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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옆집의 그녀: Chapter 21 - Chapter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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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사후의 알리바이

그 사람이 어떻게 알았을까.그녀의 목소리가 밤새 방 안을 맴돌았다. 나는 불을 끄고 누운 채 천장을 봤다.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계단 중간에서 멈춰 선 그녀의 등이 보였다. 웃고 있지만 웃지 않던 눈.실수였다. 명백한 실수.새벽 세 시, 나는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차분하게, 대기업에서 클레임 보고서를 쓰던 때처럼 상황을 정리했다.문제: 내가 그녀의 산책 시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가 인지함.원인: 발언 실수.리스크: 그녀가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함.대책: 내가 그 시간을 아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게 만들 것.대책을 적고 나니 마음이 놓였다.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면 된다. 나는 원래 그런 걸 잘하는 사람이었다.그 보고서 어디에도, 문제의 진짜 원인은 적혀 있지 않았다.*다음 날 나는 스포츠 매장에서 러닝화와 트레이닝복을 샀다. 십사만 원. 실업급여 한 달치의 칠 분의 일이었다.그날 밤 열 시 오십 분, 나는 공원을 뛰었다.한 바퀴 사백 미터. 다섯 바퀴를 돌자 폐가 찢어질 것 같았다. 대학 이후로 제대로 뛰어본 적이 없었다. 벤치에 쓰러지듯 앉아 헐떡이면서도 나는 계단 쪽 입구를 지켜봤다.열한 시. 열한 시 십 분. 열한 시 반.그녀는 오지 않았다.다음 날도 뛰었다. 그다음 날도. 나흘째가 되자 종아리가 돌처럼 굳었다. 그래도 뛰었다. 공원 운동기구 옆에서 담배를 피우던 동네 아저씨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총각, 요새 매일 뛰네. 몸 만드나?""네, 뭐. 건강 좀 챙기려고요.""좋네. 꾸준히 해."나는 그 말이 기뻤다. 증인이 생긴 것이다. 박동진은 매일 밤 열한 시에 공원에서 운동하는 사람이다. 이 동네 누가 물어봐도, 그렇게 대답할 것이다.거짓말은, 나중에 사실로 만들면 거짓말이 아니다.*닷새째 되는 밤, 나는 깨달았다.그녀는 더 이상 밤 열한 시에 산책하지 않는다.닷새 동안 한 번도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녀의 창문에서도 그 시간에 리드줄을 챙기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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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세 사람

아침 공원은 밤과 전혀 다른 곳이었다.이슬 맺힌 잔디. 비둘기. 체조하는 할머니들. 출근 전 조깅하는 사람 두어 명. 나는 그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갔다. 트레이닝복, 러닝화, 목에 두른 수건. 누가 봐도 아침 운동하는 동네 청년이었다.여섯 시 오십 칠 분. 계단 쪽 입구에서 강아지 발톱 소리가 들렸다.나는 트랙을 돌기 시작했다. 일부러 반대 방향으로. 그래야 마주 오는 모양새가 되니까. 우연히, 자연스럽게, 마주치는.두부가 먼저 보였다. 그다음 콩이. 그다음 그녀의 운동화. 그리고.남자의 운동화.나는 발이 꼬일 뻔했다.그 남자가 그녀 옆에서 걷고 있었다. 헐렁한 반바지에 모자를 눌러쓰고, 콩이의 리드줄을 쥔 채. 어젯밤 여기서 잔 게 분명한, 부스스한 뒷머리.돌아설 수 없었다. 이미 너무 가까웠다."어?"남자가 먼저 나를 알아봤다. 모자챙을 들어 올리며 눈을 크게 떴다."어, 그때 병원 카페…! 맞죠? 자리 빌려주신.""…아, 네. 안녕하세요.""와, 여기 사세요? 대박, 세상 진짜 좁네."남자가 그녀를 돌아봤다."자기야, 이분이 저번에 내가 말한 분. 카페에서 합석했던."그녀가 나를 봤다. 그리고 남자를 봤다. 그리고 다시 나를 봤다. 그녀의 얼굴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계산되고 있었다."…아, 그랬구나.""근데 자기 이분 알아?""맞은편 사시는 분이야. 저번에 떡 주신.""아, 떡! 이분이세요? 떡 맛있게 먹었습니다, 하하."남자는 진심으로 반가워했다. 그 반가움이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이 사람은 나를 경쟁자로조차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좋은 이웃. 커피 한 잔 나눈 친절한 사람."운동하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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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도어락

사흘 뒤, 맞은편에 수리기사가 왔다.작업복을 입은 남자가 공구 가방을 들고 그녀의 철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드릴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한 시간 뒤, 오래된 열쇠 구멍 대신 반짝이는 검은색 번호키가 달려 있었다.그 옆에서 그녀의 남자친구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평일 오후였다. 영업사원이 근무 시간에.나는 커튼 틈으로 그걸 지켜봤다. 지금은 원주 말대로 커튼을 달았다. 두꺼운 회색 커튼. 그 커튼에 손가락 하나 넓이의 틈을 만드는 게 새로운 습관이 됐다.'원래 문이 낡았잖아. 바꿀 때 됐지.'맞는 말이었다. 그 철문은 녹슬어 있었다. 열쇠 구멍은 이 동네 집들이 다 그렇듯 삼십 년 된 구식이었다. 교체할 이유는 충분했다.충분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이유를 생각하지 않았다.*그 주에 좋은 소식이 하나 있었다.사상구에 있는 중견 식품회사 경영관리팀. 서류와 1차 면접을 통과했다. 2차는 임원 면접이었다.합격 문자를 받은 순간 나는 방 안에서 소리를 질렀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목에서 기쁨 비슷한 소리가 나왔다. 바로 원주에게 전화했다."야, 나 1차 붙었다.""오! 어디?""식품회사. 경영관리. 연봉도 괜찮아. 이전만큼은 아니어도.""잘됐다, 인마! 거봐라, 니 탓 아니랬제. 된다, 이번엔."원주의 목소리가 진심으로 기뻤다. 그 순간 나는 오래전의 나로 돌아간 것 같았다. 친구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 친구가 같이 기뻐해 주는, 평범한 스물아홉."근데 동진아.""어.""그 옆집 여자는. 정리했나?"나는 잠깐 말이 막혔다."…정리할 것도 없지. 남친 있다니까.""그래. 잘했다. 니는 이제 면접만 생각해라."전화를 끊고 창가를 봤다. 커튼 틈 너머, 번호키가 오후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정리했다. 나는 원주에게 그렇게 말했다.그날 밤에도 나는 그 틈 앞에 앉아 있었다.*2차 면접을 앞둔 금요일 밤.맞은편 옥상에 불이 켜졌다. 그녀와 남자친구가 캠핑 의자 두 개를 펴고 앉아 있었다. 작은 버너 위에서 무언가가 지글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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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윤재석

1년 반 전, 나는 창원 공장 생산관리팀 대리였다.그해 봄, 협력업체 부품에서 불량이 터졌다. 완성품 수천 대가 리콜 대상이 됐다. 클레임 비용이 억 단위로 올라갔다. 누군가 책임을 져야 했다.그 협력업체 입고 검사 담당이 나였다.나는 지금도 믿는다. 그 불량은 검사 기준 자체가 잘못돼서 생긴 거였다고. 기준을 만든 건 윗선이었다고. 나는 기준대로 했을 뿐이라고.회의실에서 당시 팀장이던 윤재석이 말했다."박 대리. 검사 성적서에 사인한 사람이 누구야.""기준이 잘못된 거라고 몇 번을 말씀드렸습니까.""그래서 사인한 사람이 누구냐고."그다음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은 나는데 순서가 뒤죽박죽이다. 내가 일어섰고, 소리를 질렀고, 서류철이 책상에서 떨어졌다. 누군가 내 팔을 잡았다. 나는 그 팔을 뿌리쳤다. 회의실 유리벽 너머로 팀원들이 전부 이쪽을 보고 있었다.일주일 뒤, 인사팀에서 면담 요청이 왔다. 그리고 한 달 뒤, 나는 사직서를 냈다.그게 내가 기억하는 전부다.내가 기억하기로 선택한 전부.*식품회사 본사 3층 회의실. 면접관은 세 명이었고, 가운데가 윤재석이었다.그는 조금 늙었다. 흰머리가 늘었고, 안경테가 바뀌었다. 내 이력서를 보는 그의 얼굴에 놀라움은 없었다. 이미 서류 단계에서 알고 있었던 것이다."오랜만이네, 박동진 씨.""…네. 오랜만입니다, 팀장님. 아니, 본부장님."양옆의 면접관들이 눈빛을 교환했다.면접은 형식적으로 흘러갔다. 지원 동기. 직무 이해도. 강점과 약점. 나는 준비한 대로 대답했다.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윤재석은 거의 질문하지 않았다. 볼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나를 보기만 했다.마지막 순서에서, 그가 입을 열었다."박동진 씨. 하나만 물어볼게요. 지난 회사에서 퇴사하게 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회의실 공기가 멈췄다."…조직과 제 방향이 맞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그게 다예요?""네."윤재석은 한참 나를 봤다. 그리고 볼펜을 내려놓으며, 옆의 면접관들에게는 들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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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렌즈

암막 커튼이 걸린 뒤로, 나는 다른 감각을 쓰기 시작했다.소리.골목은 좁았고, 이 동네 집들의 벽은 얇았다. 창문을 조금만 열어두면 많은 것이 들렸다. 번호키 누르는 소리. 여섯 번의 삑, 그리고 짧은 멜로디. 강아지들 발톱 소리. 샤워기 물줄기. 드라이어. 가끔 텔레비전. 가끔 통화 목소리.나는 그 소리들로 그녀의 하루를 다시 짰다. 보이지 않는 만큼 상상이 채웠다. 물소리가 멈추면 수건을 두르는 그녀를, 드라이어가 멈추면 침대에 눕는 그녀를.상상 속의 그녀는 창문 너머의 그녀보다 더 선명했다. 그리고 더 이상 온전히 그녀가 아니었다. 내가 만든 무언가였다.나는 소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노트 한 권을 샀다. 날짜와 시간. 번호키. 샤워기. 드라이어. 통화. 웃음. 침묵. 소리마다 옆에 짧은 메모를 달았다. 기분 좋음. 피곤함. 남자친구와 통화, 목소리 낮음.목소리 낮음. 그 세 글자를 적으며 나는 그 통화의 내용을 상상했다. 암막 커튼 너머,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뺨에 댄 그녀. 이불 속에서 속삭이는. 그 속삭임이 어떤 말들이었을지.어떤 밤은 그 상상이 너무 선명해서, 노트를 덮고 한참 천장을 봐야 했다. 숨을 고르며. 벽 너머의 누군가를 향해 열이 오른 채로.빛을 막으면 소리가 남는다. 소리를 막으면 상상이 남는다. 그녀는 커튼을 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까지 칠 수는 없었다.그게 나의 마지막 창문이었다. 누구도 닫을 수 없는.나는 그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다.*식품회사의 불합격 통보는 나흘 뒤에 왔다.예상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문자를 읽고 삼십 분 동안 방바닥에 누워 움직이지 않았다.그날 저녁 원주에게서 전화가 왔다."동진아!!"원주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나 필기 붙었다. 4년 만에. 필기 합격이다, 인마.""…진짜?""면접만 남았다. 면접은 거의 다 붙는다더라. 나 진짜… 아, 씨, 눈물 나네."원주가 울었다. 전화기 너머로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4년. 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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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마주 보는 눈

그날 밤, 나는 방바닥에서 잤다.침대는 창문 옆에 붙어 있었다. 누우면 커튼이 머리맡에 닿았다. 그 커튼 너머, 2미터 건너 벽에 박힌 둥근 렌즈. 적외선 카메라라면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공장 출입구에도 똑같은 게 달려 있었으니까.그래서 이불을 끌어내려 방 반대편, 현관 쪽 벽에 붙여 깔았다. 창문에서 가장 먼 자리. 거기 누워 천장을 봤다.내 방에서, 내가 숨어 있었다.새벽 두 시쯤 목이 말라 일어났다. 냉장고로 가려면 창문 앞을 지나야 했다. 나는 허리를 숙이고, 거의 기다시피 방을 가로질렀다. 물을 마시고, 다시 기어서 돌아왔다.누웠을 때 웃음이 나왔다. 소리 없는, 이상한 웃음.이게 뭐 하는 짓이지.*사흘째, 공포가 조금씩 다른 것으로 바뀌기 시작했다.아침에 커튼 틈으로 카메라를 봤다. 여전히 거기 있었다. 하얀 몸통, 검은 눈. 작은 초록색 불빛이 깜빡였다. 녹화 중이라는 뜻이었다.녹화 중.누가 그 영상을 보는가. 그녀다. 퇴근하고 돌아와 휴대폰으로, 오늘 하루 골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는 그녀. 그 화면 한가운데에 내 창문이 있다.그녀가 나를 본다.그 문장이 떠오른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런데 그건 공포 때문만은 아니었다.몇 달 동안 나만 그녀를 봤다. 그녀는 나를 몰랐다. 나는 투명 인간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녀가 매일, 의식적으로, 내 창문을 들여다본다. 화면을 확대하고, 되감고, 멈춰서.나는 그걸 두려워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두려워했다. 하지만 두려움 아래에서, 무언가 뜨겁고 끈적한 것이 꿈틀거렸다.'이제 우리는 서로를 보고 있다.'*그날부터 나는 방을 치웠다.창틀 위 재떨이를 비웠다. 빈 캔을 분리수거했다. 커튼을 활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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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이상한 남자

이상한 남자.나는 그 단어를 들으며 통장의 얼굴을 봤다. 주름 사이로 호기심이 반짝였다. 동네 소문을 모으는 사람의 눈이었다. 적어도, 나를 의심하는 눈은 아니었다.아직은."…아, 그래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어떤 사람이래요?"내 목소리는 놀랄 만큼 평온했다. 면접장에서는 한 번도 나오지 않던 목소리."그기 확실하지는 않은데, 밤에 골목을 서성인다 카고, 창문 쪽을 자꾸 쳐다본다 카고. 아가씨가 무섭다 캐서 남자친구가 파출소에 한번 얘기를 했다대."파출소.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가, 이상하게 차분해졌다."저도 밤에 가끔 공원 운동 나가는데, 딱히 이상한 사람은 못 봤어요. 근데 요즘 세상이 험하니까요. 저도 좀 신경 써서 볼게요.""아이고, 고맙네. 총각 같은 사람이 있으니 든든하네. 저번에 떡도 돌렸다매? 그 아가씨 엄마가 칭찬하대. 요새 젊은 사람 같지 않다꼬."통장은 클립보드에 뭔가를 적고 계단을 내려갔다.문을 닫았다. 등을 문에 기댔다.나는 방금 나 자신에 대해 증언했다. 이상한 남자는 못 봤다고. 그리고 통장은 나를 '든든한 사람'이라고 불렀다.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동시에 토할 것 같았다.그녀가 파출소에 말했다. 이상한 남자가 있다고. 창문을 쳐다본다고.그런데 통장은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나를 칭찬했다. 떡 때문에. 좋은 이웃이라서.그렇다면 그녀가 말한 이상한 남자는, 정말 나일까.그 질문이 떠올랐을 때 나는 그게 얼마나 우스운 질문인지 알았다. 그리고 그 우스운 질문에, 진지하게 매달렸다.'혹시 다른 사람일 수도 있잖아. 이 동네에 이상한 사람이 나 하나겠어.'*토요일 저녁, 원주가 해운대 고깃집에서 소고기를 샀다.진짜 소고기였다. 한우 모둠. 원주는 메뉴판을 보며 손을 떨다가, 눈을 질끈 감고 주문했다."오늘은 내가 쏜다. 4년 치 한풀이다."불판 위에서 고기가 익어가는 동안 원주는 계속 떠들었다. 면접 준비, 합격하면 받을 발령지, 부모님이 우셨다는 이야기, 독서실 총무가 떡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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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면담

나는 그날 밤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전봇대 그림자에서 뒷걸음질 쳐 계단을 내려왔다. 큰길로 나와 편의점 파라솔 아래 앉았다. 경찰차가 골목을 빠져나가는 걸 확인하기까지 사십 분이 걸렸다. 그동안 캔커피 두 개를 마셨다. 손이 떨려서 한 번은 흘렸다.새벽 한 시에 집에 들어갔다. 불을 켜지 않았다. 옷을 입은 채로 현관 쪽 이불 위에 누웠다.잠들지 못했다.*다음 날 오전 열한 시. 노크 소리.렌즈 너머에 제복이 보였다. 어젯밤 수첩에 적던 그 경찰이었다. 사십 대 초반쯤, 무뚝뚝한 얼굴.문을 열기 전에 나는 거울을 봤다. 면도를 했어야 했다. 눈이 충혈돼 있었다. 셔츠를 갈아입을 시간은 없었다.문을 열었다."안녕하세요. ○○지구대에서 나왔습니다. 박동진 씨 되시죠?""…네.""잠깐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다른 건 아니고, 이 동네 순찰 관련해서 주민분들 몇 분 뵙고 있습니다."몇 분. 나는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다. 경찰도 내가 안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네, 들어오세요."경찰은 들어오지 않았다. 현관에 선 채로 방 안을 한 번 훑었다. 창가 책상. 노트북. 스투키 화분. 걷힌 커튼. 사흘 전에 치워둔 방이었다. 나는 그게 고마웠다. 누구에게인지는 모르겠지만."혹시 맞은편 집 사시는 분 아세요?""네, 알아요. 간호사분이요. 얼마 전에 떡 돌리면서 인사했어요. 강아지 두 마리 키우시고.""개인적으로 연락하시거나 그런 사이는 아니시고요.""아뇨. 번호도 모르는데요."사실이었다. 그게 나를 조금 편하게 했다."요즘 밤에 골목에 자주 나가세요?""공원에 운동하러 가요. 저녁이나 아침에. 동네 분들 다 아실 거예요. 공원에서 담배 피우시는 아저씨도 계시고."증인. 나흘 동안 폐가 찢어지도록 뛰어서 만든 증인.경찰은 잠깐 나를 봤다. 그 눈은 통장의 눈과 달랐다. 호기심이 아니라, 무언가를 재는 눈. 윤재석의 눈과 비슷했다."네. 알겠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맞은편 분이 좀 불안해하셔서요. 누가 계속 창문을 보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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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열이틀

물류센터는 김해에 있었다. 셔틀버스로 사십 분.밤 아홉 시부터 아침 여섯 시. 컨베이어 벨트 옆에서 상자를 분류했다. 스캐너를 찍고, 바코드를 확인하고, 구역별 카트에 던졌다. 한 시간에 몇백 개. 첫날 밤 세 시쯤 되자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옆 라인의 조장은 스물셋이었다. 나보다 여섯 살 어렸다. 그가 나를 불렀다."형님, 거기 C구역 상자 D로 가 있어요. 확인 좀 해주세요."형님. 그는 예의 바르게 말했다. 대기업 대리였던 내게 스물세 살 조장이 존댓말로 실수를 지적했다.화가 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너무 피곤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여기서는 아무도 내가 누구였는지 몰라서였는지도."아, 죄송합니다. 다시 할게요."아침 여섯 시, 셔틀버스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졸았다. 해가 뜨고 있었다. 온몸이 쑤셨다. 그런데 머릿속이 텅 비어 있었다. 몇 달 만에 처음으로.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녀도.*집에 오면 아침 일곱 시였다. 그녀가 출근하는 시간.나는 일부러 골목 반대편 계단으로 돌아서 올라갔다. 오 분 더 걸렸다. 커튼은 걷지 않았다. 샤워를 하고, 암막 커튼을 새로 달았다. 내 방에도. 짙은 회색. 그리고 그 앞에서 정오까지 잤다.오후에는 채용 공고를 봤다. 저녁을 먹고, 셔틀을 타러 나갔다.하루.이틀.닷새.나는 날짜를 셌다. 달력에 표시했다.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 그녀를 보지 않은 날.일주일째 되던 날 원주에게 카톡을 보냈다.[동진: 나 요즘 물류 야간 하는데 할 만하다][원주: ㅋㅋㅋ 대기업 대리님이 까대기를][원주: 근데 잘했다 진짜][원주: 몸 쓰면 잡생각 없어진다]잡생각. 원주는 그렇게 불렀다. 나는 그 단어가 좋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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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초대장

나는 두부를 안아 들었다.작았다. 생각보다 훨씬 가볍고, 뼈가 느껴질 만큼 말라 있었다. 온몸이 떨렸다. 심장이 손바닥 안에서 빠르게 뛰었다. 두부는 내 후드티 안으로 머리를 파묻었다.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돌려주면 된다. 초인종을 누르고, 강아지를 건네고, 계단에서 발견했다고 말하면 된다. 이웃이라면 누구나 할 일이다. 정상적인 일이다.그런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경찰의 얼굴이 떠올랐다. 명함.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데.내가 새벽 여섯 시 사십 분에 그녀의 강아지를 안고 그녀의 문 앞에 서 있으면, 카메라에 무엇이 찍힐까. 그녀는 무엇을 생각할까. 그 남자는 경찰에게 이 영상을 어떻게 설명할까.'파출소에 갖다 주자. 아니면 통장님한테.'그게 맞았다. 그게 선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열이틀 동안 지켜온 선.두부가 낑낑거렸다. 앞발에서 피가 조금 배어 나오고 있었다. 유리 조각 같은 데 벤 것 같았다.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골목을 건넜다. 카메라의 초록 불빛이 깜빡였다. 나는 렌즈를 똑바로 봤다. 숨기지 않았다. 숨길 게 없었다.초인종을 눌렀다.*안에서 콩이가 미친 듯이 짖었다. 그리고 발소리. 뛰는 소리. 번호키가 돌아가는 소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그녀였다.잠옷 위에 카디건만 걸친 채,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다. 눈이 부어 있었다. 울었거나, 밤새 찾아다녔거나. 손에 휴대폰을 쥐고 있었다. 화면에 '동물보호센터'라는 검색 결과가 떠 있었다.그녀가 나를 봤다. 순간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내 품 안의 하얀 것을 봤다."두부야…!"그녀가 두부를 낚아채듯 받아 안았다. 두부의 젖은 몸에 얼굴을 묻었다. 어깨가 떨렸다.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우리 집 계단에 있었어요. 앞발을 좀 다친 것 같아요.""어젯밤에… 제가 야간 끝나고 들어오는데, 문 열자마자 튀어나가서… 밤새 찾았는데…."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두부의 앞발을 살피며 입술을 깨물었다. 간호사의 손길이었다. 빠르고, 정확하고, 떨리는.나는 한 걸음 물러섰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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