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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화. 비어 있는 언덕을 바라보는 사람

مؤلف: 서담
last update تاريخ النشر: 2026-10-21 15:30:18

스무 살의 봄은 예전보다 조금 빨리 찾아왔다.

논둑마다 연둣빛 풀이 올라왔고, 마을 어귀 당산나무 아래에는 낮부터 어르신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춘식이 저놈은 또 노향이 쫓아댕기네.”

한 할머니가 혀를 차며 웃었다.

옆에 앉은 노인이 장기알을 놓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쟈는 옛날부터 그랬잖여. 우식이는 아직도 저러고 있고.”

시선 끝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춘식은 마트에서 가져온 음료수 두 병을 들고 노향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노향아, 이거 묵어.”

“싫어.”

“니가 좋아하는 복숭아 맛인디?”

“나 지금 안 목말라.”

“그라믄 이따 묵어.”

춘식이 기어코 노향 손에 병을 쥐여줬다.

노향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너 요즘 왜 자꾸 이래.”

“내가 뭘.”

“자꾸 먹을 거 주잖아.”

춘식이 괜히 목덜미를 긁었다.

“남아서 주는 거여.”

노향이 뒤쪽 마트를 한번 봤다.

“마트에 복숭아 음료수 딱 두 병 남았더라.”

춘식의 입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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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100화. 떠난 숨결이 머문 자리

    햇살은 진성의 손을 놓지 못했다. “살려주세요.” 의사의 소매를 붙잡은 손이 떨렸다. “제발요. 부탁이에요.” 이미 끝났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데도 고개를 저었다. “계진성, 눈 떠. 제발….” 진성의 차가운 손을 제 볼에 가져다 댔다. “오빠 없이 나 어떻게 살라고….” 숨이 넘어가듯 울음이 터졌다. 장미가 뒤에서 햇살을 붙잡았지만 몸에서 힘이 빠졌다. 시야가 검게 꺼지며 마지막으로 보인 건 진성의 움직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눈을 떴을 때도 병원이었다. 햇살은 한동안 천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가장 먼저 배를 만졌다. 의사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출혈이 있었습니다. 아이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햇살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진성도 없었다. 아이도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둘 다 있었는데. 햇살은 울지 않았다. 손가락만 배 위에서 천천히 오므라들었다. 조금 전까지 진성의 손을 올려두었던 자리였다. 함께 지키자고 말하려 했던 아이까지 그를 따라가 버린 것 같았다. 장미가 침대 곁에 앉아 손을 잡았지만 햇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 아주 오래 누워 있었다. 진성의 장례는 햇살이 겨우 몸을 일으킨 뒤에야 치러졌다. 장미는 몇 번이나 쉬라고 했다. “보물, 너 몸부터 챙겨. 내가 있을게.” 햇살은 고개를 저었다. “싫어.” “햇살아.” “오빠 혼자 두기 싫어.” 검은 상복을 입은 햇살은 영정사진 앞을 떠나지 않았다. 사진 속 진성은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햇살은 그 얼굴을 오래 바라보다 작게 웃었다. “사진도 꼭 저런 걸 골랐네.” 웃음 끝이 금세 떨렸다. 밤이 깊어 조문객이 뜸해졌을 때, 햇살은 영정 앞에 앉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노래를 시작했다. “그곳은 괜찮나요 당신이 두고 간 이곳엔 오늘도 같은 바람이 불고 나는 아직 여기 있어요 당신이 걷던 길 위에는 계절이 몇 번이나 지나고 모두가 조금씩 변했는데 나는 자꾸 그날에 머물러요 당신의 얼굴도 함께했던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99화. 새벽 끝에 멈춘 숨

    병원 응급실 앞은 새벽인데도 환했다. 햇살은 택시가 완전히 서기도 전에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발밑이 몇 번이나 휘청거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응급실 앞에는 장미가 서 있었다. 평소처럼 화장도 제대로 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손에는 진성의 피가 묻은 재킷이 구겨진 채 들려 있었다. “언니.” 장미가 고개를 들었다. “계진성은?” “햇살아.” “어디 있어. 오빠 어디 있냐고.” 장미의 입술이 떨렸다. “손님 하나가 술 처먹고 난동을 부렸어. 지수가 있는 방이었는데 진성이가 막다가….” 햇살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칼?” 장미가 대답하지 못했다. “언니.” “급소를 찔렸대.” 햇살은 그대로 응급실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의료진 한 사람이 다가왔다. “계진성 씨 보호자분이십니까?” 햇살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예요.” “환자분은 도착 당시부터 출혈이 심했고 심정지 상태였습니다. 최대한 처치를 했지만….” 의사의 말이 이상하게 멀리서 들렸다. 햇살은 눈만 깜빡였다. “무슨 말이에요.” “오전 4시 38분, 사망 선고했습니다.” 잠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햇살은 의사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다 웃었다. “뭐래.” “햇살아.” 장미가 다가오자 햇살이 손을 뿌리쳤다. “웃기지 마.” 목소리가 커졌다. “니들이 그러고도 의사야?” “보호자분.” “살리라고 데려왔잖아!” 햇살이 울면서 소리쳤다. “사람 살리는 데가 병원이잖아! 근데 왜 죽었다고 해!” 장미가 뒤에서 햇살을 붙잡았다. “햇살아, 제발….” “놔!” 결국 햇살은 진성이 누워 있는 곳까지 들어갔다. 침대 위의 진성은 너무 조용했다. 가슴과 팔 주변에는 처치에 사용한 장비와 선들이 남아 있었고, 얼굴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평온했다. 햇살은 한참 그 모습을 바라봤다. “뭐 해.” 대답이 없었다. “계진성.” 햇살은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의료진이 몸에 연결됐던 장비를 정리하려 손을 대자 햇살이 날카롭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98화. 내일을 기다리던 밤

    햇살이 앨리에서 완전히 손을 뗀 뒤, 진성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말수가 늘어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예전처럼 복도 끝에 서서 굳은 얼굴로 손님방만 노려보는 일은 줄었다. 장미는 그런 진성을 며칠 지켜보다 혀를 찼다. “야, 계진성.” “네.” “햇살이 여기 없으니까 그렇게 좋아?” 진성은 잠깐도 고민하지 않았다. “네.” 장미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아주 솔직해서 좋다.” 진성은 대꾸하지 않았지만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가 있었다. 햇살이 검정고시 학원을 다니는 동안에는 퇴근길마다 문제집이나 간식을 사 들고 갔다. 시험날에는 밤샘 근무를 마치고도 고사장 앞까지 데려다줬다. 그리고 햇살은 합격했다. 원하던 대학에는 가지 못했다. 그래도 다시 준비해 들어간 학교의 학생증을 받아든 날, 햇살은 한참 그것만 들여다봤다. “오빠.” “응.” “나 진짜 대학생이야.” “응.” “반응이 그게 끝이야?” 진성이 햇살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잘했어.” 그 한마디에 햇살은 하루 종일 웃었다. 두 해 동안 둘의 생활도 조금씩 모양을 갖췄다. 낮에는 햇살이 학교에 갔고, 밤에는 진성이 일을 나갔다. 시간이 맞는 날이면 늦은 저녁을 함께 먹었다. 물론 늘 평화로운 건 아니었다. 학교 동기들과 술자리가 있는 날이면 진성의 표정부터 굳었다. “남자도 있어?” “대학교에 남자가 없겠냐?” “몇 명.” “계진성.” “몇 명이냐고.” 햇살은 결국 신발을 신다 돌아서 소리쳤다. “나 대학생이야! 술자리도 못 가?” 그렇게 싸우고 나가도 밤늦게 집에 돌아오면 진성은 거실 불을 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햇살이 삐친 얼굴로 옆에 앉으면 진성은 물부터 내밀었다. “술 냄새.” “기다리지 말라니까.” “싫어.” “질투쟁이.” “응.” 그 싸움들은 오래가지 않았다. 햇살도, 진성도 서로를 놓을 만큼 화내는 법은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믿었다. 이 정도면 오래 갈 수 있다고. 어쩌면 계속 이렇게 살 수도 있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97화. 창가에 놓인 빈 종이

    장미는 한동안 햇살의 얼굴만 바라봤다. 검정고시 학원을 다녀보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처음에는 별말이 없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도 붙이지 않은 채 손가락 사이에서 굴리기만 했다. 그러다 낮게 말했다. “잘 생각했다.” 햇살이 웃었다. “언니가 그렇게 쉽게 보내줘?” “보내긴 뭘 보내. 니가 가는 거지.” 장미는 라이터를 켰다가 다시 닫았다. “너라도 이 더러운 데서 벗어나.” 햇살의 웃음이 잠깐 멎었다. 장미는 시선을 피했다. “여기 오래 있으면 사람 마음부터 먼저 썩어. 나는 이미 글렀고.” “언니.” “왜.” “그런 말 하지 마.” 장미가 코웃음을 쳤다. “시끄러워.” 햇살은 한동안 장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부탁 하나.” “뭔데.” “손님 말고 누가 나 찾아오면.” 장미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구.” 햇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만으로도 장미는 대충 짐작한 얼굴이었다. “나 그냥 떠났다고 해줘.” “햇살아.” “언니도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장미가 담배를 꾹 눌러 껐다. “니 아버지냐.” 햇살은 웃기만 했다. “그냥 그렇게 해줘.” “왜.” “보고 싶지 않으니까.” 짧은 말이었다. 장미는 더 묻지 않았다. “알았어.” 햇살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대신 진짜 공부해.” “네, 엄마.” “누가 니 엄마야.” 장미가 손을 들어 때리는 시늉을 하자 햇살이 웃으며 피했다. 그날부터 햇살은 낮에 학원을 다녔다. 오랜만에 책상에 앉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수학 문제는 몇 줄만 봐도 머리가 지끈거렸고, 영어 단어는 외운 만큼 빠져나갔다. 그래도 빠지지는 않았다. 모르는 건 표시해두고, 쉬는 시간에는 노트 가장자리에 작은 그림을 끄적였다. 꽃잎. 소나무. 낡은 담장. 손이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 먼저 종이 위에 올라왔다. 저녁 무렵 집에 돌아온 햇살은 장바구니부터 식탁에 올려놓았다. 시장 반찬가게에서 사온 멸치볶음과 계란말이, 나물 두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96화. 늦은 오후에 열린 길

    그날 밤 햇살은 진성의 품에서 오래 울다 잠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였다. 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침대 끝에 길게 걸려 있었다. 햇살은 한동안 천장을 바라보다 옆자리를 더듬었다. 비어 있었다. “오빠?” 주방에서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햇살은 헝클어진 흰 머리를 쓸어넘기며 밖으로 나왔다. 진성이 식탁 위에 국과 반찬을 올리고 있었다. “뭐 해?” “밥.” “그건 보여.” “먹어.” 햇살은 의자에 앉으며 피식 웃었다. 어젯밤 호텔 복도에서 자신을 안고 있던 사람도, 지금 말없이 밥그릇을 밀어주는 사람도 같은 진성이었다. “오빠 요리 늘었다.” “사 온 거야.” “역시.” 진성이 숟가락을 건넸다. 햇살은 국을 한 숟갈 떠먹었다. 따뜻한 국물이 속을 내려가자 그제야 배가 고팠다는 걸 알았다. 둘은 한동안 조용히 밥을 먹었다. 진성은 어젯밤 일을 먼저 묻지 않았다. 태만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햇살 역시 꺼내지 않았다. 그러다 밥을 반쯤 먹었을 때 햇살이 숟가락을 내려놨다. “오빠.” “응.” “나 돈도 충분하고.” 진성이 고개를 들었다. “진짜 검정고시나 볼까?” 진성의 젓가락이 멈췄다. 햇살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그렇게 봐.” “진짜?” “응.” “갑자기?” 햇살은 물컵을 만지작거렸다. “어제 좀 생각했어.” “뭘.” “아빠 만나고 나니까.” 말끝이 잠시 멎었다. 그래도 햇살은 웃었다. “내가 스무 살도 아니고 이제 내 인생 내가 좀 골라도 되잖아.” 진성은 말없이 들었다. “돈 벌려고 시작한 일이었고.” 햇살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돈 없는 것도 아니고.” “응.” “장미 언니도 전처럼 내가 없으면 가게 망하는 거 아니고.” 최근에는 수지나 미정도 제법 자기 손님을 만들고 있었다. 햇살은 밥그릇 가장자리를 숟가락으로 살짝 긁었다. “그러니까 그냥 한번 해볼까 싶어.” “해.” 대답이 너무 빨랐다. 햇살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다 말

  • 햇살이 머문 소나무   제95화. 금빛 복도 끝에서

    “오햇살!” 태만의 목소리가 객실을 울렸다. 햇살은 움찔했지만 곧 턱을 들었다. “왜!” “너 이럴려고 나간 거야?” 태만의 얼굴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일그러져 있었다. “내가 그렇게 찾아다녔는데, 너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햇살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에 대해서 뭘 아는데!” “햇살아.” “아빠가 나에 대해서 뭘 아냐고!” 목소리가 갈라졌다. 햇살은 급히 침대 끝에 놓인 가운을 끌어 몸을 감쌌다. 손끝이 떨렸다. “내가 그 집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 태만의 얼굴이 굳었다. “무슨 말이야.” “그날 그 집에서 내가 무슨 일이 있었는데!” 햇살의 눈가가 붉어졌다. “엄마 죽기 전에, 그 집에서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아빠는 하나도 모르잖아!” 태만이 한 걸음 다가왔다. “무슨 일이 있었어.” 햇살은 바로 뒤로 물러났다. “오지 마.” “누가 너한테 뭘 했어.” “알아서 뭐 하게.” “햇살아.” “알아도 아빤 못해.” 짧은 말이 날카롭게 박혔다. 태만의 입술이 굳었다. “말해. 누가 그랬어.” “싫어.” “내가 알아야—” “이제 와서?” 햇살이 웃었다. 눈물이 맺힌 채였다. “내가 울고 있을 때도 몰랐잖아. 학교 안 가고 밤새 돌아다녀도 내가 왜 그러는지 한 번도 제대로 못 봤잖아.” 태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햇살은 가운 끈을 꽉 묶었다. “그러니까 이제 찾지 마.” “그건 안 돼.” “왜?” “넌 내 딸이야.” 그 말에 햇살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그 말 참 편하다.” “오햇살.” “필요할 때만 딸.” 태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햇살은 테이블 위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문으로 향하다가 멈췄다. “아.” 태만이 고개를 들었다. 햇살은 웃었다. 일할 때 손님 앞에서 짓던, 눈만 전혀 웃지 않는 웃음이었다. “접대 만족했다고만 해줘.” 태만의 얼굴이 굳었다. “뭐?” “선금까지 냈다며.” “그딴 돈이 지금 중요해?” “나한텐 중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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