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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Author: 적매화
김단과 명정대군과 아는 사이였다.

덕빈과 임씨 부인은 오랜 친우였기에 어릴 적부터 두 여인의 아이들은 함께 놀면서 컸다. 하지만 신분이 고귀했던 명정대군과 아무리 친하게 지냈다고 할지 언정, 그들 사이에는 높고 낮음이 존재하고 거리감이 있었다.

훗날 학업에 열중해야 했던 명정대군은 궐밖으로 나오는 빈도수가 점점 줄었고 그들의 만남도 줄어들었다.

그녀는 세답방에서 명정대군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다만 무수리의 신분이었던 그녀는 많은 나인들 뒤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인사밖에 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대군도 그녀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덕빈의 옆에 명정대군이 앉아 있었다.

정갈하게 옷을 갖춰 입은 명정대군은 우아했다. 워낙 키가 컸던 탓에 앉은 키도 덕빈보다 훨씬 컸다.

이목구비가 뚜렷했던 명정대군은 주상전하를 닮았다. 눈매는 덕빈을 닮아 온화하면서 부드러웠다.

그는 연민이 어린 시선으로 김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 김단은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일어나시오.”

덕빈은 바닥에 엎드려 인사하는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낭자의 모친께서 어제 서신을 도내왔다오. 이제 와서 그런 얘기를 꺼낸 것이 늦은 감은 있구려. 내 미리 알았더라면 그날 낭자가 왔을 때 좀 더 이야기를 나눠을텐데.”

김단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남들 눈에는 부끄러워 아무 말도 못 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사실 그녀는 할 말이 없었다.

김단에게 인정을 베푸는 덕빈의 모습에 임씨 부인은 기분이 좋았다.

김단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명정대군에게 임씨 부인이 화색을 띠며 말했다.

“대군자가께서 점점 준수해지고 비범해지십니다.”

명정대군은 임씨 부인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장모의 농이 지나치군.”

장모라는 호칭에 임씨 부인은 그들의 관계가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덕빈과 임씨 부인은 눈을 마주쳤고 둘 사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오갔다.

그러나 김단은 이해되지 않았다.

덕빈은 그녀가 진산군의 수양딸인 것을 알고 있다.

세답방에서 3년 간 무수리로 지낸 미천한 여인이었다.

명정대군처럼 고귀한 신분을 가진 아드님은 고귀한 신분의 여인과 혼인하는 게 옳았다.

그럼에도 자신과 혼인하게 하는 거로 보아 다른 꿍꿍이가 있어 보였다.

덕빈은 명정대군에게 눈짓했다.

“대군, 낭자와 어화원 산책이라도 다녀오시지요.”

단둘이 있을 기회를 마련해주는 것 같았다.

명정대군은 김단에게 나가자는 손짓을 했다.

김단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명정대군은 그녀의 앞에, 그녀는 명정대군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적당한 거리를 가지고 걸었고 둘 사이에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어화원은 일 년 사시절 꽃이 만개했는데 지금 같은 겨울에는 매화가 가득 피었다.

매화나무 앞에 멈춰 선 명정대군은 손을 뻗어 매화 한 송이를 따 그녀에게 건넸다.

“적색 매화를 좋아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사실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비록 매화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음에도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매화를 받았다.

“감읍하옵니다.”

“내게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되오. 석 달 뒤면 명정빈이 될 터인데.”

명정대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그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혼사가 이리 빨리 진행될 줄 몰랐다.

깜짝 놀란 그녀의 얼굴을 본 명정대군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정식으로 나의 빈이 되거든 자연스레 봉지로 돌아가야 하오. 석 달 뒤 우린 탐라성으로 갈 것이오.”

김단은 얼이 빠져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오늘 궐에 들어 낭군님을 뵌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리 빨리 혼사가 진행될 줄은 몰랐다.

명정대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걱정 마시오. 탐라성은 제주에 위치한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오. 겨울에도 한양처럼 춥지 않지. 그곳에 가면 낭자의 동상도 재발하진 않을 것이오.”

손에 동상을 입은 것조차 알아차린 명정대군의 세심함에 그녀는 살짝 놀랐다.

김단은 황급히 옷소매에 손을 감추었다.

명정대군은 신경 쓰지 않는 듯 말을 이었다.

“탐라성은 명주실을 대량으로 생산하오. 거기 가면 명주실로 만든 옷들을 수도 없이 입을 것이오. 또 모필도 아주 유명한 곳이지. 낭자의 필력이 뛰어나다고 들었소. 그곳에 가면 분명 좋아할 것이오.”

명정대군은 장터의 물건팔이처럼 그녀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명정대군에 그녀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소녀 대군자가께 감히 여쬐도 되겠는지요?”

명정대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으시오.”

“대군자가께서 인품이 훌륭하시고 영민하십니다. 게다가 신분도 고귀하시지요. 소녀보다 신분이 고귀하고 뛰어난 아가씨들을 놔두고 어찌하여 미천한 소녀와 혼인하시려 하는지요?”

명정대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다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장모께서 제안한 것도 있지만, 때마침 본왕도 빈을 간택하고 있었던 참이었소.”

김단은 말없이 그의 눈을 응시했다.

정부인과 덕빈의 관계가 아무리 막역하다 할지언정 명정대군의 혼사 같은 대사를 사사로운 정으로 결정했을 리 없었다.

명정대군이라면 지금 당장 재상의 여식과도 혼인할 수 있는 신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천한 신분의 그녀와 혼인하려 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세답방에서 무수리로 일했던 그녀였다.

그녀는 고귀한 신분의 명정대군과 어울리지 않았다.

명정대군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기필코 낭자와 혼인해야 하는 연유를 말해야 한다면, 내 모친께서 낭자를 마음에 들어 하시오.”

명정대군의 답에 김단은 또 한 번 놀랐다.

그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날 낭자가 궐에 들어 옷을 바치고 간 뒤에 모친께서 낭자 이야기만 하더군. 낭자의 청에 따라 세답방 나인을 덕빈궁에 불러들였소. 솔직히 말해 본왕은 모친께서 타인의 일에 이리 관심을 가지신 걸 본 적이 없소.”

사실 덕빈궁에서 청소하고 있는 류 나인을 봤었다.

하여 덕빈마마에게 큰 고마움을 느꼈다.

명정대군이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고개를 들고 명정대군을 올려보던 김단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명정대군의 온화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내가 낭자를 연모하오.”

깜짝 놀란 김단은 고개를 쳐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명정대군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 사이에 거리가 너무나도 가까웠던 탓에 바짝 긴장한 그녀는 머리가 텅 비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분위기를 깬 것은 누군가의 서늘한 목소리였다.

“대군자가, 강녕하셨사옵니까.”

목소리의 주인은 소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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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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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정
제미어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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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ayzzz
너무 재밋엇어 눈을 떼지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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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지단무지
명정대군이 더 나은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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