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맨스 / 옆집의 그녀 / Chapter 41 - Chapter 50

All Chapters of 옆집의 그녀: Chapter 41 - Chapter 50

72 Chapters

41화 안

문을 닫았다. 뒤에서, 조용히.어둠이 나를 삼켰다. 완전한 어둠은 아니었다. 암막 커튼 가장자리로 가로등 불빛이 가늘게 새어 들어와, 방 안의 윤곽을 희미하게 그렸다. 눈이 적응하기까지 몇 초가 걸렸다.그 몇 초 동안 나는 숨을 쉬지 않았다.심장 소리가 귀 안에서 울렸다. 너무 커서, 이 집 벽을 타고 아래층 할머니 방까지 들릴 것 같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발끝도. 그런데 얼굴은 불타듯 뜨거웠다.그리고 그 모든 것 아래에서, 무언가가 부풀어 올랐다.들어왔다. 내가. 그녀의 집에.몇 달 동안 2미터 너머에서 바라보던 곳. 실루엣으로만, 소리로만 알던 곳. 그 한가운데에 내가 서 있었다. 누구도 모르게. 그녀조차 모르게.그 감각은 설명할 수 없었다. 무서웠다. 미칠 것처럼 무서웠다. 그리고 동시에, 태어나서 가장 강렬하게 살아 있다고 느꼈다.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그때 나는 생각하지 않았다.*현관은 좁았다. 신발장 위에 강아지 리드줄 두 개가 걸려 있었다. 분홍색과 하늘색. 바닥에 운동화 한 켤레, 슬리퍼, 그리고 병원용 흰색 크록스.거실이라고 부르기엔 작은 공간. 이 층 주택을 나눠 세를 준 원룸 구조였다. 작은 부엌, 작은 식탁, 그리고 창가 쪽으로 방 하나.내가 늘 보던 창문이 저 방에 있었다.식탁 위에 약봉지가 있었다. 동물병원 이름이 적힌. 두부의 발 치료약이었다. 그 옆에 반쯤 마신 텀블러. 달력. 달력에는 빨간 펜으로 근무표가 적혀 있었다. D, E, N, OFF. 동그란 글씨.내가 불빛으로 추측하던 근무표가, 거기 그대로 적혀 있었다. 나는 거의 다 맞혔다.그 사실에 이상한 뿌듯함이 스쳤다. 그리고 곧, 속이 뒤집혔다.냉장고 문에 사진이 붙어 있었다. 자석으로. 여러 장.부모님과 찍은 사진. 언니와 찍은 사진. 두부와 콩이의 아기 때 사진. 그리고 도윤과 찍은 사진들.한두 장이 아니었다. 즉석 사진 부스에서 찍은 네 컷 사진이 줄줄이 붙어 있었다. 사진마다 구석에 날짜가 찍혀 있었다. 가장 오래된 것은 육 년 전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2
Read more

42화 일기장

한서연.이름을 알게 된 순간, 방이 달라 보였다.이건 옆집 누나의 방이 아니었다. 창문 속 실루엣의 방도 아니었다. 한서연이라는 사람이 사는 방이었다. 서른 살. 간호사. 육 년 사귄 남자친구와 내년 봄에 결혼하는. 부모님과 언니가 있고, 강아지 두 마리를 키우고, 달력에 근무표를 빨간 펜으로 적는.실존하는 한 사람.그 생각이 들자 발밑이 흔들렸다. 나는 지금 한 사람의 집에 들어와 있다. 그 사람의 허락 없이. 그 사람이 대구에서 시부모 될 사람들 앞에 앉아 떨고 있는 동안.그런데 나는 나가지 않았다.*청첩장 시안 아래, 연락처가 인쇄되어 있었다. 신랑 측, 신부 측. 휴대폰 번호 두 개.나는 그 숫자를 읽었다. 한 번. 읽고 나서, 읽었다는 걸 후회했다. 그리고 그 후회가 무색하게, 숫자는 머릿속에 박혔다. 번호판의 숫자 네 개처럼. 부르지도 않았는데.봐서는 안 될 것을 봤다.나는 청첩장을 봉투에 다시 넣었다. 원래 삐져나와 있던 만큼만. 각도까지 맞춰서.그리고 책상 한쪽에 놓인 노트를 봤다.두꺼운 하드커버.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간호 업무 노트인 줄 알았다. 그런데 표지에 작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두부 얼굴을 그린 캐릭터 스티커. 그리고 매직으로 적힌 글씨.'서연이 마음 정리 노트'손이 먼저 움직였다. 머리가 말리기도 전에.*앞부분은 평범했다.병원 이야기. 힘든 환자, 고마운 보호자, 수간호사에게 혼난 날. 도윤과 싸운 날, 화해한 날. 두부가 아팠던 날. 짧게, 날짜와 함께.나는 페이지를 넘겼다. 빠르게.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나를. 이 노트 어딘가에 내가 있을 것이다.있었다.─ 계단에서 모르는 남자가 불렀다. 사람 잘못 봤다고 함. 괜히 심장이 쿵쾅.─ 맞은편 남자가 떡을 줬다. 엄마가 좋은 총각이라고 칭찬. 83번 버스 얘기를 하던데 난 기억이 안 난다. 근데 내가 밤에 두부 산책하는 걸 어떻게 알지?─ 공원에서 그 사람을 또 봤다. 아침 산책 시간 바꾼 지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도윤이 표정이 굳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2
Read more

43화 옷장

삑. 삑.온몸의 피가 얼어붙었다.삑. 삑. 삑.그녀일 리 없었다. 대구에 있다. 일요일 밤에 온다고 했다.그렇다면 누구.삑.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짧은 멜로디가 울리기 직전, 몸이 먼저 움직였다. 노트를 책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고, 방 안을 둘러봤다. 침대 밑은 너무 낮았다. 창가는 커튼뿐이었다.옷장.문을 열고 들어갔다. 옷걸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문을 당겨 닫았다.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넓이의 틈이 남았다.철문이 열렸다."아우, 깜깜해."여자 목소리. 그녀가 아니었다. 조금 더 낮고, 조금 더 거칠었다. 언니였다.그리고 그다음 소리가 나를 완전히 무너뜨렸다.발톱이 바닥을 긁는 소리. 킁킁거리는 소리.콩이였다.*현관 불이 켜졌다. 옷장 문틈으로 가느다란 빛이 새어 들어왔다."콩아, 잠깐만 있어. 언니 사료만 가지고 갈게. 서연이는 왜 사료를 안 챙겨줘가지고."언니가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찬장 여는 소리. 봉지 부스럭거리는 소리.콩이는 따라가지 않았다.발톱 소리가 방 쪽으로 다가왔다. 천천히. 킁킁. 킁킁. 방문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나는 옷장 안에서 숨을 멈췄다. 코트 자락이 얼굴에 닿아 있었다. 섬유유연제 냄새. 그녀의 냄새. 한 시간 전만 해도 나를 들뜨게 하던 그 냄새가, 이제는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콩이가 책상 앞에서 킁킁거렸다. 의자 다리. 책상 밑. 그리고 옷장 앞.멈췄다.옷장 문틈 아래, 콩이의 코가 보였다. 까만 코가 벌름거렸다. 한 번. 두 번.그리고 낮게, 목 깊은 곳에서,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콩아, 뭐 해?"언니가 불렀다. 콩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으르렁거림이 점점 커졌다. 그리고.컹!짖었다. 옷장을 향해. 한 번, 두 번, 세 번. 멈추지 않았다."콩아! 왜 그래!"언니가 방으로 들어왔다. 방 불이 켜졌다. 옷장 문틈으로 쏟아지는 빛이 너무 밝아서, 나는 눈을 감았다. 감으면 안 보일 것처럼. 어린아이처럼."왜 그래, 뭐가 있어? 옷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3
Read more

44화 아무 일도 없었다

라이터.나는 모든 주머니를 뒤졌다. 바지 앞주머니, 뒷주머니, 점퍼 안주머니. 없었다. 현관 바닥을 더듬었다. 계단을 다시 내려가 휴대폰 불빛으로 비춰봤다. 없었다.기억을 되감았다. 집에서 나오기 전, 창가에서 담배를 피웠다.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었다. 분명히. 그리고 골목을 건넜다. 그 집에 들어갔다. 부엌. 냉장고. 방. 책상. 노트. 옷장.옷장에 들어갈 때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던가. 옷걸이가 부딪치는 소리 때문에 몰랐던가. 아니면 책상 앞에서 노트를 읽다가. 아니면.모른다. 어디서 떨어졌는지.그 라이터는 흔한 편의점 라이터가 아니었다.전 회사 로고가 찍힌 판촉용 라이터였다. 입사 2년 차 품질 워크숍에서 받은. 까만 몸체에 은색 로고. 퇴사할 때 버리지 않았다. 버리지 못했다. 그 회사를 다녔다는 증거처럼, 1년 반 동안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그게 지금, 한서연의 집 어딘가에 있다.*일요일 하루 내내 나는 창가에 붙어 있었다.맞은편 집은 조용했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언니도, 경찰도.나는 계속 시나리오를 돌렸다. 그녀가 돌아와 라이터를 발견한다. 이게 뭐지.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없다. 도윤도 피우지 않는다. 언니가 말한다. 콩이가 옷장을 보고 미친 듯이 짖었다고. 그녀가 옷장을 연다. 코트가 구겨져 있다. 그녀가 라이터를 본다. 로고를 본다. 검색한다. 대기업. 누가 대기업을 다녔지. 떡을 주던 날, 엄마가 말했다. 맞은편 총각 대기업 다녔대.그다음은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생각이 멋대로 흘렀다. 경찰. 지문. 조사. 수갑.정오쯤, 나는 한 가지 결론을 냈다.다시 들어가서 찾아온다.그리고 그 결론을 낸 나 자신에게 소름이 끼쳤다. 어젯밤 옷장 안에서 삼십 분을 떨었던 게, 불과 열두 시간 전이었다.나는 그 생각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3
Read more

45화 친구 추가

한서연.나는 그 이름을 종이에 적었다. 한 번. 두 번. 열 번.글씨가 점점 그녀의 글씨체를 닮아갔다. 동글동글하게. 의식하지 않았는데. 손이 알아서.그리고 휴대폰 메모장, 제목 없는 목록을 열었다. 한서연 숫자 옆에 이름을 적는 순간, 목록이 완전히 다른 것이 됐다. 우연의 목록이 아니었다. 한 사람에 대한 기록이었다. 날짜와, 장소와, 시간과, 이름.나는 그게 무엇과 닮았는지 알았다. 전봇대의 안내문. 지켜보기. 따라다니기. 기다리기.목록을 닫았다.*인터넷 검색창에 그 이름을 쳤다.손가락이 망설였다. 엔터를 누르면 무언가를 또 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름을 검색하는 것 정도는. 불법도 아니다.결과는 많지 않았다. 동명이인이 몇 명. 그리고 병원 소식지의 작은 기사 하나. 올해 초, 친절 직원 표창. 사진 속 그녀는 하늘색 간호복을 입고 상장을 든 채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사진 아래, 환자 보호자의 추천 글이 짧게 인용되어 있었다. 밤새 할머니 손을 잡아주었다는.그 사진을 저장했다. 휴지통에서도 지울 수 없을 것 같은 사진이었다.SNS 계정도 찾았다. 비공개였다. 프로필 사진은 두부와 콩이. 게시물 수와 팔로워 수만 보였다. 나는 그 숫자를 한참 봤다. 그 안에 무엇이 있을까. 육 년 치의 도윤이. 강릉의 바다가. 반지가.나는 팔로우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그 정도는 알았다. 그건 그녀에게 알림이 간다.*밤이 깊어졌다. 맞은편 창문은 암막 커튼 너머로 불빛만 새어 나왔다.나는 휴대폰 연락처 화면을 열었다. 새 연락처 추가.머릿속에 박힌 숫자. 청첩장 시안 아래 인쇄된. 읽고 나서 후회했던. 후회가 무색하게 사라지지 않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4
Read more

46화 창문을 닫으면

창문을 닫으면, 조금은 괜찮아져.나는 그 문장을 노트에 옮겨 적었다. 그녀의 글씨체를 흉내 내서. 그리고 그 아래 내 해석을 달았다.'창문을 닫아야만 괜찮아진다는 건, 창문을 열면 나를 의식한다는 뜻이다.''괜찮아지고 싶다는 건, 지금 안 괜찮다는 뜻이다.''안 괜찮은 이유는, 나 때문이다.''그러니까 그녀의 하루는 온통 나로 가득 차 있다.'논리는 완벽했다. 한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미끄러지는 데 걸림이 없었다. 나는 그 매끄러움에 안심했다. 매끄러운 건 옳은 거니까.그런데 노트를 덮으면, 다른 문장이 자꾸 떠올랐다. 그녀의 진짜 노트에 있던 문장. 왜 내가 숨어 살아야 하지.나는 두 문장을 나란히 두지 않았다. 나란히 두면, 하나가 거짓이라는 게 드러나니까.*침입은 나를 바꿔놓았다.전에는 창문 너머만 봤다. 이제는 그 너머의 안쪽까지 알았다. 옷장 속 코트의 감촉. 방 안의 냄새. 침대 발치 두부의 쿠션. 냉장고 문의 사진들. 그 모든 게 내 머릿속에 지도처럼 그려져 있었다.그리고 나는 그 지도가 낡아가는 걸 견딜 수 없었다.사진이 한 장 더 붙었을까. 청첩장이 완성됐을까. 근무표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라이터는 어디쯤 있을까.한 번 안에 들어가 본 사람에게, 창문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았다.나는 그걸 알았다. 한 번 넘은 선은, 다시 그 앞에 섰을 때 훨씬 낮아 보인다는 걸. 처음엔 벽이었던 것이, 이제는 문턱이었다.두 번째는 첫 번째보다 쉬울 것이다.그 생각이 든 순간, 나는 그 생각 자체가 무섭지 않다는 게 무서웠다.*원주가 창원으로 내려간 건 그 주 일요일이었다.이삿짐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옷가지와 책 몇 상자. 원주가 트럭 조수석에서 손을 흔들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Read more

47화 프로필

친구 추가 이후, 내 하루는 그녀의 프로필을 중심으로 돌아갔다.아침에 눈을 뜨면 확인했다. 프로필 사진이 바뀌었는지. 상태 메시지가 바뀌었는지. 배경 사진이. D+숫자가.D+숫자는 매일 하나씩 늘었다. 2,191. 2,192. 2,193.나는 그 숫자가 늘어나는 걸 매일 아침 지켜봤다. 하루에 하나씩, 그녀가 도윤과 함께한 시간이 쌓였다. 내가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나는 그녀와 D+0이었다. 아니, D+0조차 아니었다. 시작한 적이 없으니까.낮에는 창문을 봤다. 밤에는 프로필을 봤다.그녀는 두 개의 창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골목 건너 진짜 창문. 하나는 휴대폰 속 프로필. 나는 두 창을 번갈아 들여다봤다. 둘 다 그녀였고, 둘 다 그녀가 아니었다.*사흘째 되던 날, 상태 메시지가 바뀌었다.─ 드디어 결정! 4월의 신부 🤍청첩장이 완성된 것이다. 프로필 사진도 바뀌었다. 웨딩 촬영 사진이었다. 그녀가 하얀 드레스를 입고, 도윤이 턱시도를 입고, 벚꽃 아래 마주 보고 웃는.나는 그 사진을 확대했다. 손가락으로 벌려서. 그녀의 얼굴을 크게. 도윤을 화면 밖으로 밀어내면서.화면 가득 그녀만 남았다. 웃는 얼굴.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각도. 나는 그 사진을 보며, 도윤이 화면 밖으로 완전히 사라졌다고 상상했다.그리고 그 상상을 오래 붙잡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손이 저려 있었다.*그 주에 나는 두 가지를 했다.첫째, 웨딩 촬영 사진의 배경을 알아봤다. 벚꽃, 한옥, 돌담. 부산 근교의 유명한 촬영지였다. 검색하면 금방 나왔다. 나는 그곳의 사진을 몇 시간 동안 봤다. 그녀가 서 있던 자리. 그녀가 걸었을 길.둘째, 그녀가 결혼식을 올릴 예식장을 추측했다. 상태 메시지에 힌트는 없었다. 하지만 프로필 사진의 워터마크에 웨딩홀 이름이 아주 작게 찍혀 있었다. 촬영과 예식을 함께 하는 패키지 업체였다.나는 그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안녕하세요, 4월에 예식 예약한 정도윤 한서연 커플 지인인데요. 정확한 날짜랑 시간을 깜빡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Read more

48화 번호

실업급여가 끝난 첫 달이었다.엄마가 보낸 오십만 원과 남은 퇴직금으로 버텼다. 월세, 관리비, 공과금, 통신비. 계산해 보니 두 달, 아껴 쓰면 석 달이 한계였다.나는 다시 채용 공고를 봤다. 진지하게. 이번에는 연봉을 따지지 않았다. 경력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그냥 뽑아주는 곳이면 됐다. 물류, 콜센터, 편의점 야간, 주차 관리.이력서를 다섯 군데 넣었다.그리고 다섯 군데 모두, 첫 줄을 채우다 멈췄다. 지원 동기. 자기소개. 입사 후 포부.무엇을 쓸 수 있을까. 나는 지난 몇 달 동안 무엇을 했나. 창문을 봤다. 프로필을 봤다. 예식장에 전화를 걸었다. 남의 집에 들어갔다.이력서에 쓸 수 없는 것들로, 내 시간은 가득 차 있었다.나는 이력서 창을 닫았다. 그리고 그녀의 프로필을 열었다.D+2,197.*그 무렵 나는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밤마다 그녀의 번호를 화면에 띄워놓는 것.전화를 걸지는 않았다. 문자를 보내지도 않았다. 그냥 번호를 띄워놓고, 통화 버튼 위에 엄지를 올려두었다. 누르지 않은 채로. 오 분. 십 분.누르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그녀의 휴대폰이 울린다. 모르는 번호. 그녀가 받는다. 여보세요. 나는 무슨 말을 할까.시나리오를 짰다. 여러 개.첫째: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녀가 숨소리를 듣는다. 무서워한다. — 안 된다. 그건 괴롭힘이다.둘째: 83번 버스 얘기를 한다. 우연을 이야기한다. 운명을 이야기한다. — 그녀가 무서워한다. 경찰을 부른다.셋째: 솔직하게 말한다. 저 맞은편 사는 사람인데, 당신을 좋아합니다. — 그녀가 무서워한다.모든 시나리오의 끝은 같았다. 그녀가 무서워한다.나는 그걸 알았다. 어떤 방식으로 다가가도, 이 시점에서 그녀는 나를 무서워할 것이다. 그건 논리적으로 명백했다.그런데 그 명백함이, 나를 멈추게 하지 못했다.오히려 반대였다. 어떻게 해도 무서워할 거라면, 무엇을 해도 마찬가지 아닌가.그 생각은 위험했다. 나는 그게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 밤마다 그 생각의 가장자리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Read more

49화 발신 번호 표시 제한

새벽의 그 전화 이후, 그녀는 다시 경계를 올렸다.암막 커튼이 온종일 닫혔다. 밤에 산책을 나가지 않았다. 택시가 다시 골목 안까지 들어왔다. 도윤이 주말마다 왔다. 그리고 목요일, 골목 전봇대에 안내문이 새로 붙었다. 전보다 큰 글씨로.나는 그 안내문을 뜯지 않았다. 이번에는.대신 다른 걸 했다.인터넷을 찾아봤다. 전화번호를 숨기고 거는 방법. 발신 번호 표시 제한. 번호 앞에 특정 번호를 붙이면, 상대방에게 '표시 제한'으로 뜬다는 것. 흔한 정보였다. 누구나 아는.나는 그 방법을 메모했다.메모하면서, 나는 내가 무엇을 준비하는지 정확히 알았다. 이번엔 문장으로도 만들어졌다. 익명으로 그녀에게 연락할 방법. 흔적을 남기지 않고.그리고 그 문장을 만든 나 자신에게, 더 이상 소름이 끼치지 않았다.그게 가장 무서운 변화였다. 나는 무뎌지고 있었다. 내가 넘는 선들에.*토요일, 도윤의 흰색 세단이 아침 일찍 왔다.두 사람은 어디론가 나갔다. 예식 준비인 것 같았다. 예복, 예물, 신혼집. 오후 내내 집은 비어 있었다.나는 그날 하루 종일 창가에 앉아 있었다.빈집을 봤다. 커튼이 닫힌 창문을. 그리고 생각했다. 저 안에 내 라이터가 있다. 전 회사 로고가 찍힌. 어딘가, 침대 밑이나 옷장 구석에.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발견됐다면 경찰이 왔을 테니까.하지만 언젠가는 발견될 것이다. 대청소를 하거나, 이사를 하거나. 이사.그녀는 결혼하면 이 집을 떠난다. 이사할 때 침대를 옮기고, 옷장을 옮긴다. 그러면 그 아래, 그 뒤에 떨어진 라이터가 나온다. 낯선 남자의 라이터. 담배 피우는 사람이 없는 집에서. 대기업 로고가 찍힌.그녀는 검색할 것이다. 떠올릴 것이다. 콩이가 미친 듯이 짖던 옷장을. 언니가 쥐새끼라고 했던 그 밤을. 맞은편 총각이 대기업을 다녔다던 엄마의 말을.그리고 모든 게 연결될 것이다.나는 그 라이터를 찾아와야 했다.그 결론에 도달하는 데, 이번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두 번째 침입은 첫 번째보다 쉬웠다. 생각만으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Read more

50화 오해

오해.나는 그 단어에 매달렸다. 며칠 동안.도윤은 나를 오해한다. 새벽 전화는 실수였다. 손가락이 미끄러진 것뿐이다. 프로필을 보는 건 누구나 하는 일이다. 상태 메시지는 저장했다가 바로 지웠다. 아무 짓도 안 했다.그들은 몇 개의 사건을 이어 붙여, 실제보다 훨씬 나쁜 이야기를 만들었다.품질팀 그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나는 그날 처음으로, 그 서랍을 조금 열었다. 오래 잠가둔 서랍을. 도윤의 목소리가 그 서랍을 두드렸으니까.품질팀. 그 친구. 이름은 지수였다. 입사 동기. 나는 그녀와 친해지고 싶었다. 점심을 같이 먹고, 퇴근길에 같은 방향으로 걷고, 주말에 안부 문자를 보냈다. 그녀가 답을 늦게 하면 한 번 더 보냈다. 그녀가 다른 동기와 웃으면 신경이 쓰였다. 그녀의 SNS를 봤다. 그녀가 회식에 안 오면 아프냐고 물었다.나는 그걸 관심이라고 생각했다. 호감이라고.지수는 어느 날 인사팀에 면담을 신청했다. 그리고 나는 팀을 옮기라는 권고를 받았다. 나는 억울했다. 나는 아무 짓도 안 했다. 그냥 좋아했을 뿐인데. 그 억울함이 쌓이고 쌓여, 불량 사건 때 회의실에서 터졌다.욱해서 뛰쳐나온 게 아니었다.나는 이미, 한 번 이런 사람이었다.그 서랍을 열자, 손이 떨렸다. 나는 서랍을 다시 닫았다. 쾅. 자물쇠를 두 번 채웠다.지수는 오해한 거다. 서연이도 오해하는 거다. 도윤이가 부추기는 거다.그렇게 정리하지 않으면, 나는 무너질 것 같았다.*그 주 금요일, 관리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다.이 오래된 주택가에도 형식적인 관리인이 있었다. 통장 겸 반장 역할을 하는. 그 사람이 문자를 보냈다.[△△번지 4층 세대주님. 임대인께서 계약 관련 전달사항이 있어 연락 부탁드린다고 합니다.]집주인.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전화했다.집주인의 말은 짧았다."동진 씨, 미안한데 계약 만료되면 방을 빼줘야 할 것 같아요. 내가 이 집을 팔기로 해서. 다음 세입자를 못 받아요.""…언제까지요?""두 달 뒤. 계약서에 써 있는 대로예요. 갑자기 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6
Read more
PREV
1
...
345678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