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희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쉽지 않아. 이 근처 대형 쇼핑몰이랑 오피스텔은 전부 차우민 씨 소유야.”임정아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윤정희는 곧장 덧붙였다.“차우민 씨는 심술궂고 밖에서 여자를 밝히는 걸로 유명해. 만약 정말 복수라도 하면 상황이 꽤 복잡해질 거야.”잠시 망설이던 윤정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만약 그쪽에서 네가 송지원 씨 부인이라는 걸 알게 되면 아마 겁먹을 텐데. 송지원 씨한테 알리는 게 어때...?”임정아는 고개를 저었다.“아니. 우리는 곧 이혼할 거야. 게다가 송지원 씨 마음은 이미 내게 없으니까 결혼 사실을 공개하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수년간 그는 외출할 때 결혼반지조차 끼지 않았고 만약 공개할 의지가 있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했을 것이다.이제 관계가 여기까지 온 마당에 그녀는 이혼 직전 그에게 기대거나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정희 언니, 정말 방법이 없는 걸까?”윤정희는 한참 생각하다가 눈빛이 번쩍였다.“있어. 차우민 씨 평소 행실이 워낙 안 좋아서 원한 산 사람이 많거든. 게다가 차우민 씨 라이벌 쪽이랑 나랑 좀 친해.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임정아의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정희 언니, 고마워. 원래 앞으로 2주만 더 일하고 좀 쉬려고 했는데...괜히 민폐 끼쳤네.”윤정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네 잘못이 아니야. 저런 놈은 빨리 손을 써야 해. 오늘 네가 아니었으면 내일 또 다른 피해자가 나왔을 거야.”임정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우선 CCTV 영상부터 확보하고 만약 그 사람이 다시는 건드리지 않으면 그냥 넘기고... 만약 또 건드리면...”끝까지 말은 잇지 않았지만 윤정희는 그녀의 뜻을 충분히 알아챘다.임정아를 방으로 데려가며 물었다.“몸은 어때? 오전 내내 촬영했는데 배는 괜찮아?”임정아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여전히 차분하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오늘 일은 그리 힘들진 않았어. 방금 조금 놀랐을 뿐이야.”그녀는 조심스레 배를 쓰다듬으며 작게 말했다.“내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찔렀다.임정아는 거의 넘어질 뻔하며 당황해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몸을 뒤로 밀어냈다.“차 대표님, 자중하세요.”차우민은 술에 취해 혀가 꼬부라진 채로 임정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뭘 그렇게 튕기는 거예요? 여긴 아무도 없잖아요. 아까 촬영할 땐 그렇게 요염하게 굴더니 이제 와서 청순한 척이에요?”임정아는 메스꺼움을 느끼며 서둘러 버튼을 누르려 했다.그러자 차우민이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어 엘리베이터 문에서 떼어내고는 술 냄새를 뿜으며 말했다.“뭘 그렇게 순진한 척이에요? 원래 널 송지원 씨한테 보내려 했는데 송지원 씨가 널 마음에 안 들어 해서... 이번 기회에 나랑 함께하면 어때요?”임정아는 그를 힘껏 밀치며 큰 소리로 말했다.“차우민 씨, 더러운 손 치우세요. 그렇지 않으면 경찰 부를 거예요.”차우민은 비웃었다.“지금 밀당하는 거죠? 나랑 같이 있으면 내가 가진 거 다 줄게요. 어때요?”그러면서 그녀의 손을 잡으려 하자 임정아는 그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꺼져.”차우민은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곧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졌다.그는 욕설을 퍼부으며 덮쳐왔다.“이 년아, 뭘 그렇게 순진한 척이야? 몰래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랑 잤는데 나한텐 안 돼?”그러면서 임정아의 얼굴을 잡으려 하자 임정아는 놀라고 분노한 나머지 그의 머리를 잡아 엘리베이터 벽에 세게 부딪히게 했고 다른 손으로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재빨리 눌렀다.하지만 그녀는 여자였고 비록 그를 밀쳤지만 힘이 부족해 큰 타격을 입히진 못했다.그 순간 차우민은 완전히 이성을 잃었고 그는 미친 듯이 임정아의 목을 조르며 소리쳤다.“이 년아 감히 날 때려? 오늘 널 반드시 가지겠어. 청순한 척은 이제 그만해.”임정아는 급히 그의 사타구니를 세차게 걷어찼고 차우민은 비명을 지르며 아랫배를 움켜쥐고 바닥에 주저앉았다.임정아는 그 틈을 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임정아는 차우민을 향해 분노에 차 달려들어 발길질하고 가방으로 머리를 여러 차례 내리쳤다.차우민은
송지원은 그를 무시하듯 말했다.“일이 바빠서 너희 수다 들을 시간이 없어.”하지만 한이준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멀리 있는 임정아를 흘끗 바라보고는 웃으며 말했다.“연수가 보낸 임신 검진 사진 보고 자극받았지? 형수한테 아직도 차갑게 무시당하나 보네?”그는 혀를 차며 덧붙였다.“넌 맨날 일만 하잖아. 내가 형수라도 널 무시했겠다. 너를 위해 애를 낳는다고? 꿈도 꾸지 마.”그러자 옆에 있던 임혜린이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속삭였다.“그 버릇없는 말투 좀 고칠 수 없어요?”한이준은 바로 말을 돌렸다.“됐어. 그 얘기는 그만하자. 아까 네가 여기서 임 대스타 봤다고 했지? 인사하러 가 봐.”임혜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쪽으로 갔다.그때 한민정이 신이 나서 다가왔고 눈빛에 별이 반짝였다.매우 친근하게 부르며 말했다.“오빠.”한이준은 뒤돌아보며 턱이 송곳처럼 뾰족한 여자가 서 있는 걸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누구세요? 저 부른 건가요?”한민정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지만 한이준이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자 순간 당황했으나 꾹 참고 말했다.“오빠, 저 민정이에요. 한민정. 한씨 가문 사람이고 당신 둘째 삼촌... 둘째 삼촌의 동생 한소운의 여동생이에요...”한이준이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짓자 그녀는 서둘러 덧붙였다.“작년 설날에 한씨 가문 가족 모임에도 참석했어요.”“응.”한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비꼬듯 웃었다.“내 둘째 삼촌의 배다른 서자 동생이 클럽에서 만난 여자한테서 낳은 딸?”한민정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고 입술을 깨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오빠... 저도 한씨 가문 사람인데 그런 말은 밖에서는 하지 마세요.”한이준은 비스듬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나를 오빠라고 부르지 마. 첫째 나랑 삼촌은 이미 분가했고 삼촌은 자기 사업을 따로 하고 있어. 둘째 우리 가족은 부인이 낳은 자녀만 가족으로 인정해. 사생아나 사생아 딸은 재산을 상속받을 수도 없고 족보에도 오를 수 없어. 그러니까 네
한민정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경수 씨, 그런 소리 하면 안 돼. 송지원 씨한테 들리겠어.”조수는 다가와 속삭였다.“방금 차민우 씨께서 전화하셔서 저녁 식사 자리가 있다고 예쁘게 차려입고 화려하게 꾸미고 오라고 하셨어요. 중요한 인물들이 많이 온다고...”한민정은 차우민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송지원에게 아첨하는 듯 무언가를 이야기하면서도 가끔 임정아를 흘끗 바라보았다.예전에는 그가 그렇게 느끼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막상 송지원과 비교해 보니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앞으로의 기회를 위해 한민정은 역겨운 감정을 억눌렀다.“알았어.”조수는 다시 말했다.“그리고 한 가지 더 임정아 씨가 입은 드레스가 원래 민정 씨를 위해 준비된 거라고 들었어요. 그런데 어쩌다 보니 임정아 씨가 입게 됐더라고요.”한민정은 화가 나서 임정아를 노려보았다.“저 나쁜 년 내 주연 자리도 뺏더니 이제는 드레스까지 뺏어? 오빠는 왜 맨날 좋은 것만 임정아한테 주는 거야? 정말 짜증 나. 아, 맞다. 임정아가 병원에서 나오는 사진 찍어서 인터넷에 올려. 임신했다느니 첩이라는 소문도 퍼뜨리고 내가 보육원에 옷 기증하는 사진 예쁘게 보정해서 올려. 좋은 댓글도 많이 달아주고 악플러들 잔뜩 고용해.”...한편 임정아는 미소를 꾸짖었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무슨 커플을 응원해? 누가 그거 인터넷에 올리기라도 하면 또 무슨 말들이 나올지 몰라. 정말 심심하구나. 가서 내 화장품이나 정리해 줘.”그때 예천우가 밀크티를 들고 왔다.그는 사람들에게 밀크티를 나눠주고 임정아에게는 잘라 놓은 과일 상자를 건네며 웃었다.“임 선배님이 다이어트 중이신 거 알아서 밀크티는 안 가져왔어요. 이건 저칼로리 과일이에요. 드세요.”며칠 동안 함께 지내며 두 사람은 점점 더 친해졌고 임정아는 자신과 공통점이 많은 이 젊은 남자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임정아는 웃으며 상자를 받아 열어 보았다.상자 안에는 여러 과일 조각이 담겨 있었고 그중 몇
옆에 있던 사진작가는 빨대를 입에 문 채 임정아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송지원 씨, 혹시 우리 정아 언니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에요? 아까부터 몇 번이나 이쪽을 힐끗거리던데요.”미소는 기뻐하며 말했다.“역시 우리 정아 언니는 매력이 대단해요. 송지원 씨도 완전히 사로잡았네요.”그때 옆에 있던 조연 배우의 조수가 시샘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분명 우리는 한민정 씨를 보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주연 배우는 아니지만 여기서 가장 젊고 아름다운 배우니까요.”미소는 한민정을 흘끗 보며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무슨 가장 젊고 아름다운 배우요? 스물여섯 살이나 되었으면서 밖에서는 열아홉 살이라고 말하고 다니고 성형도 너무 많이 해서 얼굴이 변형되었어요. 한 씨의 사촌이라는 타이틀이 없었다면 이 드라마에서 조연 역할조차 맡을 수 없었을 거예요. 자신의 실력이 어떤지 좀 생각해 보세요. 우리 정아 언니를 깔보려고 하다니요?”조수의 표정이 변했다.“무슨 말이에요?”사진작가는 서둘러 중재했다.“두 분 다 아름다운 배우들이에요. 잠시 후에 아름다운 사진을 두 장씩 찍어 드릴 테니 밀크티를 마시세요.”“그런데 송지원 씨는 결혼하셨을까요?”“결혼하셨겠죠. 송지원 씨도 서른 살이 넘으셨을 테니까요.”“이렇게 안정적이고 멋지고 잘생긴 남자가 결혼했다니 송지원 씨의 아내가 정말 부럽네요. 어떤 미인일까요?”“송지원 씨 집안은 정계 출신이라고 들었어요. 아내도 어느 집안의 딸일 테니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일 거예요.”“송지원 씨, 정말 멋있어요. TV나 뉴스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젊어 보이고 카리스마 넘쳐요.”“결혼반지를 안 꼈네요. 아마 결혼 안 하셨을 거예요.”“결혼 안 했대요. 우리 정아 언니도 싱글이잖아요. 둘이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빨리 말해 봐요. 송지원 씨 결혼하셨어요? 안 하셨으면 난 이제부터 둘을 응원할 거예요.”“내가 어떻게 알아요. 손 놓으세요. 아파요.”그때 임정아가 다가와 그들의 마지막 대화를 듣게 되었고 송지원
송지원은 매끄러운 재질의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었고 그 품질은 뛰어나 보였다. 잘 다듬어진 재단은 그의 고상한 체형을 감싸며 겸손함과 세련됨이 동시에 느껴졌다.안에는 짙은 회색 셔츠를 입고 있었고 단정한 칼라에는 주름 하나 없이 그의 완벽한 이목구비와 잘 어우러졌다.그는 네다섯 명의 중년 남성들 사이에서 침착하고 품위 있게 서 있었으며 머리숱이 적고 몸이 불룩한 이들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기품과 카리스마를 뿜어내고 있었다.그의 시선은 임정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깊고 진중한 눈빛 속에는 감탄과 복잡한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두 초 뒤 송지원은 시선을 자연스럽게 거두고는 멀리 있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방금 말했던 사람은 해성 광장의 대표 차우민이었고 약간 벗겨진 머리와 불룩한 배가 인상적인 중년 남자였다.임정아는 의도적으로 송지원의 시선을 피하며 차우민에게 공손히 인사했다.“차 대표님, 후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차우민은 임정아의 아름다운 얼굴과 우아한 목선을 훑어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오늘 촬영에 임정아 씨가 참여한다고 해서 특별히 이 드레스를 준비했습니다. 정말 잘 어울리네요.”그의 말이 떨어지자 주변 공기가 순간 차가워졌다. 하지만 에어컨이 잘 나와서인지 그는 별로 개의치 않고 다시 웃으며 말했다.“송지원 씨는 어떠세요?”이 드레스는 그가 백만 원을 들여 준비한 것이었다. 허투루 넘어가게 둘 수 없었다.해성 광장은 이번 임정아의 촬영을 위해 장소와 의상을 제공했으니 그녀가 그저 공짜로 가져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임정아가 돈을 쉽게 벌고 싶어 한다는 소문을 들은 터라 오늘 밤 송지원과 함께 술자리를 마련할 생각이었다. 송지원이 그녀에게 관심이 있다면 이 선물은 좋은 기회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손해는 없을 것 같았다.솔직히 그는 많은 여자를 겪어봤지만 임정아 같은 수준의 여자는 처음이었다.이전에는 TV 화면으로만 보았는데 실제로 마주하니 그 아름다움은 화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