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생에는 당신의 신부가 되지 않겠습니다의 모든 챕터: 챕터 1 - 챕터 10

30 챕터

제001화. 여덟 번째 죽음

서울의 불빛이 아래에서부터 꺼지고 있었다.윤해원은 두꺼운 강화유리 너머로 검은 도시를 내려다봤다. 정확히는 내려다본다고 믿었다. 지하 120m, 국가영맥 중앙핵에는 창문이 없었다. 벽을 가득 메운 관측 화면이 한강과 도로, 빌딩 숲을 실시간으로 비출 뿐이었다.[중앙 안정률 18%][제1 봉인실 생존 신호 확인][제2 봉인실 생존 신호 확인]붉은 경고문 사이로 선우도하의 목소리가 들렸다.―해원아. 들려?“응.”목 안에서 쇠 맛이 났다. 해원은 입가를 손등으로 훔쳤다. 붉은 피 사이로 은빛 불씨가 섞여 나왔다.그녀의 등 뒤에 펼쳐진 꼬리는 이제 두 개뿐이었다. 그중 하나가 중앙핵에서 뻗어 나온 검은 도관에 붙들린 채 반투명하게 흔들렸다.―이나 쪽 정화로가 먼저 끊어졌어.도하의 목소리는 놀랄 만큼 침착했다. 재난 현장에서 수천 명을 살려 온 사람의 목소리였다.―서이나를 먼저 꺼내야 정화망이 유지돼. 그다음 바로 네 쪽으로 갈게.해원은 맞은편 화면을 봤다. 다른 봉인실 안에서 서이나가 의식을 잃은 채 떠 있었다. 그녀를 둘러싼 흰 빛이 꺼질 때마다 서울 지도 위 붉은 영역이 넓어졌다.“둘 다 열 수는 없어?”잠깐의 침묵.―지금은 안 돼.도하는 늘 가장 많은 사람을 살리는 답을 골랐다. 그래서 해원은 그를 사랑했다.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지금 혼자 남겨졌다.“얼마나 걸려?”―3분. 버틸 수 있지?도하는 물었지만, 이미 버틸 거라고 믿고 있었다.해원은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내려다봤다. 안쪽에는 두 사람의 이름과 결혼 예정일이 새겨져 있었다. 아직 식도 올리지 못한 반지가 피와 여우불에 젖어 있었다.“응. 기다릴게.”대답하자마자 제2 봉인실이 열렸다.화면 속 도하가 서이나를 받아 안았다. 의료진이 달려들었고 정화망 수치가 6% 상승했다. 도하는 한 번 이쪽을 돌아봤다. 시선이 닿을 리 없는 거리였는데도 해원은 그가 자신을 본 것 같았다.―곧 갈게.통신이 끊겼다.1분이 지났다.중앙핵의 도관이 꼬리 깊숙이 파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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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02화. 하나 남은 꼬리

해원은 한동안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죽음은 기억보다 먼저 몸에 남아 있었다. 목에는 도관이 파고들던 통증이, 가슴에는 심장이 멎던 순간의 압력이 선명했다. 그런데 손으로 더듬은 피부는 매끈했다. 흉터도 피도 없었다.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들어갔다.거울 속 여자는 27세의 윤해원이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도, 영력이 빠져 하얗게 센 머리도 아니었다. 선우도하의 결혼 상대라는 이름으로 잡지 표지를 장식하던 익숙한 모습이었다.해원은 문을 잠그고 손바닥을 거울에 댔다.“나와.”목소리가 떨렸다.등 뒤로 은빛 그림자가 피어났다. 여우불이 욕실 조명을 밀어내고, 희고 긴 꼬리 하나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하나.해원은 몇 번이나 다시 셌다.정확히 하나였다.첫 번째 죽음 뒤에는 여덟 개가 남았다. 두 번째에는 일곱 개. 죽을 때마다 하나씩 사라졌고, 이전 삶의 해원은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허약함과 악몽만 다음 생으로 가져갔다.이번에는 달랐다.잃어버린 꼬리 8개가 품고 있던 기억이 마지막 하나로 쏟아졌다.라비앙호텔의 깨진 거울.백야의료원 지하병동.월광대교 위로 밀려오던 검은 물.자신과의 관계를 부정하던 도하의 목소리.신부의 이름을 확인하던 지하 혼인실.도망치던 차의 창밖으로 보이던 청월산.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도하의 눈.그리고 중앙핵.해원은 세면대를 붙들었다. 여우불이 흔들리자 꼬리 끝이 반투명해졌다.이번에 이것까지 잃으면 어떻게 되는지 설명해 준 사람은 없었다.그래도 알 수 있었다.다음은 없었다.아홉 번째 꼬리는 시간을 되돌리기 위한 마지막 생명이었다. 이것이 사라지는 순간 윤해원이라는 영혼도 함께 끝난다.해원은 여우불을 거두고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었다.울 시간은 없었다.휴대전화와 노트북을 켰다.날짜는 2028년 3월 2일이었다.죽은 뒤 되돌아온 시점은 생마다 달랐다. 어떤 삶은 몇 해 전으로, 어떤 삶은 죽음과 가까운 시점으로 되감겼다. 이번 시작점이 도하의 프러포즈 전날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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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03화. 이번에는 싫어

3월 3일 오후 6시 57분.해원은 라비앙호텔 37층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세 개의 숫자가 익숙했다.37층.오후 7시.창가에서 세 번째 테이블.선우도하는 8번 모두 같은 장소에서 청혼했다. 계절 장식과 꽃의 종류는 조금씩 달랐지만, 그가 고른 반지와 첫마디는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직원이 해원을 알아보고 허리를 숙였다.“윤해원 고객님, 선우 전무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해원은 그대로 돌아설 수도 있었다.그러나 도망치듯 불참하면 선우가와 윤가는 해원의 거절을 일시적인 감정으로 처리할 것이다. 몸이 아팠다거나, 긴장했다거나, 언론 노출이 부담스러웠다는 이유를 붙여 약혼 발표를 강행할 가능성이 높았다.이번에는 직접 말해야 했다.자신의 입으로.연회장 문이 열리자 현악 4중주가 멈췄다. 넓은 공간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유리창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펼쳐지고, 바닥에는 흰 장미와 은빛 초가 길을 만들고 있었다.선우도하는 그 끝에 서 있었다.짙은 남색 정장, 반듯하게 넘긴 머리, 긴장을 숨기지 못한 눈.해원을 보자 그의 표정이 풀렸다.“안 올 줄 알았어.”“왜요?”“어제부터 연락을 피했잖아.”도하는 가까이 다가오다가 해원의 굳은 얼굴을 보고 걸음을 늦췄다. 강제로 손을 잡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가 좋아하던 무탄산수를 테이블 위로 밀어 주었다.“몸이 안 좋은 거야?”8번의 삶 동안 수없이 들었던 목소리였다.밤새 곁을 지켜 준 적도 있었다. 해원의 생일을 누구보다 먼저 기억했고, 재단 일로 지친 날이면 한강을 돌아 집까지 데려다줬다.그 모든 순간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래서 해원은 지금도 그를 미워하는 일보다 사랑했던 자신을 떼어 내는 일이 더 어려웠다.“할 말이 있다면서요.”도하는 해원의 존댓말에 눈썹을 아주 조금 움직였다.“우리끼리 있는데 왜 그래.”그가 웃으며 분위기를 풀려 했다.“앉아서 얘기하자. 오늘은 좋은 이야기만 하려고 준비했어.”“전 서 있는 게 편해요.”도하는 더 묻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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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04화. 이미 준비된 결혼

호텔의 비상전력이 들어오자 조명이 다시 켜졌다. 흩어진 드론은 한강 쪽으로 회수됐지만, 선우도하의 태블릿에는 여전히 붉은 경고가 떠 있었다.[월 계약자의 혼인 동의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도하는 화면을 끄고 해원을 바라봤다.“이 문구, 알고 있었어?”“아니요.”그건 진실이었다.8번의 삶에서 해원은 한 번도 청혼을 거절하지 않았다. 반지를 끼는 순간 어떤 계약이 활성화되는지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도하가 천천히 다가왔다.“오늘은 일단 돌아가자. 영맥망 문제부터 확인하고 내일 다시 얘기해.”“전 다시 얘기할 생각 없습니다.”“해원아.”“결혼 관련 자료를 전부 보내 주세요. 양가 협약, 재단 공동사업, 제가 당사자로 들어간 부속합의까지.”도하의 얼굴에서 다정한 표정이 조금 걷혔다.“갑자기 계약서를 왜 봐?”“제 결혼에 관한 문서니까요.”“네가 이미 검토한 자료야.”“그럼 다시 보는 데 문제없겠네요.”그때 연회장 안쪽 문이 열렸다.윤태진과 선우재헌이 들어왔다. 양가 비서와 법무팀 직원들 뒤로 축하 샴페인과 꽃다발까지 보였다.프러포즈만 둘의 일이었다. 수락 이후의 일정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윤태진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무슨 일이냐?”도하는 짧게 답했다.“해원이가 결혼을 다시 생각해 보고 싶답니다.”다시 생각하고 싶다는 말도 아니었다.해원은 즉시 바로잡았다.“결혼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어요.”비서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려갔다.윤태진은 잠시 딸을 노려보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나가 있으라고 손짓했다. 문이 닫히자 낮게 말했다.“오늘이 어떤 자리인지 모르진 않을 텐데.”“그래서 직접 왔습니다.”“감정 상한 일이 있으면 집에서 이야기해. 이런 식으로 양가 일을 망치지 말고.”선우재헌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태블릿의 경고 기록을 확인한 뒤 차분하게 의자에 앉았다.“해원 양이 부담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결혼 발표를 며칠 늦추는 정도라면 조정하지요.”“취소해 주세요.”“양가의 결합은 두 사람의 연애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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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05화. 세기의 약혼 취소

3월 5일 오전, 해원은 한지우를 만났다.대학 시절부터 유일하게 집안 이야기를 숨기지 않아도 됐던 친구이자 변호사였다. 지우는 위조된 전자서명 기록을 3분도 보지 않고 노트북을 덮었다.“이거 네가 안 한 거 확실해?”“확실해.”“그럼 약혼보다 먼저 형사 문제야. 전자문서 위조, 개인정보 무단 사용, 재단 인증서 부정 사용. 누가 했는지에 따라 배임까지 붙을 수 있고.”지우는 해원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그런데 너, 왜 이제야 나한테 왔어?”8번이나 죽었다는 말을 지금 할 수는 없었다. 해원은 가장 단순한 진실만 골랐다.“이번에는 내 말을 믿어 줄 사람이 필요해서.”지우는 더 묻지 않았다.“좋아. 그럼 오늘 네가 할 말은 셋이야. 결혼하지 않는다. 서명하지 않았다. 관련 자료를 수사기관에 제출한다. 설명 더 해 주지 마.”“왜?”“저 사람들은 이유를 들으면 이해하는 게 아니라 반박할 구멍부터 찾아.”지우는 기자 배포용 자료와 영상 저장 경로를 확인했다. 선우그룹이 생중계를 중단할 경우를 대비해 독립 송출 계정도 열었다.오후 2시.라비앙호텔 그랜드볼룸 앞에는 취재진이 가득했다.이틀 전 프러포즈 현장의 정전과 드론 사고가 이미 기사화됐지만, 선우그룹은 ‘일시적 시스템 오류’라고 발표했다. 약혼은 예정대로 진행된다는 보도자료도 새벽부터 배포됐다.해원이 차에서 내리자 플래시가 쏟아졌다.“윤해원 씨, 어제 선우도하 전무의 청혼을 받으셨습니까?”“결혼식 날짜가 확정됐나요?”“윤월재단과 선우그룹의 지분 교환이 사실입니까?”해원은 아무 대답 없이 행사장으로 들어갔다. 무대 중앙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선우도하 × 윤해원][두 가문의 새로운 동행]‘동행’이라는 단어가 우스웠다.해원의 대기실에는 흰색 드레스와 다이아몬드 귀걸이, 약혼반지가 준비돼 있었다. 반지 상자 옆에는 착용 장면을 촬영할 카메라 동선까지 표시돼 있었다.도하가 문을 닫고 들어왔다.“해원아, 10분만 얘기하자.”그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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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06화. 파혼한 여자는 미쳤다고 불렸다

“윤해원 씨, 지금 말씀하신 게 파혼 선언이 맞습니까?”“선우그룹과의 혼인도 전면 취소입니까?”“갑작스러운 결정인데 건강 문제라도 있으신 겁니까?”질문이 한꺼번에 쏟아졌다.방금 전까지 약혼을 축하하던 플래시가 이제는 먹잇감을 발견한 것처럼 번쩍였다. 해원은 마이크를 내려놓지 않았다.“네. 약혼과 결혼 계획 모두 취소합니다.”“선우도하 전무와 상의된 내용입니까?”“제 결혼 여부를 결정하는 데 상대의 허락은 필요하지 않습니다.”웅성거림이 커졌다.누군가 뒤쪽에서 물었다.“최근 윤해원 씨가 불면이나 환청으로 치료받았다는 제보가 있습니다. 오늘 발언도 충동적인 판단 아닙니까?”해원의 눈이 가늘어졌다.아직 행사장을 떠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의료 정보가 흘러나왔다. 여덟 번의 삶에서 익숙하게 보았던 방식이었다.이상 징후를 보인다.불안정하다.보호가 필요하다.그리고 결국, 본인의 의사는 사라진다.“제 건강 상태에 관해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기사화하실 경우 법적으로 대응하겠습니다.”“그럼 치료받은 사실 자체는 부정하지 않으시는 겁니까?”“질문을 바꾼다고 답이 달라지진 않습니다.”짧게 끊은 해원이 단상에서 내려왔다.그때 도하가 앞을 막았다.“해원아. 잠깐만.”그는 웃으려 했지만 얼굴이 굳어 있었다.“지금 네가 많이 예민한 건 알아. 우리 둘이 조용한 데서 얘기하자.”우리.해원은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여덟 번이나 자신을 설득했던 말이었다.우리 미래를 위해.우리 가족을 위해.우리 모두를 위해.그 ‘우리’ 안에서 가장 먼저 지워진 사람은 늘 윤해원이었다.“선우도하 씨.”도하의 표정이 멎었다.“오늘부로 개인적인 연락도 중단해 주세요. 필요한 내용은 대리인을 통해 전달하겠습니다.”“대리인?”“저요.”낯익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한지우가 기자들 사이를 밀고 들어왔다. 손에는 이미 명함과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윤해원 씨 법률대리인 한지우 변호사입니다.”지우는 기자들을 향해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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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07화. 검은 정부 차량

검은 세단의 조수석에서 먼저 내린 사람은 회색 코트를 입은 여자였다. 그녀는 기자증도, 선우그룹 출입증도 달고 있지 않았다.대신 지갑처럼 펼친 신분증에 낯선 기관명이 박혀 있었다.국가이변관리청 특수현상수사국.“윤해원 씨 맞으십니까?”해원은 휴대전화 렌즈를 조금 올렸다.“신분증 그대로 보여 주세요.”여자가 잠시 멈췄다가 신분증을 카메라 앞에 내밀었다.“특수현상수사국 제1수사팀 이선경 수사관입니다. 현재 윤해원 씨에게서 미등록 영력 파동이 감지되어 확인 절차가 필요합니다.”지우가 곧바로 앞으로 나섰다.“임의 확인입니까, 강제처분입니까?”“현재는 임의입니다.”“그럼 의뢰인은 거부합니다.”선경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변호사님.”“한지우입니다.”“한 변호사님. 7분 전 이 건물 반경 300미터 안에서 국가 영맥망에 비정상적인 역류가 발생했습니다. 윤해원 씨의 생체영력과 파형이 일치합니다.”해원의 손가락이 굳었다.파혼을 선언한 직후였다.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정확했다.“그래서 제가 뭘 했다는 겁니까?”“그걸 확인하려는 겁니다.”“확인할 자료와 법적 근거를 먼저 보내 주세요.”해원이 단호하게 끊었다.선경은 강요하지 않았다.그 대신 태블릿 화면을 돌려 보여 주었다.붉은 선이 급격히 솟은 그래프와 위치 지도였다. 중심점은 행사장.“오늘 밤 안에 2차 파동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습니다.”“가능성이 몇 퍼센트죠?”“현재 계산값은 61퍼센트입니다.”“그 숫자로 사람을 데려가도 됩니까?”선경이 입을 다물었다.해원은 익숙한 불쾌감을 느꼈다.확률.위험.보호.사람을 통제할 때 가장 편리한 단어들이었다.“자료는 제 변호사에게 보내세요. 저는 갑니다.”해원이 몸을 돌리는 순간, 선경의 이어피스에서 짧은 잡음이 들렸다. 그녀가 누군가의 지시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강제 이동은 하지 않습니다.”지우가 낮게 중얼거렸다.“말이 너무 빨리 바뀌는데.”해원도 같은 생각이었다.차 안에 누가 있다.그리고 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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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08화. 죽음의 끝에 있던 남자

차문이 열리자 찬 공기가 밀려들었다. 해원은 도로 가장자리로 내려섰다.차시헌은 세 걸음 앞에서 멈췄다. 가까이서 보니 더 확실했다.틀릴 리가 없었다.첫 번째 삶에서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에도.다섯 번째 삶에서 피 묻은 바닥에 쓰러졌을 때도.여덟 번째 삶에서 마지막으로 눈을 감기 직전에도.시야 끝에 있던 얼굴.“윤해원 씨.”낮고 짧은 목소리였다.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해원의 손등에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지우의 손이 해원 쪽으로 움직였다가 멎었다.“해원아.”“뒤로 가.”해원은 시헌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당신이죠.”“질문이 불완전합니다.”“내가 죽을 때마다 거기 있던 사람.”시헌의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해원은 그 침묵을 인정으로 받아들였다.해원이 손을 뻗었다.여우불이 길게 늘어나 창처럼 시헌의 가슴을 향해 날아갔다.시헌은 몸을 틀어 피했다.검은 코트 자락이 불꽃에 스쳤지만 그는 반격하지 않았다. 해원이 두 번째 불꽃을 만들었다.“윤해원 씨. 여기서 힘을 더 쓰면 영맥 역류가 커집니다.”“그래서요?”“당신도 위험합니다.”“내가 위험한 걸 당신이 왜 걱정하죠?”다시 불꽃이 튀었다.시헌은 정면에서 허리 뒤의 검을 뽑았다.짧고 검은 칼날이었다.해원은 즉시 몸을 낮췄다.칼날이 자신을 향할 거라고 확신했다. 여덟 번의 삶이 동시에 반응했다.먼저 베어야 한다.이번 삶에서는 죽기 전에.하지만 시헌의 검은 해원을 비껴 허공을 갈랐다.챙.금속이 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났다. 동시에 해원의 왼쪽 손목에서 검은 빛이 튀었다.보이지 않던 가느다란 문양 하나가 피부 위로 떠올랐다가 끊어졌다.해원이 손목을 움켜쥐었다.“뭘 한 거죠?”시헌은 검을 거두었다.“감시 계약만 절단했습니다.”“누가 붙인 계약인데요?”“지금은 확인 중입니다.”“거짓말.”“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단정해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해원은 이를 악물었다.화가 날수록 목소리는 오히려 낮아졌다.“내 몸에 붙어 있던 걸 당신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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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09화. 아홉 번째라는 말

지우의 사무실로 돌아온 건 밤 9시가 넘어서였다. 해원은 코트도 벗지 않은 채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부터 펼쳤다.국가이변관리청에서 보내온 자료였다.[비인가 감시각인 절단 보고서]대상자: 윤해원.절단자: 차시헌.절단 시각: 2028년 3월 5일 19:42.해원은 마지막 줄을 오래 보았다.[각인 설치 주체: 미확인.]“진짜 모른다고 적었네.”지우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적어도 문서로 책임은 졌어. 나중에 말 바꾸면 이게 남고.”“그게 이상해.”“뭐가?”“내가 아는 사람들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어.”해원은 종이를 넘겼다.그 뒤에는 영맥 파동 분석표와 현재 조치 수준이 붙어 있었다.강제보호 없음.임의 조사 요청.당사자 동의 없는 약물 투여 금지.접촉 시 법률대리인 동석 허용.마지막 조항 옆에 수기로 추가된 문장이 있었다.[당사자의 판단능력 저하를 추정 사유만으로 인정하지 말 것.]서명은 차시헌.해원은 종이를 내려놓았다.자신을 죽인 사람이라고 의심하는 남자가, 누구보다 먼저 자신의 결정권을 문서에 박아 넣고 있었다.모순이었다.그래서 더 위험했다.휴대전화가 울렸다.선우도하였다.받지 않자 곧 메시지가 도착했다.[해원아. 기사 전부 내리게 하고 있어.][우리 둘이 먼저 얘기해야 해.][네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줄게. 일단 집으로 와.]해원은 화면을 지우에게 보여 줬다.“이게 협박으로 보이진 않지?”“아직은. 대신 ‘집으로 와’가 반복되면 기록해 둬.”해원은 답장을 짧게 썼다.[개인 연락 중단 요청드렸습니다. 이후 연락은 법률대리인을 통해 주세요.]전송하자마자 전화가 다시 울렸다. 화면에는 모르는 번호가 떴다.해원은 받았다.“윤해원 씨.”차시헌이었다.“제 번호는 어떻게 알았죠?”“공식 조사 연락처로 등록된 번호입니다. 원하시면 이후 연락은 전부 한 변호사님을 통하겠습니다.”“용건부터 말하세요.”“오늘 절단한 감시각인이 다시 생성되고 있습니다.”해원의 시선이 손목으로 떨어졌다.아무것도 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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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10화. 첫 번째 죽음

문을 열자 선우도하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넥타이는 느슨했고 머리도 흐트러져 있었다. 평소라면 사람들 앞에서 절대 보이지 않을 모습이었다.“해원아.”도하가 한 걸음 다가왔다.해원은 같은 만큼 물러섰다.“여기까지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전화도 안 받고, 집에도 안 들어오고.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그래서 변호사를 통하라고 했어요.”“우리 사이에 변호사가 왜 필요해?”또 우리였다.도하는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해원은 그 표정을 보며 이상할 만큼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다.미워할 힘조차 아까웠다.“파혼했으니까요.”“그건 네가 오늘 갑자기—”“갑자기가 아닙니다.”“해원아.”도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부탁하는 말투였지만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일단 집에 가자. 병원도 내가 알아볼게. 네가 왜 이러는지 확인하고 나서 다시 얘기하자.”해원의 눈빛이 식었다.“제가 아프다는 전제로 말하지 마세요.”“그럼 내가 뭘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 아침까지 아무 문제 없었잖아.”아침까지.해원에게는 아니었다.오늘 아침 눈을 뜨기 전까지 여덟 번의 삶이 있었다. 도하에게는 없었던 시간이었다.“당신이 이해하지 못해도 제 결정은 유효합니다.”“난 인정 못 해.”“인정받으러 한 말 아니에요.”도하의 턱이 굳었다. 그는 잠시 해원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잠깐만. 네 손이 왜 그래?”해원의 왼쪽 손목 아래로 검은 선이 희미하게 번지고 있었다.재생되는 감시각인이었다.“만지지 마세요.”하지만 도하는 이미 해원의 손목을 잡았다.“도하 씨, 놓—”시야가 새하얗게 터졌다.***비가 내리고 있었다.낯선 산길이었다.아니.해원에게는 낯설지 않았다.첫 번째 삶의 마지막 날.도하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거대한 석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태양처럼 붉은 각인이 타오르고 있었다.석문 안쪽에서 해원이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도하야! 열어!”문틈 사이로 푸른 여우불이 새어 나왔다.도하의 얼굴은 창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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