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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화

Author: 연무
강만여가 건청궁에 도착했을 땐 이미 황제는 나가고 없었다. 당직 중이던 하급 내시가 그녀에게 말했다.

"태후마마가 감기에 걸리셔서 폐하께서 자녕궁(慈宁宫)으로 문안 가셨습니다."

강만여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오늘은 또 무슨 핑계를 대고 그를 피하나 했는데, 알아서 없어져 주다니 참 다행이다 싶었다.

'혹시 감나무신이 내 소원을 들어줬나? 부디 진짜였으면 좋겠다... 출궁전까지 제발 아무일 없길....'

한편, 자선궁 안, 태후는 침상에 기댄 채 황제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저 눈 구경 잠시하다가 찬 바람 맞은 것뿐입니다. 생강차 한 잔이면 금방 나을 것인데, 무엇하러 국정도 돌봐야하는 황제가 이 날씨에 여기까지 왔습니까?"

그러자 기양이 손에 들고 있던 탕약 그릇을 숟가락으로 저으며 말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저 그리 약하지 않습니다. 설령 병이 난다고 해도 내각과 서장인이 있는데, 국정에는 영향이 없을 것입니다."

“안 그래도 듣자하니 어젯밤 늦게 서청잔이 건청궁에 다녀갔다면서요?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그 말을 들은 순간 황제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빛났으나, 표정변화 없이 손에 들고 있던 탕약을 내밀었다.

"다 식었습니다. 이제 드시지요, 태후마마."

태후는 탕약이 담긴 그릇을 받아들이고 한번에 들이켰다.

황제는 곧바로 궁녀가 가져온 과일함에서 과일 하나를 집어들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태후는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황제의 시중을 받아들였다. 누가 봐도 지극정성인 모습, 하지만 태후는 마음이 씁쓸했다.

현 황제가 황위에 오른 뒤, 자식을 둔 귀비들은 모두 선황의 능이 있는 곳으로 보내졌다. 황제의 생모를 죽인 용빈(容嫔)은 선황의 무덤에 순장되었고, 오직 그녀만이 황제의 형제를 양육했다는 이유로 태후로 남았다.

다른 이들은 이런 황제의 모습을 보고 참 효심이 깊다고 칭송했지만, 태후는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연극일 뿐, 황제는 그녀를 진심으로 공경하는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시체들을 짓밟고 황위에 오른 기양이었다. 사사로운 정에 사로잡힐 인물이 아니었다.

"제가 괜한 말을 했나 봅니다."

태후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아닙니다. 제가 걱정되어 하는 말씀 아니십니까?"

기양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탕약을 드셨으니, 이제 그만 주무십시오. 밤에 다시 문안드리러 오겠습니다."

그러자 태후가 답했다.

"아닙니다. 바쁠 텐데 올 것 없습니다. 가서 일 보십시오."

하지만 황제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작게 안도의 함숨이 터져나왔다. 모두가 황제의 출현에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태후 옆에 있던 엽 상궁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마, 좀 전에 강만여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던 것 아니셨습니까? 왜 그냥 넘기셨어요?"

태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하려고 했지. 하지만 황제의 눈빛을 못 봤느냐? 소름 끼쳐서... 내가 괜한 말을 꺼냈다가 도리어 더 그 아이에서 관심을 가지게 되면, 큰일이지 않느냐."

"그렇긴 하네요. 안 그래도 어디로 튈지 모를 성격, 마마께서 간섭해봤자 듣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래, 그러니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태후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서청잔의 눈이 이 궁 안에서 닿지 않은 곳이 없는데, 여기에도 그의 귀가 없으리란 법이 없지 않느냐? 괜히 이런 말들이 황제한테까지 흘러들어가면 우리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자 엽 상궁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이 모든 강만여가 너무 눈에 띄였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동서남북, 모든 후궁을 통틀어도 그녀보다 더 돋보이는 이가 없었다.

그녀가 궁 안에 있는 한, 그 어떤 후궁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언제든지 황제가 강만여에게 은총을 입힐 수 있었다. 모든 후궁이 그녀의 출궁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이틀이면 이 조마조마한 심정도 끝일 거라 여겼는데, 강만여가 황제와 엮이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후궁들은 마음이 무너졌다. 첫날밤은 숙비가 막아줬고, 둘째날은 서청잔이 가서 멈춰줬다. 하지만 매번 그렇게 운이 좋으리란 법이 없었다. 이틀밖에 안 남았지만, 만약 그 사이에 황제와 무언가 더 발전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후궁에 있는 모든 여인들이 위계질서가 흔들리는 날이었다.

게다가 기양이 황위에 오른지 어느덧 5년, 아직도 황후의 자리는 공석에 있었다.

그래서 후궁들 모두 그 자리를 탐내며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는데, 여기에 갑자기 강만여가 끼어든다면 그동안의 수고가 모두 헛되게 된다. 그래서 모두 합심하여 태후까지 찾아와 부탁을 하게 된 것이다.

태후는 간절한 후궁들이 간청을 외면할 수 없어 일부러 병든 척 황제의 방문을 유도했다.

하지만 막상 황제를 만나니, 기세에 눌려 준비했던 말을 제대로 꺼내지조차 못했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보면, 강만여가 황제의 옆을 지킨지도 5년, 무언가 발생할 것이었다면 진작에 발생했어야 마땅했다. 지금까지 아무런 일이 없었는데, 갑자기 무언가 바뀔 것 같진 않았다.

엽 상궁은 한숨을 내쉬며 하급 내시에게 조용히 지시했다.

"익곤궁(翊坤宫)에 가서 난귀비(兰贵妃)께 전하거라. 태후마마 쪽에서 힘을 쓰긴 어려울 것 같으니, 각자 알아서 방법을 찾으라고."

사실 태후도 할 만큼 한 것이다.

5년 전, 강만여를 침전궁녀으로 추천한 것도 황후였다. 황제가 절대로 가까운 사람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과 과거 사건 때문에 침전궁녀를 극도록 혐오한다는 것을 알고 도박을 걸었다.

결과적으로 그 도박은 성공했다. 황제는 강만여를 분풀이 대상으로만 여길 뿐, 순결은 지켜주었다.

그리고 이제 이틀, 끝까지 황제가 강만여를 건드리지 않도록 하는 것은 각 후궁의 몫이었다.

물론 강만여는 자신이 이토록 많은 파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줄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그저 건청궁을 한시라도 빨리 빠져나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업무에 집중했을 뿐이었다. 의도치 않게 넘긴 위기, 그녀는 이 모든 것이 어쩌면 감나무 앞에 빈 소원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만여는 속으로 감나무신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며, 빠르게 건청궁을 벗어나 서편문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한 하급 내시가 코를 훌쩍이며 익곤궁의 소식을 전해왔다.

"강 상궁님, 귀비마마께서 뵙자고 합니다. 어서 익곤궁으로 가시지요."

강만여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손짓으로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하급 내시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소인도 그저 심부름 왔을 뿐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잘 알지 못합니다."

강만여는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와 함께 익곤궁으로 향했다.

한편, 황제는 자선궁을 나와 건청궁으로 돌아와 서재에서 조정 문서를 처리해 나갔다.

그렇게 거의 정오가 되어 점심을 먹고 나서야 겨우 휴식을 취하러 침전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자신의 침전 앞을 지키고 있던 침전궁녀들 중에 익숙한 얼굴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짜증스레 물었다.

"어디 갔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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