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죄인으로 품던 여인이 도망쳤다

왕이 죄인으로 품던 여인이 도망쳤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By:  월야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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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밤마다 그녀를 품었지만, 날이 밝으면 다시 죄인이라 불렀다. 역적의 딸로 몰려 관비가 된 윤해원. 왕의 침전에서 밤을 보낸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피자탕이 내려왔고, 중궁은 궁인들 앞에서 그녀를 짓밟았다. 왕은 그 모든 수모를 지켜보면서도 오히려 중궁을 칭찬했다. “죄인의 몸으로 감히 내 아이를 품으려 하느냐.” 끝내 사랑도 존엄도 잃은 해원은 왕의 이복동생 진안대군의 손을 잡고 궁을 탈출한다. 그제야 왕은 자신이 버린 여인을 미친 듯이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그러나 왕이 죄인으로 품었던 여인은 이제 다른 남자의 품에서 살아갈 자유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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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Chapters
1화
“전하께서 품으신 계집이라고 해서 네 뱃속까지 귀해지는 것은 아니다.”최상궁이 검붉은 약탕 한 사발을 해원 앞에 내려놓았다.아직 김이 피어오르는 약탕에서는 코끝을 찌르는 쓴 냄새가 풍겼다. 해원은 사발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히는 듯했다.왕의 침전에서 돌아온 지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았다.불과 조금 전까지 해원은 따뜻한 비단 이불 속에 있었다. 왕은 그녀의 차가운 발을 제 무릎 사이에 끼워 녹여 주었고, 새벽녘 잠결에 뒤척이는 그녀를 끌어안으며 조금 더 자라고 속삭였다.그러나 동이 트자 내관이 들어와 그녀를 깨웠다.왕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해원은 그의 팔을 조심스럽게 풀어내고 침전에서 나왔다. 문밖에서 기다리던 궁녀는 비단옷을 벗겨 가져갔고, 대신 낡은 무명 죄인복을 내밀었다.그리고 지금, 그녀 앞에는 어김없이 피자탕이 놓여 있었다.“무엇 하느냐? 어서 마시지 않고.”해원은 사발을 받으려다 손을 멈추었다.“상궁마마. 속이 좋지 않사옵니다. 잠시만 식혔다가 마시면 안 되겠사옵니까?”최상궁은 대답 대신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짝!좁은 행랑에 마른 소리가 울렸다.해원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입안에 비릿한 맛이 번졌다.“감히 전하의 명을 흥정하려 드느냐?”“그런 뜻이 아니옵니다.”“네가 누구 덕에 아직 살아 있는지 잊었구나.”최상궁은 해원의 턱을 거칠게 들어 올렸다.“역적의 딸이 아니더냐. 네 아비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 함께 죽었어야 할 목숨을 전하께서 거두어 주셨다. 그런데 약 한 사발이 그리도 억울하냐?”해원은 입술을 깨물었다.아버지의 죽음을 입에 올리는 순간에도 최상궁의 얼굴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마시겠사옵니다.”최상궁이 손을 놓았다.해원은 사발을 들어 입술에 댔다.약탕은 뜨거웠다. 첫 모금이 목을 넘어가자 속이 뒤틀렸고, 두 번째 모금에서는 구역질이 치밀었다.그녀가 잠시 사발을 내리자 최상궁이 손목을 붙잡았다.“끝까지 마셔라.”해원은 눈을 감고 남은 약을 삼켰다.마지막 한 모금이 넘어가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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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고개를 들거라.”해원이 고개를 들자 민소령의 시선이 그녀의 목덜미로 향했다.죄인복의 깃 아래에 붉은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민소령은 그것을 잠시 바라보다 웃었다.“전하께서 네게 퍽 다정하신 모양이구나.”해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허나 다정함을 총애로 착각해서는 아니 된다. 너는 후궁이 아니라 관비다. 왕실의 혈통을 이을 자격도 없지.”중궁은 궁인들을 돌아보았다.“모두 똑똑히 보아 두어라. 전하의 침전에 든다고 해서 죄인의 신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뜰에 서 있던 궁녀들이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그중 몇몇은 입가에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민소령이 약사발을 가리켰다.“마셔라.”해원은 사발을 받았다.전날보다 약이 진했다. 입술에 닿기도 전에 쓴 냄새가 올라왔다.한 모금을 삼키자 위장이 뒤틀렸다.그녀는 숨을 고르며 다시 사발을 들었다.그때 민소령이 물었다.“어젯밤 전하께서는 무엇이라 하셨느냐?”해원의 손이 멈추었다.“그저…….”“그저 무엇?”“별다른 말씀은 없으셨사옵니다.”중궁이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내가 묻는 말에 숨기는 것이 있느냐?”“아니옵니다.”“그렇다면 전하께서 너를 어찌 대하셨는지 말해 보아라.”해원의 얼굴이 붉어졌다.주변에는 궁녀와 내관들이 서 있었다.그들 앞에서 왕의 침전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라는 뜻이었다.“마마, 부디…….”“무엇이 그리 부끄러우냐? 밤에는 전하의 품에 안기면서 낮에는 입을 다물고 싶으냐?”민소령은 차갑게 웃었다.“좋다. 대답하기 싫다면 약이나 마셔라.”해원은 사발을 입술에 가져갔다.두 모금을 더 삼켰을 때, 갑자기 구역질이 치밀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사발을 내려놓으려 했다.그러나 최상궁이 다가와 손목을 붙잡았다.“중전마마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잠시만…….”“마셔라.”해원은 억지로 사발을 들었다.뜨거운 약탕이 입술을 타고 흘러내렸다.기침이 터졌다.그 순간 손에 힘이 풀리며 약사발이 돌바닥으로 떨어졌다.쨍그랑!사발이 산산조각 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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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그때 멀리서 왕의 행차를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전하 납시오!”궁인들이 일제히 움직였다.해원도 두레박을 내려놓고 뜰 한쪽에 엎드렸다.왕의 가죽신이 그녀 앞을 지나가다 멈추었다.“너는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해원은 고개를 들었다.이경원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왕은 검은 곤룡포 차림이었다. 뒤에는 내관 둘과 호위무사가 따르고 있었다.“물을 긷고 있었사옵니다.”왕의 시선이 그녀의 손으로 내려갔다.갈라진 손바닥에 두레박 줄이 쓸린 자국이 선명했다.“손이 어찌 그 모양이냐.”해원은 손을 소매 안으로 감추었다.“별일 아니옵니다.”왕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끌어냈다.그의 손은 따뜻했다.해원은 그 온기가 낯설지 않았다.어젯밤에도 같은 손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으니까.“누가 이리 만들었느냐?”그때 중궁이 다가왔다.“전하.”민소령은 예를 올린 뒤 해원을 바라보았다.“소첩이 궁의 법도를 가르치고 있었사옵니다.”왕은 손을 놓지 않았다.“법도라.”“이 아이가 오늘 아침 피자탕을 엎질렀사옵니다. 전하께서 친히 명하신 약인데도 말이지요.”왕의 눈길이 해원에게 돌아왔다.“약을 엎질렀느냐?”해원은 입술을 깨물었다.“손에 힘이 풀려…….”“그래서?”“다시 달인 약을 모두 마셨사옵니다.”왕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토하지는 않았느냐?”해원은 숨을 삼켰다.그가 궁금해하는 것은 자신의 손이 아니었다.“예, 전하.”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되었다.”민소령이 부드럽게 웃었다.“소첩이 지나치게 엄하였사옵니까?”왕은 중궁을 돌아보았다.“아니오.”그는 해원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중전이 참으로 현명하오. 궁의 기강을 바로잡는 일은 중전의 몫이니 앞으로도 그리하시오.”해원은 왕을 바라보았다.그는 자신이 약을 두 사발이나 마셨다는 사실을 들었다.갈라진 손바닥도 직접 보았다.그런데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민소령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성은이 망극하옵니다.”왕은 다시 해원을 보았다.“오늘 밤 침전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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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해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런 생각은 한 적 없사옵니다.”“그렇다면 무엇이 억울하냐.”왕이 돌아섰다.“나는 네 목숨을 살려 두었다. 역적의 딸이 살아서 궁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과분한 은혜가 아니더냐.”해원은 입술을 깨물었다.아버지가 형장으로 끌려가던 날이 떠올랐다.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아버지의 목소리.그날 이후 해원은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수없이 고개를 숙여야 했다.왕은 그녀에게 다가왔다.“너는 내 곁에 있으면 된다.”그의 손가락이 해원의 턱을 들어 올렸다.“허나 내 아이를 품는 것은 다른 문제다.”해원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왕은 그 눈물을 엄지로 닦아 주었다.“울지 말거라.”그는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낮게 말했다.“내가 너를 버리겠느냐.”해원은 숨을 삼켰다.왕의 손길은 여전히 다정했다.그러나 그 다정함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전하께서는…… 제가 아프다는 것을 아시옵니까?”왕의 손이 멈추었다.해원은 그를 바라보았다.처음으로 피하지 않았다.“피자탕을 마시면 속이 뒤집히고, 손발이 떨리고, 하루 종일 제대로 걷기도 어렵사옵니다. 전하께서는 그것을 알고 계시옵니까?”왕은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그러더니 조용히 대답했다.“알고 있다.”해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왕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네가 약을 마시고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보고받고 있다.”“그런데도…….”“그래야 하니까.”왕은 그녀의 턱을 놓았다.“네가 내 아이를 품는 일은 허락할 수 없다.”해원은 입술을 떨었다.“그렇다면 차라리 저를 침전에 부르지 마시옵소서.”왕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해원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그러나 이미 내뱉은 말을 거둘 수는 없었다.왕이 천천히 다가왔다.“방금 무엇이라 하였느냐?”“전하…….”“내가 너를 부르지 말라?”왕은 해원의 손목을 붙잡았다.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누가 네게 그런 선택을 허락하였느냐.”해원은 숨을 삼켰다.“소비가 경솔하였사옵니다.”“네가 아직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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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한 몸으로 해내기에는 벅찬 양이었다.“그리고.”최상궁이 돌아서다 말고 덧붙였다.“오늘 밤에도 전하께서 찾으실지 모르니 몸은 깨끗이 해 두어라.”문이 닫혔다.해원은 목패를 내려다보았다.왕의 침전에 들기 위해서는 깨끗해야 했다.그러나 왕의 침전에서 돌아온 몸은 하루 종일 중궁전의 바닥을 닦아야 했다.그녀는 천천히 물통을 들었다.문을 열자 새벽바람이 얼굴을 때렸다.먼동이 트기 전의 궁은 아직 어두웠다.해원은 우물가로 걸어갔다.얼어붙은 두레박 줄을 잡자 갈라진 손바닥이 따끔거렸다.물을 길어 올리는 동안 문득 왕의 말이 떠올랐다.'네가 살아 있는 동안 너를 품을 사람은 나뿐이다.'해원은 물이 가득 찬 두레박을 바라보았다.그의 곁에 있는 한, 자신에게 허락되는 아침은 앞으로도 이와 같을 것이었다.왕의 여자로 밤을 보내고, 죄인으로 아침을 맞는 삶.그것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았다.해원은 물통을 들고 중궁전으로 돌아갔다.안채에서는 궁녀들이 아침상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녀는 무거운 물통을 내려놓고 걸레를 집어 들었다.그때 최상궁이 다시 나타났다.“윤해원.”해원은 고개를 들었다.“중전마마께서 새로 명하셨다.”최상궁은 그녀 앞에 빈 약사발 하나를 내려놓았다.“어제처럼 사발을 깨뜨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분부시다. 오늘부터는 네가 직접 약사발을 씻고 보관하여라.”해원은 사발을 바라보았다.아침마다 자신의 입술에 닿는 물건이었다.약을 마신 뒤에도 그 사발을 닦아 다음 날을 준비해야 한다는 뜻이었다.“분부 받들겠사옵니다.”최상궁은 만족한 듯 돌아섰다.해원은 사발을 들고 우물가로 향했다.찬물에 사발을 담그자 손가락 끝이 저렸다.그녀는 사발 안쪽을 문질렀다.아무리 닦아도 약의 쓴 냄새가 남아 있는 듯했다.그때 중궁전 안쪽에서 궁녀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전하께서 그리도 아끼신다면서?”“그러게. 아끼는 계집에게 저런 약을 매일 먹이시다니.”“아끼시는 것이겠지. 다른 데로 가지 못하게 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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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그러나 지금 왕은 그녀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그는 해원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누구의 명을 따라야 하는지, 어떤 약을 마셔야 하는지까지 정해 놓았다. 그리고 그것을 거두어 달라는 청을 들으면서도, 그녀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해원은 천 조각을 다시 접어 소매 안에 넣었다.그때 문밖에서 최상궁의 발소리가 들렸다.“윤해원, 돌아왔으면 어서 나오너라.”해원은 벽을 짚고 일어났다.문을 열자 최상궁은 물통과 걸레가 놓인 쪽을 가리켰다.“중전마마께서 쓰실 물을 먼저 길어 오고, 안채의 마루를 닦아라. 밤에 전하의 침전에 들었다고 해서 낮의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아니 된다.”해원은 고개를 숙였다.“분부 받들겠사옵니다.”“그리고 오늘 밤에도 부름이 있을 수 있으니, 몸은 깨끗이 해 두어라. 전하께서 손에 상처가 나는 것을 싫어하시니 조심하고.”최상궁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해원은 물통을 들고 우물가로 향했다.얼어붙은 두레박 줄을 잡자 손바닥의 상처가 쓰라렸지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물을 길어 올렸다. 차가운 물이 손등을 타고 흘렀고, 갈라진 피부 사이로 스며들 때마다 통증이 올라왔다.물을 가득 채운 뒤 잠시 숨을 고르던 해원은 문득 어젯밤 왕의 목소리를 떠올렸다.'내가 너를 버리겠느냐.'그 말은 한때 그녀가 가장 듣고 싶었던 약속이었다.그러나 이제는 달랐다.왕은 자신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하면서도 고통을 거두어 주지 않았고, 떠나고 싶다는 말에는 손목을 움켜쥐었다.해원은 물통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들어 올렸다.그때 중궁전 안쪽에서 최상궁이 그녀를 불렀다.“윤해원, 약사발을 가져오너라.”해원은 물통을 내려놓고 약을 보관하는 작은 방으로 향했다.선반 위에는 어제 깨뜨린 것과 똑같이 생긴 사발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고 행랑으로 돌아왔다.최상궁은 약탕을 사발에 따르며 해원을 바라보았다.“전하께서 어젯밤에도 너를 찾으셨다지?”“그러하옵니다.”“그렇다면 더욱 조심해야겠구나. 전하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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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중궁전의 신발을 닦는 일은 본래 윤해원의 몫이 아니었다.그러나 민소령은 아침 문안이 끝나기도 전에 최상궁을 불러, 그날 왕을 맞이할 때 신을 비단 신발을 해원에게 직접 닦게 하라고 명했다. 신발은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채 비단함에 보관되어 있었으므로 굳이 닦을 필요도 없었지만, 중궁은 해원이 궁녀들 앞에서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해원은 그 뜻을 짐작하면서도 아무 말 없이 대야를 가져왔다.최상궁은 궁녀들이 오가는 앞마루에 방석을 놓고 신발을 내려놓았다. 곁에는 깨끗한 수건과 물그릇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해원이 수건을 집어 들자 상궁은 그것을 빼앗아 옆으로 치웠다.“손으로 닦거라.”해원이 잠시 머뭇거리자 최상궁은 신발을 그녀의 무릎 앞으로 밀었다.“중전마마의 신발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영광인 줄 알아야지. 무엇을 망설이느냐?”해원은 차가운 마루에 무릎을 대고 앉아 물에 적신 손끝으로 신발의 앞코를 문질렀다. 비단에는 이미 은은한 광택이 돌고 있었으므로 닦을수록 좋아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상궁은 작은 얼룩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같은 자리를 다시 닦으라고 재촉했다.그녀가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주변의 궁녀들이 걸음을 늦추었다.“어젯밤에도 전하의 침전에 들었다면서?”누군가 속삭이자 다른 궁녀가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밤에는 전하의 품에 있다가 아침에는 중전마마의 신발을 닦으니, 저 아이도 제 신분을 잊을 수는 없겠네.”해원은 못 들은 척 신발을 돌려 잡았다.새벽에 마신 피자탕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고, 차가운 물에 젖은 손끝은 오래전부터 감각이 무뎌져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뒤축에 남아 있다는 보이지 않는 얼룩을 찾으려고 고개를 더 숙였다.그때 민소령이 처마 아래로 나왔다.“아직도 끝나지 않았느냐?”해원이 예를 올리자 중궁은 신발을 가져오라고 손짓했다. 최상궁이 신발을 들어 올렸지만, 민소령은 살펴보지도 않고 다시 해원 앞에 내려놓게 했다.“뒤축까지 닦아라. 전하를 맞이할 때 신을 것이니 흠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분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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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그러나 이경원은 민소령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웃었다.“중전의 마음이 참으로 깊구려. 내가 미처 살피지 못한 일까지 챙기니 고맙소.”중궁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전하께서 기뻐하시니 소첩도 기쁘옵니다.”왕은 해원에게 다시 눈길을 주었다.“중전께서 너를 배려하셨으니 맡은 일에 성의를 다하여라. 제 신분을 잊고 불평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해원은 신발을 내려놓고 이마를 바닥에 댔다.“명심하겠사옵니다.”왕은 더는 그녀를 보지 않았다.중궁의 손을 잡고 안채로 들어가는 두 사람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해원은 천천히 허리를 폈다. 젖은 손끝이 차갑게 식어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옷에 문지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최상궁이 다가와 비단함을 열었다.“전하께서도 중전마마의 배려를 칭찬하셨으니 네가 얼마나 복을 받은 것인지 알겠지?”해원은 신발을 함에 넣었다.“그러하옵니다.”조금 전 왕이 자신을 내려다보던 눈빛이 아직도 떠올랐다.그는 분명히 보았다.그런데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중궁의 손을 잡았다.---이틀 뒤, 중궁전에서는 왕실 친족에게 보낼 예물을 준비하고 있었다.비단과 향낭, 자수 놓인 주머니들이 안채에 가득 펼쳐졌고, 궁녀들은 최상궁의 지시에 따라 물품을 분류하고 있었다. 해원은 가장 낮은 자리에 앉아 비단을 접는 일을 맡았는데, 그녀 앞에 놓인 것은 왕이 중궁에게 직접 내린 연분홍색 비단이었다.최상궁은 비단을 함에 넣기 전 주름을 정리하라고 명했다.해원이 천을 펼쳐 놓자 바깥에서 급히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윤해원, 안채에 뜨거운 물을 가져오너라.”해원은 손을 멈추고 최상궁을 바라보았다.“이 비단은 어찌하오리까?”“그대로 두고 다녀오면 될 일이다. 중전마마께서 기다리시니 서둘러라.”해원은 비단을 가지런히 접어 탁자 위에 올려놓고 물을 가지러 나갔다.그녀가 자리를 비운 동안 중궁전 안채에는 다른 궁녀들이 드나들었다. 그중 한 궁녀가 탁자 곁에 잠시 머물렀지만, 누구도 그 모습을 유심히 보지 않았다.해원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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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해원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그 궁녀는 며칠 전 중궁전 앞뜰에서 자신을 비웃던 사람이었다.“그런 일은 없었어. 나는 비단을 접어 놓기만 했는데…….”“마마 앞에서 감히 누구에게 반말을 하느냐?”최상궁의 호통이 떨어지자 해원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궁녀는 해원을 한 번 바라본 뒤 말을 이었다.“소인은 그저 비단이 상할까 걱정되었사옵니다. 그러나 윤해원이 곧 물을 가지러 나갔기에 미처 말씀드리지 못하였사옵니다.”민소령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네가 잘못 본 것은 아닐 테지.”해원은 손끝을 꽉 쥐었다.그 궁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중궁은 이미 어느 쪽 말을 믿을지 정한 얼굴이었다.“마마, 부디 한 번만 확인하여 주시옵소서. 소인은 정말 비단을 찢지 않았사옵니다.”민소령은 한숨을 내쉬었다.“네가 죄를 인정하기만 하였다면 가벼이 넘기려 했거늘, 끝까지 다른 사람을 의심하게 만드는구나.”중궁은 최상궁에게 손짓했다.“전하께서 내리신 물건을 훼손한 일이니 전하께 직접 아뢰어야겠다. 이 아이를 데리고 가거라.”해원은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다.중궁의 처벌도 두려웠지만, 왕이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더 두려웠다.그녀는 최상궁에게 끌려가면서 마지막으로 비단을 돌아보았다.찢어진 부분이 위로 드러난 채 비단함에 놓여 있었다.자신이 손대지 않은 흠이었다.그러나 이제 그 흠은 해원의 죄가 되어 있었다.---왕은 편전에서 대신들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중궁이 찾아왔다는 말을 들은 그는 회의를 잠시 멈추고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해원은 문밖에 무릎을 꿇은 채 기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관의 부름을 받고 안으로 들어갔다.이경원은 중궁의 곁에 앉아 있었다.민소령은 찢어진 비단을 왕 앞에 펼쳐 놓고 그동안의 일을 설명했다. 해원이 물건을 거칠게 다루었다는 궁녀의 증언까지 덧붙였지만, 해원이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마지막에 짧게 언급할 뿐이었다.왕은 비단을 살펴본 뒤 해원에게 물었다.“네가 맡았던 물건이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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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그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 수는 있었다. 중궁의 편을 들고 다시 중궁전으로 돌려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직접 형벌을 명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왕은 해원이 굳어 있는 모습을 보고 덧붙였다.“전하께서 내리신 비단을 훼손하고도 허물을 인정하지 않았으니, 이 정도 벌은 받아야 마땅하다.”그는 중궁을 돌아보았다.“중전도 지켜보시오. 오늘 이 일을 분명히 바로잡아 두어야 궁의 법도가 서는 것이오.”민소령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전하의 뜻을 받들겠사옵니다.”해원은 내관들에게 이끌려 편전 앞뜰로 나갔다.차가운 돌바닥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남아 있었고, 형장을 준비하는 동안 궁인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해원은 그들 앞에 엎드린 채 왕이 마음을 바꾸어 주기를 기다렸지만, 처마 아래에 선 이경원은 중궁과 나란히 서서 형벌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첫 번째 매가 떨어지자 해원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소리를 삼켰지만, 몇 차례 매질이 이어지자 팔에 힘이 풀려 바닥을 짚은 손이 미끄러졌다. 아침부터 피자탕을 마신 탓에 속은 비어 있었고, 차가운 바닥에 엎드린 몸에서는 점점 감각이 사라졌다.최상궁은 처마 아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민소령은 왕에게 몸을 조금 기울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전하, 저 아이가 견디지 못하는 듯하옵니다.”왕은 형장을 바라보았다.“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오. 지금 멈추면 제 잘못을 가벼이 여길 것이오.”그의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없었다.해원은 그 말을 들었다.자신을 향한 형벌이 중궁의 억지 때문이 아니라, 왕이 옳다고 믿는 판단에 따라 내려졌다는 사실을 그제야 분명히 깨달았다.열 대를 넘기자 해원은 숨을 제대로 고르지 못했다.그녀는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엎드렸고, 형장을 집행하던 내관이 잠시 손을 멈추었다.“전하, 죄인이 기력을 잃은 듯하옵니다.”이경원은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아직 몇 대가 남았느냐?”“여섯 대가 남았사옵니다.”“마저 집행하라. 벌은 끝까지 받아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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