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9화

Author: 윤지
시계를 들여다보니 마침 10시 정각이었다.

유남준은 그녀에게 전화해 도착했는지 물어보려 했는데 멀지 않은 곳의 나무 아래에 박민정이 어두운 톤의 옷을 입고 서 있었다.

주르륵 내리는 가랑비 속에 앙상하게 마른 그녀는 바람이 불면 쓰러질 것 같았다.

금방 유남준과 결혼했을 때, 박민정은 밝고 긍정적이었다. 지금처럼 어두운 표정과 뼈만 남은 초라한 모습이 아니라.

그는 우산을 들고 박민정에게 걸어갔다.

그녀는 뒤늦게 유남준을 발견했다.

3년 동안 유남준은 큰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멋있고 카리스마 넘치며 전보다 조금 더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3년이란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또 자신의 일생을 다 써버린 것만 같았다.

유남준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어서 사과하길 기다렸다.

이젠 그만할 때도 됐지!

하지만 정작 그녀의 말은 정반대였다.

“남준 씨 일하는 데 방해되겠어요. 얼른 들어가요.”

유남준은 안색이 확 어두워지고 표정이 얼어붙었다.

“너 후회하지 마.”

그는 이 한마디만 내던지고 가정법원으로 들어갔다.

박민정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씁쓸했다.

후회?

그런 건 모르겠고 이젠 지쳐버렸다.

한 사람이 떠날 결심을 했을 땐 아마 일말의 희망도 얻지 못하고 마음속에 쌓인 실망이 너무 커 더는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겠지.

이혼 절차가 진행되고 직원이 두 사람에게 정말 이혼하기로 결심했냐고 물었을 때 박민정은 아주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그녀의 확고한 눈빛에 유남준은 가슴이 움찔거렸다.

수속을 마치고 한 달이란 숙려기간이 있어 두 사람은 한 달 뒤에 또 이리로 와야 한다.

만약 이 한 달 동안 오지 않으면 이혼 신청도 자동으로 폐지된다.

가정법원을 나선 후 박민정이 유독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그럼 다음 달에 봐요. 잘 있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곧게 빗속으로 뛰쳐들어가 택시를 잡고 떠나가 버렸다.

유남준은 멀어져가는 차를 바라보며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이건 아마도 해탈이겠지.

더는 그녀와 얽힐 필요도 없고 장애인 아내와 산다는 사람들의 야유도 들을 필요가 없으니까.

이때 마침 김인우가 그에게 전화했다.

“남준아, 다 했어?”

“응.”

“이혼 숙려기간이 한 달이라며? 너 절대 그 귀머거리한테 마음 약해지면 안 돼. 걔 분명 꼼수 부릴 거야.”

일리 있는 말이다.

박민정이 십여 년을 유남준에게 집착하다가 갑자기 손을 놓는다는 게 말이 돼?

...

택시 안에서.

박민정은 차창에 기대 도어 너머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멍하니 넋 놓았다.

택시기사가 백미러로 그녀를 힐긋 바라봤는데 귓가에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화들짝 놀란 기사는 재빨리 그녀를 불렀다.

“이봐요, 손님!!!”

그녀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기사는 냉큼 차를 세웠다.

‘아직 다 못 왔는데 왜 차 세웠지?’

박민정은 어리둥절한 눈길로 기사의 입 모양을 바라보다가 그제야 또 안 들린다는 걸 알아챘다.

“뭐라고요? 잘 안 들려요.”

기사는 휴대폰에 문자를 찍어서 그녀의 상황을 알려줬다.

천천히 귀를 만져보니 손끝에 따뜻한 촉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이미 적응한 듯 대답했다.

“괜찮아요, 자주 이래요.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녀는 난청 환자이지만 처음엔 이렇게 피를 흘리진 않았다.

계기는 바로 2년 전 한 파티 장소에서 유남준의 절친 김인우가 그녀를 수영장에 밀어 넣었고 수영할 줄 모르는 그녀는 고막이 부어올라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병원에 실어간 후 그녀는 이런 후유증이 남았다.

전에는 분명 치료가 잘 됐는데 요즘 들어 웬일인지 자꾸만 재발한다...

기사는 시름이 안 놓여 인근 병원으로 향했다.

박민정은 택시기사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홀로 병 보이러 들어갔다.

오늘 의사는 마침 그녀가 쭉 보였던 담당 의사였다.

“의사 선생님, 제가 요즘 기억력도 나빠지고 가끔 뭘 하고 있는지도 깜빡해요.”

그녀는 오늘 아침 모텔에서 깨어났을 때 또 한 번 블랙아웃이 왔다. 한참 후에야 오늘 유남준과 이혼하는 날이라는 게 생각났다.

이어서 그녀는 아침 일찍 가정법원에 도착해 유남준을 기다렸다.

또 깜빡할까 봐 그가 보낸 문자도 몇 번이고 확인했다.

의사는 박민정의 최근 진단서를 훑어보더니 걱정스러운 눈길로 말했다.

“민정 씨, 다른 검사도 받아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예를 들어 정신과 검사라던가.”

정신과라...

박민정은 의사의 건의대로 정신과 검사를 받았다.

진단서가 나왔는데 그녀는 우울증까지 있었다.

중증 우울증 환자의 경우 기억력도 어느 정도 저하된다고 한다.

모텔로 돌아온 그녀는 노트북과 펜을 꺼내 요즘 발생한 모든 일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걸 머리맡에 두면 아침에 깨자마자 볼 수 있으니까.

침대에 누워 휴식할 때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우울증 치료를 검색해보았는데 그중 이런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스스로 치유하도록 최선을 다하세요, 이 세상 그 누구도 당신을 구원할 수 없으니.」

박민정은 그 문장을 다 읽은 후 휴대폰을 끄고 눈을 감았다.

유남준과 이혼하는 일로 삶이 아주 시끌벅적해졌다.

그날 밤 한수민이 수없이 전화했지만 그녀는 한 통도 못 들었다.

다음날 깨고 보니 엄마의 문자가 수두룩했다.

「너 지금 어디야?」

「네가 뭐라도 된 줄 아니? 이혼을 해도 남준이가 먼저 말을 꺼내게 했어야지!」

「집안 말아먹는 년! 애초에 결혼할 때 네 아빠가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인제 와서 이혼하면 우리 집안 망하라는 거야 뭐야?!」

그녀는 이런 문자들에 일찌감치 적응했다.

그리고 담담하게 답장을 보냈다.

「엄마, 우리 앞으로 자력갱생해요, 남에게 너무 의지하지 말고요.」

곧이어 한수민의 문자가 도착했다.

「양심도 없는 년! 애초에 널 낳지 말았어야 했어!」

박민정은 더이상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고 생각했다.

‘한 달 후에 남준 씨랑 이혼 절차 마무리하고 진주시를 떠나서 새 출발 해야지.’

...

그 뒤로 며칠 동안 그녀의 몸은 나날이 악화됐다.

종종 청력을 잃었고 가끔은 한참이 지나야 다시 청력을 회복한다.

기억력도 마찬가지로 쇠퇴해지고 있다.

어제 밖에서 밥 먹을 때 그녀는 심지어 모텔로 돌아오는 길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행히 휴대폰을 챙겨서 내비게이션 앱으로 모텔까지 찾아갔다.

청력은 고칠 수 없지만 우울증은 가망이 있다.

최대한 즐거운 마음가짐으로, 분주하게 돌아치면 된다.

인터넷으로 자원봉사를 신청하여 독거노인과 고아들을 돌보는 일을 했는데 그들이 도움받는 모습에 그녀도 삶의 의미를 되찾은 것 같았다.

며칠 후 어느 날 아침.

박민정은 늘 하던 대로 깨자마자 옆에 놓아둔 노트북을 확인하더니 곧바로 보육원으로 갈 채비를 했다.

휴대폰을 챙겨 들었을 때 읽지 않은 문자가 수두룩했다.

엄마, 남동생, 그리고 이지원까지...

맨 처음엔 엄마 한수민의 문자였다.

「네 소원대로 우리 집안 망했어.」

그다음은 동생 박민호의 푸념이다.

「계속 피해 있어. 누나처럼 무자비하고 나약한 사람은 없다고.」

이지원의 비아냥대는 문자도 빠질 수 없다.

「민정 씨, 참 유감스럽네요. 하지만 바움 그룹은 남준 오빠 손에 있어야 더 잘 생존해나갈 수 있어요.」

「박씨 일가에서 한때 나를 서포트해준 걸 봐서 뭐 도울 거 있으면 도울게요.」

박민정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 채 바탕화면으로 돌아갔는데 상단에 자동으로 인기 기사가 떴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Comments (1)
goodnovel comment avatar
hyoungum kim
눈물날꺼같아 있을땐 사랑인지 깨닫지 못하는거지?
VIEW ALL COMMENTS

Latest chapter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2138화

    유남우는 휴대폰을 열어 통화 기록을 확인했다. 취했을 때 직원이 홍주영에게 걸었던 통화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음속에서 복잡한 감정들이 서로 뒤엉켜 혼란스럽고 알 수 없는 충동마저 느껴졌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결국 그는 떨리는 손으로 홍주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같은 시각, 홍주영은 홀로 회사에 남아 있었다. 하민재는 그녀를 회사에 내려준 뒤 다른 일을 보러 떠난 상태였다. 휴대폰 화면에 나타난 유남우의 이름을 보고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마침내 전화를 받았다.“유 대표님, 무슨 일 있으세요?”그녀의 낯선 호칭에 유남우는 순간 멍해졌다.“오늘 나를 병원에 데려다준 게 너였어?”그가 조심스럽게 묻자 홍주영은 숨기지 않고 말했다.“저랑 민재 씨예요. 민재 씨가 없었더라면 혼자서 대표님을 옮기기 어려웠을 거예요.”그녀의 말에서 유남우는 그녀가 하민재와의 결혼을 자신에게 상기시키려 한다는 걸 느꼈다.“하민재 씨에게 고맙다고 전해줘.”“네, 대표님. 민재 씨도 그랬어요. 동료끼리 돕는 게 당연한 거라고요.”그녀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분명한 거리감이 느껴졌다.‘또 하민재 얘기네.’유남우는 가슴이 답답해졌다.“주영아, 나 할 말이 있어.”“네?”홍주영은 이유도 모른 채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유남우는 한참을 침묵하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요즘 깨달았어. 내 삶에 네가 없으면 안 된다는 걸 말이야. 내 곁으로 돌아와 줄 수 있어?”그의 말은 홍주영의 잔잔했던 마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그녀의 심장이 순간적으로 조여왔다.“저... 이미 새로운 회사에서 잘 적응해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어요...”“그런 뜻이 아니야.”유남우가 급히 그녀의 말을 끊었다.“네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아.”그 한마디에 홍주영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내 마음을 알고 있었던 거야? 알고도 그동안 모른 척했던 걸까?’자신의 짝사랑을 들켜버린 그녀는 숨이 막혀왔다.침묵이 길어지자 유남우가 다시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다시 너랑 잘 지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2137화

    유남우의 목울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는 애써 눈을 뜨고 홍주영을 바라보다 그녀의 모습이 흐릿하게 시야에 들어오자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홍주영이 그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라 가까이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어디 불편하세요? 물이라도 드릴까요? 곧 병원에 도착하니까 조금만 참아요.”그녀의 목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유남우의 손이 그녀의 뺨에 가볍게 닿았다.유남우의 목소리가 허공을 맴돌았다.“홍주영? 내가 꿈꾸는 건가...”홍주영은 얼굴이 달아올라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있었고 옆에 있던 하민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지며 이내 유남우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무슨 짓이에요?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유남우의 손이 힘없이 떨어지며 다시 눈이 감겼다. 홍주영은 미안한 마음에 하민재를 돌아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요...”하민재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애써 불편한 감정을 숨겼다.“유 대표가 멋대로 그런 거니까 주영 씨가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우리 병원에 데려다주고 바로 돌아가죠.”“네, 그렇게 해요.”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두 사람은 유남우를 입원시켰다.하민재가 수속을 마치러 간 사이, 홍주영은 병실에서 유남우를 잠시 바라보다가 나가려던 그때 침대 위의 유남우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가지 마...”몽롱한 유남우의 목소리에 홍주영은 당황해서 그의 손을 빼내려 애썼다.“정신 드세요?”남자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은 채 계속 중얼거렸다.“가지 마...”홍주영은 순간 얼어붙었다.그녀는 멍하니 한참을 서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그의 손을 떼어냈다.“푹 쉬세요. 저는 이제 가볼게요.”유남우는 다시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힘이 빠져 눈도 뜰 수 없었고 손을 들어 올릴 힘조차 없었다.홍주영은 서둘러 병실을 빠져나왔다. 문을 닫는 순간 그녀의 마음은 혼란스럽고 복잡했다.조금 전 그가 부른 자신의 이름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입원 절차를 마친 하민재가 다가와 물었다.“별일 없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2136화

    홍주영과 하민재가 도착하자마자 직원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드디어 오셨네요! 이 술주정뱅이가 가게 술을 얼마나 깨부쉈는지 아세요? 데려가기 전에 배상부터 하세요.”홍주영은 직원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 유남우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옷은 흐트러졌고 얼굴은 수염이 듬성듬성 난 채 온몸에선 진한 술 냄새가 진동했다.그는 소파 위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고 주변은 깨진 술병 조각들로 어지러웠다.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홍주영이 직원에게 사과하려던 순간, 하민재가 냉정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가게 관리가 이렇게 허술합니까? 이 사람이 여기서 더 큰 사고라도 당했으면 당신들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겁니다.”“본인이 술을 마시다 저렇게 된 건데, 우리랑 무슨 상관이에요?”직원은 개의치 않는 듯 무심하게 대꾸했다.하민재는 그런 직원을 잠시 빤히 바라보다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멍청한 건 어쩔 수 없다지만 최소한 선하게는 살아야죠. 사례를 좀 찾아보세요. 당신과 상관이 있는지 금방 알게 될 겁니다.”하민재는 더 이상 직원과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듯, 홍주영을 향해 말했다.“우선 상태부터 확인하죠.”“네.”두 사람은 유남우에게 다가갔다. 그는 반쯤 누운 상태로 낮게 기침하며 괴로워하고 있었다.“도련...”홍주영은 익숙한 호칭을 입 밖에 내려다 하민재의 눈치를 보고 말을 급히 바꿨다. “유 대표님, 정신 좀 차리세요.”유남우는 머리가 터질 듯 아파 괴로워하며 뒤척이다 이내 다시 잠들었다. 홍주영이 불안한 눈으로 하민재를 올려다봤다.“이제 어떻게 하죠?”“어쩔 수 없죠.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가야겠어요.”하민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민재 씨까지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요.”홍주영의 말에 하민재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우리 사이에 번거롭고 말고가 어딨어요. 신경 쓰지 말아요.”그의 말이 오히려 홍주영의 미안한 마음을 더욱 키웠다. 만약 자신이 하민재였다면, 자신이 짝사랑하는 사람을 이렇게까지 도와주고 위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2135화

    홍주영은 쉽게 믿기지 않았다.유남우는 원래 체질상 술을 거의 못 마셨고 그녀가 수년간 그를 모시는 동안 술에 취한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그런데 지금, 전화 너머의 남자 말투로 볼 때 유남우는 꽤 심하게 취해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옆자리에 앉아 있는 하민재를 바라보자 홍주영의 마음은 복잡해졌다.이젠 그녀는 결혼한 몸이었다. 마음도 다잡았고 유남우와의 인연도 정리했다.절대로 하민재를 배신할 수 없었다.“죄송하지만, 지금은 곤란하네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병원에 데려다주실 수 있을까요? 깨어나면 꼭 감사 인사 드릴게요.”홍주영은 조심스레, 그러나 정중하게 말했다. 그러자 상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지금 농담하시는 겁니까? 친구인 당신도 귀찮아하는 사람을 제가 왜 책임져야 하죠? 전 모르는 사람인데다 일도 해야 합니다.”그리고는 날카롭게 덧붙였다.“지금 안 오시면, 저도 더는 책임 못 집니다.”그 말을 끝으로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홍주영의 얼굴엔 걱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 모습을 본 하민재가 조심스레 물었다.“무슨 일인데 그래요?”“도련님이 술에 취하셨대요.”홍주영은 사실대로 답했고 하민재의 이마엔 주름이 잡혔다.“근데 왜 주영 씨한테 전화를 해요?”“도련님이 직접 건 게 아니라, 술집 직원이 건 것 같아요. 많이 취했다고 하더라고요.”그제야 하민재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그런 건 비서에게 맡기면 되잖아요.”“맞아요. 제가 지금 바로 연락해볼게요.”홍주영은 자신이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 생각을 미처 못 했다는 걸 깨달았다.하지만 한참을 시도하다 간신히 통화가 연결되었고 상대방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주영 씨, 저 벌써 사장님한테 해고당했고, 지금은 진주시에 있어요. 아마 직접 가셔야 할 거예요. 사장님 성격 아시잖아요. 지금껏 어떻게 모셨는지, 진짜 존경스럽더라고요.”홍주영은 믿기지 않아 다시 물었다.“그럼 지금 도련님 비서 연락처는요?”“비서요? 그런 거 없어요. 들은 바로는... 사장님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2134화

    “민정 씨.”홍주영이 먼저 인사를 건넸고,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아이를 데리고 다가갔다.아이들은 공손하게 인사했다.“민재 아저씨, 주영 아줌마.”“그래.”늘 무표정하던 홍주영도 오늘은 살짝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하민재 역시 웃으며 말했다.“얼마 안 본 사이에 너희 둘 다 훌쩍 자랐구나.”예전 해외에서 연지석과 함께 있을 때 하민재는 이 아이들을 몇 번 본 적이 있었기에 제법 익숙했고 아이들도 그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섰다.“아저씨는 아기 언제 가질 거예요? 오늘 우리 엄마랑 병원 갔다가 하랑 이모가 낳은 아기 봤는데요, 너무 귀여웠어요!”박윤우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아기’라는 말이 나오자 하민재와 홍주영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하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듯 억지로 웃어 보였다.하민재는 헛기침을 두 번 하더니 말했다.“그런 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지. 조급해하면 안 되지.”“아, 네네.”박윤우는 무언가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아저씨, 주영 아줌마랑 파이팅 하세요. 아기 생기면 꼭 보여주세요!”“응, 약속할게.”짧은 대화가 오간 뒤, 하민재는 왠지 모를 압박감을 느꼈다.박민정은 두 사람에게 물었다.“여긴 무슨 일로 왔어요?”“근처에 볼일이 좀 있어서요.”박민정은 더 묻지 않고 간단한 인사만 나눈 후, 각자 갈 길을 갔다.⋯홍주영은 하민재와 함께 차에 올랐지만 방금 들은 박윤우의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그녀와 하민재는 결혼한 이후 지금껏 단 한 번도 부부로서의 관계를 가진 적이 없었다.그것은 하민재의 문제가 아니라 계속해서 주저하게 되는 건 그녀 자신이었다.하민재는 차창 밖, 점점 멀어져 가는 윤우와 예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애들은 참 귀엽네.”그의 목소리엔 따뜻한 바람 같은 기대감이 스며 있었다.그 모습을 본 홍주영은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미안해요.”하민재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갑자기 왜 사과해요?”홍주영은 두 손을 꼭 쥐었다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2133화

    조하랑은 박윤우를 일부러 놀렸다.“윤우야, 너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너희 엄마랑 나는 거의 친자매나 마찬가지잖아. 예전엔 다들 부모님이 정해준 사람과 중매로 결혼했단다. TV에서도 자주 봤잖아?”그녀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이번에 딸을 못 낳은 건 아쉽지만, 다음엔 꼭 예쁜 딸 낳을 거야. 그러면 우리 딸 너한테 시집보내면 되겠지? 넌 착하니까 분명 우리 딸한테도 잘해줄 거야. 그치?”박윤우는 박예찬보다 훨씬 속내가 잘 드러나는 편이라, 조하랑이 ‘정말 딸을 낳겠다’는 말에 순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하랑 이모. 저, 저 결혼 안 할지도 몰라요...”결혼 자체를 거부하고 싶을 만큼 겁을 먹은 듯한 눈빛이었다.그 모습을 본 박민정도 장난을 거들었다.“근데 너 전에 다혜 예쁘다고 했잖아? 다혜 같은 애랑 결혼하면 진짜 좋겠다고.”“어머, 어머. 좋아하는 애가 있었구나?”조하랑은 일부러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어쩐지 우리 딸은 싫다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구나~”박윤우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아, 아니에요! 그런 뜻 아니에요!”“그럼 이모가 딸 낳을 때까지 기다려. 생기면 괴롭히면 안 돼. 알았지?”“...네...”박윤우는 울며 겨자 먹기로 대답했다.인생을 포기한 듯한 표정까지 짓자 조하랑과 박민정도 더는 놀리지 않았다.한편, 그 옆에서 가만히 있던 김인우는 혼자 생각에 잠겼다.‘아들도 생겼겠다, 다음에 딸까지 생기면 더 바랄 게 없겠지.’아들과 딸을 다 갖게 된다면, 그보다 완벽한 게 또 있을까.유남준은 아들만 있고, 방성원은 딸만 있다. 그런데 자기는 둘 다? 이건 정말 운이 좋은 거다.그가 멍하니 생각에 잠긴 사이, 조하랑과 박민정은 화제를 바꿔 이야기를 이어갔다.“민정아, 다혜는 요즘 어때?”“잘 지내. 연서 씨가 워낙 잘 챙겨줘서. 이젠 살도 오르고 예전보다 훨씬 자주 웃어.”박민정은 처음 유다혜를 봤던 날을 떠올렸다.그땐 병원에 누워 있었고 두 눈엔 생기가 없었으며 작은 몸은 마치 ‘나는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