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아침, 성북동 본채 안방 다실.“약기운이 조금 도는지, 얼굴에 누렇던 낯빛이 제법 가셨구나.”시어머니 민 여사가 옻칠 찻상 너머로 차가운 놋그릇 사발을 턱짓으로 오만하게 가리켰다.사발 안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시커멓게 졸아붙은 독초(천남성·파두) 탕약이 담겨 있었다.채경을 서서히 불임으로 만들고 자궁을 망가뜨려 시댁의 꼭두각시로 만들어 온 추악한 독약이었다.과거의 채경이었다면 헛구역질을 참으며 손을 바들바들 떨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그녀의 눈빛에는 깊은 얼음 같은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채경은 탕약 사발을 집어 드는 척하며, 한복 소매 속에 은밀하게 감추어 두었던 백도현의 옥빛 약병에서 좁쌀만 한 해독 정제 한 알을 떨어뜨렸다.해독 정제가 녹으며 미세한 거품이 일었다. 독성 성분을 없애는 만능약은 아니었다. 다만 급성 자극을 줄이고, 이후 치료를 버틸 시간을 벌기 위한 처방이었다.꿀꺽, 꿀꺽.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단숨에 사발을 비워내는 채경의 의연한 모습에 민 여사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비틀렸다.“그래, 진작 그럴 것이지. 혜민당 백 박사가 솜씨는 참 용한 모양이야. 오늘도 오후에 별채 연우재로 건너가서 특별 온구(쑥뜸) 치료를 빠짐없이 받도록 해라. 대를 잇는 게 네 유일한 쓸모니까.”“네, 어머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채경은 깍듯하게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춘 뒤 성북동 본채 다실을 차분하게 걸어 나섰다.그녀의 눈빛에는 전날과 다른 단단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오후 3시, 가을비가 그치고 자욱한 물안개가 대나무 숲을 뒤덮은 별채 연우재.창호문 안쪽 방 안에는 은은하고 짙은 야생 쑥향과 청량한 박하 향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내려앉아 있었다.밖에서 들려오는 대나무 잎 스치는 소리가 묘한 긴장감을 자아냈다.달칵.채경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흰 삼베 적삼에 옥빛 명주 바지를 입은 백도현이 맞이했다.안경을 벗어 찻상 위에 올려둔 도현의 시선이 채경에게 잠시 머물렀다.“오셨습니까, 사모님.”도현의 낮고 깊은 매혹적인
Last Updated : 2026-10-04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