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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화

Author: 연무
이 말을 끝으로 서청잔은 조용히 우산을 그녀에게 건네 준 뒤,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강만여는 얼어붙은 손으로 그가 주고 간 우산을 꼭 움켜쥐었다. 그녀는 한참을 그렇게 남은 손잡이의 온기를 느끼며 그가 남기고 간 말을 되새겼다. 그러자 가슴이 점점 벅차 오르며 차가웠던 몸도 점차 혈기가 돌기 시작했다.

'정말 나와의 약속을 잊지 않았어...!'

5년 전, 반드시 출궁하는 날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 그가 잊지 않고 지키러 오는 것이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서청잔을 따라가 그가 어디까지 왔는지, 경성(京城)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참고 또 참았다. 지금은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저 이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견디고 또 견디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서청잔의 그림자가 완전히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강 상궁님, 이 등불 가져가세요."

소복자가 손에 들고 있던 등불을 그녀에게 내밀며 말했다.

"눈 오는 날은 미끄러우니, 돌아가시는 길 조심하시라고 사부님께서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강만여는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 한쪽에 우두커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손량언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손량언은 그런 그녀를 보고 그저 조용히 손을 흔들 뿐이었다. 강만여는 등을 받은 뒤, 소복자에게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자리를 떠났다.

소복자는 쓸쓸한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손량언 옆으로 돌아갔다.

"사부님, 설마 서 대인님께서 이런 자비를 베풀어 주는 날이 올 줄이야... 오늘 해가 서쪽에서 뜬 건지, 헷갈립니다."

하지만 손량언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저 독하다고 소문난 서청잔도 움직였는데, 황제는 전혀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어보였다. 과연 형제를 도륙해 황위에 오른 황제는 쉬이 마음이 물렁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오늘 밤이 지나면 강만여가 출궁까지 이틀 남지 않게 된다. 부디 더 이상은 소란이 일어나지 않기를 그는 바랄 뿐이었다.

강만여는 비틀거리며 숙소로 돌아왔다. 방 안은 온기 하나 없는 얼음장 같았다. 원래 독방은 나름 궁녀들 사이에선 직책이 높은 사람만 가질 수 있는 혜택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선 차라리 다른 이들과 함께 방을 쓰는 편이 더 따뜻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잠은 자야 하는 상황, 그녀는 씻기 위해 모퉁이 쪽에 놓여 있는 대야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이미 꽝꽝 얼붙은 물, 사용하려면 데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늦은 밤에 물을 데우려면 쉽지 않은 일, 그녀가 머뭇거리는 사이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강만여는 의아했지만, 일단 문을 열었다. 그러자 소복자가 한 손으로 놋주전자를 다른 한 손으론 온수주머니를 들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건 사부님께서 보내신 겁니다. 이 물은 오늘 밤 사용하시고, 온수주머니는 이불에 넣고 자면 내일 아침까지 따뜻하게 주무실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아침에 세수용으로도 사용할 수 있고요."

강만여는 감격한 얼굴로 얼른 그가 내민 것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소복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또 품에서 연고를 꺼냈다.

"이것도 받으세요. 무릎에 바르고 자면 아주 효과가 좋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다시 건청궁으로 환궁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강만여는 뽀드득뽀드득 눈을 밟으며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토록 차가운 궁에서도 그녀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 바로 이런 작은 온기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 총관, 소복자, 서청잔, 설영 그리고 자신을 데리러 오기 위해 밤낮없이 달려오고 있을 그 사람까지, 그녀는 다시 마음을 굳게 먹었다.

'조금만 더 참자, 조금만 더 버티면 돼....'

눈은 밤새 내렸고, 아침이 되어서야 멈췄다. 하지만 세상은 이미 온통 하얀색으로 뒤덮인 뒤였다.

첫눈부터 이렇게 많이 눈이 오다니, 올해 겨울은 꽤 고달플 것 같았다.

오늘은 관리들이 쉬는날, 황제도 아침 조회에 나갈 필요가 없어 궁인들도 평소보다 늦은 시각에 업무에 나설 수 있었다.

하지만 강만여는 이른 아침부터 몸을 단장하고 어젯밤 서청잔이 준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후궁 북동쪽에 심어져 있는 백년 넘은 감나무, 첫눈이 오는날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전해져왔다.

비록 진위여부는 확인할 수 없는 소문이었지만, 그저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에 강만여는 매년 첫눈이 내릴때마다 가장 먼저 이곳에 와서 소원을 빌었다.

눈은 꽤 두껍게 쌓여 있었고, 그녀는 땀이 차오를 정도로 힘겹게 감나무까지 걸어갔다.

아무도 따지 않은 채 얼어버린 감들이, 그 위로 소복히 쌓인 눈, 백 년 넘은 감나무의 모습은 아주 장관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아래, 누군가가 첫눈을 대비해 향낭을 걸어 놓아둔 듯한 사다리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주변을 돌아봐도 어떠한 발자국도 보이지 않았다. 강만여는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출궁 전 마지막으로 비는 소원인데, 첫 번째로 오다니, 정말 바라던 일이 꼭 이루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우산을 바닥에 내려둔 뒤, 두 손을 모아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그런 다음 미리 준비해온 향낭을 품에서 꺼내 사다리로 닿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가지에 걸었다.

바람이 불었고, 이미 수십년 동안 쌓인 붉은 향낭들이 함께 하늘거렸다.

붉은색은 희망을 뜻했다. 이 감나무는 백 년이라는 세월을 살면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희망이 되어주었다.

멀리서 푸드득 바람을 따라 새들이 날아올랐다. 점점 높이 또 멀리 사라지는 새들을 보며, 강만여는 5년이나 못 본 어머니를 떠올렸다.

'나도 저 새들처럼 날아 궁을 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는 감나무에 기대 잠시 멍하니 감상에 빠졌다가, 이내 시간이 많이 지났음을 깨닫고 우산을 챙겨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조용히 멀리서 지켜보는 그림자가 있었다.

바람이 조금이라도 더 세게 불면 함께 날아갈 것 같은 강만여의 가냘픈 모습을 보며 그는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림자의 정체는 바로 기양, 황제였다. 그녀가 떠나간 자리 반대편에 있는 소나무에서 그가 걸어 나왔다. 그리고는 뒷짐을 진 채 감나무를 바라보며 소복자에게 명령했다.

"저 향낭, 가져와."

"네!"

소복자는 민첩하게 사다리를 올라가 강만여가 걸고 간 향낭을 가져왔다.

황제는 능숙하게 향낭을 열었고, 안에는 쪽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

'평안, 또 평안이군.'

지난 5년 동안 매번 그녀가 와서 빈 소원이었다.

'도대체 누구의 평안을? 자기 자신?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황제는 이 평안의 뜻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정말 순수 평안을 원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너머 무언가를 원하는 것일까?'

황제는 자기도 모르게 얼마 전 그녀가 궁녀들에게 둘러싸여 새 배필을 만나길 기원한다는 대화를 떠올렸다.

그는 왠지 모르게 분노가 솟구쳤고, 사정없이 향낭에서 꺼낸 쪽지를 찢어 바람과 함께 날려보냈다.

소복자는 옆에서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매년 강만여가 이곳에서 소원을 빌 때마다 보는 광경이었다. 그녀는 꿈에서도 몰랐을 것이다. 매년 그녀가 정성을 들여 빌어온 소원들이 모두 이렇게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말이다.

'폐하께선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것일까? ... 강 상궁님은 무사히 출궁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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