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내가 너를 침전에 들인다고 해서 네가 후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네가 이곳에서 살아 있는 까닭은 오직 내가 허락하였기 때문이지.”
해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알고 있사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더 바라느냐? 역적의 딸이 목숨을 건졌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냐.”
왕이 돌아섰다.
그는 해원에게 다가와 턱을 들어 올렸다.
“너는 내 곁에 있으면 된다. 그러나 내 아이를 품는 일만큼은 허락할 수 없다.”
해원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왕은 엄지로 그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울지 말거라. 내가 너를 버리겠느냐?”
해원은 그 손길을 느끼면서도 더는 위로받을 수 없었다.
잠시 뒤 그녀는 왕의 손에서 조심스럽게 얼굴을 떼어 내며 물었다.
“전하께서는 제가 그 약 때문에 얼마나 아픈지 알고 계시옵니까?”
왕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무엇을 묻는 것이냐?”
“아침마다 약을 마시면 속이 뒤집히고, 낮에는 제대로 걷기도 어렵사옵니다. 전하께서도 그것을 알고 계시는지 여쭙고 싶사옵니다.”
왕은 한동안 해원을 내려다보았다.
침전 안에서는 화로의 숯이 타들어 가는 소리만 들렸다.
“알고 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해원은 한순간 숨을 쉴 수 없었다.
왕은 그녀의 표정이 굳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말을 이었다.
“네가 약을 마시고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받고 있다. 그만큼 내가 네 일을 세심히 살피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해원은 손가락을 꽉 쥐었다.
왕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아픈지, 아침마다 약사발 앞에서 얼마나 오래 숨을 고르는지, 그 약을 마신 뒤에도 중궁전에서 하루를 버텨야 한다는 사실까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계속 마셔야 하옵니까?”
해원의 목소리가 떨렸다.
왕은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래야 한다.”
해원은 더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저를 침전에 부르지 마시옵소서.”
왕의 손길이 멈추었다.
해원은 자신의 말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약을 거둘 수 없다면 적어도 밤마다 침전에 들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하고 싶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왕은 손목을 붙잡아 일으켰다.
“방금 무엇이라 하였느냐?”
“전하, 소인이 경솔하였사옵니다.”
“내가 너를 부르지 말라고?”
왕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해원은 아픔에 몸을 움츠렸지만 왕은 놓아주지 않았다.
“네가 아직도 네 처지를 모르는구나. 내가 너를 곁에 두기로 하였으면 너는 그 자리에 있으면 되는 것이다. 내 허락 없이 떠날 수도 없고, 다른 사내에게 갈 수도 없다.”
왕은 해원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 전까지의 부드러운 기색이 남아 있었으나, 눈빛만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네가 살아 있는 동안 너를 품을 사람은 나뿐이다.”
해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왕은 한참 뒤에야 손목을 놓았다.
그러고는 구겨진 그녀의 소매를 펴 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했다.
“약은 계속 마셔라. 그리고 오늘은 피곤해 보이니 먼저 누워 있거라.”
왕은 다시 서안으로 돌아갔다.
해원은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지만, 왕은 이미 문서를 펼친 뒤였다.
그녀는 침상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등 뒤에서는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고, 침전 안의 향은 여전히 따뜻했다.
***
다음 날 새벽, 해원은 중궁전 뒤편의 좁은 행랑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고 들어서자 방 안에 남아 있던 냉기가 몸을 감쌌다. 침전에서 입었던 비단옷은 이미 돌려주었고, 다시 걸친 죄인복의 소매는 손목의 붉은 자국을 제대로 가리지 못했다.
해원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던 그녀는 소매 안에서 작은 천 조각을 꺼냈다. 오래전 아버지가 손수 이름을 적어 준 천이었는데, 여러 번 접고 펼친 탓에 가장자리가 닳고 먹빛도 희미해져 있었다.
윤해원.
해원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이름을 천천히 쓸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시던 시절에는 누구도 그녀를 죄인이라 부르지 않았다. 세자였던 경원 역시 그녀를 이름으로 불렀으며, 해원은 그 목소리가 들리면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곤 했다.
“잊지 않았사옵니다. 다만 최상궁마마의 명으로 숯을 가지러…….”“내가 묻는 것은 그 일이 아니다.”왕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대군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해원은 당황하여 고개를 저었다.“아무 일도 없었사옵니다. 그저 넘어져 있는 소인을 보고 중궁전 사람을 불러 주셨을 뿐이옵니다.”왕은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손을 잡아 주었느냐?”“아니옵니다.”“부축하였느냐?”“그런 일도 없었사옵니다.”“그렇다면 어찌하여 네 이름까지 물었다는 것이냐?”해원은 대답하지 못했다.대군이 이름을 물은 이유를 자신이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다만 다친 사람을 보고 지나치지 않았고, 바람을 막아 주었으며, 중궁전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사람을 불러 주었을 뿐이었다.그러나 왕의 표정은 점점 굳어 갔다.“대군은 본래 남의 일에 그리 관심을 두는 사람이 아니다.”왕은 낮게 말하며 해원의 턱을 들어 올렸다.“그런데 너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지.”해원은 눈을 내리깔았다.“소인은 대군마마께 폐를 끼쳤을 뿐이옵니다.”“그 말은 내가 판단할 것이다.”왕은 그녀의 턱을 놓고 창가로 걸어갔다.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내관을 불러 중궁전으로 보낼 말을 전했다.“윤해원이 앞으로는 동쪽 창고에도 가지 못하게 하라. 필요한 물건은 다른 궁녀가 가져오게 하고, 저 아이는 중궁전 안에서만 일하도록 하여라.”해원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전하, 그러하시면…….”왕이 돌아보았다.“무엇이냐?”해원은 입술을 다물었다.왕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다가왔다.“대군을 다시 만나고 싶은 것이냐?”“아니옵니다.”“그렇다면 아무 문제도 없지 않으냐.”왕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손길은 다정했지만 해원은 몸을 움츠렸다.그가 그 움직임을 느끼고도 손을 거두지 않자, 해원은 더는 피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너는 내 곁에 있으면 된다. 다른 사내의 친절을 받을 필요도 없고, 그들이 네 이름을 기억하게 만들 이유도 없다.”왕은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
해원은 입술을 깨물었다.그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대군은 자신의 겉옷을 벗으려다가 해원이 본능적으로 물러서는 것을 보고 손을 멈추었다. 대신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는 쪽으로 자리를 옮겨 눈발을 막아 주었다.해원은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뒤늦게 알아차렸다.자신에게 손을 대지 않으면서도 바람을 막아 주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중궁전에서 최상궁이 달려왔다.그녀는 이태겸을 발견하자 놀란 얼굴로 예를 올렸다.“대군마마를 뵈옵니다.”이태겸은 해원을 돌아보았다.“이 아이가 눈길에서 넘어졌다. 숯은 내 사람이 들고 있으니 받아 가거라.”최상궁은 해원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지만, 대군이 보는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송구하옵니다. 소인이 미처 살피지 못하였사옵니다.”“의관을 보내도록 하였다. 다친 곳을 살피게 하라.”이태겸의 말에 최상궁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그리하겠사옵니다.”해원은 그 말을 듣고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최상궁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만으로도 중궁전에 돌아가면 어떤 말을 듣게 될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이태겸은 떠나기 전에 해원에게 다시 물었다.“이름이 무엇이냐?”해원은 잠시 망설였다.관비가 된 뒤 누군가가 이름을 묻는 일은 거의 없었다.“윤해원이옵니다.”“윤해원.”대군은 그 이름을 한 번 되뇌었다.“오늘은 더 이상 일을 시키지 마라.”그는 최상궁을 향해 분명하게 말했다.“이 아이가 길에서 쓰러졌다는 사실을 내가 직접 보았다. 의원이 살피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게 하라.”최상궁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명심하겠사옵니다.”이태겸은 그제야 발걸음을 돌렸다.해원은 그가 멀어질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눈발 사이로 검은 겉옷이 사라진 뒤에야 최상궁이 다가와 그녀의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네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아느냐?”해원은 놀라 상궁을 바라보았다.“소인은 그저 길에서 넘어졌을 뿐이옵니다.”“하필 대군마마의 눈에 띄어 중궁전의 일을 밖에 알렸단 말이냐. 네가 일부러 그 앞에서
그녀가 두려운 것은 더 이상 중궁의 벌만이 아니었다.왕이 자신에게 내리는 모든 고통을 사랑과 법도의 이름으로 정당화한다는 사실이었다.---사흘 뒤, 궁에는 다시 눈이 내렸다.해원은 중궁전 뒤뜰에서 마른 장작을 정리하고 있었다. 매를 맞은 자리는 아직 제대로 아물지 않았지만, 최상궁은 그녀가 오래 쉬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왕이 명한 이동 제한도 그대로였다.해원은 중궁전 밖으로 함부로 나갈 수 없었고, 소담과 잠시 말을 나누는 일조차 최상궁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그날도 새벽부터 피자탕을 마신 뒤 물을 긷고 마루를 닦았으며, 오후에는 저녁에 쓸 장작을 옮기고 있었다.눈은 오전부터 내리기 시작했지만 오후가 되자 바람까지 거세졌다. 손끝이 얼어붙어 장작을 제대로 붙잡기 어려웠고, 매를 맞은 자리의 통증 때문에 몇 번이나 벽에 기대어 숨을 골라야 했다.그때 최상궁이 뒤뜰로 나왔다.“윤해원, 중궁마마께서 쓰실 숯이 부족하다. 동쪽 창고에 가서 가져오너라.”해원은 장작을 내려놓았다.“마마, 전하께서 중궁전 밖으로 나가지 말라 명하셨사옵니다.”“동쪽 창고는 중궁전 물품을 보관하는 곳이다. 내가 직접 명하는데도 가지 않겠다는 것이냐?”해원은 잠시 망설였다.“그런 뜻이 아니옵니다.”“그렇다면 서둘러라. 중궁마마의 화로가 식기 전에 가져와야 할 것이다.”최상궁은 빈 광주리를 그녀에게 건넸다.해원은 그것을 받아 들고 동쪽 창고로 향했다. 창고는 중궁전 담장을 따라 이어진 좁은 길 끝에 있었는데, 눈이 쌓인 돌길이 미끄러워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다.숯을 담아 돌아오는 길에는 바람이 더욱 거세졌다.해원은 광주리를 품에 안고 걸었지만, 차가운 눈발이 얼굴을 때릴 때마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담장 모퉁이를 돌아서던 순간 발이 미끄러지면서 광주리가 기울었고, 그녀는 숯이 쏟아지는 것을 막으려다 그대로 눈 위에 무릎을 꿇었다.매를 맞은 자리에 충격이 전해지자 숨이 턱 막혔다.광주리는 겨우 붙잡았지만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그때 멀리
“마루를 닦아라. 중전마마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끝내야 한다.”해원은 걸레를 받아 들었다.허리를 굽히는 순간 통증이 밀려와 눈앞이 흐려졌지만, 최상궁은 그녀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일을 거두지 않았다.“전하께서 스무 대나 벌하신 까닭을 잊지 말거라. 네가 죄를 인정했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다.”해원은 고개를 숙였다.“명심하겠사옵니다.”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대고 천천히 걸레를 움직였다.그때 소담이 물그릇을 들고 들어왔다.소담은 해원의 모습을 보자 놀란 얼굴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최상궁이 지켜보고 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물그릇을 내려놓았다.잠시 뒤 최상궁이 다른 방으로 들어가자 소담은 해원 곁에 앉았다.“언니,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어요.”해원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너까지 벌을 받으면 안 되니 어서 가.”소담은 해원의 손을 잡으려다가 상처를 보고 멈추었다.“밤에 전하의 침전에 들면 말씀드려 보세요. 이렇게까지 벌을 받았는데…….”해원은 잠시 걸레를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다.소담은 왕이 직접 형벌을 명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밤의 왕은 다를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듯했다.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그날 밤, 왕은 평소보다 늦게 해원을 침전으로 불렀다.궁녀들이 그녀를 데리러 왔을 때 해원은 아직 제대로 걷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의 부름을 거절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녀는 두 사람의 부축을 받아 침전으로 향했다.이경원은 서안 앞에 앉아 문서를 읽고 있었다.해원이 예를 올리려 하자 그는 고개를 들었다.“오늘은 움직임이 느리구나.”해원은 무릎을 굽히려다가 통증 때문에 몸을 움츠렸다.왕은 그 모습을 보고 문서를 내려놓았다.“아직도 아프냐?”“조금 그러하옵니다.”“스무 대를 맞았으니 당연히 아프겠지.”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그는 해원의 팔을 잡아 일으킨 뒤 얼굴을 살폈다. 눈가가 붉게 부어 있었고, 입술에는 핏기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그리 아픈데
그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 수는 있었다. 중궁의 편을 들고 다시 중궁전으로 돌려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직접 형벌을 명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왕은 해원이 굳어 있는 모습을 보고 덧붙였다.“전하께서 내리신 비단을 훼손하고도 허물을 인정하지 않았으니, 이 정도 벌은 받아야 마땅하다.”그는 중궁을 돌아보았다.“중전도 지켜보시오. 오늘 이 일을 분명히 바로잡아 두어야 궁의 법도가 서는 것이오.”민소령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전하의 뜻을 받들겠사옵니다.”해원은 내관들에게 이끌려 편전 앞뜰로 나갔다.차가운 돌바닥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남아 있었고, 형장을 준비하는 동안 궁인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해원은 그들 앞에 엎드린 채 왕이 마음을 바꾸어 주기를 기다렸지만, 처마 아래에 선 이경원은 중궁과 나란히 서서 형벌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첫 번째 매가 떨어지자 해원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소리를 삼켰지만, 몇 차례 매질이 이어지자 팔에 힘이 풀려 바닥을 짚은 손이 미끄러졌다. 아침부터 피자탕을 마신 탓에 속은 비어 있었고, 차가운 바닥에 엎드린 몸에서는 점점 감각이 사라졌다.최상궁은 처마 아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민소령은 왕에게 몸을 조금 기울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전하, 저 아이가 견디지 못하는 듯하옵니다.”왕은 형장을 바라보았다.“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오. 지금 멈추면 제 잘못을 가벼이 여길 것이오.”그의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없었다.해원은 그 말을 들었다.자신을 향한 형벌이 중궁의 억지 때문이 아니라, 왕이 옳다고 믿는 판단에 따라 내려졌다는 사실을 그제야 분명히 깨달았다.열 대를 넘기자 해원은 숨을 제대로 고르지 못했다.그녀는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엎드렸고, 형장을 집행하던 내관이 잠시 손을 멈추었다.“전하, 죄인이 기력을 잃은 듯하옵니다.”이경원은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아직 몇 대가 남았느냐?”“여섯 대가 남았사옵니다.”“마저 집행하라. 벌은 끝까지 받아야
해원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그 궁녀는 며칠 전 중궁전 앞뜰에서 자신을 비웃던 사람이었다.“그런 일은 없었어. 나는 비단을 접어 놓기만 했는데…….”“마마 앞에서 감히 누구에게 반말을 하느냐?”최상궁의 호통이 떨어지자 해원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궁녀는 해원을 한 번 바라본 뒤 말을 이었다.“소인은 그저 비단이 상할까 걱정되었사옵니다. 그러나 윤해원이 곧 물을 가지러 나갔기에 미처 말씀드리지 못하였사옵니다.”민소령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네가 잘못 본 것은 아닐 테지.”해원은 손끝을 꽉 쥐었다.그 궁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중궁은 이미 어느 쪽 말을 믿을지 정한 얼굴이었다.“마마, 부디 한 번만 확인하여 주시옵소서. 소인은 정말 비단을 찢지 않았사옵니다.”민소령은 한숨을 내쉬었다.“네가 죄를 인정하기만 하였다면 가벼이 넘기려 했거늘, 끝까지 다른 사람을 의심하게 만드는구나.”중궁은 최상궁에게 손짓했다.“전하께서 내리신 물건을 훼손한 일이니 전하께 직접 아뢰어야겠다. 이 아이를 데리고 가거라.”해원은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다.중궁의 처벌도 두려웠지만, 왕이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더 두려웠다.그녀는 최상궁에게 끌려가면서 마지막으로 비단을 돌아보았다.찢어진 부분이 위로 드러난 채 비단함에 놓여 있었다.자신이 손대지 않은 흠이었다.그러나 이제 그 흠은 해원의 죄가 되어 있었다.---왕은 편전에서 대신들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중궁이 찾아왔다는 말을 들은 그는 회의를 잠시 멈추고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해원은 문밖에 무릎을 꿇은 채 기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관의 부름을 받고 안으로 들어갔다.이경원은 중궁의 곁에 앉아 있었다.민소령은 찢어진 비단을 왕 앞에 펼쳐 놓고 그동안의 일을 설명했다. 해원이 물건을 거칠게 다루었다는 궁녀의 증언까지 덧붙였지만, 해원이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마지막에 짧게 언급할 뿐이었다.왕은 비단을 살펴본 뒤 해원에게 물었다.“네가 맡았던 물건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