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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옆집의 그녀: Chapter 11 - Chapter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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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연습한 첫마디

부산으로 내려오는 KTX 안에서 나는 한 문장을 백 번쯤 고쳐 썼다."혹시… 예전에 83번 버스 타지 않으셨어요?"너무 늦다. 십 년도 더 된 버스를 누가 기억하나."저 맞은편 집 사는 사람인데요."이건 안 된다. 맞은편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그녀는 창문을 떠올릴 거다. 창문을 떠올리면, 그 다음은.나는 휴대폰 메모장을 지웠다. 옆자리 친구는 입을 벌린 채 자고 있었고, 차창 밖으로 낯선 논밭이 흘러갔다. 강릉의 밤바다, 호텔 로비의 노란 불빛, 감자옹심이집 창가 자리에서 그 남자가 그녀의 앞접시에 옹심이를 덜어주던 손. 그 장면들이 기차 바퀴 소리에 맞춰 반복 재생됐다.괜찮다. 남자친구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사촌일 수도 있고, 병원 동료일 수도 있다. 동료끼리 강릉에 가서 같은 호텔에 들어가는 일이, 없으란 법은 없으니까.그렇게 생각하자 이상하게 숨이 편해졌다.나는 그때 몰랐다. 그 편안함이 거짓말을 삼킨 뒤에 오는 편안함이라는 걸.집에 도착한 건 저녁 여덟 시 사십 분이었다.캐리어를 현관에 던져두고 신발도 제대로 벗지 않은 채 방으로 들어갔다. 불은 켜지 않았다. 불을 켜면 저쪽에서 이쪽이 보인다는 걸, 나는 언제부터 알고 있었을까.맞은편 창문은 어두웠다.아홉 시 칠 분. 계단 아래서 발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고, 조금 지친, 운동화 밑창이 시멘트를 스치는 소리. 이제 나는 그 소리만으로 그녀를 구분할 수 있었다. 곧이어 강아지 두 마리가 문 안쪽에서 낑낑대는 소리. 철문이 열리고, 닫히고, 불이 켜졌다.그녀도 여행에서 돌아온 것이다.그 사실 하나가 가슴을 이상하게 달궜다. 같은 날, 같은 도시에서 출발해, 거의 같은 시간에 각자의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 거리 2미터. 이걸 우연이라고만 부르기엔 너무 아까웠다.창문이 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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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83번 버스

한 뼘의 틈은 아침이 되어서야 닫혀 있었다.언제 닫혔는지 나는 모른다. 새벽 세 시 반쯤 벽에 기댄 채 잠들었으니까. 눈을 떴을 때 목이 돌아가지 않았고, 입 안에서는 담배 냄새가 났다. 맞은편 창문은 평소처럼 굳게 닫힌 채 햇빛만 튕겨내고 있었다.마치 어젯밤 일이 전부 내 착각이었다는 듯이.나는 샤워를 하면서 그 틈에 대해 생각했다. 불 꺼진 방. 열린 커튼. 누군가 밖을 보고 있는 것 같던 어둠.두 가지 해석이 가능했다.하나. 그녀가 계단에서 말을 건 남자를 이상하게 여겨, 불을 끄고 밖을 살폈다.둘. 그녀가 계단에서 말을 건 남자가 궁금해서, 불을 끄고 밖을 살폈다.샤워기 물줄기 아래서 나는 두 번째를 골랐다. 아주 자연스럽게. 첫 번째 해석은 물과 함께 배수구로 흘려보냈다.*그날 오후, 나는 오래된 기억 하나를 꺼냈다.고등학교 2학년. 83번 버스. 아침 일곱 시 이십 분.그 시절 나는 늘 뒷문 바로 앞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그리고 두 정거장 뒤, 여고 교복을 입은 한 학년 위 누나가 탔다. 단발머리. 하얀 이어폰 줄. 창밖을 볼 때 살짝 찌푸려지던 눈매.이름도 몰랐다. 말을 걸어본 적도 없었다. 그냥 그 버스를 타는 이유 중 하나였을 뿐이다.그런데 지금 와서 그 기억을 꺼내 들여다보니, 거기엔 없던 장면들이 자꾸 생겨났다.그녀가 나를 한 번 본 것 같았다. 비 오는 날, 내 우산 끝에서 떨어진 물이 그녀 신발에 튀었을 때, 그녀가 괜찮다는 듯 웃었던 것 같았다. 내가 내릴 때 그녀가 나를 눈으로 따라온 것 같았다.같았다. 같았다. 같았다.기억은 원래 이렇게 편집되는 법이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편집된 기억이 원본보다 훨씬 아름다웠으니까.십이 년 전 버스에서 스쳤던 누나. 그 누나가 지금 내 방 창문에서 2미터 떨어진 곳에 산다. 그리고 강릉에서 두 번이나 마주쳤다.누가 들어도, 이건 이야기가 된다.*다음 날, 나는 삼성병원에 갔다.명분은 있었다. 지난번 건강검진에서 간 수치가 조금 높게 나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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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커피 한 잔의 무게

"대기업 다니셨으면 여긴 좀 아쉬우시겠어요."남친.그 두 글자를 나는 사흘 동안 씹었다.처음엔 부정했다. 동료들끼리 장난으로 하는 말일 수도 있다. 간호사들은 원래 그런 농담을 잘한다고 들었다.썸 타는 사람을 남친이라고 부르며 놀리는 것도 흔한 일이다.그다음엔 계산했다. 강릉의 그 남자와 커피를 보낸 남자가 같은 사람이라는 증거는 없다. 없다. 없다.마지막엔, 비교했다.아이스 아메리카노 여섯 잔. 한 잔에 사천오백 원이라 치면 이만 칠천 원. 일주일에 두 번이면 오만 사천 원. 한 달이면 이십만 원이 넘는다.실업급여를 받는 나는, 그 돈을 커피에 쓸 수 없다.그 계산을 끝낸 순간 비참함이 목까지 차올랐다. 나는 그 남자의 얼굴도 제대로 모르면서, 그 남자에게 졌다.아니. 이건 경쟁이 아니다. 그녀는 아직 나를 모른다.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질 수 있나. 게임은 시작도 안 했다.그렇게 생각하자, 이상하게도 다시 기운이 났다.*목요일에는 두 번째 면접이 있었다. 해운대의 한 고객관리 아웃소싱 회사, CS 운영 매니저.그룹 면접이었다. 다섯 명이 나란히 앉았고, 나는 오른쪽 끝이었다. 옆의 지원자들은 대부분 스물다섯, 스물여섯이었다. 한 명은 자기소개에서 콜센터 상담원 3년 경력을 자랑스럽게 말했다."박동진 씨는 제조 대기업 출신이신데, CS 쪽은 처음이시죠? 현장 상담원 컴플레인을 직접 받아본 경험이 있으세요?""…직접적인 경험은 없지만, 생산 현장에서 협력업체와 조율하는 업무를 오래 했기 때문에…."면접관이 볼펜 끝으로 이력서를 톡톡 두드렸다. 그 리듬이 내 말의 가치를 세는 것 같았다.면접이 끝나고 엘리베이터에서 상담원 출신 지원자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악의는 없었다. 그래서 더 아팠다."아뇨, 뭐. 새로 시작하는 거죠."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나는 창에 머리를 기댔다. 새로 시작. 새로 시작. 입으로는 잘도 나오는 말이었다.그런데 새로 시작하고 싶은 게 정말 일이었을까.창밖으로 광안대교가 지나갔다. 나는 휴대폰 갤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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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토요일 저녁 일곱 시

토요일 아침, 원주에게서 전화가 왔다."동진아, 오늘 저녁 서면 콜? 나 모의고사 점수 올랐다. 기념으로 쏜다, 반반치킨."평소라면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원주가 쏜다는 건 일 년에 몇 번 없는 이벤트였다."…오늘은 안 돼. 선약 있어.""선약? 니가? 백수가 뭔 선약.""아, 그냥. 일이 좀 있다.""뭔데. 여자냐?"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원주가 휘파람을 불었다."오~ 박동진 드디어. 알았다, 잘해라. 다음 주에 썰 풀어라."전화를 끊고 나서 한참 휴대폰 화면을 봤다. 원주에게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여자 일이 맞았다. 다만 그 여자는 오늘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가고, 나는 그걸 보려고 친구의 치킨을 거절했을 뿐이다.그 문장을 속으로 끝까지 말하지 않으려고, 나는 청소기를 돌렸다.*오후 내내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세 시쯤 그녀의 창문이 열렸다. 이불을 터는 소리. 강아지 두 마리가 창틀에 앞발을 올리고 골목을 내려다봤다. 작은 쪽, 하얀 말티즈가 나를 향해 짖었다. 한 번, 두 번.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개는 계속 짖었다. 그녀가 창가로 와서 말티즈를 안아 들었다."왜, 뭐 있어? 아무것도 없잖아."그녀가 골목을, 그리고 내 창문 쪽을 잠깐 훑었다. 나는 커튼 뒤 바닥에 엎드린 채 숨을 참았다. 뺨에 닿은 장판이 차가웠다.개는 안다. 개는 사람보다 먼저 안다.그 생각이 들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런데 곧, 다른 생각이 그 위를 덮었다.'개가 날 기억하는 거야. 매일 보니까.'그녀의 강아지가 나를 알아본다. 나는 그걸, 그녀의 세계에 내 자리가 조금 생긴 거라고 받아들였다.*여섯 시. 그녀가 샤워를 했다.여섯 시 반. 머리를 말리는 드라이어 소리가 골목까지 울렸다. 창가 화장대 앞, 반쯤 열린 커튼 사이로 그녀가 립스틱을 바르는 옆모습이 보였다. 평소 출근길의 맨얼굴이 아니었다. 속눈썹을 올리고,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으로 말아 넘기고, 거울 속 자신을 향해 한 번 입꼬리를 올려봤다.누군가에게 예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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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새벽 한 시의 헤드라이트

그 숫자 네 개를 나는 메모장에 적었다.적어놓고, 그걸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을 멈췄다. 멈춘 게 아니라, 거기까지 가면 내가 무슨 사람이 되는지 정확히 알아서, 일부러 고개를 돌렸다.'그냥 적어둔 거야. 기억력 테스트 같은 거지.'메모장 제목은 '장보기 목록'이었다. 나는 그 제목을 한참 들여다보다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편의점에서 소주 두 병과 컵라면을 샀다.방에 불을 끄고 창가에 앉아 마셨다. 맞은편 창문은 캄캄했다. 강아지들만 가끔 현관 쪽에서 낑낑댔다. 주인이 없는 집. 기다리는 개들. 기다리는 나.술이 들어가자 머릿속이 시끄러워졌다.재홍의 목소리. 왜 욱해서 좋은 회사 뛰쳐나왔냐.면접관의 볼펜. 톡, 톡, 톡.상담원 출신 지원자. 대기업 다니셨으면 여긴 좀 아쉬우시겠어요.그리고 그 남자. 조수석 문을 열어주던 손."결혼한 것도 아니잖아."소리 내어 말했다. 목소리가 방 안에서 이상하게 울렸다."사귄다고 끝난 거 아니잖아. 사람 마음 변하는 거, 하루아침이야."맞다. 나도 대학 때 여자친구를 다른 남자에게 뺏긴 적이 있다. 그 반대도 있었다. 연애는 원래 그런 거다. 먼저 만났다고 이기는 게 아니다.나를 알게 되면. 제대로, 제대로 알게 되면.그녀는 12년 전 버스의 그 소년을 기억할 것이다. 강릉에서의 우연을 신기해할 것이다. 조수석 문이나 열어주는 평범한 남자보다, 운명처럼 계속 마주친 사람이 더 특별하다는 걸 깨달을 것이다.소주 한 병이 비었다. 나는 두 번째 병의 뚜껑을 비틀었다.휴대폰이 울렸다. 문자였다.[해운대 ○○아웃소싱] 박동진 님, 귀하의 역량은 충분하나 아쉽게도 이번 채용에서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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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갈 곳 없는 버스

버스는 붐볐다.그녀는 앞문 쪽 손잡이를 잡았고, 나는 뒷문 쪽에 섰다. 사이에 사람이 여섯 명쯤 있었다. 딱 좋은 거리였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면 내가 보이고, 보이지 않으려면 반 걸음만 옆으로 비키면 되는 거리.나는 그 거리를 계산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계산을 멈추지 않았다.그녀는 이어폰을 끼고 창밖만 봤다. 가끔 휴대폰을 확인하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어젯밤 그 남자의 메시지겠지. 나는 그 미소가 나오는 순간마다 눈을 돌렸다가, 다시 봤다.아홉 정거장. 병원 앞.그녀가 내렸다. 나는 내리지 않으려 했다. 정말로. 그런데 문이 닫히기 직전, 발이 먼저 움직였다."아, 잠깐만요! 내려요!"기사가 짜증스럽게 문을 다시 열었다. 몇 명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내렸다. 그녀는 이미 횡단보도를 건너 병원 정문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를 보지 못했다. 다행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한 게, 이상했다.*병원 1층 카페에 앉았다.노트북을 펼치고 채용 사이트를 열었다. 경영지원, 일반관리, 서비스 운영. 스크롤을 내렸다. 공고 제목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삼십 분마다 카페 유리벽 너머 로비를 봤다. 그녀가 지나갈 리 없다는 걸 알면서.열한 시쯤,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동진아, 밥은 묵었나.""어, 먹었어.""요새 면접은 우째 되노. 저번에 본 데는.""…아직 결과 안 나왔어. 괜찮은 데야."거짓말이 너무 쉽게 나왔다. 불합격 문자는 어젯밤에 받았다."그래, 니가 어련히 잘 하겠나. 근데 동진아, 옆집 영숙이 아지매 아들 있제. 걔 이번에 장가간단다. 니보다 두 살 어린 거.""엄마, 나 지금 좀 바빠.""뭐가 바쁜데. 백수가."엄마는 웃자고 한 말이었다. 나는 웃지 않았다.전화를 끊고 식은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쓴맛이 혀 뒤쪽에 오래 남았다. 대기업 다니던 아들. 명절마다 친척들 앞에서 엄마가 은근히 자랑하던 아들. 지금 그 아들은 병원 카페에 앉아, 자기를 모르는 여자가 지나가길 기다리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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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합석

"…네. 앉으세요."내 목소리가 내 것 같지 않았다.남자는 고맙다며 맞은편 의자를 빼 앉았다. 쇼핑백을 발치에 내려놓았다. 병원 약국 로고가 찍힌 서류 봉투, 샘플 박스 같은 것들이 보였다.가까이서 본 그는 더 평범했다. 쌍꺼풀 없는 눈. 약간 넓은 콧방울. 턱에 면도하다 벤 작은 상처. 셔츠 소매 끝이 살짝 해져 있었다.이 사람이다. 강릉 호텔에 들어간 사람. 옹심이를 덜어준 사람. 어젯밤 차 안에서 오 분 동안.나는 테이블 밑에서 주먹을 쥐었다."취업 준비하시나 봐요."남자가 내 노트북 화면을 흘끗 보며 말했다. 채용 사이트가 그대로 떠 있었다. 나는 황급히 화면을 반쯤 덮었다."아, 네. 뭐… 이직 준비요.""아이고, 요즘 힘들죠. 저도 작년에 이직했는데 한 여섯 달 고생했어요. 서류만 오십 군데 넣었나."그는 웃으며 말했다. 자랑도 동정도 아닌, 그냥 사실을 말하는 말투였다.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고개만 끄덕였다.그의 휴대폰이 테이블 위에서 진동했다. 화면이 켜졌다.잠금화면 사진.그녀였다. 강아지 두 마리를 양팔에 안고 눈을 찡그린 채 웃는 얼굴. 배경은 바다. 강릉이었다.남자가 전화를 받았다."응, 자기야. 지금 1층이야. 커피 기다리는 중. …어, 여덟 잔 샀지. 수간호사님 거 따뜻한 걸로 하나 따로 했고. …알았어, 알았어. 이따 올라갈게."자기야.그 세 글자는 커피보다 훨씬 썼다.전화를 끊은 남자가 멋쩍게 웃었다."여자친구가 여기 간호사라서요. 제가 담당 병원이기도 하고. 하하, 공사 구분이 좀 안 되죠.""…아, 네.""결혼 준비하려면 점수 따놔야 돼서요."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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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커튼은 좀 달아라

원주는 신발을 벗자마자 냉장고를 열었다."맥주 있나. 오, 있네. 근데 니 냉장고 왜 이 모양이고. 소주밖에 없노.""그냥 둬라."원주는 치킨을 방바닥에 펼쳐놓고 양반다리로 앉았다. 반반. 양념 반, 후라이드 반. 고등학교 때부터 한 번도 바뀌지 않은 조합."모의고사 몇 점 올랐는데.""칠 점. 이번엔 진짜 된다. 느낌 온다."원주는 올해로 공무원 시험 4년째였다. 떨어질 때마다 원주는 술을 마시고, 욕을 하고, 다음 날 아침 여섯 시에 독서실에 갔다. 누구 탓도 하지 않았다. 시험 탓도, 경쟁률 탓도, 부모 탓도.나는 그게 가끔 이해가 안 됐다. 그리고 가끔, 부러웠다."그래서. 선약. 여자. 썰."원주가 닭다리를 내 입 앞에 들이밀었다. 나는 그걸 받아 들고 한참 망설였다."…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오오오.""근데 남자친구가 있더라.""아이고. 끝났네."원주는 너무 쉽게 말했다. 끝났네. 그 두 글자가 가슴을 찔렀다."아직 모르지. 결혼한 것도 아니고.""동진아. 남친 있으면 끝난 거다. 니가 무슨 드라마 찍나.""그 여자가 결혼 얘기하면 아직 멀었다고 한다던데.""그걸 니가 어떻게 아는데?"나는 말을 멈췄다. 원주가 닭다리를 뜯다 말고 나를 봤다."…그 남친이랑 우연히 얘기할 일이 있었어.""뭔 우연이 그렇게 되노. 그 여자는 어디서 만났는데. 소개팅? 앱?""…옆집."원주가 고개를 돌렸다. 내 방 창문. 그리고 그 너머 2미터 거리의 맞은편 창문. 나는 원주의 시선이 거기 멈추는 걸 봤다.창가에 놓인 의자. 창문 쪽을 향해 돌려져 있었다. 창틀 위에 수북한 재떨이. 빈 맥주캔 세 개.원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길었다."…여기서 다 보이네.""뭐가.""저 집. 완전 코앞인데.""동네가 원래 이래. 달동네가 다 이렇지."원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치킨을 먹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이었지만, 나는 봤다. 원주가 그 의자를 한 번 더 쳐다본 걸."동진아. 좋으면 정상적으로 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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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떡

정상적으로.원주의 말이 사흘 동안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정상적인 방법을 골랐다. 가장 정상적이고, 가장 오래된 방법.떡.시장 떡집에서 시루떡 한 판을 샀다. 이사 온 지 1년이 넘은 집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이웃에게 떡을 돌리는 데 유통기한은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떡을 두 개의 플라스틱 용기에 나눠 담았다. 하나는 아래층 할머니 집. 하나는 맞은편.할머니 집을 먼저 가는 건 전략이었다. 누가 물어보면 동네에 다 돌렸다고 말할 수 있도록. 나는 그 전략을 세우면서, 이게 정말 정상적인 사람의 생각인지 잠깐 의심했다. 그리고 곧 의심을 접었다.*토요일 오후 세 시. 그녀가 쉬는 날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생각하지 않았다.맞은편 주택의 녹슨 철문 앞에 섰다. 초인종 옆에 스티커 하나가 붙어 있었다. '강아지 있어요. 놀라지 마세요 ^^'. 동글동글한 손글씨. 그녀의 글씨였다.나는 그 스티커를 한참 봤다. 그녀의 글씨체를 처음 알게 됐다. 그 사소한 정보 하나가 이상하게 가슴을 뜨겁게 했다.초인종을 눌렀다.강아지 두 마리가 미친 듯이 짖었다. 안에서 발소리가 났다. 문이 열렸다.그녀가 아니었다.오십 대 중반쯤의 여자. 앞치마를 두르고, 고무장갑을 낀 채였다. 눈매가 닮아 있었다. 고양이 같은, 살짝 올라간 눈꼬리."네, 누구세요?""아, 안녕하세요. 저 저기 맞은편 4층에 사는 사람인데요. 동네에 떡 좀 돌리고 있어서요."준비한 대사였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에게 놀랐다."아이고, 요즘도 이런 걸 하는 사람이 다 있네. 고마워라."그녀의 어머니는 고무장갑을 벗고 떡을 받았다. 환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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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어떻게 아셨어요

어디서 뵌 적 있죠.그 한 문장이 내 안에서 폭죽처럼 터졌다. 기억한다. 그녀가 나를 기억한다. 83번 버스. 12년 전 아침 일곱 시 이십 분."아, 그… 혹시 83번 버스.""네?""고등학교 때요. 저 ○○고 다녔는데, 아침에 83번 타셨죠? 여고 교복 입고. 제가 한 학년 아래였는데."그녀의 얼굴에 잠깐 공백이 스쳤다. 그리고 곧, 놀란 듯한 웃음."어? 저 83번 탔어요. 헐, 진짜요? 그걸 기억하세요?""네, 뭐. 그냥… 얼굴이 좀 익숙해서.""와, 신기하다. 근데 저는 그건 기억이 안 나고, 요 앞 계단에서 한 번 뵌 것 같아서요. 저번에 사람 잘못 보셨다고."아.계단. 그녀가 기억하는 건 12년 전 버스가 아니라, 일주일 전 밤의 계단이었다.나는 웃었다. 웃어야 했다."아, 맞아요. 그때 제가 착각을 해서. 죄송했어요, 놀라셨죠.""아니에요, 괜찮아요. 근데 83번 진짜 신기하다. 세상 좁네요."세상 좁네요. 그녀는 그 말을 가볍게 했다. 인사치레처럼. 하지만 나에게 그 말은 하나의 증거였다. 그녀도 느끼고 있다. 이 우연의 무게를.*우리는 문 앞에서 오 분쯤 이야기했다.그녀는 병원 이야기를 조금 했다. 야간 근무가 많다는 것. 강아지들 이름이 '콩이'와 '두부'라는 것. 말티즈가 두부, 푸들 믹스가 콩이. 두부가 겁이 많아서 낯선 사람을 보면 짖는다는 것."근데 신기하게 지금은 안 짖네요. 두부야, 너 이 오빠 알아?"두부가 내 슬리퍼 냄새를 킁킁거렸다. 창틀 너머로 나를 향해 짖던 그 개였다."동네에서 자주 봐서 그런가 봐요."나는 말했다. 그녀는 그렇구나, 하고 웃었다.그녀에게서 샴푸 냄새가 났다. 달큰하고 조금 풀 냄새가 섞인 향. 나는 그 향이 어느 샴푸인지 몰랐다. 하지만 그 향이 퍼지던 시간은 알았다. 밤 아홉 시 사십 분쯤. 욕실 작은 창에 김이 서리고, 이십 분 뒤 수건을 두른 채 방으로 들어오는 시간.그 기억이 떠오르는 순간, 온몸의 피가 얼굴로 몰렸다. 그녀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창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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