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왕이 죄인으로 품던 여인이 도망쳤다: Chapter 1 - Chapter 10

16 Chapters

1화

동이 트기 전, 윤해원은 왕의 침전에서 벗겨진 비단옷 대신 거친 무명옷을 받아 입었다.밤새 몸을 감싸고 있던 온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궁녀가 가져온 죄인복은 축축하고 차가웠다. 해원은 소매 끝으로 드러난 손목을 감추며 침전의 문턱을 넘었고, 뒤따라 나오던 내관이 문을 닫는 소리를 듣고서야 걸음을 옮겼다.침전 안에서는 아직 왕이 잠들어 있었다.새벽녘까지 그녀를 품에 가두었던 이경원은 해원이 일어나려 할 때마다 허리를 끌어당겼다.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춥지 않으냐고 묻던 그는 그녀의 발끝이 차갑다는 이유로 이불을 한 겹 더 덮어 주기까지 했다.그러나 해원은 그 다정함을 가지고 침전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중궁전 뒤편의 행랑에 도착했을 때, 최상궁은 이미 약사발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검붉은 약탕에서 올라오는 냄새가 찬 공기와 뒤섞여 방 안에 퍼져 있었고, 그것을 보는 순간 해원은 밤새 겨우 가라앉혔던 속이 다시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전하의 침전에서 나왔으면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겠지?”최상궁이 사발을 밀어 놓자 해원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사발을 받으려 했지만 손끝이 떨려 곧바로 들어 올릴 수 없었다.“상궁마마, 잠시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어제 마신 약이 아직 속에 남아 있는 듯하여…….”“밤새 전하를 모실 기운은 있었으면서 약 한 사발 마실 기운은 없다는 것이냐?”최상궁은 해원의 말을 끊고 사발을 집어 들었다. 해원이 급히 손을 내밀었으나 이미 상궁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중전마마께서 너를 궁에 두시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은혜인데, 네가 감히 약을 마시는 시각까지 정하려 드느냐?”해원은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그런 뜻이 아니옵니다. 곧 마시겠사옵니다.”“그렇다면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두고 입을 벌려라.”해원은 사발을 받아 들고 천천히 입술에 가져갔다. 뜨거운 약탕이 혀를 적시자 곧바로 쓴맛이 퍼졌으며, 한 모금을 삼킨 뒤에는 위장이 안쪽에서 비틀리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잠시 숨을 고르려고 사발을 내렸을 때, 최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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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해원은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지만, 마당의 얼음을 깨고 물을 길어야 할 시각이 이미 지나 있었다.***다음 날 아침, 중궁전의 뜰에는 평소보다 많은 궁녀와 내관들이 모여 있었다.밤새 내린 눈이 돌계단 가장자리에 남아 있었고, 바닥에는 얼음이 얇게 얼어 있었다. 해원은 최상궁의 지시에 따라 그 위에 무릎을 꿇었는데, 옷감이 금세 젖어 들면서 차가운 기운이 살갗까지 스며들었다.민소령은 처마 아래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따뜻한 화로를 곁에 두고 차를 마시던 중궁은 해원이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서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머리에는 봉황이 새겨진 금잠이 꽂혀 있었고, 손끝에는 정성껏 들인 봉숭아 물이 선명했다.“어젯밤에도 전하의 침전에 들었다지?”해원은 바닥을 바라보며 대답했다.“그러하옵니다, 마마.”“전하께서 너를 참으로 오래 곁에 두시는구나. 역적의 딸이라는 죄를 생각하면 목숨만 붙어 있는 것도 과분한데 말이다.”중궁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곁에 선 궁녀에게 손짓했다.은쟁반에 담긴 약사발이 해원 앞으로 옮겨졌으나, 그녀가 두 손을 내밀자 민소령은 아직 건네지 말라는 듯 손가락을 들었다.“먼저 고개를 들어 보아라.”해원이 고개를 들자 중궁의 시선이 목덜미에 머물렀다. 무명옷의 깃 아래로 희미한 붉은 자국이 드러나 있었고, 그것을 확인한 민소령은 웃음을 지었다.“전하께서 너를 품으시는 밤이 퍽 다정한 모양이구나.”해원은 옷깃을 여미고 싶었지만 중궁의 허락 없이 손을 움직일 수 없었다.“그런데 네가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전하께서 너를 침전에 들이신다고 해서 네 몸까지 귀해지는 것은 아니다. 네가 후궁이라도 된 듯 행동한다면 그것은 왕실을 능멸하는 일이겠지.”중궁은 뜰에 모인 궁인들을 둘러보았다.“오늘 너희를 부른 것은 모두에게 그 차이를 분명히 알려 주기 위해서다. 이 아이는 밤에는 전하의 부름을 받지만, 날이 밝으면 죄인의 신분으로 돌아와 내 명을 따라야 한다.”궁녀들 사이에서 작은 움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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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사발이 돌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궁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아래로 향했다.해원은 깨진 사기 조각 사이로 검붉은 약이 번지는 것을 보며 급히 몸을 숙였다.“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마마.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오라…….”민소령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그저 찻잔을 내려놓고 해원을 바라보던 중궁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전하께서 특별히 명하신 약을 이렇게 버리다니, 참으로 대담한 아이로구나.”해원은 이마를 더 깊이 숙였다.“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사옵니다.”“다시는 없을 것이라니 다행이다. 그렇다면 지금 다시 달여 오게 하면 되겠구나.”중궁의 지시가 떨어지자 최상궁이 곧바로 움직였다.해원은 고개를 들었다가 중궁의 차가운 시선과 마주쳤다.“마마, 부디 한 번만…….”“네가 약을 마시지 않겠다는 뜻이냐?”해원은 입을 다물었다.민소령은 그 침묵을 즐기듯 천천히 웃었다.“내가 어찌 전하의 명을 거스를 수 있겠느냐. 네가 억울하다면 나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그 명을 내리신 분께 직접 여쭈어야겠지.”중궁은 궁인들을 향해 돌아섰다.“모두 자리를 지켜라. 이 아이가 전하의 명을 끝까지 따르는지 함께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해원은 젖은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차가운 바닥에 오래 꿇어앉아 있던 무릎이 저렸지만, 두 번째 약사발이 도착할 때까지 그녀는 일어설 수 없었다.***약을 두 번 마신 뒤에도 해원에게 쉬라는 명은 내려오지 않았다.중궁전 뒤편의 우물에서는 두레박이 얼어붙어 있었고, 물을 길어 올릴 때마다 거친 밧줄이 손바닥을 긁었다. 해원은 물통을 채워 안채까지 나르기를 반복했는데, 몇 걸음만 옮겨도 속이 울렁거려 걸음을 멈춰야 했다.그녀가 우물가에 기대어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소담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언니, 이러다 정말 쓰러지겠어요.”소담은 주변을 살피더니 소매 속에서 작은 떡 한 조각을 꺼냈다.“아침에 남겨 두었어요. 아무도 보지 않을 테니 조금이라도 드세요.”해원은 떡을 받아 들지 못하고 소담의 얼굴부터 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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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소첩이 궁의 법도를 가르치고 있었사옵니다. 이 아이가 전하께서 명하신 피자탕을 마시다가 사발을 깨뜨리는 바람에 조금 엄히 타일렀지요.”왕의 시선이 해원에게 돌아왔다.“약을 엎질렀느냐?”해원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송구하옵니다. 손에 힘이 풀려 그만…….”“다시 마셨느냐?”“그러하옵니다.”왕은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남김없이?”“예, 전하.”그제야 왕은 해원의 손목을 놓았다.“그렇다면 되었다.”민소령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소첩이 지나치게 엄하게 다스린 것은 아니온지요?”왕은 중궁을 돌아보았다.“아니오. 중전이 참으로 현명하오.”해원의 손가락이 움찔했다.왕은 그 움직임을 보았으나 말을 멈추지 않았다.“궁의 기강을 세우는 일은 중전의 몫이니 앞으로도 그리하시오. 특히 저 아이는 제 신분을 잊지 않도록 가르쳐야 할 것이오.”민소령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성은이 망극하옵니다.”해원은 바닥에 놓인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왕은 그녀가 약을 두 사발이나 마셨다는 사실을 들었고, 그 때문에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까지 눈앞에서 보았다.그런데도 중궁을 칭찬했다.해원이 고개를 들자 왕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내관에게 손짓했다.“저 아이의 손에 약을 발라 주어라.”해원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뛰었다.그러나 왕은 곧이어 중궁에게 말했다.“오늘 밤에도 침전에 들일 것이니, 손에 상처가 더 생기지 않게만 하시오.”그 말이 끝나자 민소령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해원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왕이 중궁에게 금한 것은 그녀를 괴롭히는 일이 아니었다.그저 밤에 자신이 만질 손을 더 상하게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왕은 중궁과 함께 처소 안으로 들어갔다.해원은 그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물통을 집어 들었다. 손바닥에 난 상처가 다시 벌어졌지만, 이제 누구에게도 그것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밤이 깊어지자 왕의 침전에는 따뜻한 향이 피어올랐다.해원은 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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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내가 너를 침전에 들인다고 해서 네가 후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네가 이곳에서 살아 있는 까닭은 오직 내가 허락하였기 때문이지.”해원은 입술을 깨물었다.“알고 있사옵니다.”“그렇다면 무엇을 더 바라느냐? 역적의 딸이 목숨을 건졌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냐.”왕이 돌아섰다.그는 해원에게 다가와 턱을 들어 올렸다.“너는 내 곁에 있으면 된다. 그러나 내 아이를 품는 일만큼은 허락할 수 없다.”해원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왕은 엄지로 그 눈물을 닦아 주었다.“울지 말거라. 내가 너를 버리겠느냐?”해원은 그 손길을 느끼면서도 더는 위로받을 수 없었다.잠시 뒤 그녀는 왕의 손에서 조심스럽게 얼굴을 떼어 내며 물었다.“전하께서는 제가 그 약 때문에 얼마나 아픈지 알고 계시옵니까?”왕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무엇을 묻는 것이냐?”“아침마다 약을 마시면 속이 뒤집히고, 낮에는 제대로 걷기도 어렵사옵니다. 전하께서도 그것을 알고 계시는지 여쭙고 싶사옵니다.”왕은 한동안 해원을 내려다보았다.침전 안에서는 화로의 숯이 타들어 가는 소리만 들렸다.“알고 있다.”짧은 대답이었지만 해원은 한순간 숨을 쉴 수 없었다.왕은 그녀의 표정이 굳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말을 이었다.“네가 약을 마시고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받고 있다. 그만큼 내가 네 일을 세심히 살피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해원은 손가락을 꽉 쥐었다.왕은 알고 있었다.그녀가 얼마나 아픈지, 아침마다 약사발 앞에서 얼마나 오래 숨을 고르는지, 그 약을 마신 뒤에도 중궁전에서 하루를 버텨야 한다는 사실까지.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그런데도 계속 마셔야 하옵니까?”해원의 목소리가 떨렸다.왕은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그는 그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그래야 한다.”해원은 더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그렇다면…… 차라리 저를 침전에 부르지 마시옵소서.”왕의 손길이 멈추었다.해원은 자신의 말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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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그러나 지금 왕은 그녀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그는 해원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누구의 명을 따라야 하는지, 어떤 약을 마셔야 하는지까지 정해 놓았다. 그리고 그것을 거두어 달라는 청을 들으면서도, 그녀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해원은 천 조각을 다시 접어 소매 안에 넣었다.그때 문밖에서 최상궁의 발소리가 들렸다.“윤해원, 돌아왔으면 어서 나오너라.”해원은 벽을 짚고 일어났다.문을 열자 최상궁은 물통과 걸레가 놓인 쪽을 가리켰다.“중전마마께서 쓰실 물을 먼저 길어 오고, 안채의 마루를 닦아라. 밤에 전하의 침전에 들었다고 해서 낮의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아니 된다.”해원은 고개를 숙였다.“분부 받들겠사옵니다.”“그리고 오늘 밤에도 부름이 있을 수 있으니, 몸은 깨끗이 해 두어라. 전하께서 손에 상처가 나는 것을 싫어하시니 조심하고.”최상궁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해원은 물통을 들고 우물가로 향했다.얼어붙은 두레박 줄을 잡자 손바닥의 상처가 쓰라렸지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물을 길어 올렸다. 차가운 물이 손등을 타고 흘렀고, 갈라진 피부 사이로 스며들 때마다 통증이 올라왔다.물을 가득 채운 뒤 잠시 숨을 고르던 해원은 문득 어젯밤 왕의 목소리를 떠올렸다.'내가 너를 버리겠느냐.'그 말은 한때 그녀가 가장 듣고 싶었던 약속이었다.그러나 이제는 달랐다.왕은 자신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하면서도 고통을 거두어 주지 않았고, 떠나고 싶다는 말에는 손목을 움켜쥐었다.해원은 물통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들어 올렸다.그때 중궁전 안쪽에서 최상궁이 그녀를 불렀다.“윤해원, 약사발을 가져오너라.”해원은 물통을 내려놓고 약을 보관하는 작은 방으로 향했다.선반 위에는 어제 깨뜨린 것과 똑같이 생긴 사발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고 행랑으로 돌아왔다.최상궁은 약탕을 사발에 따르며 해원을 바라보았다.“전하께서 어젯밤에도 너를 찾으셨다지?”“그러하옵니다.”“그렇다면 더욱 조심해야겠구나. 전하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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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중궁전의 신발을 닦는 일은 본래 윤해원의 몫이 아니었다.그러나 민소령은 아침 문안이 끝나기도 전에 최상궁을 불러, 그날 왕을 맞이할 때 신을 비단 신발을 해원에게 직접 닦게 하라고 명했다. 신발은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채 비단함에 보관되어 있었으므로 굳이 닦을 필요도 없었지만, 중궁은 해원이 궁녀들 앞에서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해원은 그 뜻을 짐작하면서도 아무 말 없이 대야를 가져왔다.최상궁은 궁녀들이 오가는 앞마루에 방석을 놓고 신발을 내려놓았다. 곁에는 깨끗한 수건과 물그릇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해원이 수건을 집어 들자 상궁은 그것을 빼앗아 옆으로 치웠다.“손으로 닦거라.”해원이 잠시 머뭇거리자 최상궁은 신발을 그녀의 무릎 앞으로 밀었다.“중전마마의 신발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영광인 줄 알아야지. 무엇을 망설이느냐?”해원은 차가운 마루에 무릎을 대고 앉아 물에 적신 손끝으로 신발의 앞코를 문질렀다. 비단에는 이미 은은한 광택이 돌고 있었으므로 닦을수록 좋아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상궁은 작은 얼룩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같은 자리를 다시 닦으라고 재촉했다.그녀가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주변의 궁녀들이 걸음을 늦추었다.“어젯밤에도 전하의 침전에 들었다면서?”누군가 속삭이자 다른 궁녀가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밤에는 전하의 품에 있다가 아침에는 중전마마의 신발을 닦으니, 저 아이도 제 신분을 잊을 수는 없겠네.”해원은 못 들은 척 신발을 돌려 잡았다.새벽에 마신 피자탕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고, 차가운 물에 젖은 손끝은 오래전부터 감각이 무뎌져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뒤축에 남아 있다는 보이지 않는 얼룩을 찾으려고 고개를 더 숙였다.그때 민소령이 처마 아래로 나왔다.“아직도 끝나지 않았느냐?”해원이 예를 올리자 중궁은 신발을 가져오라고 손짓했다. 최상궁이 신발을 들어 올렸지만, 민소령은 살펴보지도 않고 다시 해원 앞에 내려놓게 했다.“뒤축까지 닦아라. 전하를 맞이할 때 신을 것이니 흠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분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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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그러나 이경원은 민소령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웃었다.“중전의 마음이 참으로 깊구려. 내가 미처 살피지 못한 일까지 챙기니 고맙소.”중궁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전하께서 기뻐하시니 소첩도 기쁘옵니다.”왕은 해원에게 다시 눈길을 주었다.“중전께서 너를 배려하셨으니 맡은 일에 성의를 다하여라. 제 신분을 잊고 불평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해원은 신발을 내려놓고 이마를 바닥에 댔다.“명심하겠사옵니다.”왕은 더는 그녀를 보지 않았다.중궁의 손을 잡고 안채로 들어가는 두 사람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해원은 천천히 허리를 폈다. 젖은 손끝이 차갑게 식어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옷에 문지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최상궁이 다가와 비단함을 열었다.“전하께서도 중전마마의 배려를 칭찬하셨으니 네가 얼마나 복을 받은 것인지 알겠지?”해원은 신발을 함에 넣었다.“그러하옵니다.”조금 전 왕이 자신을 내려다보던 눈빛이 아직도 떠올랐다.그는 분명히 보았다.그런데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중궁의 손을 잡았다.---이틀 뒤, 중궁전에서는 왕실 친족에게 보낼 예물을 준비하고 있었다.비단과 향낭, 자수 놓인 주머니들이 안채에 가득 펼쳐졌고, 궁녀들은 최상궁의 지시에 따라 물품을 분류하고 있었다. 해원은 가장 낮은 자리에 앉아 비단을 접는 일을 맡았는데, 그녀 앞에 놓인 것은 왕이 중궁에게 직접 내린 연분홍색 비단이었다.최상궁은 비단을 함에 넣기 전 주름을 정리하라고 명했다.해원이 천을 펼쳐 놓자 바깥에서 급히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윤해원, 안채에 뜨거운 물을 가져오너라.”해원은 손을 멈추고 최상궁을 바라보았다.“이 비단은 어찌하오리까?”“그대로 두고 다녀오면 될 일이다. 중전마마께서 기다리시니 서둘러라.”해원은 비단을 가지런히 접어 탁자 위에 올려놓고 물을 가지러 나갔다.그녀가 자리를 비운 동안 중궁전 안채에는 다른 궁녀들이 드나들었다. 그중 한 궁녀가 탁자 곁에 잠시 머물렀지만, 누구도 그 모습을 유심히 보지 않았다.해원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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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해원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그 궁녀는 며칠 전 중궁전 앞뜰에서 자신을 비웃던 사람이었다.“그런 일은 없었어. 나는 비단을 접어 놓기만 했는데…….”“마마 앞에서 감히 누구에게 반말을 하느냐?”최상궁의 호통이 떨어지자 해원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궁녀는 해원을 한 번 바라본 뒤 말을 이었다.“소인은 그저 비단이 상할까 걱정되었사옵니다. 그러나 윤해원이 곧 물을 가지러 나갔기에 미처 말씀드리지 못하였사옵니다.”민소령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네가 잘못 본 것은 아닐 테지.”해원은 손끝을 꽉 쥐었다.그 궁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중궁은 이미 어느 쪽 말을 믿을지 정한 얼굴이었다.“마마, 부디 한 번만 확인하여 주시옵소서. 소인은 정말 비단을 찢지 않았사옵니다.”민소령은 한숨을 내쉬었다.“네가 죄를 인정하기만 하였다면 가벼이 넘기려 했거늘, 끝까지 다른 사람을 의심하게 만드는구나.”중궁은 최상궁에게 손짓했다.“전하께서 내리신 물건을 훼손한 일이니 전하께 직접 아뢰어야겠다. 이 아이를 데리고 가거라.”해원은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다.중궁의 처벌도 두려웠지만, 왕이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더 두려웠다.그녀는 최상궁에게 끌려가면서 마지막으로 비단을 돌아보았다.찢어진 부분이 위로 드러난 채 비단함에 놓여 있었다.자신이 손대지 않은 흠이었다.그러나 이제 그 흠은 해원의 죄가 되어 있었다.---왕은 편전에서 대신들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중궁이 찾아왔다는 말을 들은 그는 회의를 잠시 멈추고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해원은 문밖에 무릎을 꿇은 채 기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관의 부름을 받고 안으로 들어갔다.이경원은 중궁의 곁에 앉아 있었다.민소령은 찢어진 비단을 왕 앞에 펼쳐 놓고 그동안의 일을 설명했다. 해원이 물건을 거칠게 다루었다는 궁녀의 증언까지 덧붙였지만, 해원이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마지막에 짧게 언급할 뿐이었다.왕은 비단을 살펴본 뒤 해원에게 물었다.“네가 맡았던 물건이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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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그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 수는 있었다. 중궁의 편을 들고 다시 중궁전으로 돌려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직접 형벌을 명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왕은 해원이 굳어 있는 모습을 보고 덧붙였다.“전하께서 내리신 비단을 훼손하고도 허물을 인정하지 않았으니, 이 정도 벌은 받아야 마땅하다.”그는 중궁을 돌아보았다.“중전도 지켜보시오. 오늘 이 일을 분명히 바로잡아 두어야 궁의 법도가 서는 것이오.”민소령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전하의 뜻을 받들겠사옵니다.”해원은 내관들에게 이끌려 편전 앞뜰로 나갔다.차가운 돌바닥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남아 있었고, 형장을 준비하는 동안 궁인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해원은 그들 앞에 엎드린 채 왕이 마음을 바꾸어 주기를 기다렸지만, 처마 아래에 선 이경원은 중궁과 나란히 서서 형벌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첫 번째 매가 떨어지자 해원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소리를 삼켰지만, 몇 차례 매질이 이어지자 팔에 힘이 풀려 바닥을 짚은 손이 미끄러졌다. 아침부터 피자탕을 마신 탓에 속은 비어 있었고, 차가운 바닥에 엎드린 몸에서는 점점 감각이 사라졌다.최상궁은 처마 아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민소령은 왕에게 몸을 조금 기울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전하, 저 아이가 견디지 못하는 듯하옵니다.”왕은 형장을 바라보았다.“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오. 지금 멈추면 제 잘못을 가벼이 여길 것이오.”그의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없었다.해원은 그 말을 들었다.자신을 향한 형벌이 중궁의 억지 때문이 아니라, 왕이 옳다고 믿는 판단에 따라 내려졌다는 사실을 그제야 분명히 깨달았다.열 대를 넘기자 해원은 숨을 제대로 고르지 못했다.그녀는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엎드렸고, 형장을 집행하던 내관이 잠시 손을 멈추었다.“전하, 죄인이 기력을 잃은 듯하옵니다.”이경원은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아직 몇 대가 남았느냐?”“여섯 대가 남았사옵니다.”“마저 집행하라. 벌은 끝까지 받아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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