이 숨을 참고 있었다.* * *여덟 시 오십 분.복도에서 장성호가 나를 가로막았다.“김 주임. 토요일에 왜 전화 안 받았어.”“휴가였습니다.”“공장에 불이 났는데 휴가?”나는 그를 봤다.“불은 목요일에 났습니다. 목요일에 멈출 수 있는 권한은. 팀장님이 지우셨고요.”장성호의 얼굴이 하얘졌다가. 붉어졌다.“회의실에서 보자.”그가 돌아섰다.심장이 쿵쿵 뛰었다.첫 번째 삶에서 나는 이 사람 앞에서 한 번도 말대꾸를 해본 적이 없다. 13년 동안 한 번도.* * *사무실.전진주 선배가 커피 두 잔을 들고 서 있었다.“기리야.”“네.”“고객사 조립 라인이 섰어. 목요일 출하분에서 부품이 헐거워서. 금요일 밤에 반품 들어왔어. 토요일엔 고객사 사람들이 여기까지 왔고.”기억대로였다.전진주 선배가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팀장님이 아홉 시에 긴급회의. 너 찾아.”그리고 목소리를 낮췄다.“조심해. 분위기가 누구 하나 잡을 분위기야.”누구 하나.첫 번째 삶에서. 그 누구 하나는.나였다.* * *오전 아홉 시.대회의실.장성호. 생산팀장. 조현석 파트장. 장구미 선배. 그리고 나.장성호가 반품된 부품 하나를 탁자에 던졌다.툭.금속이 탁자 위를 굴러 내 앞에서 멈췄다.“이게 뭐야. 품질은 뭐 했어. 김 주임.”모든 눈이 나를 봤다.장구미 선배는 노트를 보고 있었다. 생산팀장은 팔짱을 꼈다. 조현석 파트장만 나를 똑바로 봤다.첫 번째 삶의 나는. 여기서 고개를 숙였다.죄송합니다. 제가 더 확인했어야 했습니다.그 한마디로. 3년 치 평가가 결정됐다.* * *나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팀장님.”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천천히.“테스트하다 이상하면 출하 멈출 수 있게 하자는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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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싫으면 안 알려주셔도 됩니다

신호가 네 번 갔다.다섯 번째에.“……어.”철호 형이었다.“형. 기리입니다.”“알아.”형 목소리가 낮았다. 뒤에서 기계 소리가 들렸다. 어딘가 새 일자리를 알아보러 공장 견학이라도 온 모양이었다.“2호라인 터졌다며. 소문 벌써 났어. 여기까지.”“네.”“그래서 전화했냐.”나는 숨을 쉬었다.“네. 형 때문에 전화했습니다.”* * *전화 너머가 조용해졌다.길었다.“기리야.”“네.”“나 그 회사에서 투명인간 취급받다가 나왔어.”“압니다.”“석 달 동안 아무도 나한테 뭐 물어본 적 없어. 회의에서 말하면 눈치 주고. 그러다 나가라고 하고.”“압니다.”“근데 이제 와서. 도와달라고?”“네.”거짓말하지 않았다.“형. 싫으면 안 알려주셔도 됩니다.”* * *첫 번째 삶에서.나는 이 전화를 하지 않았다.떠난 사람한테 전화하는 건. 회사 입장에선 창피한 일이었고. 내 입장에선 무서운 일이었으니까.그래서 2주 동안. 공장 전체가 헤맸다.고객사는 물량을 다른 회사로 돌렸다.그리고 누군가 책임을 져야 했고.그게 나였다.두 번째 삶에서.나는 창피해도. 무서워도.전화했다.* * *“……존나 싫다.”형이 말했다.그리고 긴 한숨.“근데 알려줄게.”나는 눈을 감았다.“하단 볼트. 옮겨온 기계들. 옛날 공장 바닥이 기울어서 와셔 하나 더 끼워야 수평이 맞아. 매뉴얼대로 빼면 헐거워져. 그거 공책에 있잖아. 너 찍어갔잖아.”“네. 근데 형이 직접 말해주셔야 합니다. 고객사에 보고해야 해서요.”형이 웃었다.“고객사한테 박철호가 그랬다고 쓸 거냐?”“설비 이설 담당자 확인이라고 쓰겠습니다. 형 이름은 형이 원하시면.”잠깐.“……이름은 빼. 나 여기 면접 보는 중이야.”“알겠습니다.”“그리고 기리야.”“네.”“칸이 없어서 그래. 회사 시스템에 그런 거 적을 칸이 없어. 그러니까 나 나가면 없어지는 거지.”형의 목소리가 조금 쓸쓸해졌다.“다음 사람은. 칸 좀 만들어줘라.”* * *오후 다섯 시.2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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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오래 계실 분이네요

본사 보고서가 내려온 다음 날.오후 세 시.2호라인 뒤편 주차장.정비 업체 승합차 한 대가 트렁크를 열어놓고 있었다.앳된 얼굴의 기사 하나가 공구함을 싣고 있었다. 스물셋쯤. 작업복 가슴에 업체 이름.와셔를 넣지 않은 사람.정확히는. 넣으라는 말을 아무에게도 듣지 못한 사람.“어디 가십니까.”기사가 고개를 들었다. 나를 알아보는 데 조금 걸렸다.“아. 품질.”“짐 싸시네요.”“내일부터 울산 현장이래요.”그가 웃었다.웃는 게 아니었다.“SG에서 보고서가 내려왔대요. 정비 기사 숙련 부족. 사장님이 SG 눈치 보인다고. 저 빼래요.”* *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첫 번째 삶에서. 나는 이 사람 얼굴을 몰랐다.그때도 보고서는 이렇게 나갔을 것이다. 나는 읽지도 않았다. 내 탓만 아니면 됐으니까.그리고 이 사람은. 어딘가로 옮겨졌을 것이다.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기사님. 와셔. 매뉴얼에 있었습니까?”“없었어요. 매뉴얼대로 했어요.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목소리가 떨렸다.“근데 제가 잘못한 거래요.”* * *“기사님. 울산 가지 마세요. 오늘 하루만.”“네?”“사장님한텐 SG 품질이 붙잡았다고 하세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기사가 나를 멍하니 봤다.나는 사무실로 뛰어 올라갔다.* * *본사에 메일을 쓰면. 답은 일주일 뒤에 온다. 그 사이 이 사람은 울산에 가 있다.그래서 장성호한테 갔다.“팀장님. 본사 보고서 원인이 정비 기사 개인으로 나갔습니다.”“알아. 본사가 정리했지.”“그 기사가 내일 교체됩니다. 이 보고서 때문에.”장성호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업체 인사를 왜 우리가 신경 써.”“팀장님. 지난주 고객사한테는 원인이 기록 단절이라고 팀장님 이름으로 보냈습니다.”장성호의 손이 멈췄다.“고객사한테는 관리 문제라고 하고. 본사 보고서엔 기사 실수라고 하면. 고객사가 두 개를 나란히 보는 날. 팀장님이 설명하셔야 합니다.”장성호가 나를 봤다.그 눈에서 계산이 돌아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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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이번엔 그녀가 싸운다

“저녁 먹는 사람이 줄었대요.”늦은 식사 시간. 윤서연이 배식대 뒤에서 총무팀 자료를 흔들었다.“그래서 석식 줄이고. 조리원 한 분 내보낸대요.”“줄었습니까?”“아니요.”그녀가 자료를 탁 내려놓았다.“여섯 시에 드시던 분들이. 여덟 시로 옮겨간 거예요. 늦은 식사 예약으로. 그분들은 이 숫자에 안 들어가요. 제가 종이로 받았으니까.”그녀가 웃었다.웃는 게 아니었다.“제가 밥 남겨드리려고 센 사람들이. 저녁 줄이자는 근거가 됐어요.”* *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그리고 입이 먼저 움직였다.“제가 총무팀장한테 한번.”“아니요.”그녀가 바로 잘랐다.“주임님이 나서시면. 주임님 일이 돼요. 이건 제 일이에요.”나는 멈췄다.그녀가 행주를 접었다.“대신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네.”“품질팀 야근. 진짜로 몇 번이나 하셨는지. 공개해도 되는 것만. 알려주세요.”“그것만요?”“네. 그것만.”* * *그날 밤.나는 사무실에 남아 우리 팀 야근 기록을 열었다.봄에는 가끔이던 이름들이. 여름부터는 거의 매일 있었다.민수. 아니, 민수는 아직 다른 팀이었다.전진주. 조현석. 나.2호라인이 터진 뒤로. 우리 팀은 저녁을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많았다.그리고 굶지 않은 날은.전부 그녀의 보온함 덕분이었다.* * *회의 전날.그녀가 퇴근길에 벤치에 앉아 있었다.위생복 위에 패딩을 걸치고. 급식업체 관리자와 통화 중이었다.“인원 줄이면 설거지 시간이 안 나와요.”잠깐 침묵.“네. 효율화 알아요. 근데 늦은 식사 예약까지 넣으면 이용자 안 줄었어요.”또 침묵.“사람 한 명 빼는 걸. 제가 운영 개선했다고 보고서에 쓰지는 않을게요.”통화가 끝났다.그녀가 휴대전화를 무릎에 내려놓고 하늘을 봤다.나는 자판기에서 유자차를 뽑아 내밀었다.“필요해 보이셔서요.”그녀가 받았다.“업체에서는 제가 제일 말 안 듣는 영양사래요.”“회사에서는 제가 제일 피곤하게 사는 주임이랍니다.”“둘 다 인기 없겠네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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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내 위에 앉았던 남자

홍민수.2014년 입사. 나보다 1년 늦게 들어왔고, 나이는 세 살 많은 후배.그리고 첫 번째 삶에서.2023년. 품질 파트장 홍민수.그 인사 발령이 나던 날. 나는 서른여섯이었고, 여전히 주임이었다. 민수는 내 자리를 지나가며 어색하게 웃었다.“선배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그날 밤 나는 소주 두 병을 마셨다. 다음 날 지각했다.그 뒤로 3년.내 보고서는 민수 이름으로 올라갔다.* * *아침 여덟 시.사무실.민수가 박스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선배님. 오늘부터 옆자리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허리를 90도로 숙였다.서른둘. 안경. 성실해 보이는 얼굴. 약간 촌스러운 넥타이.첫 번째 삶의 파트장 홍민수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아직은.“……어. 잘 부탁해.”목소리가 생각보다 차갑게 나왔다.민수가 눈치를 보며 박스를 풀었다.* * *장성호가 지나가며 말했다.“김 주임. 민수한테 고객 대응 좀 가르쳐줘. 2호라인 건도 같이 보고.”그리고 덧붙였다.“김 주임 하는 거. 민수도 할 수 있게.”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대체인력.내 칸이 유지에서 한 칸 움직이려면. 내 자리를 대신할 사람이 필요하다.그게 민수였다.* * *민수는 빨랐다.첫날엔 프린터 비밀번호도 몰랐다. 사흘째엔 고객사 메일을 혼자 썼다. 일주일째엔 내가 반나절 걸리던 자료를 두 시간에 만들었다.그리고 모르는 게 있으면 바로 물었다.“선배님. 이거 이렇게 하는 거 맞습니까?”“선배님. 고객사 담당자분 성함이.”“선배님. 제가 한 번 해보고 봐주시겠습니까?”진지했다. 너무 진지해서 가끔 웃겼다.그런데 웃기지가 않았다.민수가 빠를수록.첫 번째 삶의 인사 발령 날이.자꾸 떠올랐다.* * *2주째 월요일.고객사에서 메일이 왔다.성적서 양식이 11월부터 바뀐다는 공지. 받는 사람은 나. 참조는 없었다.나는 그 메일을 읽었다.그리고.민수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 *금요일.민수가 처음으로 혼자 고객사에 성적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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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엄마의 통장

토요일 오전 열 시.엄마한테 전화했다.첫 번째 삶에서 나는 엄마한테 먼저 전화한 적이 거의 없다. 명절, 생일, 그리고 엄마가 걸어올 때만. 받으면 늘 바쁘다고 했다. 회의 중이라고. 이따 다시 건다고.다시 건 적은 없었다.두 번째 삶에서 나는 토요일 오전 열 시를 비워뒀다.“엄마.”“어? 기리야. 웬일이야. 토요일 아침부터.”“그냥요. 밥 드셨어요?”“먹었지. 너는?”“지금 먹으려고요.”“또 늦게 먹네.”엄마 목소리는 첫 번째 삶의 마지막 통화 때보다 훨씬 젊었다.그게 이상하게 목이 멨다.* * *“엄마. 이번 달 통장 보셨어요?”“봤어. 또 많이 보냈더라. 그만 보내. 너 월급으로 어떻게 그렇게 보내.”엄마는 모른다.내가 월급만 받는 게 아니라는 걸.2013년 봄. 회귀한 지 석 달째. 나는 첫 월급의 절반을 비트코인에 넣었다. 그때 한 개에 십몇만 원이던 것이 지금은 수십만 원이었다. 그리고 내 노트에 따르면.내년 겨울. 이천만 원을 넘는다.미연에게 7억을 잃고도 내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였다.“괜찮아요. 회사에서 성과급 나왔어요.”“성과급? 너 진급도 안 됐다며.”엄마는 눈치가 빨랐다.“진급은 안 됐는데 성과급은 나왔어요.”“그런 게 어딨어.”“요즘 회사는 그래요.”엄마가 한숨을 쉬었다.“기리야. 너 회사에서 힘들지.”* * *나는 대답을 골랐다.첫 번째 삶에서 나는 13년 동안 이 질문에 한 가지 대답만 했다.괜찮아요.진급에서 빠진 날도. 후배가 파트장이 된 날도. 회식에서 혼자 남아 소주를 마신 날도.괜찮아요.그리고 서른아홉 살의 어느 밤. 경찰이 엄마한테 전화를 했을 것이다.그때 엄마는 알았을까. 아들이 하나도 안 괜찮았다는 걸.“……조금요.”전화 너머가 조용해졌다.“조금 힘들어요. 근데 버틸 만해요.”엄마가 한참 말이 없었다.그리고 말했다.“처음이네.”“네?”“너 힘들다고 한 거. 처음이야.”* * *오후.엄마 집에 갔다.부산 외곽. 엘리베이터 없는 오래된 아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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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평생 참치 계약서

병원 옥상.바람이 셌다.동팔이가 간호사복 위에 패딩을 걸치고 난간에 기대 있었다. 손에는 캔커피. 뜯지도 않은.“왜 이 시간에 옥상이야. 무섭게.”“여기가 병원에서 유일하게 조용한 데야.”녀석이 웃었다. 눈 밑이 검었다.“오늘 나이트 끝나고 데이. 데이 끝나고 또 이브닝. 사람이 없어서.”“몇 시간 잤냐.”“네 시간? 세 시간?”* * *첫 번째 삶에서 동팔이는 간호사가 아니었다.두 번째 삶에서 나는 녀석한테 간호학과 원서를 내밀었다. 억지로. 싸우면서.그리고 녀석이 사고를 쳤을 때. 합의금 1억을 내가 대신 냈다.“갚지 마. 대신 평생 참치 사.”그게 계약이었다.녀석은 3년 동안 매달 참치를 샀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이트 끝나고 눈이 벌건 채로도.그리고 오늘.옥상.* * *한참 말이 없었다.그러다 녀석이 불쑥 말했다.“오늘 새벽에 할머니 한 분 돌아가셨어.”나는 녀석을 봤다.“내가 맡은 환자. 여든둘. 나한테 맨날 사탕 주던 할머니. 간호사 선생 얼굴이 너무 핼쑥하다고.”녀석이 캔커피를 손에서 굴렸다.“새벽 네 시에. 콜벨이 울렸는데. 내가 다른 병실에 있었어. 삼 분 늦었어.”“…….”“삼 분.”녀석이 웃었다.“선배들은 그러더라. 원래 그런 거라고. 삼 분이면 빠른 거라고. 근데 할머니 손이. 아직 따뜻했어.”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첫 번째 삶에서 동팔이는 이런 밤을 몰랐다.두 번째 삶에서 나는 녀석에게 이 밤들을 줬다.사람을 살리는 일. 그리고 가끔은. 삼 분 늦는 일.“동팔아.”“응.”“밥은 먹었냐.”“……아니.”녀석이 웃었다.“그 얘기 하려고 부른 거 아니야. 다른 거야.”* * *“기리야.”“응.”“나 이번 달 참치. 못 살 것 같다.”녀석이 캔커피를 만지작거렸다.“근무표가 엉망이야. 날짜를 못 잡겠어.”“그럼 다음 달에 사.”“그러면 계약 위반이잖아.”녀석이 웃었다.웃는 게 아니었다.“나 가끔 무서워. 너한테 1억 빚진 거. 평생 참치로 갚는 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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