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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화

작가: 연무
강만여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황제는 못 믿겠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증명해보거라."

강만여는 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증명하라는 거지?'

의문이 가득한 눈빛을 본 황제가 툭툭 침상을 손바닥으로 쳤다.

"올라와."

강만여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쳤다.

그러자 황제의 미간이 심하게 찌푸려졌다.

"싫은 게 아니라면 왜 피하는 것이냐? 나는 세상에서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제일 싫어해. 너의 언니처럼, 역시 너도 거짓말쟁이구나?"

강만여는 황급히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너는 할 줄 아는 게 무릎 꿇고 머리 조아리는 것뿐이냐?"

황제가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녀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끌어당겼다.

그리곤 다리 사이에 강만여가 도망칠 수 없도록 결박하고, 뒤통수를 눌러 얼굴을 자신의 복부 쪽으로 숙이게 했다.

강만여는 결국 탄탄한 황제의 복근에 이마가 부딪히고 말았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잠시 멈칫했으나, 곧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기지를 발휘해 그의 옆구리를 깨물었다. 황제는 뜻밖의 통증에 잠시 방심했고, 강만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있는 힘껏 그를 뿌리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당장 돌아오지 못해!"

뒤에서 황제의 격분한 외침이 들렸지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달렸다.

겉으로 보기엔 화려하지만, 한없이 가혹한 궁생활, 그래도 참으면 벗어날 수 있을 거란 희망에 버텼으나 모든 것이 무너졌다.

하지만 입구에 도달하기도 전에 곧바로 뒤따라온 황제의 손아귀에 옷자락이 잡혔다. 그녀는 다시 한 번 그에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렇게 간신히 또 한번 빠져나오는 것에 성공하나 싶었지만, 중심을 잃고 말았다.

"강만여!"

황제가 이성을 잃은 듯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그 순간, 검은 복장에 금실로 용문이 수놓아진 한 인물이 침전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덕분에 강만여는 바닥이 아니라 남자의 품에 돌진하는 꼴이 되었지만, 그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그녀를 단단히 받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우, 나를 너무 반기는 것이 아니냐? 그래도 이렇게 품에 뛰어들 필요까진 없는데."

그 목소리를 듣자 강만여는 울컥하고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지만, 황제가 있는 자리였다. 그녀는 얼른 정신을 차고 허리를 곧게 세운 다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황제도 이성을 되찾고 민망한지 헛기침을 뒷짐을 졌다.

"서장인(徐掌印), 네가 이 시간엔 어인 일이냐?"

그러자 서장인, 본명 서청잔(徐清盏)이 허리를 굽히며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동창(東廠)에서 큰황자 잔당들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도착하여 보고하러 왔습니다."

그리고는 강만여를 바라보며 싱긋 웃더니 덧붙였다.

"그런데 제가 시기를 잘 못 맞춰 왔나 봅니다. 만여 양과 술래잡기 놀이 중이셨나봅니다?"

그러자 황제가 불쾌한 듯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헛소리 그만하고 들어오거라."

"강 상궁도 함께 보고를 들어도 되는 겁니까?"

서청잔이 되물었고 황제가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

"넌 내가 허락할 때까지 밖에 무릎 꿇고 있거라."

그 말을 들은 강만여는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밖으로 나가 무릎을 꿇었다.

서청잔은 그런 그녀를 잠시 힐끔 바라본 뒤, 문을 닫고 황제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한차례 폭풍우가 지나갔고, 문밖에 놀라 잠시 굳어 있던 사람들도 하나 둘 정신을 차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곧 손량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강만여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또 어쩌다가 폐하께 미움을 샀느냐?"

강만여는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묵묵히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손량언은 그녀의 반응에 한숨을 내쉬며 고래를 절레절레 흔들다 다시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슬슬 날이 어두워졌고 궁 곳곳에서 등불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했다.

강만여는 몇 시진 동안 딱딱하고 차가운 돌 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있자니, 도가니가 날카로운 송곳으로 찌른 듯 아파왔다.

안 그래도 무릎 꿇을 일이 많은 궁녀의 신분, 비록 손량언 같이 오래된 궁인들에 비할 바는 못 됐지만 그녀도 어느덧 5년 궁생활을 한 궁녀였다. 무릎이 성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평생 궁에 묶여 나가지 못하는 환관들보다는 나은 처지, 그녀는 고통을 참으며 묵묵히 황제의 허락을 기다렸다.

그렇게 또 한침이 지났고, 손량언과 환관들 모두 그녀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왔다. 하지만 그들이 대신할 수도 없는 노릇, 그저 조금이라도 빨리 황제가 기분을 풀어주길 바랄 뿐이었다.

밤은 점점 어두워졌고, 차가운 바람을 타고 눈송이가 하나 둘 내리기 시작했다.

소복소복 눈이 쌓이는 소리를 들으며 소복자는 참지 못하고 걱정스레 손량언에게 물었다.

"사부님, 눈까지 오는데... 만여 님, 이대로 둬도 괜찮은 겁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느냐? 나라고 뭐 뾰족한 수가 있겠느냐?"

손량언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이따가 무릎 연고나 챙겨주거라."

그 말에 소복자는 결국 의기소침하게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때, 드디어 침전 문이 삐걱하며 열리며 서청잔이 걸어 나왔다.

손량언은 재빨리 공손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서장인, 폐하와 이야기는 잘 마치셨습니까?"

"예."

서청잔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뒤, 아직까지 무릎 꿇고 있는 강만여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새 눈발이 굵어졌고, 어느새 그녀의 어깨와 머리 위로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다.

"눈이군."

서청잔이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남자는 황제 직속 기관 동창의 수장, 하지만 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성격은 아주 독하기로 유명했다. 오죽했으면 백면독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그렇네요. 올해 첫 눈이군요."

손량언이 맞장구를 치며 소복자를 불렀다.

"이놈아, 뭘 꾸물거리고 있는 것이냐? 얼른 서장인께 우산 챙겨드리지 않고."

그제야 소복자는 정신이 들었는지 얼른 우산을 챙겨와 펼친 다음 서청잔에게 씌워주었다.

"대인,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필요 없다. 알아서 쓰고 가마."

서청잔이 우산을 받아 들고 밖을 향해 발을 내디디려던 찰나였다.

"서 장인...."

이때, 손량언이 조심스레 그를 불러 세웠다.

그러자 서청잔이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손 총관? 무슨 일이오?"

"별일은 아니온데... 그게 말이지요...."

손량언이 망설이다 강만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눈이 이렇게 오는데, 장인께서 한 번만 자비를 베푸셔서 폐하께 잘 말씀드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자 서청잔이 조용히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이만 일어나거라. 폐하께서도 들어가 쉬어도 된다고 하셨다."

"...."

그 말에 손량언과 소복자의 시선이 맞닿았다. 진작 알려줄 수 있었음에도, 일부러 말하지 않고 있었던 그의 심보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제야 강만여는 힘겹게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거의 얼어붙은 무릎, 제대로 균형잡기조차 쉽지 않아 비틀거렸다.

놀란 손량언과 소복자가 급히 몸을 뻗으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서청잔이 재빠르게 그녀를 붙잡아줬다.

"조심하거라. 출궁하기 전까진 폐하의 시중을 들어야 하지 않겠나?”

그는 일부러 과장되게 말한 뒤, 나지막이 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조금만 더 참아. 밤새 달려오고 있으니, 곧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걸야. 출궁하는 날, 마중 나온다고 했어.”

그 말을 들은 강만여는 정신이 번쩍 들며, 그녀의 얼어 있던 얼굴에도 살짝 혈색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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