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아홉 번째 생에는 당신의 신부가 되지 않겠습니다: Chapter 21 - Chapter 30

30 Chapters

제021화. 90일의 계약

엘리베이터가 12층을 지났다. 한지우는 태블릿을 해원에게 밀었다.“대체 보호안 초안이야. 지금 이걸 네가 선택해서 제출하면 강제이송은 일단 보류시킬 수 있어.”해원은 화면을 빠르게 읽었다.[보호·공동수사 협약]기간: 90일.첫 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보호’가 앞에 있네요.”시헌이 옆에서 말했다.“바꿀 수 있습니다.”“공동수사가 먼저예요.”“수정하겠습니다.”지우가 즉시 문구를 고쳤다.[공동수사 및 안전협약]해원은 다음 항목으로 내려갔다.지정 안전가옥 거주.생체영력 상태 정기 확인.특수현상 발생 시 제1수사팀과 연락 유지.여기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문제는 그 아래였다.[안전상 필요 시 담당 팀장은 대상자에 대한 이동제한 조치를 요청할 수 있다.]“삭제.”지우가 곧바로 지웠다.시헌도 반대하지 않았다.“제한이 필요할 정도의 위험이 발생하면?”그가 물었다.“위험과 선택지를 먼저 설명하세요.”해원이 답했다.“그리고 제가 결정능력을 잃었다고 판단한다면, 그 판단 근거를 한지우 변호사와 별도 의료인에게 동시에 검증받아요. 당신 혼자 결정하지 않습니다.”“동의합니다.”엘리베이터가 15층을 지났다. 해원은 더 빠르게 내려갔다.“투약은 본인 동의 없이는 금지. 진정제뿐 아니라 영력억제제도 포함.”“넣을게.”지우가 타자를 쳤다.“신체 접촉은 긴급구조를 제외하면 사전 고지.”시헌이 말했다.“긴급구조의 범위도 정해 두는 편이 좋습니다.”해원이 그를 봤다.“생명 또는 중대한 신체 손상이 임박하고, 동의를 받을 시간이 없을 때.”“네.”“그리고 긴급상황 종료 즉시 접촉 종료.”“그렇게 하겠습니다.”엘리베이터 표시가 16으로 바뀌었다. 복도에 있던 수사관들이 움직였다.해원은 마지막으로 계약 종료 조항을 읽었다.[위험성 해소 시 조기 종료 가능.]“이것도 바꿔요.”“어떻게?”지우가 물었다.“90일을 상한으로. 제가 언제든 종료를 요구할 수 있게.”“기관이 거부하면?”“거부 사유를 문서로 내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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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22화. 같은 집, 다른 문

안전가옥은 한강 북쪽의 오래된 주상복합 건물에 있었다. 전용 엘리베이터도 없었고, 로비에는 새벽 청소를 하는 관리 직원이 있었다.“기관 시설이 아니네요.”“명의만 정부 협력법인으로 되어 있습니다.”이선경이 말했다.“건물 전체를 통제하지 않습니다. 이 층의 2개 호실만 사용 중입니다.”엘리베이터가 24층에 멈췄다. 시헌이 앞서 걸어가다 복도 중앙에서 멈췄다.왼쪽 2401호.오른쪽 2402호.“윤해원 씨는 2401호입니다.”해원이 오른쪽 문을 가리켰다.“저쪽은요?”“제가 사용합니다.”“같은 집이 아니네요.”“초안에는 같은 안전가옥이라고 되어 있지만 생활공간은 분리했습니다.”해원은 문과 문 사이의 거리를 확인했다.약 7미터.복도 끝에는 공용 비상계단이 있었다.“내부 연결문은?”“없습니다.”“마스터키?”시헌이 주머니에서 카드 하나를 꺼냈다.“관리용 비상키가 있습니다. 윤해원 씨 호실에는 사용하지 않겠습니다.”“그럼 왜 가지고 있죠?”“화재나 구조 요청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서입니다.”해원은 지우를 봤다.지우가 손을 내밀었다.“내가 보관할게요.”시헌은 망설임 없이 카드를 건넸다.“그게 낫겠습니다.”해원은 2401호 안으로 들어갔다.거실과 작은 주방, 침실 2개.창문에는 방탄필름과 영력 차단막이 설치돼 있었지만 병원이나 구금시설 같은 느낌은 없었다. 문 안쪽에는 수동 잠금장치가 하나 더 있었다.해원이 직접 잠가 봤다.철컥.“외부에서 해제할 수 있습니까?”선경이 대답했다.“기계식이라 안 됩니다.”“좋네요.”지우가 소파에 가방을 내려놓았다.“나도 오늘은 여기 있을게.”“괜찮아.”“안 괜찮아. 오늘만.”해원은 작은 침실 쪽으로 턱을 들었다.“그럼 저 방 써.”선경이 비상통신기와 영력 측정기를 현관 안쪽에 놓았다.“측정값이 자동으로 전송됩니까?”해원이 기기를 집어 들었다.“기본 설정은 그렇습니다. 끄실 수 있습니다.”문밖에 서 있던 시헌이 답했다.해원은 선경에게 설정을 꺼 달라고 했다. 전송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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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23화. 놓고 온 내 이름

대문 앞에서 해원의 출입카드가 거절됐다.삑.그녀는 카드를 한 번 더 대는 대신 초인종을 눌렀다. 안쪽에서 누군가 뛰어나오는 소리가 들렸다.“아가씨, 왜 밖에서…….”자신을 오래 돌봐 온 가사관리인이 카드 단말을 보고 말을 멈췄다.“어제부터 방문 등록으로 바뀌었대요. 저는 잠깐 외출하신 줄 알았는데.”해원은 카드를 가방에 넣었다.“짐만 가져갈게요.”3월 7일 오전 10시.윤월재단이 관리하는 집은 이틀 전 떠날 때와 똑같았다. 현관의 백합도, 계단 위 액자도 제자리에 있었다. 해원의 카드만 더는 문을 열지 못했다.지우가 방문대장에 이름을 썼다.“한지우, 물품 인수 입회. 미리 보낸 명단 확인하셨죠?”관리인은 뒤따라오는 시헌을 보고 난처하게 손을 모았다.“수사관님도 방까지 올라가시나요?”“현관에 있겠습니다.”시헌은 해원에게 시선을 옮겼다.“차량은 옆문에 대 두겠습니다.”해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계단을 올랐다.그가 자신의 방을 보지 않는 것은 다행이었다. 아직 이 남자에게는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것이 많았다. 어떤 침대에서 잤는지, 무엇을 버리지 못하고 보관했는지까지.방 안에는 여행용 가방 2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관리인이 지퍼를 열었다. 새 잠옷과 화장품, 보석함이 칸마다 반듯하게 들어 있었다. 모두 바로 쓸 수 있도록 포장도 벗겨져 있었다.“급히 나가셔서 불편하실까 봐요.”해원은 가방을 닫았다.“챙겨 주셔서 고마워요. 제가 다시 고를게요.”“필요한 건 다 넣었는데…….”지우가 낮게 거들었다.“빠진 것도 있을 테니까요. 빈 상자부터 부탁드릴게요.”관리인이 나가자 해원은 책상 맨 아래 서랍을 열었다.여권이 든 남색 지갑이 그대로 있었다. 집을 나설 준비를 하며 위치와 유효기간까지 확인했던 물건이었다. 여권을 펼쳐 사진을 보고, 이번에는 사본이 아닌 지갑 자체를 가방에 넣었다.작은 수첩도 꺼냈다.남들이 채운 일정표와 달리 표지 안쪽에는 자기 글씨가 빼곡했다. 건강검진을 마치고 가려던 가게, 사다 놓고 못 읽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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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24화. 돌아오면 준다는 말

해원은 인수표를 돌려놓았다.“제 여권을 가져가는데 저 사람 서명이 왜 필요하죠?”담당자는 펜 끝으로 아래쪽을 가리켰다.“귀중품 반출 때 쓰는 공용 양식입니다. 생활지원 책임자를 지정해 두셔서…….”“제가 지정했습니까?”담당자의 입이 닫혔다.지우가 그 사이에 서류를 가져왔다.“여권하고 행사 대여품은 따로 빼세요. 같은 종이에 묶지 마시고.”“결재받은 양식이라 임의 변경은 어렵습니다.”“그럼 여권을 안 돌려주는 이유를 메일로 보내 주세요. 누구 지시인지도요.”담당자는 해원 대신 자기 휴대전화를 내려다봤다.해원은 열려 있던 여행가방을 옆으로 밀었다. 집에 돌아온 지 30분이 지났는데 상자는 아직 하나도 현관을 넘지 못했다.다시 전화가 왔다.선우도하.이번에는 받았다.“우리 집에 왔다며.”해원은 빈 서랍에 손을 얹었다.“제가 살던 집입니다.”“알아. 말이 그렇게 나온 거야. 지금 갈게.”“오실 필요 없습니다.”“네가 필요한 게 뭔지 내가 알잖아. 담당자한테 맡겨 놓으면 또 빠뜨릴 수도 있고.”수화기 너머로 차 열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회의만 정리하면 돼. 1시간 정도면 가.”“기다리지 않을 겁니다.”도하는 잠깐 말이 없었다.해원은 여권 지갑이 든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담당자가 무심코 손을 들었다가 지우를 보고 내렸다.“뭘 가져가려는데 그렇게 급해?”“여권, 제 수첩, 옷입니다.”“여권은 왜?”“제 물건이니까요.”“어디 갈 생각이야?”해원은 창문 너머를 봤다. 현관 옆에 시헌의 차가 서 있었다. 운전석은 비어 있었고, 그는 대문 쪽에서 경비원과 짧게 이야기하고 있었다.“그 이야기를 하려고 온 게 아닙니다.”“해원아. 얼굴 보고 얘기하면 될 일을 왜 자꾸 전화로 끝내려고 해.”“물건 돌려받는 일에 만남을 붙이지 마세요.”수화기 너머에서 도하의 숨이 거칠어졌다.“돌려주기 싫어서 이래?”“그럼 돌려주세요.”해원은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조금 전까지 나려던 차 열쇠 소리가 멎었다. 도하가 어디엔가 앉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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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25화. 내 것이 아닌 옷장

해원은 옷걸이를 도로 걸었다.“제가 입던 옷은 어디 갔어요?”관리인이 안쪽 붙박이장을 가리켰다.“촬영 의상이 들어와서 뒤로 옮겼어요. 봄옷은 이쪽으로 꺼내 뒀고요.”겉옷 안쪽에 작은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업체 이름, 대여 기간, 반납 예정일. 지우가 휴대전화를 꺼내 목록을 띄웠다.“이번 행사에 입었던 것도 섞였어?”“네. 세탁 끝나면 함께 반납할 예정이었습니다.”“그럼 비닐 벗기지 말고 그대로 두죠.”해원은 안쪽 장문을 열었다.접힌 니트와 청바지가 보였다. 맨 위의 검은 바지 허리에는 단추 대신 실밥만 남아 있었다. 바느질 함에 남아 있던 단추 하나가 이 옷에서 떨어진 것이었다.“찾았다.”“뭐?”지우가 돌아봤다.“내 옷.”해원은 바지를 팔에 걸쳤다. 그 아래에서 얇은 면 티셔츠를 꺼내자 지우가 눈을 찌푸렸다.“그건 너무 늘어났는데.”“잘 때 입으면 돼.”“같이 사는 사람도 없으니 상관없긴 하다.”해원이 복도 쪽을 흘끗 봤다.시헌은 빈 상자를 내려놓고 전화 중이었다. 지우도 시선을 따라갔다가 어깨를 으쓱했다.“맞은편 집은 옆집이지.”“알아.”괜히 대답이 빨라졌다. 해원은 티셔츠를 개서 상자 밑에 눌러 넣었다.지우는 웃지 않았다. 장 안쪽에서 바닥까지 끌린 치맛자락을 걷어 주느라 바빴다.해원은 자기가 산 코트 2벌을 따로 걸었다. 재단에서 지급한 정장은 남겼고, 선물 받은 옷은 판단이 서지 않아 별도 보관을 부탁했다.반납할 옷만으로 이동식 행거가 찼다. 관리인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이렇게 두고 가시면 당장 입으실 게 없어요. 급하게 인터뷰라도 잡히면요?”해원은 뚜껑이 닫히지 않는 상자를 눌렀다.“잡힌 거 없어요.”“그래도 미리 준비는…….”“필요하면 그때 살게요.”말을 마친 뒤 한 번 숨을 골랐다. 관리인은 자신을 곤란하게 하려는 게 아니었다. 늘 옷이 늦지 않게 준비하는 사람이었고, 해원도 그 덕에 쉽게 나가곤 했다.“그동안 챙겨 주신 건 알아요.”관리인이 접고 있던 손을 멈췄다.“그러니 다 안 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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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26화. 새 문 앞의 운동화

2401호 앞에 짐이 내려졌을 때, 해원은 마지막 상자부터 열었다.코트 위의 신발 상자를 열어 운동화를 꺼냈다. 구두 옆에 나란히 뒀다. 현관에 신발이 2켤레 놓이자 빌린 방 같던 집이 조금 달라 보였다.시헌이 아래층에서 가져온 종이를 건넸다.“차량 적재함까지 확인했습니다. 남은 짐 없습니다.”해원은 종이에 적힌 상자 수를 세었다.큰 것 2개, 작은 것 1개.지우가 빈 손을 털었다.“생각보다 적네. 차 두 대 부를 뻔했어.”“오늘 전부 가져오진 않았어.”“응. 보관품은 내가 일정 잡아서 받을게.”지우는 수첩이 든 상자를 발끝으로 가리키고 휴대전화를 받았다. 재단 담당자였다. 반납할 대여품이 몇 벌인지 다시 물어 오는 모양이었다.해원은 통화하는 친구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한 뒤, 시헌에게 말했다.“작은 상자만 식탁에 부탁드릴게요.”그는 신발을 벗고 상자를 옮겼다. 뚜껑이 벌어져 수첩 모서리가 보였지만 그대로 내려놨다.해원은 방문을 열어 여권 지갑을 침실 서랍에 넣었다. 열쇠는 가방 안쪽으로 옮겼다. 어느 칸에 무엇을 넣었는지 알리는 전화는 하지 않았다.거실로 돌아오니 시헌이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가시게요?”“짐은 다 옮겼습니다.”해원은 아직 씻지 못한 컵을 내려다봤다.“커피 한 잔만 하고 가세요.”그가 잠깐 머뭇거렸다.해원은 주방으로 돌아섰다.“계약 이야기는 내일 지우가 오면 해요. 오늘은 한 잔만.”“그럼 얻어 마시겠습니다.”지우는 통화를 끊고 외투를 집었다.“나는 사무실 갈게. 인수표 원본 맡겨야 해.”해원이 돌아보자 지우가 식탁 끝을 톡 두드렸다.“짐 들였다고 밤새 정리하지 말고. 내일 10시에 와서 볼 거야.”“아이도 아니고.”“어제도 그 말 하고 약관 읽었잖아.”지우가 나간 뒤 해원은 머그컵을 씻었다. 펜 자국이 묻은 바닥을 몇 번 더 문질렀다. 거울 속에서 무언가 나올까 경계하던 손으로 지금은 컵을 닦고 있었다.시헌은 식탁에서 물러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상자 하나가 의자 절반을 차지했는데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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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27화. 과거의 윤해원

3월 8일 새벽.백야병원 신경정화센터에서 서이나가 눈을 떴다.손끝에 하얀 빛이 불규칙하게 맺혔다. 그녀는 상체를 일으키고, 아직 꿈속인 것처럼 침대 발치를 더듬었다.“여우가…….”간호사가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서이나 씨, 악몽 꾸셨어요?”이나가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꼬리가 하나뿐이었어요.”간호사는 바닥에 떨어진 담요를 주웠다. 담요 아래에서 푸른 불꽃 한 점이 피어났다가 꺼졌다.***같은 날 오전 10시.해원은 초인종이 울리자 현관 모니터를 확인했다.차시헌 혼자였다.“들어오세요.”그는 서류 상자를 들고 있었다. 지우는 도로가 막혀 5분쯤 늦는다고 연락을 보낸 참이었다.“먼저 꺼내 놓으세요. 검토는 지우가 오면 시작하고요.”시헌은 어제 앉았던 식탁 끝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해원은 자신의 수첩과 바느질 함을 치웠다. 다 마신 커피잔 자리에는 물 한 잔을 뒀다.시헌은 밀려 있던 의자를 당겨 앉았다. 해원은 그의 시선이 어디로 가는지 잠깐 살폈다. 식탁 위로 펼친 문서 외에는 손대지 않았다.잠시 뒤 지우가 도착했다. 숨을 고르며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나 왔어. 시작하자.”“90일 협약 원본입니다. 수정된 조항 모두 반영됐습니다.”해원은 첫 장부터 읽었다.공동수사 우선.투약 동의권.정보 공유.일방 감독 금지.언제든 종료 요구 가능.협약을 정할 때 고쳤던 문장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별도 부속서가 있네요.”“현재 확인된 위험요소 목록입니다.”첫 번째는 감시각인.두 번째는 거울형 공간왜곡.세 번째는 월흔 반응.네 번째 항목에서 해원의 손이 멈췄다.[반복기억과 관련된 정신오염 가능성 — 미확인.]“이건 뭐죠?”시헌이 물잔을 내려놓았다.“월흔에 접촉할 때 과거와 현재의 감각이 겹칠 가능성이 있습니다.”“저를 정신이상으로 분류하는 겁니까?”“아닙니다.”시헌은 즉시 답했다.“기억의 진위와 별개로 감각 중첩 자체가 위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그의 시선이 멎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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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28화. 꼬리 하나의 악몽

3월 8일, 공식 신고가 접수되기 전의 백야병원.서이나는 같은 꿈을 3일째 꾸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악몽이라고 생각했다.하얀 복도 끝에 여우가 앉아 있었다.아주 큰 여우였다.등은 푸른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고,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이상한 건 꼬리였다.단 하나.여우는 매번 자신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복도 끝 문이 열리면, 안쪽에서 검은 손들이 나와 여우의 꼬리를 잡아당겼다.이나는 꿈속에서 늘 소리쳤다.도망가라고.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그리고 오늘은 달랐다.여우가 처음으로 이나를 향해 걸어왔다.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뒤, 사람 목소리로 말했다.‘그건 네 것이 아니야.’이나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서이나 씨. 제 목소리 들리세요?”담당의가 손전등으로 동공을 확인했다.이나는 거친 숨을 골랐다.“네.”“현재 위치는요?”“백야병원. 신경정화센터 검사실.”“오늘 날짜는?”“3월 8일.”답은 정확했다.의사는 안도한 듯 기록지에 체크했다.“영력 폭주 수치는 안정됐습니다.”이나는 손을 내려다봤다.손끝에서 새어 나온 하얀 빛은 사라졌지만 손바닥에는 낯선 푸른 잔광이 남아 있었다.“이건 뭐죠?”의사가 잠시 망설였다.“검사 중 일시적인 색 변화가 있었습니다.”“제 정화력은 흰색이에요.”“알고 있습니다.”“그런데 왜 파란색이죠?”“정확한 원인은 분석 중입니다.”누가 분석하는지, 누가 결과를 쥐고 있는지는 빠져 있었다.이나는 그 빈칸이 싫었다.누가 분석하고 있는지.누가 알고 있는지.왜 자신에게 말하지 않는지.그런데 지금까지는 한 번도 깊게 묻지 않았다. 센터에서 정상이라고 하면 정상인 줄 알았다.“오늘 검사 기록 보여 주세요.”의사의 표정이 굳었다.“내부 분석이 끝나면—”“제 기록이잖아요.”“서이나 씨.”“제가 봐도 되는 거 아닌가요?”처음으로 따지는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의사가 답하려는 순간 복도에서 경보가 울렸다.삐이익.검사실 조명이 꺼졌다가 켜졌다. 천장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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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29화. 백야병동

3월 8일 오전 열 시가 넘어 도착한 백야병원 앞에는 구급차보다 정부 차량이 더 많았다.해원은 차에서 내리기 전 건물부터 올려다봤다. 본관은 정상적으로 불이 켜져 있었다.문제가 생긴 곳은 별관 8층.창문 12개가 모두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밤도 아닌 오전인데, 그 층만 햇빛과 무관하게 발광하고 있었다.“그래서 백야병동인가요?”해원이 물었다.이선경이 고개를 저었다.“원래 이름입니다. 중증 이능력자 신경정화 병동이라 야간에도 조명을 끄지 않는 데서 붙은 명칭이고요.”“지금 저 빛은?”“정상 현상 아닙니다.”시헌이 태블릿을 해원에게 보여 줬다. 8층 평면도 일부가 검게 지워져 있었다.“07시 42분에 B구역 격리문이 닫혔습니다. 07시 49분부터 내부 CCTV 영상이 23분 전 기록을 반복 재생하고 있습니다.”“사람은 몇 명 있죠?”“등록상 의료진 9명, 환자 4명.”“등록상?”“실제 생체신호는 14개입니다.”한 명이 더 있었다.해원은 협약을 맺던 날 새벽에 온 첫 알림과 오늘 아침의 검사 결과 문자를 떠올렸다.서이나.“그 사람도 안에 있습니까?”“네.”시헌이 화면을 넘겼다.서이나.31세.정화능력자.백야병원 정기검사 대상자.사진 속 여자는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에 단정한 인상이었다.해원의 손목이 욱신거렸다.“이번 생에서 이 사람을 직접 만난 적은 없어요.”“현재 확인한 이번 생의 접점도 없습니다.”“그런데 왜 이 사람의 검사 알림이 제 번호로 왔죠?”“그걸 확인하려는 겁니다.”해원은 차에서 내렸다.시헌이 바로 뒤따르지 않았다.“윤해원 씨.”“왜요?”“이번 사건은 협약상 의무 참여 대상이 아닙니다.”해원은 그를 돌아봤다.“또 확인하는군요.”“네.”“갑니다.”“알겠습니다.”그제야 시헌이 같이 움직였다. 병원 로비에는 환자와 보호자들이 몰려 있었다.직원들은 8층 사고를 전기시설 문제라고 설명하고 있었지만, 천장 모니터에는 이미 국가이변관리청 재난 코드가 떠 있었다. 해원과 시헌이 별도 통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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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30화. 기계보다 먼저 아는 것

“8개요.”스피커 너머 서이나의 대답이 떨어지자 통제실의 공기가 달라졌다. 해원은 자신의 등 뒤를 확인했다.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남은 꼬리는 여전히 하나였다.“형태를 더 설명해 주세요.”시헌이 마이크 앞으로 다가갔다.“실체가 있습니까?”“반투명해요. 푸른색이고…….”이나가 잠깐 말을 멈췄다.“병실을 열 때마다 꼬리 하나가 사라집니다.”이선경이 즉시 생체신호 지도를 확대했다. 8층 B구역에는 14개의 점이 떠 있었다.그중 복도 중앙을 이동하는 검은 표시 하나.“장비상 미확인 개체는 없습니다.”현장 분석관이 말했다.“생체도 영체도 0입니다.”해원이 화면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있어요.”분석관이 돌아봤다.“무슨 근거입니까?”“냄새가 나요.”“여기는 1층 통제실입니다.”“그래도 납니다.”해원은 눈을 감았다.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 사이로 희미한 탄내가 섞여 있었다.불에 탄 털.자신의 꼬리가 소멸할 때마다 맡았던 냄새였다.첫 생에서는 죽기 직전.다섯 번째 삶에서는 정신을 잃기 전.여덟 번째에는 숨이 끊어진 뒤라 기억할 수 없었다.하지만 살아 있는 동안 맡은 냄새만으로 충분했다. 해원이 8층 평면도를 가리켰다.“이 복도 아니에요.”장비가 초록색으로 표시한 동쪽 통로였다.“저기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분석관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현재 유일하게 영력 오염 수치가 정상인 구간입니다.”“그래서 이상해요.”“정상이라서요?”“네.”해원이 손목을 들어 보였다. 검은 감시각인은 동쪽 통로가 화면에 잡힐 때마다 조금씩 선명해졌다.“이게 저 길을 좋아합니다.”시헌은 바로 물었다.“반대쪽은요?”해원이 서쪽 서비스 복도를 짚었다. 장비에는 붉은 위험 표시가 빽빽했다.“저쪽은 아파요. 그런데 끌리지는 않아요.”분석관이 고개를 저었다.“오염농도 기준치의 4.8배입니다. 현행 매뉴얼상 진입 금지입니다.”시헌이 말했다.“매뉴얼 근거는 기록해 두십시오.”그리고 평면도 위의 진입선을 서쪽으로 바꿨다.분석관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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