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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옆집의 그녀: Chapter 51 - Chapter 60

72 Chapters

51화 방 구하기

토요일 오전 열 시, 원주가 정말로 왔다.양손에 커피 두 잔을 들고. 창원에서 첫차를 탔다고 했다. 얼굴이 조금 탔고, 표정이 밝았다. 사람이 제자리를 찾으면 저런 얼굴이 되는구나, 싶었다."자, 가자. 부동산 세 군데 예약해 놨다. 사상, 연산, 동래.""…다 멀다.""머니까 좋은 거다. 새 출발."원주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앞장섰다. 나는 따라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며 습관처럼 맞은편 창문을 봤다. 암막 커튼. 원주가 그런 내 시선을 곁눈으로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첫 번째 방. 사상역 근처 신축 원룸. 깨끗했다. 창문은 넓었고, 창밖으로 대로변과 상가 간판이 보였다.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갔다. 아무도 창문을 올려다보지 않았다."괜찮네. 역도 가깝고."원주가 말했다. 나는 창가에 서서 맞은편 건물을 봤다. 거리 30미터쯤. 사무실 건물. 블라인드가 전부 내려져 있었다."…너무 시끄러울 것 같다."두 번째 방. 연산동 오피스텔. 12층. 창밖으로 도시가 내려다보였다. 멀리 황령산."와, 뷰 봐라. 여기 좋다, 동진아."나는 창밖을 봤다. 너무 높았다. 너무 멀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점처럼 작았다. 얼굴도, 실루엣도, 아무것도."…월세가 좀 세다."세 번째 방. 동래 주택가 3층. 조용한 골목. 창문을 열자 맞은편에 다른 주택이 있었다. 거리 5미터쯤. 맞은편 창문에 커튼이 쳐져 있었다.나는 그 창문을 봤다. 오래."동진아."원주가 뒤에서 불렀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여기는 어떻노.""…괜찮네."그 말이 너무 빨리 나왔다. 원주가 조용히 부동산 중개인을 먼저 내보냈다. 그리고 문을 닫고, 내 옆에 섰다. 같이 맞은편 창문을 봤다."니 방금 저 창문 봤제.""…그냥 봤지. 창밖 보는 게 뭐.""사상 방은 블라인드 내려진 사무실이라서 싫었고. 연산은 너무 높아서 싫었고. 여기는 맞은편에 창문이 있어서 괜찮고."나는 대답하지 않았다."동진아. 방을 고르는 기준이 그거가."*점심은 동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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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새벽 세 시의 목격자

그날 밤, 원주는 내 방바닥에 이불을 깔고 잤다.창가 쪽이었다. 내가 늘 무릎을 꿇던 그 자리. 원주는 모르고 거기 누웠다. 나는 현관 쪽 벽에 붙어 누웠다.원주는 금방 코를 골았다. 공무원 합격생의 잠. 걱정 없는 사람의 잠.나는 잠들지 못했다.두 시. 두 시 반. 세 시.맞은편 창문의 불빛이 신경 쓰였다. 오늘 그녀는 야간이었다. 달력에 N이라고 적혀 있던 날. 새벽 두 시 반쯤 택시로 돌아온다. 오늘은 아직이었다.세 시 오 분. 골목 아래에서 택시 소리.나는 일어났다. 원주를 넘어, 창가로 갔다. 원주의 머리맡에서, 커튼 끝을 손가락 하나만큼 젖혔다. 무릎을 꿇었다. 늘 하던 자세로.택시에서 그녀가 내렸다. 지쳐 보였다. 택시는 떠나지 않았다. 헤드라이트가 계단을 비췄다. 그녀가 계단을 오르며, 한 번, 내 창문을 올려다봤다.나는 숨을 멈췄다."……동진아."바로 옆, 내 무릎 아래에서 목소리가 들렸다.원주가 눈을 뜨고 있었다.*원주는 누운 채로 나를 올려다봤다. 새벽 세 시. 무릎을 꿇고, 커튼 틈에 한쪽 눈을 댄 채 굳어 있는 나를.그리고 원주의 시선이, 커튼 틈을 지나, 골목 건너 계단을 오르는 여자에게 닿았다.원주는 일어나 앉았다. 천천히."니 지금 뭐 하노.""…물 마시려고 일어났다가.""무릎 꿇고?"나는 커튼을 놓았다. 커튼이 원래대로 닫혔다. 너무 늦었다.원주가 불을 켰다. 형광등이 두 번 깜빡이고 켜졌다. 눈이 부셨다. 원주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화난 얼굴이 아니었다. 창백했다."동진아. 앉아봐라.""…됐다. 자라.""앉으라고."원주의 목소리가 낮았다. 원주가 이렇게 말하는 걸, 나는 고등학교 3년, 그 뒤 십 년 동안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나는 앉았다."그 여자. 매일 이렇게 보나.""…가끔.""거짓말하지 마라. 방금 그 여자가 택시에서 내리는 시간 맞춰서 일어났잖아. 내 봤다. 니 세 시 되기 전부터 뒤척였다."나는 입을 다물었다."전봇대에 붙은 거. 그거 니 때문이제. 경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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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초인종

원주를 차단한 뒤, 무언가가 풀렸다.나사 하나가 빠진 것 같았다. 기계 안쪽 깊은 곳에서. 그동안 모든 부품을 붙잡고 있던, 작고 보이지 않던 나사.나는 그걸 자유라고 느꼈다.더 이상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다. 경찰 말고 나한테, 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새벽 세 시에 무릎 꿇은 나를 올려다보는 사람도 없었다.남은 건 나와, 2미터 건너 그녀뿐이었다.*도윤의 전화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압니다, 전부. 그만하세요. 당신이 뭘 상상하든, 그런 일은 없어요.그 차분한 목소리. 나를 벌레 보듯 하던. 증거도 없이 나를 범죄자로 단정하던. 원주가 똑같은 단어를 썼다. 범죄. 스토킹.모두가 나를 그렇게 부른다면.그렇다면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도 상관없지 않은가.그 논리가 머릿속에서 완성됐을 때, 나는 그게 얼마나 유치한지 알았다. 억울하니까 진짜로 해버리겠다. 초등학생이나 하는 생각. 하지만 그 유치함이, 이상하게 나를 편하게 했다. 복잡한 걸 전부 치워버리는 단순함.너희가 나를 괴물이라고 부르니까.*화요일 밤 열두 시 반.골목은 조용했다. 순찰차는 열한 시에 지나갔다. 다음은 두 시.나는 모자를 눌러쓰고 계단을 내려갔다. 골목을 건넜다. 네 걸음. 그녀의 계단을 올랐다. 철문 앞.초인종을 눌렀다.딩동.그리고 뛰었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 골목을 건너, 내 계단을 두 칸씩 올랐다. 문을 닫았다. 불을 끈 채 커튼 틈에 붙었다.맞은편에서 개들이 미친 듯이 짖었다. 두부. 콩이.불이 켜졌다. 방. 그리고 현관.철문은 열리지 않았다. 번호키 옆 작은 창에 그림자가 비쳤다. 그녀가 문 안쪽에서 밖을 살피는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계단을.개들은 계속 짖었다.오 분 뒤, 그녀의 방 창문 너머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떨리는 목소리. 전화였다."…오빠, 누가 초인종 눌렀어. 지금. 아무도 없어. …아니, 나 문 안 열었어. …무서워. 오빠 진짜 무서워."나는 그 목소리를 들었다.무서워. 오빠 진짜 무서워.심장이 뛰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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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감시자

그날 이후 도윤은 매일 밤 왔다.열한 시쯤 흰색 세단이 골목에 섰다. 도윤은 그녀의 집에 올라갔다가, 자정 무렵 다시 내려왔다. 그리고 차에 앉았다. 시동을 끈 채. 새벽 네 시, 다섯 시까지.가끔 차 안에서 휴대폰 불빛이 반짝였다. 가끔 운전석 창문이 조금 내려갔다. 그리고 늘, 도윤의 얼굴은 내 창문을 향해 있었다.그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몇 달 동안 내가 그녀에게 했던 것처럼.나는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방 안에서 움직일 때마다 등 뒤가 따가웠다. 불을 켤 수 없었다. 커튼을 만질 수 없었다. 창가에 다가갈 수 없었다. 내 방에서, 나는 다시 숨어 살게 됐다.아이러니를 알아차릴 여유 같은 건 없었다.나는 그냥 분노했다.*'저 남자만 없으면.'그 문장이 처음 떠오른 건 사흘째 새벽이었다.차 안의 도윤을 커튼 틈으로 보면서. 운전석 창문 너머 그의 옆얼굴. 평범한 얼굴. 턱의 면도 자국. 병원 카페에서 나에게 커피 한 잔을 건네던 그 손.저 남자만 없으면. 그녀는 나를 오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경찰도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카메라도 달지 않았을 것이다. 저 남자가 그녀에게 나를 조심하라고 했다. 저 남자가 그녀를 겁주고, 나를 괴물로 만들었다.저 남자만 없으면.그 문장의 끝에 무엇이 오는지, 나는 이번에도 끝까지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문장의 끝이 저절로 떠올랐다. 이미지로.빗길. 흰색 세단. 미끄러지는 바퀴. 가드레일.사고. 누구의 탓도 아닌.나는 그 이미지를 오래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미지 속에서, 장례식장에 선 그녀를 봤다. 검은 옷. 부은 눈. 그리고 그녀 옆에, 조용히 서 있는 나.위로하는 나. 곁에 있어 주는 나.그 이미지가 너무 선명해서, 나는 벌떡 일어났다. 부엌으로 가서 찬물을 틀었다. 얼굴에 끼얹었다. 몇 번이고.'미쳤다. 박동진, 너 미쳤다.'소리 내어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나는 그 이미지를 지웠다. 지우려고 했다. 지워지지 않았다. 번호판처럼. 전화번호처럼. 한번 박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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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어머니

어머니는 현관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문지방 바깥, 계단참에 서서 말했다."이거, 떡 담아줬던 그릇 대신이에요. 그때 우리 딸이 그릇 돌려주면서 귤만 넣었다고, 내가 뭐라 했거든. 반찬이라도 담아 보내야지. 그래서 멸치볶음 좀 했어요."반찬통을 내밀었다. 나는 받았다. 손이 떨려서 뚜껑이 달그락거렸다."그날 총각이 떡 들고 왔을 때, 내가 우리 딸한테 그랬어요. 맞은편에 좋은 총각 산다고. 요새 젊은 사람 같지 않다고. 대기업 다니다 잠깐 쉬는 거라고. 우리 딸한테 괜히 그런 말을 했어요."어머니가 입술을 깨물었다."그래서 우리 딸이, 처음에 이상하다 싶었을 때도, 엄마가 좋은 사람이라 했으니까 괜찮겠지, 했대요. 경찰 부를 때도 반대했대요. 엄마가 칭찬한 사람이라서.""…….""그게 내가 제일 미안해요. 우리 딸한테."나는 반찬통을 쥐고 서 있었다. 뚜껑 너머로 멸치볶음 냄새가 났다. 달큰하고, 짭짤하고, 집 냄새."총각. 우리 딸 요즘 잠을 못 자요. 밤마다 초인종 소리 난대요. 누가 눌렀다가 도망간대요. 창문 쪽에서 소리가 난대요. 모르는 번호로 새벽에 전화가 왔대요. 한 달 만에 오 킬로가 빠졌어요. 병원에서 실수를 해서 수간호사한테 불려갔대요. 우리 딸 그런 애 아니에요. 표창도 받은 애예요."표창. 병원 소식지 속 어색하게 웃던 얼굴. 밤새 할머니 손을 잡아주었다던."내가 증거 가지고 온 거 아니에요. 총각이 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에요. 경찰도 증거가 없대요. 그래서 내가 왔어요. 엄마로서."어머니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허리를 굽혀. 깊이."총각. 부탁할게요. 우리 딸 좀 놔줘요."*나는 그 모습을 내려다봤다.오십 대 중반의 여자가, 서른 살 딸을 위해, 스물아홉 백수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떡을 받으며 좋은 총각이라고 웃던 사람이. 대기업 똑똑하네, 좋은 데 금방 갈 거예요, 라고 말해주던 사람이.엄마에게조차 듣지 못한 말을 해주던 사람이.무언가가 목에서 치밀어 올랐다."……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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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이름

그 주에 도윤은 출장을 갔다.나는 그걸 흰색 세단이 사흘 연속 오지 않은 것으로 알았다. 그리고 그녀의 창문 너머 통화 목소리로 확인했다. 제주 학회. 금요일에 온대. 응, 괜찮아. 언니가 와서 자고 가기로 했어.언니는 오지 않았다. 첫날 밤은.나는 그 빈 밤을 기다렸다. 무엇을 할지 정해두지 않은 채로. 정해두지 않으면, 계획이 아니다. 계획이 아니면, 나는 그냥 밤에 깨어 있는 사람일 뿐이다.*새벽 한 시.나는 창가에 서서 그녀의 창문을 봤다. 암막 커튼 너머로 희미한 불빛. 요즘 그녀는 불을 완전히 끄고 자지 않았다. 작은 무드등을 켜두었다. 창가 쪽, 커튼 가장자리에 작고 붉은 점 하나가 깜빡였다.무드등이겠지. 무서우니까 켜두는.나는 그 붉은 점을 오래 보지 않았다.베란다 화분 옆에 작은 자갈들이 있었다. 이 집에 이사 올 때부터 있던, 화분 배수용 자갈. 나는 그중 하나를 집었다. 손톱만 한.그리고 창문을 조금 열고, 던졌다.2미터. 자갈은 그녀의 창유리에 맞았다. 틱. 아주 작은 소리.아무 반응이 없었다.한 개 더. 틱.커튼이 흔들렸다. 안에서. 무드등 불빛이 가려졌다. 누군가 커튼 바로 뒤에 섰다.나는 창문을 닫고 벽 뒤로 붙었다. 심장이 뛰었다. 그리고 그 뛰는 심장 아래에서, 그 감각이 다시 올라왔다. 초인종 때처럼. 힘. 내가 그녀를 움직이게 한다는.그녀는 커튼을 열지 않았다. 한참을 커튼 뒤에 서 있다가, 사라졌다. 무드등 불빛이 다시 보였다.오 분 뒤, 그녀의 방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게. 베개에 얼굴을 묻은 것 같은.나는 그 소리를 들었다.그리고 창가에서 물러나 앉았다. 손바닥에 남은 자갈 가루를 바지에 문질렀다.'존재를 알리는 것뿐이야. 내가 여기 있다고.'그 문장은 이제 나 자신에게도 설득력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그 문장을 붙잡았다. 붙잡을 게 그것밖에 없었으니까.*둘째 날 밤, 언니가 왔다. 콩이 짖는 소리, 자매가 나누는 낮은 목소리.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셋째 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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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이름을 불리다

박동진 씨죠.그녀가 내 이름을 불렀다.나는 그 자리에 앉아 떨어진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화면이 꺼져 있었다. 손을 뻗어 주울 수 없었다.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그녀가 내 이름을 안다.어떻게. 경찰. 어머니. 도윤. 통장. 누구든. 이 골목에서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다. 그녀가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그런데 나는, 그 가능성을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몇 달 동안 나는 그녀를 알았다. 출근 시간, 퇴근 시간, 근무표, 강아지 이름, 남자친구 이름, 결혼 날짜, 전화번호, 그리고 이름. 한서연. 나는 그 모든 걸 알고, 그녀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믿었다. 그 불균형이 나를 지탱했다. 나만 보는 창문. 저쪽은 모르는 창문.그 창문이 방금, 반대 방향으로 열렸다.*공포는 오래가지 않았다.한 시간쯤 지나자, 다른 감정이 올라왔다. 나는 그 감정을 부정하려 했다. 부정하지 못했다.그녀가 내 이름을 불렀다.이름을. 박동진 씨. 존댓말로. 또박또박.처음이었다. 83번 버스에서도, 계단에서도, 떡을 줄 때도, 두부를 돌려줄 때도, 편의점 앞 캔커피에서도. 그녀는 한 번도 내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다. 맞은편 분. 두부 은인. 그 사람.이제 그녀는 나를 박동진이라고 부른다.그녀의 세계 안에, 내 이름이 있다.나는 그 생각을 하며 웃었다. 소리 없이. 새벽 네 시, 불 꺼진 방에서.그 웃음이 얼마나 끔찍한지, 나는 거울을 보지 않아서 몰랐다.*다음 날, 나는 사하구 부모님 집에 갔다.돈을 빌리러. 통장 잔고가 두 달을 못 버틸 만큼 줄어 있었다. 엄마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봉투를 건넸다. 백만 원."아부지 알면 안 된다. 얼른 넣어라."나는 봉투를 주머니에 넣었다. 엄마가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우리 아들 얼굴이 와 이렇노. 잠은 자나.""잔다.""밥 먹고 가라. 엄마가 갈비 재워놨다."나는 부엌 식탁에 앉았다. 엄마가 갈비를 굽는 동안, 내 옛날 방에 잠깐 들어갔다.변한 게 없었다. 고등학교 때 책상. 벽에 붙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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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결혼식장

토요일, 재홍의 결혼식이었다.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엄지 든 곰 이모티콘 하나로 끝낸 관계였다. 우리 둘 다 알았다.그런데 오전 열한 시, 나는 셔츠를 다리고 있었다.왜인지 몰랐다. 아니, 알았다. 사람이 보고 싶었다. 창문 너머가 아닌, 내 이름을 알고 나를 보는 사람들. 고등학교 친구들. 박동진, 오랜만이다, 라고 말해줄 사람들.그리고 원주가 올 것이다.차단한 원주. 니 내 친구다, 라던.*예식장은 서면의 한 호텔이었다.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발이 멈췄다.화환이 줄지어 있었다. 신랑 서재홍. 신부 김지현. 화환마다 회사 이름. 재홍이 다니는 회사, 지현의 회사, 거래처들. 로비는 정장 입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웃음소리. 악수. 명함 교환.나는 그 로비에 들어가지 못했다.유리문 밖에서 봤다. 고등학교 동창들이 모여 있었다. 진급한 민혁. 결혼한 태훈과 그의 아내, 아기 띠를 한. 코인으로 돈을 벌었다던 성호, 새 시계를 찬 손목. 그리고 동창회 때 사업이 망했다던 준영도 있었다. 준영은 웃고 있었다. 새로 시작한 일이 잘 된다고,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모두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나만 유리문 밖에 서 있었다.그리고 그 무리 한가운데, 원주가 있었다. 새 정장. 공무원증 목걸이는 안 했지만, 공무원 같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반듯하고, 안정된. 원주는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도 자꾸 로비 입구를 봤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나를.나는 돌아섰다.*호텔 앞 횡단보도까지 걸었을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동진아!"원주였다. 로비 유리문을 박차고 뛰어나오고 있었다. 새 정장 자락이 펄럭였다.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신호가 바뀌려 하고 있었다."동진아! 서라! 박동진!"사람들이 돌아봤다. 나는 뛰었다. 빨간불로 바뀌기 직전의 횡단보도를. 차 한 대가 경적을 울렸다.건너편에 도착해 돌아봤다. 원주가 횡단보도 앞에서 멈춰 있었다. 빨간불. 차들이 우리 사이를 지나갔다. 원주가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차 소리 사이로, 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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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엄마

"원주가 뭐라는데."내 목소리는 차가웠다. 엄마에게 이런 목소리를 쓴 적이 있었던가."니… 니 동네에 어떤 아가씨가 있다며. 니가 그 아가씨를… 매일 쳐다보고, 따라다니고, 경찰까지 왔었다며.""원주가 오해한 거야.""오해?""그냥 옆집 사람이야. 인사 몇 번 한 게 다야. 원주가 뭘 잘못 본 거라고.""원주가 그러더라. 니 새벽 세 시에 창문 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고. 그 아가씨 택시 타고 올 때."나는 대답하지 않았다."동진아. 엄마 봐라. 엄마한테 거짓말하지 마라. 니 그 아가씨한테 뭐 했노.""아무것도 안 했다고!"소리가 터져 나왔다. 엄마가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원주 그 새끼가 뭘 안다고. 지 합격했다고 이제 나를 가르치려 들어. 엄마까지 끌어들이고. 내가 뭐 범죄자야?""…동진아.""끊어. 피곤하다.""엄마 내일 갈게.""오지 마.""갈 거다. 아부지랑 같이."전화가 끊겼다. 엄마가 먼저 끊었다. 처음이었다.*나는 밤새 방을 치웠다.창가 의자를 책상 쪽으로 돌렸다. 커튼 틈을 없앴다. 화분 옆 자갈 통을 베란다 구석으로 치웠다. 노트, 그녀의 글씨체를 흉내 내 이름을 적은 노트를 찢었다. 한 장씩. 잘게. 변기에 버리고 물을 내렸다.휴대폰 메모장. 제목 없는 목록. 열네 개의 번호.그것도 지웠다. 이번엔 진짜로. 휴지통에서도.번호는 외우고 있었다. 목록도 외우고 있었다. 지워도, 아무것도 지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가 볼 수 있는 곳에서는, 사라져야 했다.새벽 다섯 시, 방은 깨끗했다. 성실한 재취업 준비생의 방. 카메라를 위해 연기하던 그 방처럼.나는 그 방 한가운데 앉아, 스스로에게 물었다.엄마에게 보여줄 수 없는 것들을 지우는 동안, 나는 무엇을 지우고 있었나.*오후 두 시, 엄마가 왔다.양손에 반찬통을 들고. 아버지는 올라오지 않았다. 골목 입구에 차를 세우고,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아부지는?""차에 계신다. 니 얼굴 보면 화날 것 같다고."엄마는 방에 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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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유리

그날 밤, 나는 무너졌다.소주 네 병. 담배 한 갑. 창가 바닥에 앉아, 커튼을 활짝 열어둔 채.엄마의 고개. 그녀 어머니의 고개. 두 개의 굽은 등이 계속 눈앞에서 겹쳤다.부끄러웠다. 견딜 수 없을 만큼. 그리고 그 부끄러움은 금방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늘 그러듯이.분노로.왜 엄마를 끌어들였나. 원주. 원주가 먼저 엄마에게 전화했다. 그리고 그녀. 그녀가 자기 엄마를 우리 집 앞까지 보냈다. 허리를 굽히라고. 반찬을 들려서. 그녀가 경찰에게 내 이름을 말했다. 도윤이 표시 제한으로 전화했다. 모두가 나를 포위하고 있었다.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그 문장을 소리 내어 말했을 때, 목소리가 웃음처럼 뒤틀려 나왔다. 아무것도 안 했다. 집에 들어갔다. 노트를 읽었다. 초인종을 눌렀다. 자갈을 던졌다. 새벽에 전화했다. 숨소리를 들었다.아무것도 안 했다."아무것도 안 했다고!"빈방에 대고 소리쳤다. 벽이 울렸다.*새벽 두 시 반. 순찰차가 지나간 직후.맞은편 창문에 무드등이 켜져 있었다. 커튼 가장자리에 붉은 점이 깜빡였다.나는 베란다 구석에서 자갈 통을 꺼냈다. 새벽 다섯 시에 엄마를 위해 치워둔 그 통.손톱만 한 자갈이 아니었다. 통 바닥에서 조금 더 큰 것을 골랐다. 엄지손가락 마디만 한.왜 그걸 골랐는지 모른다. 아니, 알았다. 틱, 하는 작은 소리로는 부족했다. 더 큰 소리가 필요했다. 엄마가 흘린 눈물만큼 큰. 내 안에서 울리는 이 소리만큼 큰.창문을 열었다.던졌다.쨍.작은 소리가 아니었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는 아니었다. 금이 가는 소리였다. 날카롭고, 짧고, 골목 전체를 가르는.그리고 비명.그녀의 비명이었다. 커튼 너머에서. 짧게, 그리고 길게. 개들이 미친 듯이 짖기 시작했다. 불이 켜졌다. 방, 거실, 현관. 전부.나는 창문을 닫았다. 불을 껐다. 바닥에 엎드렸다.비명은 멈추지 않았다. 흐느낌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날카로워졌다. 누군가에게 전화하는 목소리. 떨리는, 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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