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서울 성북동 한옥 별채 ‘연우재(然雨齋)’.성운글로벌 사옥 로비에서 시댁 방계 친족들의 난동을 완벽하게 진압하고 420억 원대 횡령 혐의에 대한 모든 법적 고발을 마친 후, 백도현은 신채경을 에스코트하여 성북동으로 돌아왔다.성북동 본가 대저택은 이미 가압류 표지가 붙은 채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었고, 오직 별채 연우재만이 짙은 새벽안개와 울창한 대나무 숲의 고즈넉한 적막 속에서 두 사람을 맞이하고 있었다.바람이 대나무 숲을 스칠 때마다 댓잎 서걱거리는 소리가 새벽공기를 청량하게 갈랐다.대청마루를 밟고 사랑방으로 들어서는 채경의 발걸음마다 지난 3년 동안 겪었던 지옥 같은 기억들이 아지랑이처럼 스쳐 지나갔다.이곳은 시어머니 민 여사와 남편 강시우가 채경을 감금하다시피 가두고, 맹독성 천남성이 든 쓰디쓴 탕약을 강제로 들이붓던 악몽의 도살장이었다.‘애도 못 낳는 불임녀’라며 놋그릇 사발을 들이밀던 민 여사의 표독스러운 얼굴, 그리고 밖에서 술에 취해 들어와 목석이라 비하하던 남편의 폭언.하지만 지금 채경은 기업의 주도권을 되찾은 성운글로벌의 총괄대표이자, 혜민당과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사람으로 이곳에 서 있었다.“채경아.”도현이 옥빛 두루마기를 벗어 옷걸이에 걸치며 다가왔다.도현의 눈에는 채경을 향한 걱정과 숨기지 못한 애정이 함께 어려 있었다.남자가 다가오자 방 안의 오래된 약 냄새보다 익숙한 약초 향이 먼저 느껴졌다.남자의 단단한 흉근과 슬림한 수트 핏이 채경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도현이 사랑방 서재 안쪽, 백 년 된 고풍스러운 흑단 목재 책장 앞으로 걸어갔다.남자의 긴 손가락이 책장 구석에 숨겨진 백옥 조각을 지그시 눌렀다.달칵, 쿵—.묵직한 기계음과 함께 흑단 목재 벽면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아래로 이어지는 은밀한 화강암 돌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연우재는 원래 혜민당 선대가 진료와 약재 보관에 쓰던 별당을 태강가가 인수한 건물이었다. 그 아래에는 혜민당 종가에만 전해지던 지하 치료실, ‘약향실(藥香室)’이 남
Last Updated : 2026-10-04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