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6화

Author: 최은솔
나정이 진남군 관저로 돌아온 것은 해가 서쪽 기슭에 기울 무렵이었다. 먼저 조모께 문안인사를 드린 뒤 본가의 안채로 향했다. 그곳에는 나정의 어머니인 백씨 마님이 있었다. 나씨 부인은 머리에 청록빛 비취 장식을 단 비녀를 꽂고 있었는데 세월이 지나도 그녀의 풍채는 여전했고 손끝 하나 흐트러짐 없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항상 기품 있는 웃음이 머물러 있었으나 그 미소 뒤에는 늘 그렇듯 날카로운 가시가 숨어 있었다.

“정아, 자꾸 궁궐에 들어가 대비마마를 귀찮게 해선 아니 된다. 한두 번이야 그렇다 쳐도 너무 잦으면 마마의 미움을 사게 될 수도 있어.”

나정은 눈을 내리깔며 잔잔하게 웃었다.

“대비마마께서는 오히려 기뻐하셨습니다. 오늘은 중전마마도 뵈었는데 자주 들러 대비마마를 즐겁게 해달라고 부탁하시더군요.”

백씨 마님의 눈빛이 짧게 흔들렸다. 그 속에는 놀라움과 얕은 부러움, 그리고 감춰지지 않는 질투가 어른거렸다. 그러나 기뻐하는 기색은 단 한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전생의 나정은 어머니의 이런 반응을 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십여 해를 귀신으로 떠돈 끝에야 부모도 자기 자식을 싫어할 수 있다는 비참한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때로는 그 미움이 원수보다 더 깊어 가슴속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정아, 너는 평범하고 말재주도 없는 아이다. 그래서 무심코 말실수라도 할까 걱정되는구나. 다음에는 이 어미도 함께 궁궐로 찾아가야겠어.”

나정은 잔잔히 웃었다. 그녀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열여덟 해를 혼자 정처없이 떠돌아다녀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긍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다음에요, 어머니.”

그러자 백씨 마님은 곧 화제를 돌렸다.

“문기당은 어떠냐?”

가볍게 내던진 말이었지만 불순한 의도는 분명했다. 전생에 나정은 문기당을 되찾기 위해 한바탕 소란을 벌였고 그 대가로 온갖 비난을 견뎌야 했다. 사람들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수식어를 그녀에게 갖다 붙이며 손가락질 해댔었다.

“아주 좋습니다.”

나정은 부드럽게 대꾸했다.

“문기당은 진남군 댁의 중심이지요. 그곳에 앉아 있으니 제가 칼에 맞아 세 해를 병상에 누워 보낸 시간이 모두 헛된 것은 아니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나씨 부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래, 푹 쉬거라.”

그날 저녁, 나씨 부인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장남 나신, 차남 나준 그리고 백씨 마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백지현이 식사 자리에 함께했다.

“또 정이 때문입니까?”

장남 나신이 조심스레 물었다. 나씨 부인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젖혔다.

“나는 그저, 그 아이가 지나치게 자기 공을 내세우는 게 걱정될 뿐이다. 언젠가 낭패를 당할까 충고해 준 것뿐인데 듣질 않으니.”

“어머님 말씀이 옳습니다.”

나신이 날을 세웠다.

“일생을 바쳐 공을 세워도 작위 하나 받지 못하는 자들이 수두룩합니다. 고작 칼 하나 맞은 게 뭐 대수라고 잘난 체하는 것인지.”

차남 나준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밥만 씹었다. 그러자 백지현이 나긋이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언니는 이제 막 돌아왔으니 당분간은 서먹서먹할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차차 괜찮아지실 겁니다. 아직은 마음이 불안하니 계속 공을 내세우는 것일 테죠.”

“나는 나정의 어미이니 마음이 쓰이는 수밖에.”

백씨 마님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튿날 아침, 궁궐에서 하사한 물품이 진남군 댁으로 도착했다. 대비마마의 뜻이 담긴 상이었고 전달 사령은 왕실의 위 내관이었다. 진남군 나승엽이 직접 마당까지 나갔으나 하사품은 오직 나정 한 사람에게 내려졌다는 사실에 온 집안이 술렁거렸다. 미혼 신분인 처녀가 직접 상을 받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씨 마님과 백지현을 포함한 집안 여인들이 하나둘 문기당으로 몰려들었다.

“정아, 오늘은 정말 경사 났구나. 네 덕분에 이 어미가 체면이 선다.”

백씨 마님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백지현은 눈부신 미소로 나정의 곁에 다가서며 축하해 주었다.

“정이 언니,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대비마마께서도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계시다니 정말 감동입니다.”

“대비마마의 자비 덕분이지.”

나정은 웃으며 받아쳤다.

“그 부광옥금, 어서 한 번 보여주거라. 예전에 멀리서 본 게 전부란다.”

백씨 부인이 들뜬 목소리로 말하자 나정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급할 것 없습니다. 다음에 제가 옷으로 지어 입고 나오면 그때 보세요.”

순간, 방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백씨 마님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 맞는 말이구나.”

그러고는 몸종 송희를 불렀다.

“창고에서 사람을 부르거라. 하사품을 정리해서 잘 넣어두어야겠구나.”

송희가 움직이려 하자 나정이 손을 들었다.

“어머니, 이 물건들은 대비마마께서 직접 제게 하사하신 것들입니다. 그러니 공중 창고로 들일 이유는 없지요. 제가 직접 보관하겠습니다.”

그러자 백씨 마님의 웃음이 눈에 띄게 식었다.

“정아, 문기당에서 독립하기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네가 쓰고 있는 모든 것들은 문기당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 혼인하지도 않은 네가 무슨 권한으로 따로 보관하겠다는 것이냐?”

그러더니 짐짓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설마 우리가 이걸 탐낸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나정은 고요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요. 어머니께서 그럴 분이 아니라는 건 저도 잘 압니다. 허나 대비마마께서 하사한 물건을 제 손에서 거둬들여 창고에 넣는다면 대비마마께서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혹여 어사대에서 진남군 댁 딸의 하사품을 빼앗았다고 장계를 올린다면 아버니의 체면이 말이 아닐 겁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나정의 말에 숨을 죽였다. 백씨 마님은 진남군의 정실부인이며 일품 부인이었지만 딸 앞에서는 그 어떤 결정권도 행사할 수 없었다. 그렇게 무너져내린 위엄은 하인들 사이에서 비웃음거리가 되기 충분했고 백씨 마님도 자신이 체면이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나정은 더 이상 예전처럼 순순히 뜻을 굽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안색이 딱딱하게 굳은 그녀는 한마디로 눌러내려 했으나 나정은 더 매섭게 밀어붙였다.

“어머니, 어사대의 장계는 별일 아닐지 모르지만 이 소문이 한양의 명문가들 귀에라도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대비마마의 하사품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게 진남군 관저라고 놀리며 비웃을 겁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집안이라는 오명이 붙는 순간 우리 모두에게 좋을 게 없지요.”

백씨 마님은 속이 서늘해졌다. 그녀가 그토록 애써 지켜온 이름이, 그리고 백지현을 위해 갈고닦아온 체면이, 모두 위태롭게 흔들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종국에 단 한마디도 받아치지 못했다.

“그래 정아. 네 말이 맞구나.”

그들은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나정은 백씨 마님이 이를 악문 채 돌아서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볼 근육이 경련 난 듯 움찔거렸고 입술 아래에서는 억눌린 울화가 솟구치는 것이 역력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정은 문득 전생을 떠올렸다. 그때 그녀는 어머니의 사랑을 갈망했고 백지현보다 열등하다 여겨지는 자신에게 실망했다.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찢기고 망가졌는지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백씨 마님은 무심한 말투로 그녀를 외면했다. 그녀의 고통 앞에서도 항상 미소만 유지하던 어머니가 이토록 일그러진 얼굴을 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속이 시원하거나 기쁜 것은 아니었다. 이번 생에 나정은 차라리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그날 이후, 그 하사품들은 실오라기 하나조차 문기당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동정원에서는 하인과 몸종들이 일부러 들으라는 듯 떠들고 있었다.

“큰 아가씨도 참… 마님을 대놓고 거역하다니... 참말로 버릇이 없다니까.”

하지만 그들 눈빛은 생각만큼 다정하지 못했다. 나정이 지나친 건 맞지만 백씨 부인도 뭐라고 할 자격은 없었다. 그녀도 나정에게 냉정하게 대했고 자신의 친딸보다 백지현을 더 아꼈으니 말이다.

“부광옥금 참 곱더구나. 옷 두 벌은 충분히 나오겠지.”

백씨 마님은 이미 분을 삭인 얼굴이었다.

“정월연회에 입으면 딱일 텐데.”

“그럼 정이 언니가 굉장히 돋보이겠네요.”

백지현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백씨 마님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 그날의 주인공은 네가 될 거다. 정이는 이미 충분히 눈에 띄었으니 이쯤에서 멈추는 게 도리지.”

백지현은 깜짝 놀란 듯 기쁨을 숨기지 못한 채 말했다

“정말요? 저한테 주시는 거예요?”

백씨 마님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래. 좋은 게 생기면 다 네 것이다. 내 심장도, 목숨도 다 너에게 줄 수 있단다. 너는 어린 시절 너무 많은 고생을 했잖니.”

백지현은 조용히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아닙니다. 그 고생들은 잊힌지 오래입니다. 지금처럼 이렇게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저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이 언니는 그 천을 내놓지 않을 거예요.”

“걱정 말거라. 곧 스스로 가져오게 될 것이다.”

백씨 마님이 낮게 웃으며 말하자 백지현이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어머니.”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화종왕 그늘 아래 자비는 없다   제100화

    “네가 그 일을 그리 신경 쓸 줄은 몰랐구나.”태비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아무런 얘기도 없이 너무 갑작스럽게 내려졌으니 그러죠.”공주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대비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주상께서 예부에 교지를 작성하라고 하시면서 마지막까지 비밀에 부치라고 했어. 네가 모르고 있었던 건 옹성대군의 혼처에 원래부터 관심이 없었으니 굳이 얘기를 안 한 게지. 그런데 그게 왜 갑자기 궁금해졌을까? 나정이 때문이니?”공주는 한참 침묵하더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물었다.“그래서 성사되었나요? 옹성대군은 동의했나요?”만약 옹성대군이 원하지 않는다면 교지가 내려진다고 한들 그가 알아서 혼사를 없던 일로 만들 것이다.어쩌면 나정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가홍 장공주는 그 상황이 되면 나서서 상황을 무마하고 나정에게 새로운 신분을 주어 자신의 며느리로 받아들일 생각도 있었다.“물론이지. 진성대군 부인이 세상을 뜨면서 원래는 4월에 내리려던 교지를 그 녀석이 하도 재촉하는 바람에 3월 초순으로 앞당긴 게야.”대비가 웃으며 말했다.물론 재촉이라기 보다는 그저 주상을 찾아와 3월 초순에 교지를 내려달라고 요구했을 뿐이었다.진남군의 딸이면 권력 가문도 아니니 주상 전하는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특히나 옹성대군의 말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는 주상 전하였기에 대비와 상의 후에 바로 진행되었다.물론 주상의 뜻을 알고는 있지만 대비는 그래도 나정을 예뻐하니 일이 빨리 추진되는 것에 흔쾌히 동의했다.가홍 장공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옹성대군이… 정말 이 일에 동의했단 말입니까? 대비께서도요?”“나야 당연히 동의하지. 나정이는 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인걸. 지금도 그 날을 생각하면 오싹한데 그 아이는 참으로 용감했어.”공주는 조바심이 났다.‘그럼 내 아들은요?’날이 밝자마자 장공주에게 빨리 대비께 찾아가서 상황을 알아보라고 성화를 부리던 배영이었다.이미 정해진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너는

  • 화종왕 그늘 아래 자비는 없다   제99화

    나정이 이런 식으로 신분 역전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여씨 부인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여운탁은 무릎이 아픈 것보다 자존심이 상했다. 탄탄대로를 잃은 것때문인지, 아니면 나정이 시집을 잘 가서 배가 아픈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좀 닥치세요!”여씨 부인은 화들짝 놀라며 아들을 바라보았다.“이… 이런 후레자식이!”분노한 여씨 부인이 소리쳤다.“나가라고요!”여운탁이 소리쳤다.나정과 사주단자를 교환하지 않은 것을 오늘이 있기 전까지는 다행으로 알고 있었다. 꽃처럼 아름다운 백지현을 정실로 들일 수 있는 것에 한껏 들떠 있었다.어차피 나정과는 구두 약속이라 굳이 실행에 옮길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속박에서 풀려나 하늘로 날아오른 사람이 자신이 아닌 나정이 될 줄이야!그에게 내려진 철기장군이란 칭호는 옹성대군의 권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나정이 득세하면서 자랑스럽게 느껴지던 칭호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렸다.여운탁의 자랑거리는 하루아침에 우스개로 전락한 것이다.이게 그가 분노한 가장 큰 이유였다.아무나 득세할 수 있지만 신변 사람이 자신을 초월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가까운 사람이 훨훨 날아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큼 자존심 상하는 일이 없었다.같은 무장 출신인데 나씨 가문은 작위를 받았고 혼인을 약속했던 죽마고우는 대군의 부인이 되었다. 그녀의 성공은 그가 이루어낸 모든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여운탁은 증오심이 일었다.뻘겋게 부은 무릎을 보고 있자니 증오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나신은 여운탁보다 부상이 심각했다.의원은 뼈는 다치지 않았다고 했지만 오장육부가 비틀리는 느낌에 피까지 토했다.“어사대로 가서 고발할 것입니다!”나신이 말했다.백씨는 간곡하게 아들을 말렸다.“명문 귀족가의 도련님들도 옹성대군에게 맞고 가만히 있는데 어사대가 무슨 수로 그런 분에게 뭐라 하겠니?”“분해도 참아, 신아. 옹성대군이 네 처남이 되면 넌 횡재한 거야.”나신도 알고는 있

  • 화종왕 그늘 아래 자비는 없다   제98화

    약을 먹고 잠들었던 노부인은 얼마 안 지나 잠에서 깼다.옆에는 심복 어멈이 곁을 지키고 있었다.“나정이는… 앞으로도 잘 될 것이야.”노부인은 교지를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어멈도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큰 아가씨는 용기 있는 분이고 복도 많은 분이니 이제부터는 탄탄대로를 걷게 되겠지요.”노부인은 눈시울을 붉혔다.“이 행운이 오기까지 너무 힘든 날들을 겪었어.”아무도 그녀가 옹성대군의 부인이 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우리 가문에도 약간의 희망이 생겨났구나.”노부인이 말했다.“자식들은 각자 알아서 살아갈 테니 너무 심려치 마세요, 마님.”노부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둘째는 근래 승진이 너무 느려. 무예와 병법, 용맹함을 따지면 절대 형에게 뒤처질 아이가 아닌데.”어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둘째 나리 얘기는 왜 갑자기 꺼내십니까?”“여운탁은 고작 스무 살에 종3품 철기장군이 되었는데 둘째는 나이 사십인데도 고작 종사품에 머물러 있으니.”어멈의 생각은 달랐다. 종사품 무장이라도 대단한 거라 생각했다.아무나 다 자식 덕을 봐서 작위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아무나 어린 나이에 재능을 꽃피울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무관의 입지는 문관을 따라갈 수가 없지. 종4품이라고는 하지만 한양성에서는 그저 수많은 관직 중 하나에 불과하니 언제 고개 들고 당당히 살 수 있을까?”어멈은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노부인께 물었다.“왜 갑자기 둘째 도련님 걱정을 하십니까? 저희에게는 대감 나리가 있잖아요? 대감 나리는 작위를 받으셨고 큰 공자는 똑똑하고 이미 문관이 되었으니 조금만 더 지나면 탄탄대로가 펼쳐질 것입니다.”그 말을 들은 노부인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럴수록 어멈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이 집안에 우리 사람이 얼마나 남았지?”노부인은 한숨을 쉬었다.“감히 서재에서 나정이에게 몽둥이를 들려고 했어. 추화가 달려와서 고하지 않았으면 우린 아무것도 몰랐겠지.”“큰 부인께서 살림을 잘하시지 않습니까? 그래

  • 화종왕 그늘 아래 자비는 없다   제97화

    “앞으로 바빠지겠구나. 저택엔 너를 도와줄 사람이 없으니….”“할머니도 계시고 둘째 숙모와 형수도 계시잖아요.”나정은 조모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할머니, 저를 도와주는 사람도 많아요.”노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나정아, 착한 우리 아가. 네가 고생 많았다.”이때, 진남군이 의원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의원이 진료를 보는 틈을 타 나정과 진남군은 바깥으로 나왔다.“나정아….”진남군은 애처로운 표정으로 나정을 불렀다.“아버지, 하실 말씀 있으면 하세요.”“할머니 상태는 좀 어떠니?”진남군이 물었다.“에둘러 말하지 말고 본론을 말씀하시라고요.”나정이 답했다.진남군은 그제야 기대에 찬 얼굴을 하고 말했다.“나정아, 아비는 네가 잘돼서 너무 기쁘구나. 네가 가문을 일으켜주는 복덕이야.”“당연하지요. 안 그랬으면 고작 삼품 장군부였던 우리가 어떻게 신분 역전하고 작위를 받았겠어요?”나정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받아쳤고 진남군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뻘겋게 달아올랐다.“그래, 네 말이 맞지. 이 작위는 네 덕분에 받은 것이니까.”“당연한 말씀을요. 제가 칼에 가슴을 찔리는 위험을 감수하고 대비마마를 구하지 않았으면 작위가 내려졌을까요? 아버지, 그런데 그 얘기를 꺼낼 때 왜 그렇게 주저하시나요?”“혹여 제가 칼을 맞지 않았어도 아버지의 능력으로 작위를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나정은 곧장 정곡을 찔렀고 진남군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어쩌면 아버지는 제가 소양에서 죽었더라면, 저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면 모든 공로는 아버지께 돌아간다고 생각하셨겠지요. 그런데 제가 돌아와서 진실을 마주하기가 불편하셨던 거 아닌가요?”진남군은 말문이 막혔다.분노가 치밀고 아비의 위엄을 내세워 호되게 꾸짖고 싶었다.어찌 이리도 아비의 체면을 봐주지 않는 것인가.나정은 그의 딸이고 그의 생사마저 아비의 손에 달렸거늘, 공로가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거 아닌가?그는 점점 그런 쪽으로 생각이 굳어졌다

  • 화종왕 그늘 아래 자비는 없다   제96화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나정의 머리와 이마를 촉촉하게 적셨다.진남군은 곧바로 집안 사람들을 대열을 갖추게 하고 대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예부상서가 내관을 대신해 교지를 읊었다.“짐이 명하노니, 진남군의 장녀 나정은 명문가에서 자라 품성이 단정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헌신할 절개까지 갖추었으니, 그 마음을 기특하게 생각하여 옹성대군의 부인으로 책봉하고자 하노라. 모든 예식과 절차는 예부와 내무부에서 공동으로 준비할 것이며 길일을 택하여 식을 올리도록 하거라.”“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나정은 가장 먼저 큰절을 올리며 교지를 받았다.그녀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제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진남군과 부인 백씨의 표정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유독 노부인만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예부상서가 나정에게 다가오더니 공손히 말했다.“감축드립니다, 대군 부인. 소신은 이만 전하께 돌아가 봐야 하니 이만 물러가겠나이다.”“살펴 가세요, 대감.”나정이 말했다.소하겸은 나정의 곁으로 다가가 좌중을 내려다보더니 담담히 말했다.“다들 일어나거라.”말을 마친 그는 다시 나정에게 고개를 돌렸다.“교지가 내려질 거란 말을 들고 예물을 준비해 왔다. 이건 내가 개인적으로 주는 것이니 굳이 혼수에 추가해서 가져올 것 없이 네 개인 재산으로 쓰면 돼.”나정이 감사를 표하려는데 진남군이 앞으로 나서며 끼어들었다.“대군, 소신은 이게 무슨…”그는 말까지 버벅이고 있었다.나정은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아버지가 원하시는 대로 소양에 돌아갈 수는 없게 되었네요. 실망시켜서 정말 죄송합니다.”진남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무슨 일로 소양에 돌아가려는 거지?”옹성대군이 물었다.“사람을 시켜 예물을 네 처소로 들여갈 수 있게 안내하거라.”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대군 관저의 관리인이 시종들을 거느리고 예물 상자들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미리 대기하고 있던 관리인이 그들을 문기당으로 안내했다.그 외에 아무도 감히 제 자리에

  • 화종왕 그늘 아래 자비는 없다   제95화

    노부인이 처음 백지현을 보았을 때 느꼈던 호감은 익숙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백지현은 백씨도 닮고 나신도 닮았으니 말이다.순간 몰려든 생각에 노부인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할머니, 화는 건강에 안 좋습니다.”나정이 노부인을 부축하며 말했다.그러자 노부인은 애써 표정을 숨겼다. 아직은 나정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수 없었다.“이런 못돼 먹은 것들이라고!”그리고 그들을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여운탁은 시종에게서 우산을 받아들고 와서 백지현의 옆에 섰다.“오늘은 저를 봐서 이만 조용히 넘어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노부인, 신이는 누구를 때리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그저 서재에서 얘기를 나눴을 뿐입니다.”“여긴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노부인이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여운탁이 냉소를 지으며 받아쳤다.“어찌 이리 막무가내일 수가! 전하께 찾아가서 고할 것입니다. 노부인, 저는 곧 옹성대군의 휘하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신이는 제 친우이기도 하니 앞날이 창창해지겠지요. 헌데 어찌 이리 장손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십니까?”그가 옹성대군의 이름을 내세우자 노부인은 덜컥 겁이 났지만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여봐라, 철기 장군을 대문 밖으로 모시거라. 이건 우리 집안일이야.”잠시 후 소식을 들은 진남군과 백씨, 그리고 여운탁의 어머니인 여씨 부인이 부랴부랴 도착했다.진남군은 안색이 좋지 않은 어머니를 보고 나신과 나정을 혼냈다.“너희가 말싸움을 벌인 일로 할머니까지 끌어들여?”말을 마친 그는 나정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너는 점점 무법천지가 되어가는구나. 오늘 매를 들지 않고서는 그냥은 못 넘어가겠어. 대체 이런 사소한 일에 왜 할머니까지 끌어들인 거니?”“나정이 잘못이 아니네, 대감. 오라비인 나신이 손님들 있는 앞에서 문을 닫아걸고 제 동생에게 매를 들려고 했어!”“손뼉도 부딪쳐야 한다고 나정이가 너무 예의 없이 굴었겠지요. 제 어미도 안중에 없는 애인데 오라버니는 오죽하시겠습니까? 분명 나정이가 신이를 먼저 도발했을 겁니다.”진남군이 말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