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4화"...그럼 은정이의 한이라는 게 대체 뭐죠?"조심스럽게 입을 연 주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독고춘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잠시 창밖을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저도 잘 모릅니다."주미는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눈을 크게 떴다.독고춘은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박도윤.""...네?""...그 남자와 관련이 있을지도.""오빠가요?""...확실한 건 아닙니다."독고춘의 말에 주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은정이와 자신의 오빠가 얽혀 있었던 것 역시 사실이었다.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모르고 있었던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주미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한 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어색한 침묵이 계속되자 지희가 주미의 손을 잡았다."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또 이상한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주세요.""아, 네.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잠시 후, 세 사람이 병실을 나갔다.철컥.문이 닫히자 다시 조용한 적막이 병실 안을 채웠다.주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박도윤."설마...?"주미는 고개를 저었다.오빠가 은정이에게 무언가를 숨겼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이제 와서 아무것도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주미는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그리고 얼마 뒤, 병원에서 퇴원 수속을 마친 그녀는 곧장 H금융으로 향했다.---H금융 본사.익숙한 건물 앞에 멈춰 선 주미는 잠시 고개를 들어 높은 건물을 올려다봤다.평소라면 아무 생각 없이 드나들던 곳이었다.하지만 오늘은 달랐다.주미는 굳은 얼굴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그녀는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눌렀다.띵.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주미는 천천히 복도를 따라 걸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쪽 문 앞에 멈춰 섰다.부사장실.주미는 문 앞에서 한동안 망설였지만 곧 천천히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똑똑."들어오세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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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3화서울의 OO병원에 도착한 세 사람은 주미가 문자로 알려준 병실로 향했다. 병실 문 앞에 멈춰 선 지희는 문에 붙은 '박주미' 이름표를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았다. 철컥. "주미씨?" 병실 안으로 들어오는 세 사람을 발견한 주미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아, 오셨어요?" "아니, 아니. 그냥 누워 있어요." 지희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몸도 안 좋은 사람이 왜 일어나려고 해요?" "괜찮아요. 아까 수액 맞고 나니까 조금 나아진 것 같아서..." 주미는 희미하게 웃었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핏기가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지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근데 진짜 많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요? 아, 저는 지희 언니 매니저 이지아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초면에 누워 있어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언니. 아참, 주미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야, 주미씨가 너보다 어리면 어쩌려고." "...지희 언니? 잘 못들었습니다?" "주미씨가 너보다 어려 보인다고. 안 그래요, 꼬춘씨?" "...음." "허! 형부까지 이러면 저 섭섭해요?" "푸흣..." 지희와 지아의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주미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나마 무거웠던 병실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지는 듯했다. 그 사이, 독고춘은 조용히 주미의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부터 그의 시선은 한 번도 다른 곳으로 향하지 않았다. 주미는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저, 왜 그러세요?" 그제야 독고춘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어젯밤부터 꿈을 꾼 겁니까?" "아, 네. 꿈이야 자주 꿨지만... 그런 이상한 꿈은 분명 어젯밤부터였어요." 지희의 표정도 조금 굳었다. 주미가 그런 꿈을 꾸기 시작한 건, 자신들과 만난 바로 그날 밤이었다. "꼬춘씨. 뭔가 보여요?" 독고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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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2화주미와 통화를 끝낸 지희는 한동안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결국 서울로 가야겠네." 남은 휴가가 아직 이틀이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게 아쉬울 상황이 아니었다. 지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소파 쪽을 바라봤다. 독고춘은 여전히 소파에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잘도 자네." 지희는 작게 중얼거리며 소파 앞으로 다가갔다. "꼬춘씨." 그녀가 살짝 몸을 흔들어 깨웠으나 대답이 없었다. "꼬춘씨, 일어나요." 지희는 잠시 그를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엔 일찍 일어나던 사람이 왠일이래." 다시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흔들던 순간, 덥석. 독고춘의 손이 지희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 지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강한 힘이 손목을 잡아당겼다. "아앗!" 푹! 지희의 몸이 그대로 소파 위로 넘어졌다. 그리고 잠결에 움직인 독고춘의 팔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어머머..." 지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독고춘의 품에 거의 안기다시피 누워버린 상태였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독고춘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꼬춘씨? 지금 뭐하세요?" 지희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이익... 하! 진짜 꼼짝도 못 하겠네. 힘이 얼마나 쎈 거야. 이봐요! 얼른 일어나라고요!"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수록 지희의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아니, 하... 이게 무슨 꼴이야." 그때, 철컥.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짜잔! 지아 등!...장..." 지아의 목소리가 뚝 끊기며 지희와 눈이 마주쳤다. 지아는 눈을 껌뻑껌뻑 거린 뒤, 소파 위에 엉켜 있는 두 사람을 다시 바라봤다. 잠시 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지아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아침부터 러브러브 일 줄 정말 상상도 못했어요..." 그 말에 지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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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1화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주미는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헉...!"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주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꿈이었다.분명 꿈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꿈속에서 느꼈던 공포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하아..."주미는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은정이의 뒷모습과 자신을 휘감던 검은 연기, 그리고 귓가를 맴돌던 목소리까지 모든 장면이 뒤섞여 머릿속을 어지럽혔다.그때였다."주미야."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주미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엄마?""왜 그렇게 놀라? 계속 불러도 일어나지도 않고. 악몽이라도 꿨어?""...아니, 아니야."주미의 어머니 한정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딸을 바라봤다."너, 왜 그래? 혹시 어디 아픈거야?""괜찮아, 엄마. 지금 몇 시지?"주미는 멍한 얼굴로 휴대폰을 확인했다.평소라면 이미 출근 준비를 끝냈어야 할 시간이 지나 있었다."...아, 회사 가야지."주미는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러나,휘청.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렸다."어?"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정희가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주미야!"주미는 애써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손끝까지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얼굴은 눈에 띄게 창백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괜찮긴 뭐가 괜찮아!"그녀는 딸의 얼굴을 살피더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오늘 회사 가지 마.""엄마, 나 정말 괜찮아.""괜찮기는! 일단 병원부터 가자."주미가 몇 번이나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녀의 엄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결국 주미는 엄마의 부축을 받아 집을 나섰다.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은 뒤 의사는 크게 걱정할 만한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검사 결과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습니다.""정말 괜찮은 건가요? 애가 쓰러질뻔 했는데.""네. 다만 최근에 피로가 많이 쌓인 것 같습니다. 며칠 푹 쉬면서 수액 치료를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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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0화호텔로 돌아온 두 사람은 각자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바닷물에 젖은 발과 옷자락을 정리하고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나니, 하루 종일 이어졌던 긴장도 조금씩 풀리는 듯했다.먼저 씻고 나온 지희는 편한 잠옷으로 갈아입은 채 침대에 앉았다.휴대폰을 손에 들었지만 화면에는 별다른 관심이 가지 않았다.평소 같았으면 SNS를 확인하거나 연예 쪽 기사를 확인했을 텐데, 오늘따라 손가락만 괜히 화면 위를 움직였다.그녀는 문득 고개를 들어 욕실 쪽을 바라봤다.아직 물소리가 들리고 있었다."..."지희는 괜히 입술을 꾹 다물었다.지금까지 독고춘과 함께 있었던 시간이 결코 짧지는 않았다.차를 타고 이동할 때도 있었고, 촬영장에도 함께 있었고, 심지어 오늘은 바닷가에서 사람들 앞에 그에게 안겨 호텔 로비까지 들어왔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이 가장 어색했다.아무것도 하지 않고 같은 방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지희는 괜히 침대 위에 놓인 베개를 끌어안았다."...왜 이러지."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순간,철컥.욕실 문이 열리고 독고춘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닦으며 걸어 나왔다.지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편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독고춘의 모습은 평소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지희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애매해졌다."..."독고춘 역시 지희를 잠시 바라봤다.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지만 이상하게 눈길이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잠시 동안 눈이 마주치자 지희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왜 그렇게 쳐다봐요?"독고춘은 잠시 생각하더니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아직도 그 여자가 신경 쓰이나?""뭐, 그렇긴 한데...아 몰라요, 몰라."지희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더니 벌러덩 누웠다.독고춘은 반대편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두 사람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있었지만 이상하게 그 거리가 평소보다 가깝게 느껴졌다.지희는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봤다.그러나 이번에도 몇 초 지나지 않아 화면을 껐다.옆에 있는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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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9화저녁 노을이 바다 위로 천천히 가라앉을 무렵, 호텔 레스토랑 창가. 붉게 물든 석양이 유리창 너머로 잔잔한 바다를 물들이고 있었다. 지희는 식은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후우..." 맞은편에 앉아 있던 독고춘이 그녀를 힐끗 바라봤다. "...땅 꺼지겠군." "아, 진짜!" 지희가 눈을 흘기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거든요?" "...그 여자가 신경 쓰이나." "그럼 안 쓰이겠어요?" 지희는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헝클었다. "사랑이 엄마 친구잖아요. 안색도 너무 안 좋아 보였고..." "...신경 쓴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지." "아오, 진짜." 지희는 결국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꼬춘씨는 걱정도 안돼요? 분명 주미씨가 위험하다고 했잖아요." "...조만간 다시 만나겠지. 그때까지는 별일 없을거다." "하아, 그럼 일단 안심이네요. --- 레스토랑을 나온 두 사람은 말없이 해변을 따라 걸었다. 어느새 해는 완전히 저물었고, 짙푸른 밤하늘 위에는 별들이 하나둘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철썩. 철썩. 잔잔한 파도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고, 차가운 겨울 바람이 두 사람의 옷깃을 스쳐 지나갔다.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걷던 지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독고춘이 슬쩍 그녀를 바라봤다. "...또 한숨이군." "안 쉬게 생겼어요?" 지희는 볼을 살짝 부풀렸다. "원래 휴가 오면 아무 생각 없이 놀아야 되잖아요." "...음." "근데 오늘은 머릿속이 엉망이에요." 지희는 괜히 발끝으로 모래를 툭 걷어찼다. "고은정씨 일도 그렇고... 주미 씨도 계속 신경 쓰이고." "...신경 쓴다고 달라질 건 없다고 했을텐데." "알아요." 지희는 피식 웃었다. "근데 사람 마음이 원래 그런 거예요." "..." "꼬춘씨처럼 뭐든 무덤덤하게 살면 얼마나 편할까요." 독고춘은 대답 대신 잔잔한 바다를 바라봤다. 잠시 후, 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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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0화"...황자님.""예.""그럼 다리가 움직이면, 에단님을 도와주실 수 있는 거예요?""......"레오넬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물론입니다."그리고 담요 위에 놓인 두 손을 모았다."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너무 진지한 목소리였다. 장난처럼 넘길 틈도 없이."그, 그럼 시작하겠습니다..."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휠체어 앞으로 다가갔다.'으... 괜히 긴장되네...'지난번에도 똑같은 상황이었다. 그때는 진흙탕 한가운데였고, 등 뒤에서 함성이 들렸고, 생각할 틈도 없었다.그런데 지금은 햇빛이 쏟아지는 조용한 방이었다.창밖의 새소리까지 다 들렸다. 내 심장 소리도.나는 휠체어 앞에 쪼그려 앉아 레오넬과 눈높이를 맞췄다.레오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촉하지도, 눈을 피하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준비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그 눈이 너무 가까워서, 결국 내가 먼저 눈을 질끈 감았다.쪽.짧게 닿았다가 떨어졌다."......"천천히 눈을 뜨자, 레오넬이 나를 보고 있었다. 조금 붉어진 얼굴로.그때, 레오넬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구두 끝이 바닥을 더듬듯 움직였다.레오넬은 팔걸이를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담요가 바닥으로 스르르 미끄러졌다.그는 한 걸음, 또 한 걸음 창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햇빛이 고인 바닥 위에 멈춰 섰다."......"레오넬은 한동안 자기 발을 내려다보았다. 처음 일어섰던 그날처럼, 아주 신기한 것을 보는 얼굴로."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가 않네요."그건 저도 마찬가지랍니다...나는 바닥에 떨어진 담요를 주워 들고, 괜히 코끝을 문질렀다.레오넬이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고맙습니다, 영애. 이제 오스틴에게 가 봐야겠습니다."--------------같은 시각, 응접실."그래서 반란군의 병력은 얼마나 되던가?""정확히는 모릅니다. 다만 로웬을 함락할 만큼은 됐겠지요.""흠. 로웬이라."오스틴은 안경을 고쳐 쓰고, 탁자 위에 펼쳐 둔 지도를 손가
최신 업데이트: 2026-10-25
Chapter: 69화해가 중천에 걸릴 무렵, 마차가 멈춰 섰다. "도착했습니다, 백작님." 마부가 문을 열었다. 나는 카시안의 뒤를 따라 마차에서 내리다가, 그대로 멈춰 섰다. "...와." 반듯하게 깎인 정원수.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깔린 돌길. 창문마다 똑같은 높이로 걷힌 커튼. 그 정교함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군, 카시안 백작." 현관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 콧등에 걸친 둥근 안경.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운 셔츠에는 주름 하나 없었다. "오랜만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오스틴이 내민 손을 카시안이 부드럽게 잡으며 악수를 나눴다. "서신이 무례했지? 사정이 급해서 그리 썼으니 이해해 줬으면 좋겠군." "괜찮습니다." 그리고 오스틴의 시선이 나에게로 옮겨 왔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나를 차분히 훑었다. 머리부터, 드레스, 그리고 손끝까지. "이분이 사촌 동생인가?" "아, 안녕하세요." 나는 최대한 우아하게 치마 자락을 잡고 인사했다. 연회 때 수십 번 연습했던 그 인사였다. "반갑습니다, 영애. 오스틴 레브란트라고 합니다." "아, 아이린입니다!" 오스틴은 내 인사에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사람, 웃고 있는데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선한 얼굴에 미소까지 지어 보이니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일단 안으로 들지." 나와 카시안은 오스틴을 따라 저택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택 안 응접실로 안내받은 우리는 고급스러운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책장의 책들은 키 순서대로 꽂혀 있었고, 탁자 위의 꽃병은 정확히 한가운데에 놓여 있어서 내 눈길을 끌었다. ...음, 이 저택에서 일하는 건 굉장히 피곤할 것 같아. 그때, 하녀가 소리 없이 차를 내려놓고 물러났다. 은은한 꽃향기가 김을 타고 피어올랐다. "레브란트에서 나는 찻잎일세. 입에 맞을지 모르겠군." "향이 좋네요." 나는 찻잔을 조심스럽게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새끼
최신 업데이트: 2026-10-23
Chapter: 68화루텐부르크 영지, 칼튼 상단의 집무실. 사각, 사각. 에단은 서류 더미 사이에서 펜을 굴리고 있었다. "후... 지루하네." 에단은 펜을 내려놓고 창밖을 보았다. 카르디아 영지 쪽 하늘이었다. '누나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벌컥! 순간, 집무실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도, 도련님!" 상단 직원 하나가 숨을 헐떡이며 뛰어 들어왔다. 손에는 서신이 들려 있었다. "...노크하는 법도 잊어버린 건가?" "죄, 죄송합니다. 워낙 급한 건이라..." "뭔데 그러지?" "그, 그게 이에노스에서..." "이에노스?" 에단의 눈이 가늘어졌다. "역병에 걸린 이에노스 사람들이... 몸이 굳어서 쓰러지고 있답니다. 팔이며 다리며, 하룻밤 새 수십 명이..." "역병이 그런 병이었나?" "아닙니다. 다들... 성수를 마셨답니다." "...성수?" "예. 칼튼 상단 깃발을 단 마차에서 샀다고 합니다." 집무실 안이 조용해졌다. "우린 이에노스에 그런 걸 보낸 적 없잖아." "맞습니다! 그런데..." 직원이 떨리는 손으로 서신을 내밀었다. "버려진 병마다, 저희 인장이 찍혀 있었답니다. 벌써 황도에도 소문이..." 에단은 서신을 받아 들었다.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는 동안 표정이 지워졌다. 상단 인장. 성수. 이에노스. 쾅! 에단은 한 손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이런, 젠장. 당했어." 에단의 머릿속에 연회장에서 이에노스 이야기를 꺼내던 아르덴 공작의 얼굴이 떠올랐다. "예? 뭘 말입니까?" "아니야." 에단은 서신을 신경질적으로 구겼다. 다그닥, 다그닥. 그때, 창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칫, 벌써 온 건가." 쿵, 쿵, 쿵.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도, 도련님. 어떡합니까?" "어떡하긴. 손님 맞을 준비해야지." 에단은 구겨진 서신을 서랍에 밀어 넣고, 흐트러진 옷깃을 정리했다. 벌컥. 이번에도 노크는 없었다. 황실 문장을
최신 업데이트: 2026-10-22
Chapter: 67화동이 틀 무렵, 크로이츠는 병사들과 함께 진영으로 돌아왔다. 검 끝에 묻은 피는 이미 검게 굳어 있었다."...후, 토벌군도 꽤 하는군."카시안이 이끄는 토벌군은 결국 퇴각했다. 기습은 날카로웠지만, 적은 병력으로 반란군을 제압하기는 쉽지 않았다."크로이츠 님."부관이 굳은 얼굴로 크로이츠에게 다가왔다."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황자가... 사라졌습니다."크로이츠의 걸음이 멈췄다."...뭐?""천막이 비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격리해 두었던 그 여자도 보이지 않습니다.""...보초병은 뭘 하고 있었지?""여기 데려왔습니다."병사 둘이 한 남자를 끌고 왔다. 황자의 천막을 지키던 보초였다. 그는 크로이츠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말해. 무슨 일이 있었지?""그, 그게... 습격이 시작되자 황자가 도망치려 해서 붙잡았습니다... 그, 근데 갑자기 역병에 걸린 그 여자가 나타났습니다.""......""기침을 막 하면서... 크로이츠 님께서 이쪽으로 가라고 하셨다고... 그래서 저는 역병이 옮을까 봐, 그만...""내가?"크로이츠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내가 언제 그런 명령을 내렸지?"보초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땅에 처박았다.크로이츠는 말없이 황자의 천막 쪽으로 걸어갔다.진흙탕 한가운데에 텅 빈 휠체어 한 대가 기우뚱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 진흙 위로, 숲을 향해 나란히 찍힌 두 줄의 발자국.하나는 작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비틀거리며 끌리듯 찍힌 남자의 발자국이었다."......"걸을 수 없는 황자가, 휠체어를 두고 사라졌다.길을 잃었다던 여자. 식량을 훔치려 했다던 여자. 역병 환자 흉내를 내던 여자. 오빠를 찾으러 왔다던 여자.그 여자가, 자신의 이름까지 팔았다.뿌드득.크로이츠가 쥐고 있던 검 손잡이에서 소리가 났다."...감히 날 속였구나.""예?""그 여자를 찾아라. 제국을 다 뒤져서라도 내 앞에 데려와!"---------------
최신 업데이트: 2026-10-21
Chapter: 66화"물 온도는 어떻습니까?""아주 좋아. 역시 대부호 상단의 후계자라 그런지, 저택에 이만한 온천이 있다니. 대단하군."레오넬과 에단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탕에 앉아 피로를 풀고 있었다.정확히는 탕의 양쪽 끝에,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과찬이십니다. 상단 일로 지친 몸을 풀려고 만든 곳이죠.""그대도 지칠 때가 있나 보군.""요즘은 꽤 자주 지칩니다. 누나 덕분에.""......"온천물 흐르는 소리만 졸졸 울렸다.레오넬은 물속에서 천천히 자신의 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발끝이, 무릎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였다. 십여 년 동안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감각이었다.에단의 시선이 그 움직임을 조용히 따라갔다."...정말 다리가 나으셨군요.""그래, 정말 믿기지 않는군.""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믿기지 않습니다."에단이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김 사이로 드러난 왼쪽 뺨에는 오래된 화상 자국 대신 매끄러운 피부만 남아 있었다.레오넬의 눈이 그 뺨에 잠시 머물렀다.에단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제 왼쪽 뺨에는 오래된 화상 자국이 있었습니다. 제국의 어떤 의원도 고치지 못했죠.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사라졌습니다.""...설마 영애가?""예. 그래서 잘 압니다. 누나가 가진 힘이 얼마나 위험한지."에단의 목소리가 낮아졌다."그 힘이 알려지는 순간, 누나는 더 이상 평범하게 살 수 없을 겁니다. 아르덴 공작은 성수를 만든 자를 찾고 있고, 반란군도 마찬가지예요.""알고 있네.""그럼 묻겠습니다. 황궁으로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아니."레오넬의 대답은 짧았다."황궁으로 돌아간다면, 다들 묻겠지. 어떻게 반란군 진영에서 도망쳤는지.""......""그 질문의 끝에는 영애와 자네가 있을 거고."에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영애가 나를 구하려고 무엇을 감수했는지 알고 있네. 그러니 내가 그녀를 위험하게 만들 수는 없어.""...그건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에단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당분간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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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5화"......" 입술이 떨어졌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방금... 뭐였지? "...영, 영애?" 레오넬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귀 끝까지 새빨개진 채, 그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허락을 구하고 싶었는데... 순서가 바뀌었군요." "......" "영애 덕분에 걸을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오래 걷고 싶었습니다. 그게... 제 욕심이었습니다." 그는 말을 고르는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것만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 아니, 이건 대체..." 미, 미, 미쳤어! 황자님이 나에게 키, 키스를 하다니! 심장이 쿵 떨어졌다. 바스락. 그때, 근처에서 나뭇잎을 밟는 발소리가 들렸다. "......!" 나는 반사적으로 레오넬 앞을 막아섰다. 크로이츠가 쫓아온 걸까. 아니면 반란군 병사? "누, 누구예요!" 탁. 검은 그림자가 나무 사이에서 휙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린님. 모시러 왔습니다." "...그로우씨?" 검은 복면 위로 낯익은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어떻게 여기... 언제부터 계셨어요?" "처음부터입니다." "처, 처음부터요?" "수레에 숨으실 때부터요." "......" 아니, 이게 뭔 소리야? "...그, 그럼 방금 그것도?" "예." "......" "에단님께 보고드릴 내용이 꽤 많아졌군요." "아, 안 돼요! 보고하지 마세요! 제발요!" 그로우는 대답 대신 내 뒤에 선 레오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레오넬 황자 전하. 칼튼 상단 소속 에단님의 호위, 그로우입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칼튼 상단." 레오넬이 나와 그로우를 번갈아 보았다. 무언가를 이해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로우씨, 처음부터 계셨으면서 왜 이제야 나타나셨어요? 진작 황자님을 구해 주시지 않고!" "에단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아이린 님의 목숨이 위험하지 않은 한, 끼어들지 말고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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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9화나는 방문을 닫고 천천히 마을 안쪽으로 걸어갔다.나무 위에 지어진 집들과 그 사이를 오가는 엘프들. 인간 마을과는 전혀 다른 풍경에 절로 시선이 갔다.흔들다리를 조심조심 건너는데, 밑에서 소곤소곤 소리가 올라왔다."인간이다.""진짜 인간 남자야.""처음 봐. 신기하다."엘프 꼬마 세 명이 나무 기둥 뒤에 옹기종기 모여 나를 훔쳐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우르르 숨었다가, 다시 하나씩 고개를 내밀었다."아하하, 안녕? 괜찮으면 마을 안내 좀 해주지 않을래?"내가 손을 흔들자 아이들은 나무 뒤에서 속닥속닥 거리더니, 내 앞으로 쪼르르 다가왔다."와, 진짜 못생겼다.""인간들은 다 이렇게 못생겼을까?""아니야. 아까 온 인간 여자들은 못생기지 않았어.""......"꼬마들이 한마디씩 하며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얘들아? 오빠도 자세히 보면 꽤 잘 생겼단다.""풉!""푸하하!""와하하!""......"농담삼아 한 말에, 꼬마 엘프들은 배꼽 빠지게 웃어댔다....뭐가 그렇게 웃긴건데?한참을 웃던 꼬마 엘프 한명이 눈물을 닦으며, 나에게 말했다."넌 참 재밌는 인간이구나.""...어허, 이녀석! 오빠한테 너라니!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는 존댓말 하는거야.""몇 살인데?""오빠가 이래보여도 26살이란다.""와, 아직 애기네? 우린 86살.""......?""뭐해? 존댓말 해야지?"문득 앨레나와 야영할때, 그녀의 나이가 200살이 넘었다는 얘기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엘프들은 오래 산다고 듣긴 들었지만, 이런 초등학생 외모로 86살이라고?"...거짓말...이죠?""엘프들은 거짓말 안해. 세계수 엘드라실 걸고 맹세할게.""...마을 안내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좋아. 대신 우리 셋의 질문에 먼저 대답해 줘야해.""알겠습니다."꼬마 엘프들, 아니 할머니 나이의 작은 엘프들이 자기들끼리 소곤소곤 대더니 첫 질문을 던졌다."인간은 어떻게 태어나는 거야?""...예?""우리는 세계수 엘드라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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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8화다시 엘프의 숲으로 가는 길은 꽤 험난했다.다들 제대로 쉬지 못한데다가 곳곳에 정체 불명의 몬스터까지 습격해 와서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그때마다 에르시의 마법이 몬스터를 날려버렸고, 무아는 거대한 도끼를 휘둘러 놈들을 단숨에 쓸어버렸다.로제타 역시 창과 방패를 휘두르며 나와 앨레나를 지켜 주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앨레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다시 봐도 너희들은 정말 강하구나.”“하하, 당연하죠!"앨레나는 잠시 우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대단해.”뭐, 우리 파티가 좀 세긴 하지.나는 파티장으로서 괜히 어깨가 올라갔다.그렇게 우리는 다시 길을 걸었다.밤이 되어서야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쉬었고, 해가 뜨자마자 다시 길을 나섰다.그렇게 앨레나의 안내를 따라 얼마쯤 걷자, 눈앞에 낯익은 숲이 나타났다.아니, 정확히는 숲이 나타났다기보다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는 듯 풍경이 슥 바뀌었다. 마차를 타고 카이델로 향할 때 갑자기 튀어나왔던 숲이다."결계를 열게. 잠깐 가만히 있어."앨레나가 나무 둥치에 손을 얹고 무언가를 중얼거리자, 공기가 물결치듯 일렁였다. 그리고 빽빽하던 나뭇가지들이 스르륵 갈라지며 길이 열렸다."드디어 도착했네."숲 안쪽은 역시 바깥과 공기부터 달랐다. 나무 하나하나가 집채만 했고, 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연둣빛으로 부서졌다. 이끼 낀 뿌리 위에는 작은 빛 알갱이들이 둥둥 떠다녔다.처음 왔을때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파티원 모두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하기 시작했다."예쁘다~""밟지 마. 저건 정령이야.""어머~ 미안해요~"무아가 발을 슬며시 거뒀다. 빛 알갱이가 무아 주변을 한 바퀴 돌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무아씨한테 인사한 건가요?""아니. 경계하는 거야.""......"계속해서 숲 안쪽으로 들어가니 나무 위에 지어진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굵은 가지에 얹힌 둥근 집들, 나무와 나무를 잇는 흔들다리, 그 사이를 오가는 뾰족한 귀의 사람들.모두가 우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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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7화카이델을 빠져나온 우리는 해가 뜰 무렵에야 도시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걸어왔다.그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밤새 걷기만 해서 피곤한 건지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나는 앞서 걷는 앨레나의 뒷모습을 힐끔거렸다. 손목에는 수갑 자국이 벌겋게 남아 있었고, 금발은 먼지로 엉켜 있었다.'...이제 좀 쉬어가도 되지 않나?'한참을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저, 여기서 좀 쉬었다 갈까요? 다들 피곤해 보이는데.""그게 좋겠어."우리는 근처에 큰 나무를 발견하고 그늘진 곳에 모두 모여 앉았다."하아~ 이제 좀 살 것 같네요~"무아는 벌러덩 누우며 눈을 감았다. "후우... 그럼 좀 쉬면서 각자 보상으로 받은 스탯 포인트랑 스킬 포인트 정리하죠."에르시가 자신의 상태창을 띄우며 말하자 로제타가 고개를 끄덕였다."그게 좋겠어요."엘레나는 조용히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나는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괜히 캐물었다가 또 위험한 이야기에 휘말리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른 채 넘어갈 수도 없었다.결국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앨레나씨.""...응?""카이델에는 무슨 일로 가신 거예요? 처음에 볼일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노예로 팔리시려고 가신건 아닐 테고."퍼억!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에르시가 내 뒤통수를 후려쳤다."아악! 왜 때려!""어휴, 이 등신아! 눈치 좀 챙겨."앨레나는 한동안 말없이 있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동료들을 찾으러 갔을 뿐이야.""동료요? 엘프?""그래. 숲에는 인간과 교류하자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있는데, 오래 전에 교류를 원하는 아이들이 카이델로 떠났어."앨레나가 주먹을 쥐었다."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끊겼어. 편지도, 전령도 없이.""그래서 직접 찾으려고 하신 거군요.""응. 하지만 나 혼자서는 카이델 성문을 통과할 수 없었어. 엘프는 신분증이 없으니까. 그때 마침 마차로 카이델에 가는 너희를 만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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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6화순식간에 단상 아래와 주변 통로가 무장한 남자들로 가득 찼다.창, 석궁, 단검. 수십 개의 무기가 우리를 향해 겨눠졌다.나는 앨레나를 부축한 뒤 상황을 훑었다. 출구는 전부 닫혀 있었고, 적은 족히 오십 명. 그리고 맨 앞에 선 남자는 레벨 200이 넘는다던 마르셀이었다.'...이건 못 이긴다.'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분명 이렇게 될 줄 알고 저지른 일이겠지?"이제 어떡할 거야?"내 물음에 에르시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뭘 어떡해? 탈출해야지.""탈출하자고? 어디로?""아, 자꾸 말시키지 마! 지금 생각 중이니까!"'...생각이 있긴... 한 거야?이곳은 지하였다.경매장을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는 제한되어 있었고, 설령 우리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쓰러뜨린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입구가 막히거나 건물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우리 역시 빠져나가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우리 파티가 강해졌다고는 해도, 숫자가 많은 적을 상대로 무작정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잠깐만."앨레나가 내 어깨에 기대며 입을 열었다."저쪽에 비밀 통로가 있어.""비밀 통로요?"앨레나가 경매장 오른쪽 구석을 가리켰다.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과는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검은 천으로 가려진 문 하나가 벽에 붙어 있었는데, 방금 전까지는 그곳에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나 역시 제대로 보지 못했던 곳이었다."경매품을 들여오는 통로야. 끌려오는 동안 봤어. 저쪽으로 가면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어.""좋았어! 그럼 저쪽으로 빠져 나가자."나는 뭐에 홀린 듯 말하고 있었다."로제타씨와 무아씨가 선두에서 적들을 막아 주세요! 에르시는 간단한 마법으로 적들 시야 가리고! 앨레나씨는 길 안내 해 주시고!"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보자!""출발~!"무아가 제일 먼저 튀어 나갔다. 도끼가 휘둘릴 때마다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이 볼링핀처럼 나가 떨어졌다. 로제타는 방패를 앞세워 길을 열었고, 에르시의 마법이 뒤쪽 추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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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5화이제 우리가 이곳까지 찾아온 목적은 달성했다. 그렇게 고생해서 찾아왔고, 경매에서 터무니없는 가격까지 지불하면서 손에 넣었다. 막상 손에 넣고 나니 기쁘기는커녕 이상하게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여신의 눈물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이곳에서 더 볼일은 없었다. "그럼 이제 돌아가요." 로제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네. 필요한 물건도 구했고, 더 이상 볼일은 없으니까." 나도 여신의 눈물을 인벤토리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띠링! 익숙한 알림음이 울렸다. ━━━━━━━━━━━━━━━━━[퀘스트 완료!] ■ 도시의 암시장 조사! 보상: 스탯 포인트 +50, 스킬 포인트 +10━━━━━━━━━━━━━━━━━ "...오." 생각보다 꽤 좋은 보상이었다. 나는 바로 상태창을 확인했다. 확실히 스탯 포인트가 50 올라와 있었고, 스킬 포인트도 10이 추가되어 있었다. "퀘스트 완료됐네." "나도 받았어." 에르시가 자신의 시스템 창을 확인하며 말했다. "스탯 포인트 50. 스킬 포인트 10." "저 역시 동일합니다." 로제타도 고개를 끄덕였다. "보상이 꽤 좋네요~ 어디에 올릴까나~" 무아는 벌써 보너스 포인트를 어디에 사용할지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거 꽤 좋은 보상인데? 10레벨이나 오른 느낌이잖아?"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암시장이라는 위험한 장소까지 찾아와서 경매에 참가한 보상이라 그런지, 일반적인 퀘스트 보상보다 확실히 좋았다. "그럼 이제 돌아가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출구로 향했다. 그런데 몇 걸음 걷지 않았을 때였다. "여러분!" 단상 위에서 사회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회자는 객석을 천천히 둘러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깊은 밤의 경매를 찾아주신 여러분께 마지막으로 특별한 물품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경매장 곳곳에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특별한 물품이라고?" "뭐가 남았지?" "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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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4화문 안쪽은 바깥에서 본 것보다 훨씬 넓었다. 원형으로 배치된 좌석, 그 중앙에 우뚝 솟은 단상. 사람들은 대부분 가면이나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입장하신 분들은 번호표를 받으십시오." 검은 정장의 안내원이 우리에게 작은 나무 패찰을 하나 건넸다. 내 패찰에는 [37]이라고 적혀 있었다. "입찰하실 때는 이 번호를 들어 올리시면 됩니다. 낙찰 후 정산은 일시불입니다." "...일시불." 5,000골드로 살 수 있는 게 있을까? "왜 그렇게 우울한 표정이야?" 에르시가 옆에서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 그냥... 내 골드 상황이 떠올라서." "그건 네가 자초한 거고." "...그렇지." 우리는 안내원이 알려준 중간 열 자리에 앉았다. 곧 조명이 한 단계 어두워지고, 단상 위로 사회자가 올라왔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 깊은 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첫 번째 물품입니다." [1번 물품: 폐광 지대의 마력석 세트. 시작가 10만 골드] "11만!""14만!""19만!" 숫자가 오르내리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눈이 따라가질 못했다. '...시작가부터 장난 아니네.' 물품은 계속 이어졌다. 이름 모를 고서, 봉인된 단검, 정체불명의 알 하나. 낙찰가는 가볍게 모두 수십만 골드를 넘어갔다. "렌씨, 여신의 눈물이에요." 로제타가 작게 속삭였다. 단상 위에 하얀 천을 두른 작은 상자가 올라왔다. 사회자가 천을 걷자, 푸른빛이 은은하게 번지는 투명한 결정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 이제 12번 물품. 여신의 눈물입니다. 독과 저주를 중화하는 희귀 광물, 시작가 20만 골드." "...20만." 시작하자마자 내 입에서 영혼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에르시, 돈은 있지?" "내가 넌 줄 알아?" "...아하하. 다행이네." 그 순간, 나는 뒤통수가 따끔한 걸 느꼈다. 누가 보고 있다. 살짝 고개를 돌리자, 맨 뒷줄 구석에 낡은 망토를 뒤집어쓴 작은 사람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정확히는, 앉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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